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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0 (수) 01:2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98      
[현대] 부마민중항쟁 1 (부산)
유신체제하 197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1

관련문서

유신체제하 197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1
유신체제하 1970년대 부산지역 민주화 운동 2

1. 부마민주항쟁의 발생배경

1) 유신체제의 억압적 정치경제구조와 부산지역의 특수성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1979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그런데 여기서의 '특별'힘이란 박정희 군부독재 권력의 18년 철권통치가 막을 내렸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에서이다. 즉 1979년은 장기간에 걸친 군부독재의 탄압정치로 황폐화 되어 온 자유민주적 통치질서가, 그나마 그 외피로서 마지막 남아있던 형식 합리성(즉 제도 야당의 존재) 마저 최종적으로 유린되었던 그런 한 해였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민주주의가 개선 ·정상화될 어떤 정치적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된 말기적 반동의 해이기도 했다.

구태여 지적하자면 1979년 박정희 정권은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중이던 YH 여공들을 폭력으로 해산시킨 뒤 법원의 '신민당 총재단 직무정지 가처분' 판결과 함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시켜버렸던 것이다. 집권측은 이제 형식상으로도 야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폭거를 자행하였고, 마침내 그 것은 국민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의 발생배경은 근본적으로 유신 독재권력의 광범위하고 극단적인 억압구조 그 자체였다. 시위에 나선 많은 시민 ·학생들의 압도적인 구호가 '유신철폐'와 '독재타도'였다는 사실 또한 그 점을 명백히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항쟁이 발생한 근본적 배경 내지 원인이 '유신정권의 억압성'이라는 일반적 근거에 분명히 동의하면서도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발생배경과 계기를 따져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장장 18년간이나 계속된 박정희 군부독재 정권의 시대, 그 중 유신시절 만도 7년이나 되는데, 왜 하필 '79년 그 시점,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항쟁의 불길이 붙었는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기 때문이다.

이 의문을 풀어가기에 앞저 먼저 위에 언급한 1979년의 정치사적 두 사건, 즉 YH사건으로 대표되는 '인권말살'의 사건과 김영삼 제명파동으로 대표되는 '정치압살'의 사건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부마항쟁 직전인 '79년 8월과 10월에 각각 일어난 이 유신말기의 대표적 폭압사건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부마 민주항쟁의 보다 직접적인 발생배경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79년 8월, 회사의 부당한"폐업조처 철회와 정상가동을 요구하며 야당인 신민당의 당사에서 농성중이던 가발업체 YH무역의 여공 170여명을 경찰이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하여 강제해산시킨 사건이 곧 YH사건이다. 경찰의 폭력적 해산과정에서 여공 김경숙 양이 참혹하게 죽고 신민당 국회의원들과 신문기자까지 무차별로 구타·폭 행당하였으며, 신민당의 당사도 아수라장으로 짓밟혔다.

이 사건은 '70년대 후반 석유파동과 함께 불어닥친 불황으로 근로조건이 극도로 악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빚어진 노동자의 생존권 싸움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 사건이 결코 노동운동사에만 기록될 단순한 사건으로 묻힐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사건이 독재정권의 연장과 독점자본의 이익옹호를 위해 야만적으로 인권을 유린하던 박정희 유신정권의 폭력성-권력과 권위가 아닌, 말 그대로의 폭력성-을 만천하에 알리는데 기여함으로써,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건 신민당에는 대여투쟁의 명분을 강화시켜 주고 국민들에게는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식을 강하게 자극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소위 '중도통합론'으로 그동안 굴욕적인 대여 타협을 일삼던 이철승을 누르고 당권을 탈환한 김영삼 총재는 당선 첫날부터 강도 높은 대여투쟁을 주도해 나갔다. 박정권은 김영삼이 이끄는 신민당을 갖은 음해와 공작으로 탄압했다.

9월에는 YH사건을 "살인적 죄악"으로 규정하고 강경투쟁을 다짐하던 신민당에 법원이 전당대회시의 대의원 자격 등을 문제삼아 총재단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림으로써 김영삼의 총재직을 사실상 박탈하였다. 이에 신민당은 "야당을 말살하려는 정치조작극에 사법부가 하수인으로 전락하여 이 나라 민주주의와 사법부 독립에 마지막 룬뜰을 울리게 한 것"이라며 비난했다.

마침내 10월 4일, "미국은 국민에게서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독재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의 한국 국민들 중 하나를 선택할 때가 되었다"는 뉴욕타임스지와의 9월 16일자 기자회견 내용 등을 문제삼아 유정회와 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제명시켜버림으로써 그의 국회의원직마저 박탈하고 말았다.

야당과 민주주의를 완전히 말살하는 폭압이었다. 당사자인 김영삼은 자신에 대한 국회의 제명결의가 '날치기'로 통과된 뒤 기자회견을 갖고 "이제 이 나라에는 행정, 사법, 입법부 어디에도 민주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입증했다"며 비난했다. 그리고 곧 이어 10 · 16 부마항쟁이 발생하였다.

