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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0 (목) 23:12
분 류 사전3
ㆍ조회: 5352      
[근대] 부산항의 역사 1 (부산)
부산항역사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해운대 신시가지 유적

해운대 바다는 1∼2만년 전만 해도 지금의 해운대신시가지 가까이까지 만입(灣入)하여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해운대의 중심이 되는 냇길인 춘천(春川)의 흐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해운대 신시가지는 앞은 바다가 펼쳐진 가운데 남서로는 장산이, 동북으로는 부흥봉이 가려서 바람을 막아 사람 살기에 알맞았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1992년에서 93년까지 해운대 신시가지 개발계획에 따라 부산시립박물관이 유적지조사를 한 결과 좌동 933번지 지역과 중동 59번지 지역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2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후기 구석기시대 유물 약 3백여 점을 발굴하면서 밝혀졌다.

좌동지역에서 출토된 특징적 석기로는 다수의 석영제(石英製)와 규암제(硅岩製)와 일부의 옥수제(玉髓製) 석기로서 긁개와 홈날, 그리고 몸돌들이었다. 중동지역에서는 니암제(泥岩製) 석기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제작수법이나 형태적 특징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 중에서도 말기 양상으로 볼 수 있는 돌날몸돌, 돌날, 소형의 찌르개 등이었다.

이 두 유적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해도 후기 구석기 가운데서도 서로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유물인 것 같았다. 남겨졌다는 것은 인지가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그 때 돌을 두드려 치거나 깨뜨려서 생활용구인 돌연장을 만들어〔打製石器〕 쓰다가 그 물건을 그 자리에 버렸거나 그대로 둔 것이 오늘날 발견되었다는 것이 되는데, 이 유적 출토물로 부산지역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이들이 남긴 유물 가운데서 일본 규슈우(九州)지방에서 발견된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들을 통해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한·일간 바다를 통해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운대 신시가지의 배산(背山)이 되는 장산에 오르면 대마도가 바로 수평선 위로 나타난다. 그 날에 있었던 선인(先人)들의 생활을 헤아려 볼 만하다.

청사포유적(靑沙浦遺蹟)
 
유랑(流浪)생활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구석기시대의 선인들에게는 오늘날의 해운대구 중2동에 속하는 청사포지역은 사람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기후는 온대해양성지대에 속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면서 앞으로 펼쳐진 바다에는 해산물이 물결따라 밀려들고 배후의 와우산(臥牛山)에는 계절에 따른 임산물(林産物)도 풍부했을 것이다. 그 와우산이나 이웃 산은 짐승을 잡는 사냥질에도 좋았을 것이다. 산비탈에는 움막 같은 삶의 터를 마련하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청사포의 북쪽인 현재의 동해남부선 철길 건너편 계단식으로 개간되어 있는 경작지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들이 1990년 부산시립박물관이 지표조사를 할 때 채집되었다. 그 석기는 니암제(泥岩製) 박편 수십 점과 원판형 석기들이었는데 그 석기 가운데는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에서 발견된 석기들과 그 성격이 유사한 것이 있었고 연대는 우리나라 후기 구석기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니 후기 구석기시대인 15,000년 전쯤 선사(先史)의 선인(先人)들이 이곳 청사포 바닷가에서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 부산의 바닷가 유적들
 
부산의 옛날 옛적 사람은 바닷가에서 살아온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그들이 남긴 부산 주위 곳곳의 패총(貝塚)에서 나오는 출토물에서도 알 수 있다. 패총이란 조개껍데기가 쌓여 있는 무덤 같은 곳으로 조개무덤 또는 조개더미, 조개무지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 사람이 까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서 무덤처럼 된 무더기를 말한다.

그렇게 버려진 무더기는 쓰레기장 같은 것이어서 그 때 쓰던 토기 또는 토기조각, 석기, 짐승이나 고기 또는 새의 뼈, 짐승의 뿔, 그러한 것으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이 패총속에 섞여 있다. 섞여든 그 옛것을 파헤치면 그 당시의 먹거리나 생활상이나 인적 교류 등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패총이 부산에서 발견된 것만 해도 섬인 영도구 동삼동과 또 한자리의 동삼동 하리(下里), 그리고 조도(朝島 :아치섬), 영선동(瀛仙洞), 서구 암남동(岩南洞), 사하구 다대동, 북구 금곡동, 강서구 강동동의 북정마을과 범방동(凡方洞), 섬인 가덕도 대항동(大項洞)과 외양포(外洋浦)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모두 섬이나 바닷가이다.

이들 패총에서 나온 유물들은 모두 신석기시대의 것이다. 신석기시대란 생활용구로 쓰인 기구가 구석기 시대보다 한 걸음 나아가서 돌을 갈아서 만든 것을 쓴 시대를 말한다. 대략 BC 5,000년(현재에서 7,000년 전)에서 BC 1,000년(현재에서 3,000년 전)에 이르는 약 4,000년간이 된다.

그런데 신석기시대 전시대(全時代)인 4,000년간의 유물을 한 곳에 간직하고 있었던 패총이 동삼동패총이다.

동삼동패총(東三洞貝塚)

동삼동패총은 역사적 중요성에 비추어 국가는 1979년 사적(史蹟) 제266호로 지정한 바 있고 2001년에는 현장에 동삼동패총 유물전시관을 세워 축토유물을 전시중에 있다. 이 패총의 정확한 위치는 영도구 동삼동 750∼1번지 일원으로 태종대로 가는 태종로에서 아치섬의 해양대학으로 드는 오른쪽 비탈이 된다.

동삼동패총은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여러 문화층이 겹쳐서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가 나아간 방향과 함께 신석기문화연구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 패총에 쌓인 시대적 성격을 발굴한 사람에 따라 3∼5개의 층위로 보고 있다. 이 가운데 3개층으로 나눈 것을 중심으로 보면 맨 아래층에 쌓인 조개껍질층이 이 패총 근처에서 가장 오래전에 산 사람이 버린 조개껍질층이 된다. 이 맨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으로는 무늬없는 토기, 가는 선의 덧무늬토기, 눌러찍은 무늬의 토기와 반쯤 갈아만든 편편한 석기, 흑요석(黑曜石)으로 만든 석기, 뼈로 만든 복합 낚시바늘, 조개껍질로 만든 팔찌들이 있고, 여러 종류의 바다고기와 육지 짐승의 뼈가 있었다.

이 같은 출토물을 탄소연대로 보아 고고학자들은 기원전 5,000년까지의 사람들이 쓴 것으로 거슬러 올리고 있다. 오늘날에서는 7,000년 전이 된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의 상한선(上限線)을 BC 5,000년으로 보고 있으니 동삼동 패총자리에 맨 처음 산 사람은 신석기 시대 초기의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중간층은 신석기 중기의 전형적인 빗살무늬의 토기파편과 갈아서 만든 석기,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동물의 뼈와 뿔로 만든 골각기(骨角器)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니 전기에 버려진 조개껍질 위에 중기의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계속 버려서 쌓여간 것으로 본다. 그것은 위층으로 갈수록 신석기 후기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최상층인 신석기 후기의 유물로는 아가리가 겹으로 된 무늬 없는 토기, 반달모양의 돌칼,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 등 중간층보다 발달한 문화를 보이는 유물이 나왔다. 그러니 맨 위층은 신석기 후기를 보이면서 탄소연대로서는 오늘에서 3천년(BC 1000년) 전쯤의 사람이 조개껍질을 버린 자리가 된다.

그렇다고 4천년 동안 줄곧 이 한 자리에 계속 사람이 살았다기보다 일정기간 공백기가 있어도 얼마 뒤에 이 곳으로 딴 지역의 사람이 찾아들어 살면서 앞의 사람이 버린 조개더미 위에 다시 조개껍질을 버리면서 그 날에 쓰던 연장과 뼈 조각들이 버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동삼동패총에서 나타나는 해양문화와 인적교류

이 동삼동패총이 보인 유물에서 당시의 여러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이곳 패총이 가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무늬 없는 토기의 모양이나 기형이 맨 아래층은 동해안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이곳 부산지역으로는 전기에는 동해안문화를 받아들이고 중기 이후부터는 서해안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바다를 통해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둘째로, 일본 신석기시대 전기에서 후기에 걸치는 각 시기의 죠몽(繩文 :승문 ;새끼줄 모양의 무늬)조각이 나온 것이나 흑요석(黑曜石)제 석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부산지역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바다를 통한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이 동삼동패총에서는 대구, 농어, 감성돔, 가오리, 복어, 정어리 등 10여 종의 고기 뼈가 발견되었는데 신석기의 그 당시도 그러한 어류가 있었고 그러한 고기를 그물이나 낚시, 작살 같은 어로(漁撈)도구를 이용하여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이 패총에서 조개껍질로 만든 낚시바늘, 골각기(骨角器)로 만든 화살촉과 낚시바늘이 많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넷째는, 30여 종의 조개껍질이 나왔는데 이는 남해에 서식하는 조개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정도다. 이 가운데도 굴이 가장 많고 전복, 소라, 꼬막, 백합, 우렁 같은 것이 많은 편이었다. 이로써 조개류 먹거리가 당시의 식량으로 요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 멧돼지 또는 사람모양의 토우(土偶)와 뿔잔(角杯) 모양의 토기와 조개껍질로 만든 탈이 나왔는데 이는 원시 신앙과 관계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여섯째,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소규모의 원시적 농경(農耕)도 하였을 것으로 본다. 그것은 동삼동패총에서 나온 돌도끼 중에서 괭이나 보습 대신으로 쓸만한 것이 있고 반달모양의 돌칼이라든가 곡물을 탈곡하는데 쓰였을지도 모를 갈돌 같은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1999년에는 동삼동패총 1호 주거지에서 탄화곡물인 조와 기장이 출토되기도 했다.

위에서 말한 여러 사실에서 동삼동패총이 있는 자리야말로 자연에서 나는 채집(採集)식량 중심으로 생을 영위한 신석기시대에는 살기 좋은 자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한 자리에 4,000년의 역사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본다.

동삼동패총 자리의 지형은 봉래산이 남서풍을 막아 주고 북으로 아치섬을 가진 양지바른 동향으로 패총 아래로는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그 때의 지형이 오늘과 같았다면 그 날의 선인들은 통나무로, 또는 통나무나 대를 엮어 묶은 뗏목배로 바로 지척에 있는 신선대·용당포·감만포로 오갔을 것이다.

