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3 (수) 18:47
분 류 사전3
ㆍ조회: 1372      
[현대] 박정희 (전재호)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과 그 정치적 함의

전재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민주화운동연구단체 공동학술심포지움 - 한국 기념사업의 현주소] 발표논문

■ 2003년 8월 27일(수) 오후1시~6시,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
■ 주최 :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나라와문화를 생각하는 의원모임,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전남대5.18연구소, 제주4.3연구소
■ 후원 : 한국학술진흥재단, 민주연구단체협의모임
■ 협찬 : (주)가락전자

1.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경과

한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박정희 기념관의 국고 지원 문제는 노무현 정부의 유보적인 태도로 인해 최근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2003년 3월 노무현 대통령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에 대한 국고 지원을 두고 사회적 논란이 빚어지고 있으며, 특정인을 기리는 기념관은 그 인물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모금해 건립하는 게 순리"(한겨레신문 2003년3월15일)라며 기존 방침의 재검토를 관련부처에 지시하였고, 4월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 역시"국민의 정부에서 이미 국고 보조를 약속했지만 집행승인 여부는 총리실이나 기획예산처와 협의해 신중하게 판단하겠다"(한겨레신  문 2003년4월17일)고 말해 지원을 유보할 수도 있음을 내비쳤다 이러한 변화는 1999년 9월 28일 결성된'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의 적극적인 활동, 사업추진의 실질적 주체였던 김대중 정부의 퇴진, 그리고 국민들의 무관심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199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었던 박정희 신드롬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이미 이 문제는 박정희 신드롬이 풍미하던 시기에 지지자들과 출신지역에 의해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부 세력의 의도대로 기념관 건립이 그의 출신지에 국고지원이 없이 순수 민간사업으로 진행되었다면 논쟁이 현재와 같이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기왕의 박정희 신드롬에 편승해 보수 계층과 대구·경북 지역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1997년 대선국면에서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을 공약으로 내건 데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김대중 정부는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하여 1999년 5월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 지원의 추진을 지시함으로써 이 문제는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는 쟁점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99년 7월 26일"과거의 유물적 재현이 아닌 미래지향적 시각에서'박정희학(學)'을 정립하고 전개하는 데 진력할"(취지문)「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출범하였다. 이 단체는 김대중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김종필 자민련 총재를 고문으로, 신현확을 회장으로, 정권 실세인 권노갑 국민회의 고문, 김용환 자민련 수석부총재,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를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기념사업회는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대구·경북 출신 김중권과 신현확 전 총리가 긴밀히 협의해 주도하였고 실무연락도 이 지역 출신인 박명재 행정비서관이 담당(한겨레 1999.5.17)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대구·경북지역의 원로로서 10·26 당시 부총리였고 최규하 내각에서 총리를 지냈던 신현확이 기념사업회 회장이라는 사실로 볼 때, 대구·경북 및 박정희 정권 시기 관료 출신들이 사업을 주도하고 김대중 정부는 뒤에서 후원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은 꾸준히 추진되어, 2000년 7월 서울시가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기념관 부지를 제공하였고 2002년 1월 29일 착공식 후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해 경실련, 참여연대, 민주노총, 전국연합 등 전국 270여개의 노동사회단체들은 1999년 9월 28일'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지난 4년여 동안 국민연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및 국고지원의 부당성을 고발하는 기자회견, 반대 시위, 토론회, 박정희실정백서 발간,'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반대 청원서'국회 제출, 박정희기념관 반대 온라인서명운동, 서울시의 박정희기념관 건립부지 제공 반대 서울시청앞 1인 시위 등 다양한 형태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영등포구 문래공원 내 박정희 흉상 철거와 종로 탑골공원 내 박정희가 쓴 3·1문 현판 철거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국민연대의 적극적인 반대활동과 기념사업회 측의 100억원 국민모금 부진에 기인한 행정자치부의 국고보조금 집행 중단은 2002년 8월 기념관 건립 공사를 중단시켰다. 따라서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은 김대중 정부의 임기 종료와 함께 무산되어야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임기 종료 직전인 2003년 2월 7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을 2004년 10월까지 연장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이 사업을 노무현 정부에게 인계하였다. 더욱이 기념사업회는 2003년 3월 중순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주요 경제단체와 일부 대기업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뭉치 돈을 기부받아'기념관 건립을 지지하는 국민들로부터 모두 100억원을 모금했다'며, 행정자치부에 약속한 국고보조금 100억원을 집행해 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이에 대해 국민연대 등 시민사회단체와 학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고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와 달리 유보적 태도를 보이면서 박정희 기념관이 아닌 역대 대통령 기념관 사업을 추진할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1999년 이후 최근까지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 문제는 단순히 박정희라는 역사적 인물의 평가에만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정치세력들간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물론 박정희 개인에 대한 평가도 당대의 역사인식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쟁점이다. 기념사업회 및 지지자들은 박정희 신드롬을 등에 업고 기념사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반면, 국민연대를 비롯한 반대자들은 그가 존경받을만한 정신적 유산을 남기지도 못했고, 치적으로 간주되는 경제발전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반대하고 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이 부당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지만 이미 많은 학자들이 그 부당성을 입증하였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 글은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전개와 관련하여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 문제가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박정희 정권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세력인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을 제안한 것은 대선 및 총선에서 대구·경북 및 보수 세력의 지원을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진보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는 현실정치의 논리를 내세우며 이를 추진했다. 이는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서 파생된 현실정치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먼저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의 기반이 되었던 박정희 신드롬을 다룬다. 특히 정치사회화의 측면에서 박정희 신드롬이 등장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다음으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정당화하는 주요 담론들이 주조되었던 1990년대의 박정희 영웅화 작업을 추종자들의 저서를 통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정치에서 박정희 기념관 국가지원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정리한다.

