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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14:41
분 류 사전3
ㆍ조회: 1398      
[현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민족)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
     
1945년 8·15광복과 함께 조직되었던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설립]

약칭 ‘건준(建準)’이라 한다. 1945년 8월 초 일본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당시의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는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일어날지도 모를 우리 나라에 있는 일본인들에 대한 여러 가지 문제와 앞으로의 한일관계의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일본과 협력할 수 있는, 신망 있는 우리 나라의 민족지도자와 협력관계를 맺고자 총독부정무총감 엔도(遠藤隆作)를 앞세워 협상대상자를 찾았다.

그 대상자 중 송진우(宋鎭禹)는 요청을 거부하였고, 여운형(呂運亨)이 그 제의를 받아들여 8월 15일 오전 8시를 전후하여 엔도의 관저에서 협상을 가졌다. 엔도는 자주적인 국내치안유지와 일본인들의 퇴거 때까지 그들의 생명과 재산보호 등을 요청하였고, 여운형은 ① 정치·경제범의 즉시 석방, ② 3개월간의 식량 보급, ③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④ 학생훈련과 청년조직에 대한 간섭 배제, ⑤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사업에 조직, 동원하는 것에 대한 간섭 배제 등 5개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타결되자 여운형은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동시에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 총무부장 최근우(崔謹愚), 재무부장 이규갑(李奎甲), 조직부장 정백(鄭栢), 선전부장 조동호(趙東祜), 무경부장(武警部長) 권태석(權泰錫) 등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여운형은 8월 16일 오후 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경과 보고연설회를 개최하였고, 안재홍이 한·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함으로써 건국준비의 대업을 시작하였다. 서울 풍문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준비사업 선전공작과 치안활동을 개시하였다. 8월 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 건국공작 5개 항을 제시하였다.

즉, ① 어느 기간까지 자발적으로 자치수단을 강구하여야 한다. ② 자치수단은 가장 신속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하여야 된다. ③ 자치수단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이어야 한다. ④ 모든 공사기관의 기능을 확보하기 위하여 소속인원은 현 직장을 엄수하여야 한다. ⑤ 각 원은 각기 직장에서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공작에 협력하여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다만 자치기관의 명칭은 ‘건국○○읍(면)공안대’로 하되, 각기 지방유지가 중심이 되어 청년층·학도 등을 동원하든지, 종래의 경방단(警防團)을 개편, 조직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활동]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全朝鮮職域自治本部)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張槿)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丁相允), 총무부장에 송병무(宋秉武)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9월 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을 보면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개 항을 내세웠다.

위원회는 8월 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세워두었으나, 광복 이전의 여러 정당·정파 이외에 새로이 한국독립당·대한여자국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 등의 난립으로 행동통일이 어려웠다. 한편 위원회내에서는 건국동맹(建國同盟)과 마찰을 빚었으며 극좌파가 분열을 획책하였다.

우파민족주의 진영에서는 송진우·김성수(金性洙)·김준연(金俊淵) 등을 중심으로 한 국민대회준비위원회파와 김병로(金炳魯)·백관수(白寬洙)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강화·확대파로 분파되었다. 그러나 우익진영의 노력으로 위원회는 “정권은 전국적 인민대표회의에서 선출된 인민위원으로서 전취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내고 전국대회의 소집을 결정하였으나, 박헌영(朴憲永)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세력의 최용달(崔容達)·이강국(李康國) 등의 반대공작으로 대회소집은 거듭 지연되었다.

전국대회의 제1차 소집일자를 8월 18일로 정하고 480명을 선정, 통지하였으나 지연되었고, 23일 전국적인 확대회의 대신 위원회가 추천하는 명사의 회합으로 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25일 62명의 명단을 김병로·백관수·이인(李仁)·김약수(金若水) 등이 선정하였으나, 위원회에서는 독자적으로 73명의 명단을 첨가하여 135명의 회합으로 바꾼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였다. 이 135명의 회합을 9월 2일에 소집하기로 예정을 잡았다가 다시 4일로 연기하는 곡절을 겪었다.

[해체경위]

그러나 위원회는 9월 1일에 부위원장 안재홍이 결별을 선언하고 조선국민당을 결성하였고, 정백·고경흠(高景欽) 등 간부들이 위원회의 승인도 없이 경성지부를 결성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9월 4일 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려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는 등 집행위원회의 개편이 있었다. 개편 이틀 후인 9월 6일 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서울 경기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인민대표위원에 이승만(李承晩)·여운영·허헌·김규식(金奎植)·김구(金九)·김성수·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申翼熙)·조만식(曺晩植)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吳世昌)·권동진(權東鎭)·김창숙(金昌淑)·이시영(李始榮) 등 12명을 각각 뽑고, 〈조선인민공화국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위원회는 9월 7일 해체되고 9월 11일 그 조각을 마쳤다. 이 조각명단에는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상해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청에서는 10월 10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승인을 거절하는 성명을 포고하였다. 그리고 이승만마저 환국하여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呂運亨先生鬪爭史(李萬珪, 民主文化社, 1946), 夢陽呂運亨(呂運弘, 청하각, 1967), 資料大韓民國史 1(國史編纂委員會, 1968), 解放三十年史 Ⅰ(宋南憲, 成文閣, 1976).

<이정식>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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