그렇게 오가면서 덫을 놓거나 창을 써서 내륙의 산이나 들에 살고 있는 노루, 사슴, 멧돼지, 너구리, 오소리, 고라니 같은 짐승도 잡았을 것이다. 그것은 이 패총에서 그러한 짐승들의 뼈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짐승들의 살은 식용이 되고 껍질과 털은 겨울의 방한용(防寒用)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 당시 바다나 바닷가에는 해산물도 많았을 것이고 봉래산에는 산에서 채집할 수 있는 식물성 먹거리도 많은 반면 인간의 천적(天敵)인 호랑이는 섬이었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다. 먹거리가 많고 산악지대에서 득시글거리는 호랑이가 없고 보니 이 곳이 바로 인간낙원이 아니었을까?

이런 자리에 움집이나 굴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평지 같으면 땅을 밑으로 1m 정도 둥글게 파고 벽에 붙여 몇 개의 기둥을 세워 억새풀이나 나뭇가지로 원뿔모양의 지붕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한 움집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삼동패총처럼 산비탈일 경우는 수평으로 파 들어간 굴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굴집에는 겨울을 살기 위해 여름·가을에 잡아 말린 고기와 조개, 가을에 거두어들인 호두와 개암, 도토리들을 저장해 두는 지혜도 가졌을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이 자리보다 먹거리가 많고 살기 좋은 곳이 있으면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을 것이다. 먼저 사람이 옮겨간 빈자리에 얼마 간의 시일이 지난 뒤 또 한 무리의 선인들이 찾아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채집식물(採集食物)로 살아간 그 시대의 선인들이 오고간 자리가 오늘날의 동삼동패총 자리로 여겨진다.

부산에 산재해 있던 패총들
 
부산에 산재해 있는 패총은 열 군데가 넘지만 동삼동패총 이외는 모두 파괴되어 주택가 또는 도로로 편입되어 그 자취를 잃었다. 그 가운데 아치섬패총에서는 흙이나 돌로 만든 그물추가 나오고 영선동패총에서는 동해안계통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오고 다대포패총에서는 선이 굵고 전형적인 남해안식의 침선문계토기가 나왔다. 가덕도 대항동패총에서 어망추가 채집되었다.

북구 금곡동 율리패총은 마을사람이 닭의 사료를 하기 위해 마구 파다가 혹시 문화재가 아닐까 하고 부산시에 신고함으로써 발견되었다. 1972년 12월에서 2개월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뒤 지금은 안이 비어 버렸다.

이 금곡동패총은 금정산 산줄기의 바위가 자연 그대로의 바위그늘을 만들어 그 안에서 사람이 굴살이하듯 살면서 그 앞의 비탈에 먹고 난 뒤의 조개껍질과 함께 생활찌꺼기를 버려 썩지 않은 석회질패총을 만든 것이었다. 바위그늘은 너비 255∼270㎝, 깊이 약 230㎝, 높이 약 200㎝ 내외로 사각형에 가까워 한 가족이 살 수 있는 하나의 방을 연상케 한다. 발굴결과 돌로 테를 돌리고 바닥에 돌을 깔아 만든 화로자리 3개소가 층위를 달리하여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와 갈아서 만든 화살촉, 끌, 바퀴날도끼, 삼각형돌칼, 숫돌, 납석으로 만든 장신구들도 나왔다.

이 금곡동패총은 신석기 마지막단계인 4,000년 전에서 3,000년 전으로 보더라도 그 당시의 낙동강 하구(河口)는 이곳 금곡동의 율리 근방이 되고 현재는 광활한 육지가 된 강서구 평야 일대는 바다였을 시기가 된다.

현재의 강서구에도 패총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강동동 북정마을의 당산부근에 있었던 패총은 북정패총이라 한다. 이 패총이 있었던 자리는 강서구 평야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동산의 북쪽 끝부분이었지만 낙동강의 홍수로 강서구 평야가 삼각주(三角洲)로 형성되기 이전은 주위가 바다였고 패총이 있었던 북정리는 섬이었을 것이다.

이 북정리패총에서 채집된 유물은 주로 토기류이고 석기는 적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신석기시대의 부산지역은 동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오랜 옛부터 바다와 그 바다 주위에서 채집된 채집식량을 먹거리로 삼아 삶을 영위해 왔다는 사실과 이 곳이 대륙에서 남하하는 북방문화의 종착지인 동시에 해양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남방문화의 상륙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중기로 내려오면서 그물추, 낚시바늘, 복합낚시바늘, 작살 등이 곳곳 패총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의 기술이 신석기시대부터 발전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득한 옛날인 신석기시대부터 부산지역에서는 바다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개척해 온 것으로 본다.

가야시대 해상교통의 요지 강서구지역
 
앞의 장에서는 옛 유적과 유물, 그리고 패총에서 나타나는 부산항의 선사시대를 추구해 보았다. 이제는 기록자료에서 부산항을 살필 차례다. 부산항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 시초는 가야시대에서 비롯된다.

가야는 고대(古代) 낙동강 하류지역인 변한(弁韓)에서 1세기경 12부족(部族)이 연합하여 6가야로 통합된 나라를 말한다. 그 6가야는 금관가야(金官伽倻:金海)·대가야(大伽倻:高靈)·소가야(小伽倻:固城)·아라가야(阿羅伽倻:咸安)·성산가야(星山伽倻:星州)·고령가야(高寧伽倻:咸昌?)가 된다.

이 6가야의 위치를 보면 모두가 낙동강의 서쪽지역이 되는데 이 가운데 금관가야와 대가야가 가장 강한 맹주국으로 바다와 낙동강의 수운을 이용한 해상할동을 활발히 하여 일본과는 물론 낙랑(樂浪)·대방(帶方) 등 한(漢)의 군·현과도 교역을 하였고 동해안의 예(濊)와도 통교를 하였다.

가야가 이렇게 활발한 해상교통을 한 것은 오늘날 부산광역시의 강서구 지역으로 그 당시는 수운의 요지인 바다였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강서구 평야지대는 오랜 세월 이전은 바다였는데 그 바다에 낙동강 물길과 함께 토사(土沙)가 밀려오고, 밀려온 것이 쌓여서 삼각주(三角洲)를 만들어 가다가 육지로 바뀐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낙동강 물길을 따라 명지동·신호동·을숙도 남쪽의 바다에 진우도·대마등도·새등도·백합등도 등 모래섬이 계속 형성되어 새로운 사구도(沙丘島)가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해지역에 금관가야가 선 것은 서기 42년으로 지금으로부터 1959년전이 된다. 그 당시는 가덕도가 남쪽에서 대한해협의 사나운 풍파를 막아주고 서로는 성화례산(省火禮山)·금병산(錦屛山)이, 북으로는 신어산(神魚山)이 병풍이 되어 바람을 막아주고 바다 한가운데는 칠점산(七點山)·덕도산(德道山)들이 바다 속의 섬이 되고 동으로는 낙동강 하구(河口)가 되어 배가 드나들기 좋은 포구(浦口)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북방의 내륙문화가 바다와 강을 통해 남하하고 남방의 해양문화가 상륙하는 문물의 교역지가 되면서 가야문화를 꽃피웠을 것이다.

그러한 문물전파나 인적 교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유다국에서 가야로 온 허왕후가 내린 나루터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서기 1세기에 이미 인도의 아유다국(阿踰陀國)과 인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에 의하면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부인 허왕후가 서기 48년 바다를 건너 김해로 왔다는 기록이다. 수로왕이 가락국을 건국한 지 6년 뒤가 된다.

수로왕이 허왕후를 맞는 과정을 〈가락국기〉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 뽑아보면 수로왕이 유천간(留天干)에게 날랜 준마를 챙겨서 망산도(望山島)로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으로 가게 하였다.

유천간과 신귀간이 왕이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갑자기 바다 서남쪽 귀퉁이로부터 어떤 배가 다홍색 돛을 달고 꼭두서니 빛 깃발을 내걸고 북쪽을 향해 왔다. 유천간 등이 섬 위에 불을 피우고 물을 건너 뭍으로 내려오고 신귀간이 대궐로 달려가서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신귀간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구간(九干)들을 보내 왕후를 맞이하게 하였고 왕후가 타고 온 배를 궁궐 안으로 모셔들이려 하는데 왕후가 "나는 당신들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가벼이 따라갈 것이냐"고 하였다. 유천간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하니 왕은 그렇겠다고 하여 궁궐에서 서남쪽으로 60보(步)쯤 되는 곳 산자락에 장막으로 임시 궁전을 짓게 하였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매고 올라왔다. 왕후는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패백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때 따라온 신하와 노비는 20여 명이었고 가지고 온 금수(錦繡)와 능라(綾羅), 의상(衣裳), 금·옥·주옥들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후가 점점 행재소(行在所)에 가까이 오매 왕이 나아가 함께 만전(慢殿)으로 들어왔다. 이에 왕과 후(后)가 함께 침전(寢殿)에 계실재 후가 왕께 조용히 말하되 “나는 본래 아유다국(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씨요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二八(18세)이라 금년 5월에 본국에 있을 때 부왕(父王)이 황후(皇后)와 더불어 나에게 말씀하기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수로왕이 유천간을 시켜 망산도로 가게 한 그 망산도가 어디냐는 것이 문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지금의 강서구가 바다였을 때 있었던 섬으로 덕도(德島)·죽도(竹島)·취도(鷲島)·명지도(鳴旨島)·전산도(前山島)들이 나오는데 이 전산도가 음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망산도였을 것이란 견해인데 김태식 교수(홍익대)는 강서구 서쪽 산인 칠산(七山)으로 잡고 있다.

그리고 신귀간으로 하여금 승점(乘岾)으로 가게 한 그 승점은 지금의 김해시 봉황동 봉황대로 추정하고 허왕후를 맞이하기 위해 장막궁전을 설치하였다는 곳도 김해시 반룡산(盤龍山) 산자락으로 보고 있다. 왕후의 배를 맨 별포(別浦) 나루터는 뒷날 주포(主浦)라 한 오늘날의 강서구 미음동 와룡 마을의 옛 나루터로 비정했다.

이 같은 허왕후 도래에 관한 행적에는 이설(異說)도 적지 않다. 이 이설 가운데 망산도를 진해시 용원동 앞바다에 있던 조그마한 돌섬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김해에 있었던 가야국 궁전과는 거리가 멀고 허왕후 일행이 거행하거나 유천간과 신기간이 서로 연락을 하는 일에 대해서도 여건이 맞아들지 않는다. 비록 용원동 앞바다에 있었던 섬을 망산도라 했다 해도 그 곳도 현재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되는 해양수산부가 항만법에 의해 정한 바 있는 오늘날의 부산항 해역에 속한다.