물론 부마항쟁의 상황적 배경이 그러한 정치사적 문제로써만 간단히 설명될 수도 없고, 그 항쟁의 정치사적 배경 또한 '79년의 그러한 일회적 사건으로만 국한될 수는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그 해에 일어난 위의 정치사적 사건은 부마항쟁의 배경을 논하는 데 우선적으로 언급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즉 제1공화정의 폭발적 붕괴가 전대미문의 3 · 15 부정선거완 김주열 군의 참혹한 피살을 계기로 한 4월혁명으로써 가능케 되었던 것처럼, 한국 현대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유신정권'이라는 군부독재 시대의 몰락 또한 일정한 계기적 상황을 배경으로 민중의 폭발적 저항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계기적 상황이 위에서 언급한 '79년에 벌어진 일련의 정치사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유신 정권의 몰락을 몰고 왔던 부마항쟁은 당시의 사회정치적 · 역사적 조건에서 볼때 극히 자극적인 방법과 강도에 의한 야당탄압과 민주주의의 반동적 부정이라는 '집권세력의 말기적 지배행태'를 계기로 하여, 그에 대응한 '다수 민중의 폭발적 저항'으로서 거대하게 분출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집권세력이 그러한 말기적 지배행태를 보이게 된 것'이나 그에 대응한 '민중적 저항이 그처럼 폭발적으로 치솟았던 것'은 원인없이 문득 찾아 온 결과는 아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박정희 군부독재정권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그들의 '원죄'를 사면받고자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건설에 몰두하였다.

이미 결핍된 그들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경제건설의 성과로써 사후적으로나마 메우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노력의 결과 산업화와 경제건설 자체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으나 구조적으로 또다른 모순이 박정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즉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자본의 팽창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 세력으로서의 노동계급 및 중간적 제계층의 급속한 성장과 농민충의 희생 및 몰락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이었는데, 산업화가 일정하게 진행된 이후부터는 그동안 성장해 나온 노동자 및 중간 제계층이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이익과 역할의 몫을 당연히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5 · 16이라는 '원죄'로부터는 어느 정도 벗어난 '70년대에도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적인-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정치적 부담으로 구조화하게 되는 것이었 다.

거기에다 박정희의 지칠 줄 모르는 집권욕은 3선개헌을 지나 사실상의 총통제라 할 유신체제까지 수립함으로써 그러한 구조적 부담을 정권 스스로 더욱 증폭시켜 나갔다. 박정권으로 볼 때 그 정치적 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 헌법으로 복귀함으로써 야당은 물론 재야세력까지 제도권 내로 감싸 안는 한편 그동안 정권의 비호와 특혜아래 급성장한 독점자본의 물적 양보를 이끌어 내고 분배과정에서 배제되어온 노동자·농민 등 기층민중의 분배참여를 일정 정도 확대시키는 정치적 ·사회적 타협과 개혁일 터였다.

그러나 박정권 및 그를 둘러싼 지배세력은 그러한 방향의 개혁보다는 도리어 재야세력과 야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을 보다 철저히 탄압하고 민중을 더욱 극단으로 억압함으로써 그 사회 정치적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파쇼적 방향의 길로만 나아갔다.

그 내용의 대부분이 날조되거나 턱없이 과장된 '2차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그리고 정치질서에 대한 국민적 결단의 자유민주적 전제가 될 토론 그 자체를 억압하려 한 일련의 '긴급조치' 등이 모두 파쇼적 탄압의 전형적 사례들이었다. 그 것이 당시 정권과 지배세력이 보여준 정치적 역량의 전부였다.

위에서 말하였던 것처럼 '집권세력이 보인 말기적 지배행태'나 그에 대응해서 부산과 마산의 '민중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저항'은 바로 그러한 박정권 시대의 지배와 저항 간의 공방이 도달한 한 귀결점이었던 것이다.

지배에 대한 저항의 고조라는 그러한 탈민주적 정치상황을 국민 스스로의 자기통 치라는 민주주의 원리로 되돌려 놓을 방법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직접선거를 통한 국민의 정권심판과 그 심판에 대한 정권의 승복 및 그 심판의 뜻을 제 정치과정에서 정권이 반영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본다면, 사실 국민 다수가 박정권에 대하여 등을 돌리기 시작한 증거는 '78년 12월의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로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그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의석수는 신민당보다 7석 앞섰지만 총득표율로는 야당인 신민당의 32.8%보다 1.1% 뒤지는 31.7%를 획득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국민의 다수가 이미 이때 야당인 신민당을 선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아는대로 박정희의 유신정권은 대통령직위를 그러한 국민적 직접심판의 대상 에서 벗어난 위치로 아예 빼돌려 놓은 상태였고, 남아 있던 유일한 선거적 심판의 수단인 국회의원 총선거마저 의원 총수의 3분의 2만을 선출하는 기형(련꾼)과 왜곡으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나 피지배 민중은 그러한 기형적 구조 안에서나마 선거를 통한 민의의 전달을 정권측에 대하여 그처럼 성실하게 시도하였지만, 정권은 정치 과정에서 그 민의의 반영은 고사하고 앞서 본대로 인권말살과 정치적 압살의 폭거로써 파렴치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철권통치 아래서 쌓이고 쌓였던 피지배 민중의 불만과 분노가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시점이었다. 특히 부산과 마산은 김영삼의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지역이며, 그런 점에서도 박정권의 폭압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김영삼에 대한 반동적 탄압을 촉매삼아 그 곳으로부터 터져나오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에서 보여준 대중의 그같은 폭발적 진출이 전적으로 위에서와 같은 정치적 요인만을 계기로 발생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것은 항쟁 당시 시위대 속의 분위기에서도 읽혀질 수 있었다.