이〈가락국기〉는 설화적(說話的)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러나 주위의 매장문화를 근거로 거슬러 오를 때면 이미 1세기경 강서지역이 바다였을 그 날 외국과의 교류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일 것 같다. 그날의 아유다국이 존재하고 그 당시의 해류(海流)와 해류에 따른 문물교류, 그리고 오랜 날을 이어온 가야국의 설화들은 허구성이 있다해도 지리·지형으로 보거나 그 날의 문화가 이 곳으로 전파된 사실들로 보아 학자들의 연구과제가 되는 가운데 그 근거를 부정할 수 없다.

필자가 부산항변천사에 〈가락국기〉를 근거하여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도 이에 유연하다.

해로(海路)를 통해 가야로 오간 신라의 석탈해(昔脫解)
 
〈가락국기〉에는 허왕후 도래 이전에 수로왕과 탈해(脫解)에 관한 설화도 있다. 이는 수로왕이 가야를 건국한 2년째의 일이니 서기 43년의 일이다. 석탈해가 오늘날의 강서구가 바다였을 때 해로를 통해 이 곳으로 오고 해로를 거쳐 신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가락국기〉에 의하면,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낳은게 알〔卵〕이었고, 그 알이 변하여 사람이 된 그 사람을 탈해라 했다. 탈해는 해로를 따라와서 왕궁으로 찾아들어 왕궁에서 수로왕을 만나 “내가 왕위를 빼앗고자 한다"고 하였다. 탈해의 말에 수로왕은 “천명(天命)이 나를 왕위에 오르게 하여 나라 안을 평안하게 하고 백성들을 안무(安撫)하라 하였는데 어찌 하늘의 명을 어기고 너에게 왕위를 내어줄 것이냐"고 하였다.

그러자 탈해가 그러면 기술로 다투어 보겠느냐 하기에 왕이 좋다고 하니 탈해가 갑자기 화하여 매가 되었고 왕은 화하여 독수리가 되었다. 연이어 탈해가 화하여 참새가 되니 왕은 새매로 화하였는데 그 사이는 촌음(寸陰)의 간격도 없었다. 조금 있다가 탈해가 본신(本身)으로 돌아오니 왕도 본신으로 돌아왔다. 탈해가 엎드려 말하기를 “도술을 부리는 데 있어 독수리에 대한 매, 새매에 대한 참새로 화하는 것을 볼 때 성인(聖人)이 나를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진 덕임을 믿는 바 왕과 왕위를 다툴 수가 없습니다"하고 절하고 물러나와 가까운 교외 나루터에 이르러 중국선(中國船)을 타고 수도(水道)를 따라 가려 했다.

왕은 탈해가 남아서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급히 주사(舟師) 500척을 내어 추적하니 탈해가 달아나 계림지계(鷄林地界: 현 경주지역)로 물러갔다. 이렇게 탈해가 배를 타고 가야로 와서 가야의 왕이 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배 타고 간 나루터와 바다는 어디였을까? 이 가야에 들어설 바다나 나루는 오늘날의 강서구지역밖에 없다.

강서지역은 이러한 설화가 얘기해주듯 부족국가가 연맹체국가로 형성되어 가는 1세기경에는 바다가 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여러 가지 역할을 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중국선을 타고 수도를 따라갔다는 것도 의미있는 교류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칠점산(七點山)과 초현대(招賢臺)가 뜻하는 것

칠점산은 강서구 대저1동 자연마을인 평강리 칠점(신촌 :김해 비행장지역)에 일곱 개의 작은 구릉을 이룬 산을 말한다. 이는 대저동에서는 유일한 산이었는데 8·15광복 이전의 낙동강 제방축조공사와 김해국제공항 건설공사 때 3개의 산이 없어지고 광복 이후 다시 3개가 없어졌다. 1개 남은 산도 대부분 깎여나가고 35m 높이만 남아 있다. 이 칠점산은 「대동여지도」에 그려져 있는데, 칠점이라 한 것은 이 지역이 바다였을 때 떠 있는 7개의 점처럼 보여 7점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부산 앞바다에 다섯 여섯 개의 바다 속 맥도(脈島)를 5·6도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그러했던 점같은 섬이, 대저동 주위가 낙동강의 토사(土砂)로 사구(砂丘)가 되어 물이 빠지고 보니 산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의 고적(古跡)조항 가운데의 초현대(招賢臺)가 그 때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초현대란 현인(賢人)을 불러들인다 하여 그런 이름이 생긴 것이지만 초현대를 설명하기를 “부(府 :김해부를 말함) 동쪽 7리에 있는 조그마한 산이다. 전해내리기를 가락국의 거등왕(居登王 :수로왕의 아들로 가락국의 2대왕)이 칠점산의 참시선인(璇始仙人)을 부르니 참시선인이 거문고를 안고 배를 타고 와서 더불어 즐겼다. 이로 인해 초현대라 이름하였다. 왕이 앉았던 자리의 돌에는 연꽃과 함께 바둑판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참시선인과 거등왕에 대해서는 설화에 속한다 해도 설화 속에 나타나는 지역 또는 지점 같은 것은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참시선인의 칠점산과 거등왕의 초현대(김해시 안동 685-1번지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78호) 사이는 4.5㎞거리다. 그 사이를 참시선인이 배를 타고 왔다면 그 사이는 그때 바다였음을 이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

몽고의 정동군(征東軍) 서낙동강지역에 주둔

몽고군이 중국과 만주지역까지 석권하고 고려에 침입하자 고려정부는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38년 만인 1270년 개경(開京)으로 환도함으로써 고려군과 몽고군, 고려집권자와 국민 사이 벌어진 삼별초(三別抄), 야별초(夜別抄) 등의 혼란에서는 어느 정도 진정을 보았으나 고려사회는 몽고의 지배 아래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몽고가 안무사(按撫使)란 이름으로 사람을 보내어 고려조정의 동정을 살피며 감독하고 각도의 지방 정황을 살피는 동시에 둔전군(屯田軍)을 두어 고려에 그들 몽고의 지반을 굳히면서 세력을 확대해 갔다. 그러하니 고려는 자주성을 잃은 변태기(變態期)현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큰 일로는 1280년 원(元:몽고가 1271년 국호를 원으로 바꿈)나라가 일본을 정벌한다 하여 고려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둔 일이었다.

이 정동행중서성을 중심으로 원의 세조는 고려에 둔전(屯田:지방에 주둔하는 군대에 딸린 밭)을 설치하여 병참기지(兵站基地)로 삼게 하고 고려가 병력을 내어 몽고군에 가세하여 정동(征東:일본을 정벌)케 했다. 이 정동을 위한 둔전지역과 정동기지(征東基地)가 바다와 강을 가지고 일본과 가까운 김해가 되었는데 그 김해는 오늘날의 강서구의 서낙동강지역이었다.

원나라는 그들의 힘을 믿고 고려와 원의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 형성을 고려정부에 요구하면서 원나라의 여진인(女眞人) 조양필(趙良弼)을 국신사(國信使)로 삼아 김해에서 출범하여 일본에 건너가 입공(入貢)을 요구했다.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두 차례였다.

조양필이 국신사로 나가는 동안 원은 고려의 함선까지 김해로 집결시켜 일본에 위압(威壓)을 주었다. 이때 김해에 주둔한 병력은 5,000명에 이르렀다.

이 무렵인 1280년대는 김해라 한 오늘날의 강서구지역은 곳곳으로 사구(砂丘)가 형성되어 섬으로 바뀌어가고 있을 때였다. 이보다 200년 후인 1481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의 산천조를 보면, 바다였던 강서구지역에 덕도(德島)·죽도(竹島)·취도(鷲島)·명지도(鳴旨島)·전산도(前山島)들의 이름이 보인다. 이 섬의 소재를 강중(江中)이라 기록하거나 해중(海中)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낙동강 하구(河口)이자 해구(海口)의 삼각주(三角洲)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몽고)의 정동군은 이 섬 사이의 바다와 강류를 이용한 군선(軍船)으로 오가며 일본을 공격할 군사기지와 둔전에 의한 곡물 생산기지로 삼은 것이다.

이같이 강서지역에 집결했던 정동병력은 이 곳에서 정동(征東)길에 오르지 않고 합포(合浦 :현 馬山)로 이동해 가서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참패를 거듭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동의 병참기지가 된 강서구지역은 본의 아닌 원의 무모한 정복욕으로 어려운 곤욕과 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왜구침범의 입구가 된 낙동강 하구(河口)

왜구(倭寇)를 《우리말사전(한글학회刊)》은 “옛날 우리 나라와 중국 연안을 무대로 약탈을 일삼던 일본 해적"이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옛날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이 “내가 죽으면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다는 말이나 신라 때 창건된 동래의 범어사가 부처님의 가호로 왜구를 막고자 한 염원에서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창사연기(創寺緣起)로서도 알 수 있다.

왜구의 발생지는 일본의 이끼〔壹岐〕·쓰시마〔對馬島〕·기다큐슈〔北九州〕·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 등 섬과 해안지대였는데 해적 선단(船團)이 적을 때는 수척 또는 수십 척, 많을 때는 수백 척에 이르렀다.

이 왜구의 약탈물은 식량과 재물은 물론 사람까지 잡아다 노예로 삼거나 팔았다. 이들은 약탈과 함께 살인(殺人), 방화(放火) 등 그 횡포는 격심했다.

《고려사》에서 왜구에 관한 기사가 처음 보이는 것은 1223년 5월에 “왜가 금주(金州)를 노략질하였다"는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 보는 금주는 오늘날의 김해인데 노략질을 위해 들이닥친 바다는 김해바다가 된다. 이 김해바다는 강서구 바다의 해구(海口)이자 낙동강 하구(河口)가 되어 있었을 때의 일이다.

이 왜구는 김해바다로 침입하여 낙동강의 물길을 거슬러 올라 내륙 깊숙이까지 침탈했다. 1225년에는 왜선 2척이 경남 연해안에 출몰하기에 이를 나포(拿捕)하였고, 1226년에는 거제도 일대를 약탈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금주(金州 :현 김해시)가, 5월에는 웅신현(熊神縣 :현 창원군)이 침탈을 당했다. 1263년 2월에도 금주·웅신현·물도(勿島) 등 경남해안지대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몽고의 침입을 입고 일본을 정벌할 정동군(征東軍)이 오늘날의 강서구지역에 주둔하다가 마산으로 자리를 옮겨간 1270년대에서 1280년대에는 왜구의 침탈이 별로 없었다. 1300년대에 들어서 왜구침탈은 재개되었는데 공민왕 재위 때만 해도 부산·경남지역의 침구(侵寇) 횟수는 30여 회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를 지나 우왕(禑王 :재위 1375∼1388)대에 이르러서는 왜구의 기세가 더 격심하여 우왕 원년 11월에는 왜구가 금주·진주 지역에 내습하여 살육과 분략(焚掠)을 자행하였다.