예컨대 항쟁 첫날 밤, 10시 쯤 광복동 시위 군중 속에서 "김영삼 ! " "김영삼 ! " 하고 연호가 터져 나오자 다른 한쪽에선 "여기서 김영삼이가 왜 나와? 우리가 김영삼이 위해 데모하나?"라는 핀잔섞인 반론도 즉각 튀어 나왔다. 이는 유신 독재의 폭압에 대한 명백한 적대감과는 달리 그에 맞선 제도 당에 대해서는 민중들 사이에선도 애증이 착잡하게 뒤섞이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분명 항쟁이 발생하기까지의 정치적 경로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아직 그 배경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한 국가의 정치적 사건과 변동은 반드시 그 사회 경제적 기반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써 설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태의 전체적 조망을 결여한 자의적 설명으로 오도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 다면, 우리가 위에서 박정권이 보여준 '말기적 지배행태'에 대응한 '민중의 폭발적 저항'이라는 정치적 사태를 아무리 정확히 설명하려 해도,그 '폭발적으로 저항할 대중' 이 형성되며 일정한 세력으로 결집되는 과정의 뿌리는 경제 및 사회적 영역에 있기 때문에, 현실로서의 부마항쟁이 발생하기에 이르는 전체적 배경은 역시 사회경제적 과정과 정치적 과정의 통일 속에서야 제대로 조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은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김영삼과 야당 탄압'을 보면서 들고 일어나기는 하였으되, 그들 전체를 그렇71 '폭발시킬 만큼' 쌓이고 쌓여왔던 불만의 실체는 정치 이외의 또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경제문제였다. 다시 말해 학생들을 넘어서서 민중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항쟁의 대열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당시 민중이 겪고 있던 빈곤과 심화되는 빈부 격차의 현실, 그리고 그 뒤에 가로놓인 부정부패에 대한 불만에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6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한편으로 독점자본의 물적 토대를 강화시킴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내부의 계급분화를 촉진시켜 농민 층의 몰락과 임노동자계급의 확대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그러한 기조 위에서 유신정권이 '70년대 중반이후 급속하게 추진한 중화학공업화의 진전은 국내 독점자 본의 기반 확대와 함께 외국자본의 국내 지배 또한 한층 강화시킴으로써 한국자본 주의가 그 독점적 지배와 아울러 종속적 구조를 분명한 자기 특징으로 갖게 만들었다.

이러한 축적 과정은 본질적으로 민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국내외 독점자본을 축으로 한 종속적인 자본축적 과정에서 가치 실현, 소재보전, 자본, 기술 등을 해외 독점자본에 예속당하고 있던 국내 독점자본으로서는 그 이윤 폭이 무척 제한되기 마련이어서 자신의 존립기반을 국내 노동계급 및 농민의 희생 위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구조적 사정 탓에 국내 노동계급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저임금,노동력의 극한적 소모를 요구하는 장시간 노동, 높은 산업재해율 등을·.겪어야만 했고, 농민층 역시 농업기반의 와해와 저농산물 가격에 따른 농가소득의 저하 및 부채증대 등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했던 1979년의 경우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각종의 물가상승, 금응긴축에 따른 기업의 자금사정 악화, 소비자들의 구매력 위축 등 경제 전반이 침체국면에 빠져들어 있었다. 대중들은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그런 분위기에 횝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억 압력으로 뒷받침된 한국경제의 그러한 반민중적 현실이 이미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던 상황에서 유독 부산과 마산에서 시위가 발화된 직접적 이유는 아무래도 이 지역에 그만한 특수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점에서 볼 때, 부산지역은 그 경제구조 자체부터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산업화 초기 이래 부산의 경제구조는 신발, 섬유, 합판 등 경공업 부문이 주종을 이루어 왔는데, 이들은 수출에의 의존성이 높은 노동집약적 업종들로서 극도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부문이며,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정은 대동소이했다. 이는 자연히 민중들의 불안정한 취업과 소득빈곤, 생활불안을 야기시 키고 영세기업의 저임금 노동자, 실업자 등 하층 노동자나 반프로층 민중들의 사회적 불만을 장기적으로 누적시키게 되었다.