1377년 4월에는 김해에서 황산강(黃山江 :낙동강지류가 되는 양산강을 말함)까지 내습하여 밀양·울주·양주(현 양산)까지 분탕(焚蕩)되다시피 하였다. 11월에는 다시 적선 130여 척이 몰려와 김해부와 의창현(義昌縣 :창원군)이 침략을 입었고 1379년에서 1382년 사이에도 김해에 산발적으로 출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놓인 고려의 우왕 즉위년에는 왕이 교서(敎書)를 내어 “왜구로 인하여 수로가 막히거늘 조운(漕運)을 피하고 전라·양광(楊廣 :경기도 및 강원도 일부와 충청도)·경상도 연해주의 요역(搖役 :나라에서 시키는 노동)과 부세(賦稅 :세금 부과)를 면제하되 차등있게 하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왜구로 말미암아 “조세곡물(租稅穀物)을 운반하는 배가 약탈을 당하니 배로써 운반하는 일을 피하고 전라·양광·경상지역 가운데 바닷가 지역은 요역과 조세부과를 면제 또는 차등있게 하라"는 것이다.

왜구의 침탈은 이처럼 심각하였고 그 침탈은 바닷가 지역에 격심했다. 그래서 오늘날의 부산항 해안지역은 왜구에 시달리는 첫 자리가 되어 바닷가 30리는 어느 때 왜구의 침탈을 입을지 몰라 전전긍긍으로 사람살기 어려운 지역으로 바뀌었다. 그러한 일은 고려 후기가 더했다.

오늘날의 강서구가 바다였을 때를 생각하면 서기 기원 초에는 인도의 아유다국에서 왕비와 그 수행원이 해로를 따라오는 인적 교류지가 되고 신라와도 교류가 이루어졌지만 낙동강의 토사(土砂)로 삼각주(三角洲)가 형성되어 섬으로 바뀌어 가는 고려시대는 몽고군이 일본을 정벌할 정동군(征東軍)의 군사기지가 되기도 하고 왜구 내침의 중심지가 되어 암울한 갈등을 빚는 시기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의 바다가 메워진 강서구는 오늘날 부산광역시의 행정구역에 속하면서 광대한 평야를 가지게 되었다. 그 동안 산악지대로 내륙의 발전이 가로막혔던 부산시는 이 강서구로 해서 개발과 발전의 숨통이 틔워지고 있다.

해운포(海雲浦)

해운포(海雲浦) 해역(海域)과 지세(地勢) 변천

오늘날의 수영구 수영(水營)은 조선시대의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연대에 울산 개운포에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 :줄여서 좌수영, 더 줄여서 수영)이 옮겨온 뒤 수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 이전은 남촌(南村)이었다.

그것은 《동래영지(東萊營誌)》, 《영남영지(嶺南營誌)》, 《여지도서(輿地圖書)》가 “좌수영은 울산 개운포에서 동래부 10리 정도의 남촌으로 이건하였는데 언제인지 모른다”고 하였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선조 25년(1592)에 동래 남촌으로 이설(移設)하였다고 하고, 《울산읍지(蔚山邑誌)》, 《징비록(懲毖錄)》은 선조대(宣祖代)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좌수영을 건치(建置)한 포구를 해운포라 했다. 그것은 《동래부지》 관방(關防)조에 좌수영의 소재를 해운포 옛 터라 했고 역시 《동래부지》의 성곽(城郭)을 기술한 자리의 고읍성(古邑城)을 설명하기를 해운포 수영(海雲浦 水營)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고읍성은 오늘날의 수영구 망미동에 있었던 성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수영이란 이름 이전은 남촌이었고, 남촌에 수영을 건치했던 포구는 해운포였다.

필자가 이렇게 여러 문헌을 인용한 것은 현재의 수영 동쪽의 수영천이 바다로 이어지는 포구가 해운포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대동여지도」가 그것을 증거하듯 좌수영쪽인 수영강 서쪽에 해운포를 적어넣고 있다.

말하자면 수영이란 이름이 생기고 사천(絲川 :뒷날의 수영천)과 동래천(東萊川 :온천천) 물길이 토사(土砂)를 실어내려 해운포 바다를 메워서 수영비행장이 되었다가 수영 컨테이너 하치장(荷置場)이 되고 지금은 센텀시티가 형성되고 있는 광활한 지역이 아주 옛날에는 바다였다는 사실이다.

이 센텀시티 자리의 서쪽인 수영천쪽을 해운포라 한 대신 맞은편 자리(바다였을 당시)는 오늘날의 재송동 아래 재송포(裁松浦)가 있었다. 이 재송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山川)조에 나오는데 재송포를 설명하기를 “현(縣 :동래현을 말함) 동쪽 10리에 위치하여 소나무 수만주(數萬株)가 있다"하였다. 이 재송동 아래도 바다였다. 오늘날 재송1동 산 74∼5번지 일대 골짜기를 조선골(造船谷)이라 하는데 이 조선골에서 배를 만들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해운포와 재송포가 바다였을 때는 그 바다가 더 깊숙이 내륙으로 들어가서 만(灣)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동국여지승람》과 《동래부지》의 산천조에 의하면, 다도(茶島)가 나오는데 《동국여지승람》은 “현에서 남쪽으로 4리 떨어진 곳”이라 하였고, 《동래부지》는 “부(府)의 남쪽 7리에 있다” 하고는 작설(雀舌)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다도는 글자 그대로 섬이다. 1735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보는 동래부 지도는 동래구 안락동 충렬사 남쪽이자 동래천의 이섭교(利涉橋) 북쪽에 다도를 그려넣고 있다. 이 다도는 그 지역이 바다였을 당시는 섬이었을 것이 동래천 상류에서의 물길을 따라 바다가 메워져 섬 아닌 조그마한 언덕같은 산으로 남아 있다가 동래에서 해운대로 가는 도로와 기차 철도 부설 때 산처럼 남아 있는 토석(土石)이 깎여 없어지면서 지형 지세가 바뀌었다. 이로써 보면 다도가 있었던 자리도 아주 오래 전엔 바다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동해남부선 동래역 남쪽에 있는 패총(貝塚)이다.

이 동래패총 밑자리에서 고대의 제철(製鐵)시설의 일부로 생각되는 야철노지(冶鐵爐址)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 패총이 형성된 시기를 3∼4세기로 보고 동래지역에서 형성된 4∼5세기경의 고분군에서 철제유물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동래지역에는 철의 생산이 많았던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삼국지》가 삼한(三韓)시대 가운데의 진한과 변한 조항에서 “나라(변한)에서 철(鐵)을 생산하니 한(韓)·예(濊)·왜(倭)가 모두 와서 취해 가고 모든 매매(賣買)에 철을 사용하니 중국에서 돈(錢貨)를 사용함과 같다. 또 철을 낙랑(樂浪)·대방(帶方) 2군에 공급하였다"고 한 대목이다.

변한 때 철이 생산되어 해외로 수출한 포구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다. 이 이설 가운데 김해바다(지금의 강서구가 바다였을 당시)를 보는 경우가 있고 동래를 추정하는 경우가 있다. 동래로 추정할 경우는 동래패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쪽지역이 1,400∼1,500년 전에는 바다였고, 그 바다를 통해 철(鐵)이 수출되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일은 장산(?山)에서 이어내린 재송포 동남쪽 뒷산에 조선시대 초기부터 봉수대(烽燧臺)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봉수대를 간비오산봉수대(干飛烏山烽燧臺)라 한 사실이다. 간비오산봉수대는 간비오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간비오산은 ‘큰 나루'를 한자의 음과 새김을 따서 이두식(吏讀式)으로 표기한 이름으로 본다. 간(干)은 각간(角干), 이벌간(伊伐干)할 때의 간(干)으로 신라 때 첫째 벼슬을 붙인 것이다. 그 뜻은 ‘한' ‘큼'(大)을 뜻하고 비오(飛烏)의 飛는 날비의 새김 ‘날'과 烏의 음 ‘오'가 어울려 ‘날오' ‘나루'로 소리나니 ‘큰 나루'가 되고 그 큰 나루로 배가 많이 오가는 위쪽 산이 되어 ‘한나루뫼'를 ‘간비오산'으로 표기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큰 나루라 한 것은 외국과의 해상교통이 크게 이루어졌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삼한(三韓)시대의 변한 12국(國) 가운데 독로국(瀆盧國)을 동래(東萊)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독로국은 탁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을 ‘독로'라 했다고 하니 그 독로는 동래천과 수영천이 홍수 때면 입는 탁류를 말한 것으로 볼 만하다.

이러한 여러 사실에서 볼 때 동래천은 금정구 범어사 앞을 흐를 때는 범어천(梵魚川), 동래 온천장 앞을 흐를 때는 온천천, 동래읍 앞을 흐를 때는 동래천이라 일컬어지지만 그 물길은 모두 바다로 향한다. 1,400∼1,500년 전에는 동해남부선의 동래역 앞쪽에 있었던 동래패총 동쪽까지 바다가 만입(灣入)하여 오늘날의 센텀시티 자리는 물론 안락2동과 연산8동의 평지지역은 바다였을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다도(茶島)가 말하고 있다.

그러했던 바다가 동래천 물길에 실려내리는 토사(土砂)가 바다를 메워가고 수영강 상류인 사천(絲川)이 기장군 철마면에서 선동을 거쳐 역시 토사를 실어내려 바다를 메워가다가 동래천과 어울리면서 바다메우기는 속도를 더해갔을 것이다. 두 갈래 흐름으로 오늘날의 동래구의 안락2동과 연제구의 연산8동 저지대가 육지로 바뀌면서 센텀시티 자리까지 메워갔을 것이다. 그래서 재송포도 해운포도 바다 아닌 육지로 바뀌어 바다를 잃어버리게 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바다였을 당시는 그 바다가 내륙 깊숙이 들어서서 좋은 항구를 형성했을 것이다. 간비오란 이름이 큰 나루터를 의미하듯 삼한시대는 동래에서 철이 생산되어 이 나루터에서 해외로 수출되는 무역이 크게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시대

부산포(富山浦)와 부산포(釜山浦)

부산항은 부산포에서 발전되었다. 그러면 부산포의 형성은 어느 때 어느 자리에서 시작되었을까? 이는 문헌적 고찰이 필요하다. 그 문헌을 살피기로 한다.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의 고적(古蹟)을 기록한 가운데 부산부곡(富山部曲)이 나온다. 그 부산부곡을 설명하기를 卽 釜山(곧 부산)이라고 했다. 부자 부(富)자로 된 부산부곡이 가마 부(釜)의 釜山이란 뜻이다.