이런 지역 경제구조의 위약함을 반영이라도 하듯, 부마항쟁이 발생하던 1979년의 부산지역 경제상황은 사실 심각할 지경에 처해 있었다. 1971년만 하더라도 전국 및 서울의 그것보다 약 1.1배에 지나지 않던 부산의 부도율이 '79년에는 전국의 2.4배, 그리고 서울의 무려 3.0배에 달하였다. 2") 또 수출에 의존하고 있던 부산경제는 '79년 당시 수출증가율이 10.2%로서 전국 평균증가율 18.4%에 훨씬 못미쳤고 이로 인해 상당수의 부산시민이 실업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하게 됐으며 마산도 9월 당시 24개 업체가 휴 ·폐업, 6천여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특수했던' 당시 부산지역의 경제사정이었다. 여기에 대하여, 적어도 경제 지표상으로는 4월 이후 급속도로 하강하던 부산 경제상황이 8월을 고비로 다소 회복되기 시작해 9월부터는 호전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반론도 있으나, 그것이 당시 부산지역 경제사정의 악화와 그로 인한 부마항쟁과의 연관성을 반박할만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그러한 견해는 당시의 경제사정이 9월부터 '지표상으로' 다소' 호전되기 '시작'했다는 것일 뿐, 지표상의 경기회복세가 실제 주민들의 생활 에까지 체감될 만큼 호전되려면 상당 기간의 시간적 지체를 요한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단견이며, 또 한국의 경제사정은 전체적으로 계속 악화되어 그 이듬 해인 '80년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10월 16일의 부산과, 18 일의 마산에서 뚫고 나온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바로 그 절망의 화약통에 불을 당긴 셈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부마항쟁은 (1) 반민중적 한국경제의 모순의 야기한 현상태로서의 민중빈곤 및 심화된 빈부격차 그리고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적 울분과 (2) 유신정권의 전반적 억압성에 장기간 노출된 국민등의 광범위한 반정부적 불만 심리 등을 그 구조적 배경으로 하고, (3)'79년 들어 특히 상대적으로 더욱 악화된 부산 및 인근 마산 지역의 경제상황과 (4) YH사건 및 김영삼 제명이라는 '79년의 잇따른 반동적 탄압사태를 직접적 계기로 삼아, (5) 그에 분노한 부산 · 마산 민중들이 학생들의 가두시위와 결합함으로써 폭발적으로 발생한 것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2) 부산지역 운동세력의 성장과 재생산 기반의 구축

위에서는 부마항쟁이 발생하기까지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태적으로 설명하였다. 재삼 지적하거니와 부마민주항쟁은 원인 없이 문득 일어난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사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정치경제적 모순구조의 귀결로서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부마항쟁이 터져 나오기까지의 그러한 객관적 모순구조의 해명만으로 이 역사적 항쟁의 폭발과 호藁耀산에 대한 모든 배경이 다 설명되었다고는 말할 수없다. 적어도 그러한 모순을 질질곡과 위기로 인식하고 그를 타개하려는 주체적 대응의 모습을 알아보는 것 역시 모순구조 그 자체에 대한 해명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그 모순적 정치경제의 귀결이 대중적 항쟁으로 작용해 들어가는 데 필수적으로 개입되는 저항적 주도세력의 자각적 결집 과정을 밝혀내는 작업이다. 그런 맥락에서 여기서는 부마항쟁에 참여하였던 저항대중이 형성되기까지의 정치경제적 과정에 대한 위에서의 논의에 유념하면서, 당시 부산지역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확대재생산될 수 있었던가를 알아봄으로써, 부마항쟁의 발생배경을 보다 총체적으로 해명할 수 있도록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부마항쟁 전야인 '7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부산의 민주화운동 세력은 크게 보아 '전통적인 학생집단'과 '종교계를 기반으로 형성된 비판적 청년집단 및 사회운동기구'의 두 갈래로 성장하고 있었다.

부산지역 운동권의 이 두 흐름은 인적자원 및 시공 간대의 상호중첩이라는 면 뿐 아니라, 개발독재에 의한 산업화의 귀결로 '70년대 초 부터 빈발하기 시작한 노동 및 농민문제들과 일정하게 결부됨으로써 부마항쟁 이후 '80년대 민주운동의 본격화를 예비하는 토양 마련에 함께 기여했다는 면까지도 고 려하여 그 궁극적 의미를 통일적으로 인식해야만 한다.

그러자면 이 두 흐름의 운 동세력이 각기 독자적 성장을 견지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유기적 상호보완의 효과를 나타내며 부마항쟁 및 '80년대 운동으로의 진입 기반을 닦아 나갔는 지 그 과정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학생운동 쪽의 사정을 보자. 4월혁명으로 분출.고양된 부산의 학생운동 세력은 '65년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고비로 침체기에 접어들지만 '69년 3선개헌 저지 투쟁을 거치면서부터 새로운 저항의 대열이 형성된다. 부산대학교에서는 김재규(무역 68학번) 등의 주도로 '69년의 '한얼'과 '71년 '사회문제 비교 연구회' 같은 학생운동 목적의 이념 써클이나 법정대의 비공개 스터디 그룹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경북대의 '정진회'나 '정사회,' 서울대의 '사회법학회'나 '후진국 사회연구회,' 이화여대 의 '새얼,' '한사회'나 '한맥' 등 주요 대학마다 이념 써클들이 결성되는 전국적인 분위기와 맥을 같이 하며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때 '한얼'은 그 조직과 사업을 학생 대중에게 뿌리내리고자 '70년에 회보 <<한얼>>을 발간하였는데, 이는 그 해 여름<<동아일보의 취재와 보도의 대상이 될 만큼 학내외에 주목을 끌기도 했다.