이 부곡(部曲)은 조선시대는 이미 없어지고 고려말까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부곡이란 군·현(郡·縣)과 같은 일반행정구역과는 달라 전정(田丁 :논밭과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호구(戶口)가 현(縣)에 미치지 못한 곳에 둔 것 같다. 그러면서 특수한 물건을 생산하거나 제조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조선조 이전에 옛 동래지역에 있었던 부곡은 부산부곡만이 아니었다. 고지도부곡(古知道部曲)·조정부곡(調井部曲)·형변부곡(兄邊部曲)에 생천향(生川鄕)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의 동구 좌천동(佐川洞) 지역은 고려시대는 부산부곡이라는 부곡으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부산부곡은 조선초에 동래현(東萊縣)의 속현(屬縣)인 동평현(東平縣 :현 동구와 부산진구·영도구)에 소속되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좌천동 바닷가 포구(浦口)를 부자 부(富)자 富山浦라 했다. 富山浦는 富山部曲에서 온 이름인 것 같다. 그것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태종 2년(1402) 2월 왜구가 동평현 富山浦로 쳐들어 천호(千戶) 김남보(金南寶) 및 군사 10여명을 살해(殺害)했다고 한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조선조초 태조·태종 무렵의 현재의 부산지역 포구에는 부산포 이외에 석포(石浦 :현 남구 대연동)와 다대포(多大浦)가 큰 포구였던 것 같다.

그것은 석포와 다대포의 천호(千戶)기록이 자주 나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태조 5년(1396) 5월에는 경상도 동래 만호(萬戶) 윤형(尹衡)과 석포(石浦) 천호 이의경(李義敬)이 왜선 1척(隻)을 포획(捕獲)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왜선은 해적선(海賊船)인 왜구를 말했다.

태종 7년(1407) 7월에는 부산포 병선(兵船) 3척을 다대포 천호에 나누어 주었다고 했다. 그때의 기록도 부산포는 부자 부(富)의 富山浦로 되어 있다. 태종 13년(1413) 7월 전라도와 경상도의 바닷물빛이 변해 고기가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때의 다대포를 양주(梁州)다대포라 했다. 그때의 다대포는 양주(현 梁山)에 속해 있은 것 같다.

절영도(絶影島 :현 영도)와 동래 밖의 부산포도 쇠털(牛毛)을 달인 물빛 같이 바닷물이 붉었다고 하면서 부산포를 富山浦라 쓰고 있다. 태종 18년(1418)에는 경상좌도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가 조정에 올린 정계(呈啓)를 기록했는데 부산포에 상고(商賈 :장사)라 하여 유녀(遊女)라 하는 왜인 여자들이 머물면서 일본에서 오는 흥리선(興利船 :貿易船을 가리킴)이 올 때면 남자와 어울려 놀아날 뿐 아니라 타지역 포구 왜인까지 찾아들어 술을 마시며 바람 자서 배 떠날 날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연일을 머물러 있다고 했다. 그 왜인의 함부로운 말과 행동의 피해가 크다면서 왜관을 염포(鹽浦)와 가배량(加背梁)으로 분치(分置)해 줄 것을 장계로 올리고 있다.

부산포와 함께 제포(薺浦 :乃而浦라고도 함 지금의 진해시 웅천동)에 왜관이 설치된 것은 태종 7년(1407)의 일이다. 앞서 상고(商賈)라 하고 유녀(遊女)라 하는 왜인이 와서 함부로운 말과 행위를 하여 풍기를 문란케 했다는 것은 이곳에 왜관이 선 뒤가 된다.

왜관을 설치한 것은 왜구를 유화(宥和)하기 위한 일이지만 그 뒤에도 왜구는 끊이지 않았고, 그 왜구가 富山浦로 잡혀들고 富山浦에서 이쪽의 호위(護衛) 아래 떠난 왜인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돼 있다. 일본 사신이 부산포로 들어오고 부산포에서 조선 조정에 헌상(獻上)할 진상물(進上物)이 올려오고 또 이쪽에서 저쪽으로 회례(回禮)로 나간 것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모두 부자 부의 富山浦라 했다. 이 같은 富山浦는 앞서 말한 그대로 富山部曲에서 온 富山으로 여겨진다.

부산포(富山浦)가 부산포(釜山浦)로
 
부산포란 기록은 예종(睿宗) 원년(1469)의 8월까지 富山浦라 썼다. 그런데 3월 뒤인 같은 해(1469)의 성종이 즉위한 뒤의 12월부터 부산포 첨절제사(僉節制使)라고 가마 부(釜)의 釜山浦로 바뀌었다. 그 뒤는 한결같이 가마 부(釜)의 釜山浦로 통일되어 간다. 그러니 예종이 11월에 승하(昇遐)하고 성종이 즉위한 뒤의 12월에 富山浦가 釜山浦로 바뀐다. 그런데 세조·예종 때의 《조선왕조실록》 편찬자로서의 대표는 신숙주(申叔舟)였는데 성종 때는 신승선(愼承善)으로 바뀐다. 편찬대표가 바뀌었다고 한 지역의 포구이름의 표기가 바뀔 수 있을까?

어쩌면 사관(史官)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관이 富山浦는 釜山浦라야 한다는 견해였고, 그 견해가 받아들여져 釜山浦가 된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을 지금에서는 헤아릴 수 없다 해도 성종 즉위 후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맨 먼저 釜山浦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사실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에 그려진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之圖)」가 보이고 있다. 《해동제국기》가 발간된 것은 성종 7년(1476)이지만 예조좌랑(禮曹佐郞) 남제(南悌)가 그 《해동제국기》를 위해 이곳을 답사한 것은 1474년이다. 그러니 《조선왕조실록》이 가마 부(釜)의 부산을 쓴 5년 뒤가 되는데도 《해동제국기》는 부자 부(富)를 쓰고 있다. 그러나 1481년에 발간된 《동국여지승람》 ‘동래현'의 산천(山川)을 밝힌 자리는 ‘釜山'이라는 산의 이름이 나온다.

부산과 부산진 釜山과 釜山浦

부산이라는 산의 설명에는 “동평현(東平縣)에 있다. 산이 가마(釜)꼴과 같아서 그리 이름했다. 그 아래가 곧 부산포(釜山浦)다.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다. 북으로 현(縣)과 떨어지기 21리(里)다.” 고 했다.

여기서 부산이란 산은 가마솥의 모양 같아서 가마 부(釜)가 되었다는 것과 그 부산은 동평현(현 부산진구·동구·영도구)안에 있고, 그 산 아래에 부산포와 항상 머물고 있는 왜인의 집이 있으며 동래현에서는 21리 떨어져 있는 곳이 된다. 그러면 부산이란 산 아래 있는 부산포에서 지금의 부산이란 지명이 생겼을텐데 그 부산이란 산은 어느 산이며 부산포란 포구는 어느 포구를 말했을까?

말의 순서에 따라 ‘釜山'이란 산 이름으로부터 살펴보면, 부산이란 산은 지금 동구 좌천동을 형성하고 있는 산인 증산(甑山)을 말한 것이다. 이 증산을 시루같이 생겼다 하여 시루(甑) 대(臺)라고도 한다. 1834년에 완성된 김정호의 청구도(靑邱圖)는 지금의 증산 자리에 ‘釜山'이라 적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905년에 작성된 「부산항 지도」(한국해양자료센터 한상복 님이 필자에게 제공해 준 지도)도 그 위치를 ‘釜山'이라 하고 그 정상에다 증대(甑臺)라 적고 있다. 산으로서의 부산은 《동국여지승람》이 기록한 그대로 동래현과 동평현이 합쳐져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1547)로 승격되기 이전은 부산이란 산이나 부산포란 포구는 동평현 지역에 속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동래현에서 21리(里) 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산진 釜山鎭

부산포에는 임진왜란 때까지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이 있었다. 지금의 좌천동 지역을 부산진(釜山鎭)이라 하는 것도 부산진첨사영의 진영(鎭營)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첨사영이 있을 때의 성이 부산진성으로 주위가 1,689척(尺) 높이 13척이었다. 성문 가까이까지 바닷물이 닿았다고 한다. 성의 남문 자리는 지금의 정공단(鄭公壇)의 외삼문 앞쯤으로 보고 있다. 그 부산진성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점령당하자 왜군이 종전의 성을 허물고 그들의 축성법으로 쌓은 것이 지금의 증산 정상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증산왜성이라 한다. 그때의 부산진첨사영은 임진왜란 뒤 지금의 자성대성(子城臺城)으로 옮겼다.

《동국여지승람》이 부산(산이름) 아래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다고 한 것은 왜관(倭館)으로 왜인들이 장사하러 와서 돌아가지 않고 머물던 집을 말한다. 그 왜관은 1476년에 발간된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之圖)」에도 지금은 좌천동과 범천동사이를 왜관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왜관의 실제 위치는 지금의 자성대 서북쪽으로 보고 있다.

이도 《동국여지승람》이 기록한 그대로 부산(산이름) 아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래부지(東萊府誌)》에서도 부산이란 산 이름이 나오는데 그 산을 설명하기를 《동국여지승람》과 같이 말하고는 그 산 아래 부산·개운(開雲) 두 진(鎭)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부산진은 임진왜란 후 지금의 자성대성으로 옮긴 부산진첨사영을 말했고, 개운포진은 왜란후 부산의 해방(海防)을 공고히 하느라 울산 개운포 만호영을 부산포로 옮긴 뒤의 일을 말한다.

《동래부지》가 1740년에 발간되었으니 부산이란 산 아래 부산진과 개운포진이 그 무렵에 있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동래부지》는 부산이란 산 아래 옛날에는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고 하고 있다.

왜관 따라 따라다닌 항거왜호는 1607년 지금의 수정동인 구관(舊慣 :古館이라고도 부름)으로 왜관을 옮겼으니 항거왜호도 1740년 《동래부지》가 발간될 때는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항거왜호가 있었다고 한 기록 또한 맞아들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에서 지금의 좌천동의 증산(甑山)이 부산이란 지명이 굳어지기 전의 부산이란 산이었고, 그 아래 부산포와 부산진 그리고 항거왜호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부산, 산이름이 지명으로
 
부산이란 산 아래의 포구라 하여 부산포라 하고 부산이란 산 아래 있는 수군(水軍) 진영(鎭營)이라 하여 부산진이라 하다보니 부산이란 산 아래 지역이 절로 부산이라는 지역이자 땅의 이름이 되어갔다.