'한얼'은 71년 상반기 양대 선거 국면에서 공정선거감시 및 선거참관 운동에 참여하였고, '한얼'이 불법 써클로 간주된 후 다시 조직된 '사회문제비교연구회'는 '71년 하반기의 교련강 화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73년 12월 1일에는 1,000~1,500여 명의 부산대학생들이 "학원자유 보장" "구속학생 석방" 등을 내걸고 유신체제 출범 이후 부산대 최초의 학내 시위가 발생하고, 오후 1시 경부터는 남포동 부영극장 앞에서 700여 명이 교가를 부르며 연좌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74년에는 4월 3일 발표된 바 있는 소위 '민청학년' 사건의 재판이 종결되는 시점에 맞추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10월과 11월에 걸쳐 부산에서도 부산대, 동아대, 수산대 등지에서 교내시위와 단식농성 등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무렵, 김재규와 그의 후배들인 김해룡, 이병철, 강성숙, 김영일, 배권재 등이 유신철폐 투쟁을 협의하던 중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74년 봄 대부분 구속되고, '75년 가을 '재일교포 간첩 김오자' 사건에 연루되어 당시 반정부 유인물을 제작 배포한 김오자(재일교포 유학생, 사학과 3년), 이원이(경제4), 김정미, 박준건 (철학3), 김준홍,노승일(정외3) 등이 구속되어 실형을 선고받는 등 대대적이며 끈 질긴 학원탄압의 소용돌이에 부산의 학생운세력은 '79년 10.16부마항쟁이 발생 하기까지 장기적인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

당시의 학원탄압은 특히 베트남의 공산화 과정을 배경으로 강화된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전국 규모의 학원사건 및 간첩사건들이 조작되는 일련의 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어서, 학원내에 뚜렷한 재생산 기반을 미처 구축하지 못하고 있던 부산의 학생운동 세력은 거의 단절될 수 밖에 없는 위기와 시련을 맞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고난 속에 보낸 부산의 학생운동 세대는 그들 자신의 운동의 단절이라는 명보다는 이후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미친 그들의 영향이라는 면에서 더욱 주목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김재규의 경우 부마항쟁 이후 후배 이상록(법학 74학번), 고호석(영문 76학번)등을 격려하여 그들이 후배들을 통한 학내외 운동세력의 재생산 및 사회과학 학습 기반을 구축하도록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자신은 이후 '80년대 6월항쟁 국면에서 도심지 가두시위 촉발에도 결정적 역할을 맡아내게 된다.

또 노승일의 경우 출소한 뒤 보수동과 부산대 앞에서 사회과학전문 서점을 경영하게 되는 데, 이 서점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하여 '79년 10월 15일 부산대학교 교내시위를 주동하고자 <민주 선언문>을 제작 배포한 황선용, 이진걸, 남성철 등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뒤에 다시 상세히 서술된다.

그런데 부산의 학내 학생 운동 그룹이 침체에 빠져 있던 '70년대 중반 이래로, 한 쪽에서는 사회운동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에 위치한 중부교회가 그러한 사회운동 세력의 성장은 물론 학생운동의 맥도 다시 잇게 해 준 새로운 피의 수혈자로 역할했다. 물론 중부교회 이외에도 그러한 역할에 일정한 몫을 했던 곳이 없지 않은 데, 부산 YMCA나 동광교회, 연산동의 남부교회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특별히 언급해야 할 것은 '부산 양서협동조합'(이하 '양서조합')이다. 중부교회와 직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이 창립한 양서조합은 '70년대 말 부산 운동세력의 커다란 저수지 같은 구실을 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이나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거기에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장로회 계열의 중부교회는 많은 일반 교회들과 달리 매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시국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74년부터 이 교회 강사로 참여한 이래 '76년 전도사를 거쳐 '78년 담임목사가 된 최성묵 목사, 그리고 그를 도와 이 교회 청년회 원들을 이끌던 이명수, 박상도 등이 이 교회의 그러한 정향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서울로부터의 지하 유인물이나 갖가지 민권운동 정보들은 당시 대부분 중부교회를 매개로 부산지역에 전파되었다. 각종 민권 강연회와 사례발표회,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대학생들의 그룹 스터디 등도 흔히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민주화를 주제로 한 강연을 위하여 동광교회, 전포성당, 제일감리교회, 중앙성당, 영락교회, 부산진교회 등도 가끔 장소를 제공하였으나, YMCA강당과 중부교회가 단연 가장 많이 쓰여졌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 밑에 중부교회 교인들 가운데 1975년에서 '79년 사이에 긴급조치 제9호 위반 등 혐의로 구속된 사람 만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이 교회의 청년부원들 중에는 동아대나 부산대에 재학중인 비판적 학생들과 졸업생 또는 제적생들이 많았다. 그래서 중부교회는 부산의 민주화운동에서 사회운동 세력과 대학의 학생운동 세력을 연결시키는 매개 고리로서의 역할도 그만큼 컸다.

즉 '76년 경부턴 정기적으로 이루어 진 중부교회 스터디 그룹은 부산 시내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비판적 청년 학생들을 끌어 모으는 흡인력을 발휘했고, 그럼으로써 이 그룹이 대학내 학생운동을 일정하게 자극하는 인자를 새로이 공급하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이 무렵 요산 김정한 선생을 비롯하여 임기윤 · 심응섭 · 최성묵 · 김정광 목사, 송기인 ·오수영 신부, 이흥록 · 김광일 변호사 등의 지도적 인사들을 중심으로 박상도, 김형기, 김희욱, 최준영, 박점룡, 조태원, 김영일, 이태성 등 청년 및 학생 세대의 실무적 노력에 의해 부산의 각종 사회운동기구들도 민권과 민주화 운동의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한 조직들로는 위의 양서조합 이의에 부산 기독청년협의회 (EYC), 부산 교회인권선교협의회, 부산 도시산업선교회, 카톨릭노동청년회(JOC),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 부산지부, 정의구현기독자회 등이 있었다.

비록 이런 단체들은 합법 공간이 극히 좁아진 '70년대 후반의 억압적 상황에서 제대로 활동하기가 힘들었지만,몇몇 조직내 선진적 활동가들의 경우 현장 지향성을 가지면서 노동자 등 기층 민중과의 연대를 활발히 추구하기도 했다.

예컨대 요산 김정한 선생과 노경규, 지부장 김광일 변호사 등이 이끈 부산 엠네스티는 양심수 지원 등 인권상황에 대한 관심과 지원, 고발을 끈기있게 펼쳐갔다. 도시산업선교는 최성묵 목사가 회장을 맡고 실무자 박상도가 열정적으로 활약한 부산지역 특수선교회의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 주요 활동은 부산지역 노동현장의 각종 부당 처우와 탄압 사례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을 배포하고, 사례발표회를 겸하여 노동문제에 대한 기도회를 여는가 하면, 노동자 훈련 및 교육을 통한 민중들의 의식을 깨우치는 일 등이었다. 물론 도산의 그러한 활동은 중부교회, JOC, 엠네스티, YMCA 등 다른 민권 운동권과의 유기적 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

JOC는 그 주요 활동이 노동자 개인의 수양이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나,'78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부산투쟁이 벌어지면서 노동현장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의 부산투쟁이란 '77-'78년에 있었던 동일방직 사건 당시 어용 노동운동가로서 노동자 탄압에 앞장섰던 전국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이후 한국노총 위원장)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출마를 저지하고자 인천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추송자 등 15명이 부산에 와서 김영태 낙선 투쟁을 벌이다 연행, 고문, 투옥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역사의 족적을 남겨낸 기구는 무엇보다 앞에 말한 양서조합이었던 점 만은 분명할 것이다.

양서(로롤)를 매개로 한 협동조합인 양서조합은 세계 최초의 것이라 할 만큼 독창적이고 선구적 방식으로 운동세력을 결집하고 교육하고 확산시켜 낸 부산 특유의 사회운동조직이었다. 양서조합의 첫 제안자는 김형기(현재 목사)였다. 당시 김형기는 박상도와 함께 중부교회 청년들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가 부산으로 오기 전 서울의 협동교육연구원에서 배운 협동조합운동 실무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착상을 얻어 양 서조합의 설립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김형기, 최준영, 박상도, 김희욱 등이 주도하여 이 조합의 창립총회를 열게 된 것은 1978년 4월 2일이었고, 4월 22일에는 이른바 '양서'만을 판매하는 조합 직영의 '협동서점'도 문을 열었다. 양서조합의 초대 이사장에는 이흥록 변호사가 추대되었다. 그는 조합이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달이 조합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양서조합은 그 발기문에서 양서의 판매 및 이용을 통하여 부산의 지적 문화적 풍토의 후진성을 극복하고,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참다운 인간애가 넘치는 사회를 실현해 갈 수 있도록 사회의 어둡고 병든 곳을 개혁해 나가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정관에 따르면 누구든 출자금 1천원과 가입금 1천원을 냄으로써 조합에 가입할 수 있고(문호개방의 원칙), 출자액에 관계없이 조합원 1명에 투표권은 1표이며 (경제민주주의의 원칙), 정치 및 종교적 중립을 지키고(중립의 원칙), 조합원 교육을 통하여 지역사회에 공헌한다(교육의 원칙)는 것이 그 운영 원칙이었다.