‘부산에 간다'하면 종전에는 부산이란 산으로 간다는 말이 되었지만 지역의 지명으로 바뀌어 가자 부산포와 부산진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말이 되었다. 그런 가운데 부산이란 산과 산 아래 지역의 혼돈을 피해, 산 이름은 서서히 쓰이지 않게 되고, 쓰이지 않으니 그 산이름은 잃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산은 분명히 있는데 그를 말할 이름이 없고보니 산의 모양이 시루와 같다 하여 시루 증(甑)의 증산이 되고, 그리 높지 않아 그곳으로 올라 경관을 바라보기 좋으니 ‘시루대' 또는 ‘증대'(甑臺)라 하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이 부산이란 산을 말하기를 산의 모양이 가마솥(釜)과 같아서 그리 이름하였다고 했는데 지금의 증산이 실제 가마솥 모양인가? 혹들 가마솥과 시루는 같은 용도에 쓰이기 때문에 그리 말했을 것이라 하지만 부산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때의 산은 시루 모양은 아니었을 것이다.

위가 도두룩하게 솟은 곳이 있는 산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임진왜란 때의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에서 보는 그런 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가마솥 모양의 산이 임진왜란 때 침입한 왜군이 그들의 축성법에 따라 성을 쌓느라 산꼭대기를 깎아내린 것 같다. 그들의 축성법이란 성 둘레를 둥근형으로 잡아오른 맨 위의 정상에 장대(將臺)를 올릴 때는 삼지환(三之丸), 이지환(二之丸), 본환(本丸)으로 둘러 층층의 둔하계단식(遁下階段式)으로 쌓아 올렸다. 그러니 맨 꼭대기 지면은 평면으로 깎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축성법은 자성대왜성이나 동래 증산의 왜성이나 양산군의 물금과 호포 사이의 낙동강가 증산왜성이 같은 꼴이다. 그렇게 산꼭대기에 쌓인 장대가 무너지면 성터는 시루모양이 된다. 시루 증(甑)의 증산이란 이름을 가질 만도 하다.

좌천동의 옛 부산을 증산으로 기록한 것은 「부산진성지도(釜山鎭城地圖)」에서 처음 볼 수 있다. 그 「부산진성지도」에 정공단(鄭公壇)이 기록돼 있는데 정공단은 1766년에 설단(設壇)되었다. 그러니 그 지도는 1766년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 이전인 1740년 발간의 《동래부지》에서는 증산이라 하지 않고 부산(산 이름)이라 했다. 최근 입수한 규장각 소장 「釜山鎭地圖」는 오늘날의 증산자리에 釜山故基(부산고기)라 기록하고 있다. 부산고기란 말은 부산 옛터란 말이다.

이러한 여러 사실로 보아 부산(地名)의 근원은 부산(山名)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산은 본래가 조그마한 산 아래의 바다, 그 바다와 연관된 부산포와 부산진에서 발전해 간 것은 사실이다. 그 발전은 또 우리나라 제1항구로 발전해 갔다.

국방의 요새

현(縣)의 위치에 놓였던 동래

고려를 이어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부산포를 다스린 동래현은 울주군(蔚州郡)의 속현(屬縣)으로서 독립된 행정력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태조 5년(1396) 8월에 왜선(倭船) 1백20척이 경상도를 침략하여 병선(兵船) 16척을 빼앗고 수군 만호(萬戶)를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동래·기장(機張)·동평성(東平城)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한해 뒤인 태조 6년(1397) 조정에서는 동래현에 군사가 주둔하는 진(鎭)을 설치했다. 이 진의 설치로 진의 장수인 병마사(兵馬使)가 배치되고, 그 병마사(현 제도로는 육군이 됨)가 동래현의 행정관인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비록 현이기는 하지만 행정적인 독립성을 가지게 되었다.

태종 2년(1402) 2월에는 왜구가 동평현의 부산포를 침략하여 천호(千戶)와 사졸(士卒) 10여명을 살해했다. 태종 5년(1405)에는 양주의 속현이 되어 있던 동평현이 동래현의 속현이 되어 동래현 판현사의 행정적 지시를 받게 되었다. 태종 7년(1407) 7월에는 왜인(倭人)들이 내왕하는 도박처(到泊處)를 경상좌도와 우도의 도만호(都萬戶)가 주둔하고 있는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 :齊浦라고도 함)에 한정시켰다.

이것이 왜관(倭館)설치의 시작이 되는데 이 두 포구에 도박처를 정한 것을 왜관 이포(二浦)시대라 일컫는다. 이 때의 부산포 도박처는 지금의 자성대(子城臺) 서북쪽으로 보고 있다.

태종 9년(1409)에는 어찌된 일인지 동평현이 양주의 속현으로 다시 돌아 갔다. 태종 14년(1414) 7월에는 일본에 대장경을 보내면서 왜구를 회유하는 한편 세종 5년(1423)에 병마사(兵馬使)를 첨절제사(僉節制使)라는 이름으로 바꾸자 첨절제사가 판현사를 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동래현은 군사적 요충지라 하여 타지방은 문관(文官)의 현감(縣監)을 임명했는데 동래현은 군관(軍官)이 계속 현령 노릇을 했다. 세종 10년(1428)에는 양주 속현으로 돌아갔던 동평현이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니 동평현의 행정은 동래현의 판현사 지시를 따라야 했다. 이 동평현이 다시 동래현의 속현이 됨으로써 동래현은 현의 위치에 있었지만 단독적인 행정력이 보다 높아졌다. 이 뒤 얼마가지 않아 판현사(判縣事)를 현령(縣令)으로 고쳐 문관직이 현감이 되었다. 이는 세종 25년(1443) 대마도와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고 외교사무가 주된 임무가 되어갔기 때문이었다.

이 때부터 부산은 외교의 요지이자 군사의 요충지가 되어갔다.

군사는 이즈음 말하는 육군과 해군(수군)이 별도의 체계 아래 독립된 진영(鎭營)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초기의 수군제도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상도 육군의 배치표를 보면 경상도에는 여섯 진(鎭)이 있는데 그 하나에 동래진(東萊鎭)이 있다. 이 동래진은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가 군관장(軍官長)이 되어 있다. 병력으로는 군관(軍官)이 3백명 수성군(守城軍)이 80명 도합 3백80명이다.

경상도의 수군(水軍)도 기록돼 있는데 그 수군진(水軍鎭)은 21개처이다.

그 가운데 경상좌도 수군의 사령부 격인 경상좌도 수군 도안무처치사(慶尙左道水軍都安憮處置使)가 부산포(富山浦)에 있었다. 이 경상좌도는 지금의 경상남·북도를 한성(서울)에서 보아 낙동강 왼쪽에 해당되는 동쪽지역을 좌도라 하고 오른쪽에 해당되는 서쪽지역을 우도라 하였다. 그러니 경상좌도의 관할은 부산에서 동해안으로 올라 경상북도와 강원도 접경까지의 해역(海域)이 된다.

이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 관장의 부산포에는 병선(兵船) 33척에 수군이 1천7백79명이다. 그 휘하에 지금의 부산지역에 있었던 만호영(萬戶營)으로는 해운포진(海雲浦鎭)과 다대포진(多大浦鎭)이 있었다. 해운포진에는 병선 7척에 수군이 5백89명이고, 다대포진에는 병선 9척에 수군 7백23명이다. 이로 보아 세종조 때 지금의 부산에 있었던 육군과 수군의 총수는 3천4백37명이나 된다. 인구수가 적었던 조선초에 이미 이와 같은 병력을 가졌다면 국방의 요새지라 할만하다.

이 무렵의 경상도는 육지의 군사보다 바다를 지키는 군사가 월등으로 많았다. 군사 수만 해도 경상도 육군은 2천8백67명인데 수군은 육군의 5배가 넘는 1만6천6백2명이다. 경상도는 그 만큼 왜구를 막기 위한 해방(海防)에의 임무가 컸다.

그런데 부산에 언제부터 수군첨절제사가 관장하는 수군진영이 형성되었을까? 그에 대해서는 명백한 기록이 없으나 조선초인 태조 3년(1394)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경상도에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는 그때의 일로 여겨진다. 그 처음의 부산포(富山浦)의 첨절제사영은 감만포(戡蠻浦)에 두었다는 견해도 있고 오늘날의 좌천동 바닷가인 부산포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수군 창설 때 부산에 둔 수군첨절제사가 관장하는 포소(浦所)에 대해서는 아직 기록에 접할 수 없으나 세종때는 부산(富山)에 도안무처치사(都安憮處置使)가 있고, 그 휘하에 11개 만호영(萬戶營)이 있다. 그 만호영을 열거하면 동래의 해운포(海雲浦), 동래의 다대포, 기장(機張)의 두모포(豆毛浦), 울산의 개운포(開雲浦), 울산의 서생포(西生浦), 울산의 염포(鹽浦), 장기(長기 )의 포이포(包伊浦 혹은 加嚴浦), 흥해(興海)의 통양포(通洋浦 혹은 豆毛赤浦), 영덕(寧德)의 오포(烏浦), 경주의 감포(甘浦), 영해(寧海)의 축산포(丑山浦)다.

그 동안 여러 수군 포진(浦鎭)의 병사는 만호(萬戶)의 지휘 아래 병기(兵器)와 양식을 병선(兵船)에 싣고 항상 배 위에서 대기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수군은 성을 쌓아 보류를 삼는 성보(城堡) 같은 것을 갖추지 않았다.

육지의 군사는 육지에서 지키고 싸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니 수상에서의 방어전략은 수군이 담당하고 적이 육지로 상륙하면 육군이 담당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원칙이기는 하나 적을 맞았을 때 수군이 용전(勇戰)을 않고 피하는 경우가 있었다. 수군이 피하면 적은 바로 육지로 오르니 싸움은 육군의 몫이 되었다. 그러면서 수군은 항상 수상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배의 파손과 노후(老朽)가 심했다. 계속된 수상근무로 병사들의 피로도 더했다.

그런 여러 실정을 감안하여 성종 15년(1484)부터 수군도 성보(城堡)를 축조하게 되었다. 수군도 기지(基地)를 육지에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동래지방 포진(浦鎭)도 성을 쌓게 되는데 성종 21년(1490) 8월에는 부산포의 부산진성이 완성되고, 같은 해의 11월에는 다대포성이 완성되었다. 그때 쌓은 성은 임진왜란때 모두 허물어졌지만 본래의 부산진성은 둘레가 1천6백89척(尺) 높이 13척으로 그리 넓지 않았으나 견고한 성이었다. 바닷물이 남문 부근까지 와 닿아 배를 내려 바로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 남문을 지금의 정공단(鄭公壇 :동구 좌천동) 입구로 보고 있다.

다대포 만호영은 조선조초에는 장림포(長林浦)에 있었다고 한다. 성종때 쌓은 성은 지금의 다대포로 포진(浦鎭)이 옮겨진 뒤 성이 쌓여졌을 것이다. 지금의 다대초등학교를 중심해서 있었던 성은 임진왜란 이후에 쌓은 성이었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이관(移管)
 
태조때 부산포에 있었던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慶尙左道都安憮處置使營이 바뀐 이름)이 언제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옮겼는지는 그 기록을 접할 수 없다. 《동국여지승람》의 울산군 관방(關防)조에 의하면, 좌도수군절도사영을 “개운포에 있다. 동래현 부산포에서 옮겨왔다."고 했을 뿐이다. 혹들 태종때 옮겨졌다는 말도 있으나 《세종실록》에 좌도수군도안무처치사의 소재를 동래 부산포로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세종 이후에 이관(移管)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8년(1477) 윤2월에 다시 좌수영을 개운포에서 부산포로 이관할 문제가 논의되고 있다. 그 이전문제는 울산에 병영(兵營 :陸軍)과 수영(水營 :海軍)이 함께 있어 주민의 부담이 과중하니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반대의견도 적지 않다. 그 반대의견은 부산으로 이전하면 울산쪽이 허술해진다는 점과 부산은 왜인이 왕래하고 있으므로 주장(主將)이 부산에 있으면 군사에 관한 허실(虛實)이 왜인에 탐지되기 쉽다는 점이다.

그 이외에도 좌수영 소관의 재산 이동이 곤란한 점과 부산포가 지리적으로 협소하다는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이는 조정에서 의논한 바를 《성종실록》이 기록하고 있지만 그 때의 실정으로서는 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좌수영을 울산 개운포(開雲浦)에서 부산으로 다시 이전하여야 한다는 조정에서의 의논은 성종 8년(1477)에 있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뒤 삼포왜란(三浦倭亂 :1510년 齊浦·釜山浦·鹽浦의 왜관 왜인들이 일으킨 폭동) 직전에도 좌수영을 부산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문제가 나오고, 삼포왜란이 있은 이 후에도 이전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왜관을 둘 때는 왜관을 다스리기 위해 수군진영이 있는 곳에 왜관을 두었지만 막상 왜관을 두고보니 왜관 왜인이 우리의 군사 기밀(機密), 그 기밀 가운데도 우리 군사의 허실(虛實)이 탐지 당하는 불리함이 있었다.

그런데 개운포의 좌수영은 마침내는 해운포(동래 南村 :현 수영)로 옮겼다. 그런데 옮긴 해가 어느 해임을 알 수 없다. 《좌수영지(左水營誌)》도 “울산부 개운포에서 동래부 10리 밖의 남촌으로 옮겼는데 어느 해임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울산읍지(蔚山邑誌)》도 《징비록(懲毖綠)》도 좌수영을 옮긴 것을 선조대(宣祖代)라 했을 뿐 그 햇수를 밝히지 않았다. 《문헌비고(文獻備考)》만이 선조 25년이라 했다.

이 《문헌비고》가 맞을 것도 같다. 선조 25년(1592)이라면 임진왜란이 그 해 4월에 일어났다. 그러니 왜란이 일어났는데 좌수영을 옮기라는 지시를 정부가 내릴 리도 만무하다. 지시를 내렸다면 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월에서 3월 사이다. 그래서 이전을 하는 도중에 전란이 일어나서 경상좌수영군은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임진왜란 이후의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 이전 경위
 
현(縣)의 위치에 놓여 있던 동래현은 일본사신이 왕래하는 길목이 되어 행정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하여 1547(명종)년 정부는 동래현을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시켰다. 행정기구도 확장하여 도호부 부사(정3품 :일반도호부는 종3품)아래 보좌관인 판관(判官 :종5품)을 두었다. 동평현도 이때 동래도호부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부사가 전사하고 동래(현 부산시)가 왜적의 점령 아래 들어가자 정부는 왜적이 처음 발디딘 자리요 적을 막아내지 못한 지역이라 하여 종전의 도호부를 현으로 낮추어 현령(縣令)이 임명되었다. 현령도 임진·정유왜란 당시는 임지인 동래에 부임하지 못하고 양산 통도사 또는 경주에서 현무(縣務)를 보았다.

1599(선조 32)년에는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당상(堂上)의 무관이 부사에 임명되었다. 1601년에는 일본측에서 강화교섭을 해 옴으로 외교상의 체면을 생각하여 문관을 부사로 삼았다.

임진·정유왜란 7년을 거치자 민생이 극도로 피폐하였다. 전후의 복구는 엄두도 못낼 지경이었다. 정부도 언제 다시 쳐들어 올지도 모를 왜적에 대비하여 군사제도와 군(軍)의 혁신을 꾀했으나 민생이 어려운 가운데 민중이 따라주지 않았다. 군사제도와 군의 재편성은 시일을 요하고 있었다.

왜적침입의 문호가 된 부산지역만큼은 하루 빨리 방어체제를 갖추어야 했지만 해이(解弛)된 민심을 돌이키는데 시일이 필요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전투에 나서지 못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복구는 처음에서 시작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은 부산포에서 부산첨사영과 함께 재편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재편성이 언제 이루어졌는지, 오늘날의 수영에 좌수영이 언제 돌아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경상좌수영을 1611년에는 부산포의 부산진성(임진왜란 이후 부산진첨사영은 현재의 범일동 자성대로 옮겨져 있었다)에 옮기려 했다. 이를 볼 때 경상좌수영은 그때까지 부산진성에서 재편성 과정을 밟으면서 점차적으로 수영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렇게 경상좌수영을 오늘날의 자성대에 두려는 것은 경상좌수영의 정위치인 오늘날의 수영은 수영강이 물길에 묻혀 병선(兵船)의 출입이 불편하다는 것과 부산첨사영인 부산진성과 거리가 멀어 만일의 경우 유기적인 연락이 곤란한 점이었다.

그러나 그때 왜관이 두모포(현 수정동 :수정동에 왜관이 선 것은 1607년)에 있었다. 좌수영이 부산진성에 있게 되면 왜관과 가까웠다. 가까우니 좌수영의 군사기밀이 왜관 왜인에 탐지될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성에서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은 재편성되어 오늘날의 수영으로 옮겨갔다. 옮겨간 수영의 좌수영은 수영강의 홍수로 말미암아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수군의 병선이 통하지 않을 경우는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기 어려웠다. 1636(인조 14)년 좌수영을 오늘날의 남구 감만포(戡蠻浦)로 옮겼다.

그런데 막상 감만포로 좌수영을 옮기고 보니 지금의 동구 수정동에 왜관(두모포왜관)이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서 그 왜관에 좌수영이 가진 군사상의 기밀이 누설될 우려가 있었다. 1652(효종 3)년에 동래 남촌의 옛터로 좌수영을 다시 옮겼다.

그후 1895(고종 32)년 7월에 군제개혁으로 수영이 폐지될 때까지 243년 동안 계속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은 지금의 수영에 있었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구성
 
좌수영에는 영의 주장(主將)으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줄여서 경상좌수사)가 있었다. 경상좌수사는 정3품 무관직이었다. 좌수사의 부관으로는 정4품 무관의 우후(虞侯)가 있었다. 그 이외 대솔군관(帶率軍官) 6명, 화사(畵師) 1명, 사자(寫字) 1명, 영리(營吏) 30명, 진무(鎭撫) 37명, 통인(通引) 25명, 관노비(官奴婢) 10명, 사령(使令) 26명, 군솔(軍率) 23명이 있어 좌수사의 공사 생활에 사역(使役)되었다.

1652년 감만포에서 남촌의 옛터로 좌수영이 옮겨올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좌수영성은 석축(石築)으로 둘레 1,193보(步 :9,190여척) 높이 13척, 성첩(城堞) 375타(?)·옹성(壅城) 3곳, 치성(雉城) 6∼7곳을 갖추고, 동서남북으로 각각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을 영일문(迎日門)·서문을 호소문(虎嘯門)·남문을 주작문(朱雀門)·북문을 공진문(供辰門)이라 했다. 각 문마다 2층으로 된 문루(門樓)가 있었다. 특히 남문 밖 양쪽으로는 돌로 조각한 박견(拍犬 :조선개)이 놓여 있었다.

성문은 일정한 시간에 폐문루(閉門樓)인 관해루(觀海樓)에 달아둔 북을 울리는 것을 신호로 열고 닫았다.

지금은 남구 수영동에 성지 얼마가 남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고 아취형으로 된 남문은 원래는 남구 광안동 286-1번지에 있었으나 한때는 수영초등학교로 옮겨져 교문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남구의 수영공원 입구에 박견(拍犬)과 함께 옮겨져 지방 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좌수영성 안에는 수사(水使)가 집무하는 수사영인 상영(上營)과 우후가 집무하는 중영(中營)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다.

중요 시설물로는 객사(客舍)인 영파당(寧波堂)과 동헌(東軒)인 관운당(管雲堂)·우후의 집무처인 세검헌(洗劍軒)·비장청(裨將廳)인 백화당(百和堂)·원문(轅門)인 수항루(受降樓)·주사대변소(舟師待變所)인 척분정(滌?亭)·주사장대(舟師將臺)인 연무정(練武亭)과 군기고·화약고·호고(戶庫)·보군고(補軍庫)·영수고(營需庫)·공고(工庫)·관청고(官廳庫)·지창(紙倉)·수성청(守城廳) 등 많은 관아와 창고가 있었다.

성 밖에는 군사들에게 사격훈련을 시키는 어구정(禦寇亭)과 매년 10월 1일 수사가 직접 무사들에게 무예를 시험하는 장대(將臺)가 있었다. 이 장대에서 무예시험이 합격되면 좌수사 명의로 된 합격증을 받아 선달(先達)이 되었다.

이 밖에도 평상시에 병선을 정박시키기도 하고, 풍랑이 심할 때 병선을 대피시키기도 하는 상영선소(上營船所)와 중영선소(中營船所)가 있었고, 그 주위에는 적을 탐망(探望)하는 첨이대(當夷臺)와 망경대(望景臺)가 좌우에 있었다. 그 첨이대는 지금 남구 민락동의 백산(白山)이 바다로 향한 정상에 있었고, 망경대는 지금의 광안해수욕장의 서쪽에 있었으나 60년대에 헐리어 시가지가 되었다. 어구정과 장대는 지금의 수영중학 위치쯤에 있었다.