회원 가입 시부터 양서조합은 기본 교육을 실시하고 매월 양서 1권 이상을 읽도록 권장하였다. 당시의 조합원 교육은 <협동의 원리>, <협동조합운동사>, <해방후 한국 경제> 등을 주요 교재로 삼았었다. 한편 조합 내에 노동, 농촌, 문학, 공해, 전통 탈춤 등을 연구하거나 배우는 10여 개의 소그룹을 조직하고 수련회, 농촌 봉사활동, 영수증 모으기 운동 등도 실시하여 회원들의 의식계발을 위한 체계적 노력을 기울였다.

조합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해 갔다. 대학생 60∼70여명을 포함하여, 회사원, 교수와 교사, 공무원, 변호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던 141명의 창립회원이 1년 반만에 572 명으로 불어났다. '79년 10월 현재의 조합원 572명 가운데 대학생은 100명 쯤이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출자금도 700만원을 넘어 독립채산이 가능할 정도로 되었다.

부마민주항쟁은 바로 그 즈음에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미 정보기관에게 불순분자들이 모이는 단체로 주목받고 있던 양서조합이 '부마사태의 배후'라는 구실로 1979년 11월 19일 해산을 강제당하고 말았던 것은 당시의 역사 속에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부산 양서조합을 뒤이어 두 해 사이에 대구 · 광주 · 전주 · 마산 ·울산·수원 ·서을 등지까지 속속 이런 조합들을 생겨나게 만들었던 7원조로서의 부산의 역할이야말로 그 시대 역사의 놀라운 수확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 이다.

부산의 의식있는 사람들에게 양서조합은 서로 좋은 책과 정보를 교환하며 흥금을 털어놓고 시국을 걱정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교회와 학교와 사회에 홑어져 있던 의식있는 청년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을 다시 무엇인가 함께 하도록 묶어서 배출할 수 있게 하는 커다란 저수지가 되어 갔다.

'74년의 '민청학련 사건' 및 '75년의 김오자 사건'에 얽히어 그 중심 세력이 대부분 감옥에 들어간 이래 침체에 빠져들었던 부산의 학생운동도 이처럼 양서조합과 중부교회를 매개로 '70년대 말부터 다시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78년 4월 19일에는 (부산대학교 자율화민주실천선언문) 살포 사건, 즉 약칭 '4 · 19선언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 가담한 대입준비생 전중근과 부산대의 정외영(여, 사학), 서연자(미술교육), 이성동(의예) 등은 모두 중부교회에서 그룹 스터디를 함게 하며 사회의식에 눈뜬 이들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시위를 유도하고자 교정 길바닥과 강의실 칠판 등에 매직으로 "유신철폐" "박정권 물러나라" "긴급조치 해제하랴" 등의 구호를 쓴 뒤 위 선언문을 부산대학생들에 우편으로 보내거나 도서관 등에 뿌리다가 투옥되었던 것이다.

이듬해인 '79년 10.15<민주 선언문> 살포를 주도하게 될 부산대의 이진걸은 바로 이 때 그의 고교 동기생 이성동이 구속되는 것을 보면서 부산대학 내 그들(동고와 동여고)의 동문 써클 '동녘'을 이끌며 후배들과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토론해 가는 한편, 양서조합을 통해서는 부산대학내 지하써클 '도깨비 집'의 이호철을 만나게 되고 '김오자 사건'으로 투옥된 바 있던 책방 주인 노승일과 만나며 남성철을 소개받기도 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부터 문제의식을 다져 나가게된다.

'78년 7월4일에는 부산대학교 교정에서 이른바 '반유신 페인팅 사건'이 발생한다. 여느 교회들과 달리 감사헌금이나 십일조헌금을 받지 않고 거의 자력으로 생계를 꾸려간 이주학 목사의 남부교회에 다니던 부산대생 이상경(인문사회계열1, 학보사 기자)과 그의 중앙고 동기생이자 이목사의 아들인 이희섭, 그리고 검정고시 출신의 대입준비생 김승영 등이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었다.

중앙고 선배이자 부산대 동문 (중앙고와 중앙여고) 써클 '영목'(嶺木)의 창립을 주도했던 고호석(영문 76학번)과 더불어 남부교회에서 맹렬한 독서와 토론으로 사회의식을 다져가던 이들 또한 양서조합을 통하여 만남의 폭과 학습의 수준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 이상경, 이희섭, 김승영 등 위의 3인이 7월3일 반 야음을 틈타 부산대 운동장 스탠드의 벽과 바닥에 스프레이로 "유신철폐", "교련반대", "독재타도"의 구호를 페인팅하고 투옥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회적이고 고립분산적이며 소모적인 사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운동의 역량과 인적 자워이 재생산될 수 있고 질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장기적 기반을 구축하는 일이었는데, 이 또한 양서조합이나 중부교회의 역할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청년 학생들의 문제의식이나 투쟁의지가 중부교회와 양서조합 등을 통한 여러 가닥의 만남들 속에서 더한층 굳건해져 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것이 대학 내에 들어와 조직적으로 규합됨으로써, 당시 부산 민주화 운동의 최대과제라 할 만 했던 운동의 기반건설과 재생산구조의 학립이 비로소 가능해졌다.

앞서 말한 대로 '74-75년 민청학련 사건과 김오자 사건으로 부산대학 내의 운동 세력이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한 이래, '77년 말 중부교회 청년대학부원이던 부산대 학생 조태원(토목 74학번), 이상록(법학 74학번) 등은 학내의 학생운동 재건을 위해 의식있는 후배들을 물색중이었다.

이 무렵부터 몇 달 사이에 이상록은 후배 고호석(영문 76학번), 이호철(법정대 77학번) 등을 만나 그들 주위에 있던 인문사회계 학 생들의 하습모임을 이끌게 된다. 저부터 고호석은 학내의 고교 동문 써클 영목을 만들어 의식을 길러가고 있었고, 이호철의 경우 송병곤, 주정연, 김영욱 등과 1학년 2학기부터 그룹 스터디를 해오고 있던 터였다.

중부교회를 매개로 하여 이런 식으로 퍼져나간 학생운동 세력의 재건 노력은 '78년부터 급속히 활기를 띠게 된다. '78년 봄에 출범한 양서조합으로 모여든 많은 학생들이 학내에 돌아가서는 다시 운동 및 조직세력을 급속히 확산시키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비교적 고립적으로 이루어진 '78년 4월과 7월의 4.19선언문 사건과 반유신 페인팅 사건을 통해서 희생을 보여준 학우들에 대한 부채 의식도 운동세력의 그러한 확산을 자극했던 커다란 요인이었다.

그 무렵 김형기, 송세경, 최준영, 김희욱, 소준열, 설동일 등 서울 지역으로부터 저마다의 각자 사정에 따라 부산에 오게 된 몇몇 운동권 출신 인자들이 중부교회나 양서조합을 통하여 그들의 경험과 지도력을 부산의 운동세력에게 제공, 접맥시킴으로써 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송세경, 설동일 등은 서울지역에서 흔히 학습하고 있던 스터디 커리큘럼을 도입하여 양서조합내 학습단에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 학내에서의 조직확산을 꾀하는 데 실질적으로 크게 공헌하였다. 송세경, 설동일 등과 당시 학습에 함께 참여하였던 이상록, 고호석, 이호철, 노재열, 송병곤, 윤연희, 주정미, 설경혜 등은 그들이 '80년대 초 '부림사건'에 그대로 연루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후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세력의 중요한 일각을 담당할 만큼 성장해 가게 된다.

그러한 노력들의 결과, '78년 말 쯤에는 부산대학내에 저항적 학생운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분명한 학내 지하 써클이 태동하고 이를 토대로 '79년 봄 쯤에는 각 학년별 조직체계와 그 후의 재생산구조까지 갖춘 비공개 운동조직(이른바 패밀리 구조)이 생겨나게 된다. 즉 이상록(74학번), 고호석(76학번), 등이 이호철, 노재열 등의 77 하번과 김진모, 최병철, 정귀순, 유장현, 유동현, 김영(현재소설가 김하기), 남경희 등 78학번을 규합하고, 정귀순, 이정애, 부경란, 최민성, 김정현, 손동준 등 79학번 신입생들까지 조직화시켜 냄으로써 학번간의 재생산 라인이 구축된 조직체계가 상당수의 인원을 포괄하며 확립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일면 '도깨비 집'혹은 '사랑 공화국'으로 불리우며 후일 '80년대 초 '부림사건'을 계기로 세간에 알려진 부산대 지하 써클의 실체였다. '도깨비 집'의 경우 명확한 실체는 보이지 않으나 뭔가 일이 진행되고 있 음을 감지한 바깥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었고, '사랑 공화국'은 79년초 술자리에서 구성원들 사이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오고 간 제의가 이후에도 조직의 이름 처럼 계속 통용되어 버린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마침내 YH사건이 발생하고 박정희 독재권력의 모순이 점차 극점에 도달하여 가던 '79년 여름께가 되면, 위의 지하 써클이 중심이 되어 공개 써클들까지 포괄하는 꽤 광범위한 협의체도 만들어진다. 즉 도깨비 집은 이호철을 협의 창구로 하여 아카데미의 김종세, 성아(成我)의 안승문이나 신재식, 동녘의 이진걸, 그리고 그 밖에 부산 최초의 노동 야학인 가야야학 팀, 상대의 경제사학회(經濟史學會), 전통예술연구회, 영목(嶺木) 등등과 시국에 대처하는 방향과 방식을 논의하려는 움직임이 모색되기 시작인 것이다.

그들 주변에서 9월께부터 벌써 도깨비 집, 공대, 법대, 상대 등에서 "이번 2학기에 [시위] 한 건 한다"는 얘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현실로써 필연화 될 것이었고, 광범위한 민중적 호흥을 얻으며 폭발적으로 확산되어갈 것이었다.

출전 : 부산대학교 사회학과-사회학자료실-월별사건-부마민중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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