경상좌수영이 관할하는 각 지역에는 병기고(兵器庫)인 병고(兵庫)와 조선(造船) 목재조달을 위해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 봉산(封山)이 있었다. 병고는 좌수영 관할 아래 있는 7진(鎭)과 기장·울산 등지 27개소에 두었고, 봉산은 동래의 상산(上山 :?山)과 동변산(東邊山)·서변산(西邊山)·운수산(雲水山)과 다대포의 몰운산(沒雲山)·두송산(頭松山)·금치산(金峙山)이 봉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기장·울산·경주·장기·영일·흥해·밀양·양산 등지에도 봉산이 많았다.

임진왜란 이후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의 여러 포진(浦鎭)들

경상좌수영 관내에는 1개의 첨사영(僉使營)인 부산진첨사영과 10여개의 만호영(萬戶營)인 동래 다대포영·동래 해운포영·동래 서평포영(西平浦營)·기장 두모포영(豆毛浦營)·울산 개운포영(開雲浦營)·울산 서생포영(西生浦營)·울산 염포영(鹽浦營)·장기 포이포영(包伊浦營)·경주 감포영·영덕 오포영(烏浦營)·영해 축산포영(丑山浦營)·흥해 칠포영(漆浦營)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 다대포영이 첨사영으로 승격되고 해운포영·염포영·오포영 등에 폐지되고 임진왜란 이후는 2개의 첨사영과 8개의 만호영이 있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에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해상방위의 요충지인 부산지방에 임진왜란 이후 두모포영·개운포영·포이포영·감포영·축산포영·칠포영들이 옮겨와서 군비를 갖추었다. 경상좌수영이 관장하는 전 수군병력이 부산에 집결된 셈이었다. 그러니 부산은 국내 최대의 수군기지가 되었다.

하지만 부산 연안에 살던 지방민들이 입는 민폐는 컸다. 그들 수군은 각 지역에서 온 남정들이었다. 그 남정들은 남정들 끼리가 되어 거칠었다. 그 거칠음에 시달려야 했다. 각 진영의 수군들은 주어진 병선으로 군비염출이란 이름 아래 고기도 잡고, 짐도 실어 나르고, 소금도 구웠다. 그만큼 연안 지방사람들의 생업은 주둔 수군들에 빼앗겨야만 했다.

조선 후기에 부산 연안에 있었던 진영(鎭營)

(1) 부산첨사영(釜山僉使營)

부산첨사영은 임진왜란 당시까지는 현재의 동구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을 중심한 위치에 있었으나 임란 이후는 동구 범일동에 있는 자성대성으로 옮겼다.

이 부산첨사영은 경상좌수영의 막하(幕下) 거진(巨鎭)으로 무관 정3품 당상관이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줄여서 첨사)가 되었다. 첨사영에는 군관(軍官) 36명, 진리(鎭吏) 30명, 지인(知印) 17명, 사령(使令) 22명, 군뢰(軍牢 :군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 15명이 있었다.

이 첨사영 소속 병선(兵船)으로는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伺候船) 4척이 있었다. 이 가운데 전선에 따른 병력은 감관(監官) 1명, 선장 1명, 지구관(知?官) 4명, 도훈도(都訓導) 1명, 토사부(土射夫) 36명, 교사(敎師) 10명, 포수(砲手) 48명, 능로군(能櫓軍) 290명, 분방사부(分防射夫) 112명, 방군(防軍) 1,640명이었다. 그렇다고 이 군사는 상시에 항상 갖추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2) 다대첨사영(多大僉使營)

다대첨사영은 현재의 사하구 다대동의 다대초등학교 위치에 있었다. 원래는 종4품의 만호(萬戶)가 수장(守將)이 되는 만호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첨사영으로 승격하여 정3품의 당상관이 첨사로 임명되었다.

1654(효종 5)년에는 첨사가 국마장(國馬場) 목장을 감독하는 감목관(監牧官)을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1676(숙종 2)년에 그 겸임이 폐지되었으나 이듬해 다시 겸임하게 되었고 1751(영조 27)년에는 다대진을 왜적이 침범하는 첫 길목이 된다 하여 다대첨사를 변지구이력과(邊地區履歷?)라 하여 매우 중요시하였다. 첨사 밑에는 군관 14명, 진리(鎭吏) 24명, 지인(知印) 13명, 사령(使令) 10명, 군뢰(軍牢) 8명이 있었다.

첨사영은 둘레 1,806척, 높이 13척의 돌로 쌓은 성으로 둘러 쌓였으며 동서남북으로 성문과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 문루를 패인루(沛仁樓)·서문 문루를 영상루(迎爽樓)·남문 문루를 장관루(壯觀樓)·북문 문루를 숙위루(肅威樓)라 하였다.

성 안에는 객사인 회원관(懷遠館)과 동헌인 수호각(睡虎閣)을 비롯하여 군기소인 청상루(淸霜樓)·관청(官廳)·금산소(禁山所)·목소(牧所)·공방소(工房所)·도훈도소(都訓導所)·지통소(紙筒所)·제향소(祭享所)·등 많은 관사와 대동고(大同庫)·유포고(留布庫)·대변소(待變所)·진창(鎭倉) 등 창고가 있었다.

성 밖에는 주사(舟師)의 관문(官門)인 진남루(鎭南樓)와 주사의 대변소인 진남정(鎭南亭)이 있었다. 당시의 객사 회원관은 주위의 벽도 문도 없어진 그대로 기둥과 지붕만 복원되어 현재 다대동의 몰운대 정상에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다대진 직속 병선으로는 전선 2척, 병선 2척, 거북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다. 전선 2척에 딸린 군사는 감관 1명, 선장 1명, 지구관 4명, 교사 10명, 토사부 36명, 포수 48명, 능로군 290명, 분방사부 212명, 방군 1,600명에 이르렀다.

다대진에 속해 있던 방리(坊里)는 서평리(西平里)·장림리(長林里)·구서평(舊西平)·신평리(新平里)·감천리(甘川里)·암남리(暗南里)·당동(堂洞)·고다대(古多大)·목장리(牧場里)·대치리(大峙里)·엄광리(嚴光里)·구초량(舊草梁)·감만리(戡蠻里)·용당리(龍堂里)·석포리(石浦里) 등 15개 리가 있었다. 다대진은 이들 방리에 대해 제반 공역(公役)을 부과하고 군정(軍丁)을 징발했다.

(3) 서평포만호영(西平浦萬戶營)

서평포만호영은 지금의 사하구 구평동에 있었다. 종9품의 무관이 수장(守將)이 되는 가장 작은 진보(鎭堡)였다. 임진왜란 후 다대진 성내로 이전하였다가 1668년(현종 9) 다대진성이 비좁다는 어사의 보고에 따라 옛 진영 자리 서평으로 돌아갔다.

그 뒤 1677년(숙종 3)에는 무관 종 4품의 만호가 수장이 되었다.

서평포만호영은 다대 직할의 만호영으로 만호 아래 군관 8명, 진리 6명, 지인 3명, 사령 2명이 있었다. 보유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전선 1척에 딸린 병력은 1,100명이었다.

(4) 두모포만호영(豆毛浦萬戶營)

두모포만호영은 원래 기장(機張)에 있었으나 1629년(인조 7)에 부산포로 옮겨왔다가 1680년(숙종 6)에 옛 왜관(뒷날 두모포왜관이라 했음) 자리에 해당하는 현재의 동구 수정동으로 옮겼다. 종4품의 무관이 만호가 되었다. 만호 아래 군관 8명, 진리11명, 지인 10명, 사령 5명이 있었다.

병선으로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고, 전선에 딸린 군사는 약 1,100명이었다.

《동래부지》의 동평면(東平面)에 두모포리(豆毛浦里)가 있다. 이는 기장 두모포에서 이전해 온 두모포만호영에서 온 동리 이름이다. 두모포만호영이 오기 전에 있었던 왜관을 『두모포왜관』이라 한 것도 그 왜관자리에 두모포만호영이 들어섰기 때문의 이름이었다.

(5) 개운포만호영(開雲浦萬戶營)

개운포만호영은 원래 울산 개운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현 동구 좌천동)로 이전하였다. 수장(守將)은 무관 종4품의 만호였다. 만호 밑에 군관 18명, 진리(鎭吏) 11명, 지인(知印) 10명, 사령(使令) 5명이 있었다. 병선으로는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이 전선에 딸린 병력은 약 1,100명이었다.

(6) 포이포만호영(包伊浦萬戶營)

포이포만호영은 원래 장기(長?)의 포이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뒤 동래 남촌(현 수영구 민락동)으로 이전하였다.

본영의 수장은 종4품의 만호였다. 그 만호 아래 군관 18명, 진리 10명, 지인 9명, 사령 2명이 있었다. 보유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다. 전선에 딸린 군사는 약 1,100명이었다. 《동래부지》의 남촌면에 『포이포리』라는 동리명이 나온다. 이는 포이포만호영이 이곳으로 오면서 그 이름을 가져왔기 때문에 포이포만호영이 있었던 자리를 포이포리라 했다.

(7) 감포만호영(甘浦萬戶營)

감포만호영은 원래 경주 감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뒤 부산포에 이전하였다가 그 이후 동래 남촌인 지금의 민락동으로 옮겼다. 수장(守將)은 무관 종4품 만호였다. 보유 병선이나 전선(戰船)에 따른 군사는 딴 만호영과 비슷했다.

《동래부지》의 남촌면에 『감포리』가 있는 것은 감포만호영이 이곳으로 올 때 제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그 만호영이 있었던 동리를 감포리라 한 것이다.

(8) 축산포만호영(丑山浦萬戶營)

축산포만호영은 원래 영해(寧海)의 축산포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부산포로 이전하였다가 뒤에 감만이포(戡蠻夷浦 :현 남구 감만동)로 옮겼다. 만호의 위계나 보유 병선과 병력은 딴 만호영과 비슷했다.《동래부지》의 남촌면에 『축산리』이 있는 것은 영해에서 온 축산만호영에 말미암은 것이다.

(9) 칠포만호영(漆浦萬戶營)

칠포만호영은 원래 흥해(興海)의 칠포에 있었으나 임란 이후 부산포에 이전하였다가 뒤에 동래 남촌(현 수영구 민락동)으로 옮겼다. 만호의 위계나 보유 병선과 병력은 딴 만호영과 거의 같았다.

《동래부지》의 남촌면에 『칠포리』가 있는데 이는 칠포만호영이 옮겨와서 있었던 자리를 그리 이름하게 된 것이다.

(계속)

출전 : 부산라이프 부산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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