2. 박정희 신드롬의 등장과 의미

박정희 기념관 건립 사업이 등장하는데는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를 풍미한 박정희 신드롬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박정희 신드롬이 없었다면 기념관 건립 논의도 등장하지 않았거나 또는 추종자들만의 문제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절에서는 박정희 신드롬의 등장과 그 의미를 고찰한다.

1979년 심복의 총에 사망한 박정희는 1980년대 중반까지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박정희 사후 등장했던 전두환 정권이 그의 후광(後光)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들도 암울했던 그의 시대를 회상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박정희가 죽었을 때 많은 국민들은 눈물로 그를 보냈지만, 누구도 그의 시대로의 복귀를 원하지는 않았다. 국민들은 당연히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을 기대하였고 그를 흘러간 인물로만 기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은 두 번 나타난다고 했던가.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번은 희극으로. 한때 한국을 지배했던 독재자가 사라지자, 그와 똑같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독재자'인 전두환이 등장하였다. 이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역사의 간계(奸計)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기에 분단의 아픔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힘으로 박정희의 독재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국민들은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재판(再版)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받들거나 추앙하기보다 그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헌법에서 5·16혁명(?)정신을 삭제하였고,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제거하면서 박정희의 시기를 부정과 부패, 비리의 시기로 규정하는 반면 자신들은'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것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연히 1980년대는 새로운 암흑기가 되었고 일반국민들은 박정희보다 더한 전두환의 독재에 신음하면서 박정희를 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가 다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국민들의 힘 때문이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반(反)독재투쟁의 선두에 섰던 학생운동 및 재야 세력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지속적인 타격을 가했고, 마침내는 1987년 6월 민주화투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했다. 그런데 이를 통해 확장된 정치공간은 민주화운동 세력 뿐 아니라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박정희의 후예들에게도 복귀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박정희 추종세력이던'구시대의 인물'들은 자신들의 등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덤에서 잠자던 박정희를 불러내었고, 자신들의 정당을'민주공화당'을 계승했다는 의미에서'신민주공화당'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들은 때마침 불어온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박정희의 정치적'장자'인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출신지인 충청권을 기반으로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민주화운동세력이 박정희를 무덤에서 부활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1980년대 말 구시대의 인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활동하면서 박정희는 점차 국민들의 기억에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시의 여론 조사에서 잘 드러난다. 1989년 10월25일 10·26 10돌을 맞아 20세 이상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61%가 과오보다 공적이 많았다고 응답한 반면 과오가 많았다는 쪽은 13.7%에 불과하였다. 한 달 앞선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조사결과도 역시"박정희의 18년 집권이 우리 역사에 미친 유익성은"이란 질문에"아주 유익했다"는 응답자가 26.1%,"약간 유익했다"는 응답자가 40%이었다. 이는 박정희의 사망 직후와 달리 박정희가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는 사후 국민들로부터 잊혀졌지만, 박정희 정권보다 더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정·비리·부패를 바탕으로 부활하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많은 국민들은 과거를 모두 기억하지는 못한다.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은 잘 기억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실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단지 눈에 보이는,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경제적 지표와 생활 수준의 제고에만 경도되어 박정희 정권의 부정적 측면을 망각하였다. 더욱이'레드 컴플랙스'(Red Complex)에 의해 움츠러든 국민들에게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 낸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은 범죄들은 제대로 기억될 겨를도 없이 묻혀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의 긍정적 측면만 기억되고 부정적 측면은 망각되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의 말년에 그의 독재와 대결하여'민주화의 기수'라는 상징성을 획득했던 김영삼이었다. 김영삼은 정권 획득을 위해 삼당합당을 감행하는 등 독재정권의 후예들과 손을 잡았지만, 초기 개혁정책으로 인해 90%를 상회하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보수세력들의 반격에 이은 개혁의 실패,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던 여러 사건들,'역사바로세우기'라는 역전극의 실패, 그리고 결정적으로 IMF관리체제라는 경제위기로 인해 김영삼은 몰락하였고, 보수세력은 죽은 박정희 살리기 작전에 성공하였다. 산 김영삼이 죽은 박정희를 살려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박정희의 부활이 김영삼만의 단독작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정희의 부활극에서 주연은 그를 이용하여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책과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저지하려는 보수세력이었다. 보수세력들은 김영삼 정부 등장 이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민주화의 물결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자, 조선일보 및 중앙일보의 주도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는 명분하에 과거의 독재자들을 미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분단된'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國父)로 이승만을 부활시켰고, 곧이어 대한민국을 발전시킨 인물로 박정희를 부활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보수세력의 담론은 5.16을 군사쿠데타로 규정한 김영삼 정부의'역사바로세우기'와 대비되면서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적으로 다가왔고, 한보 및 김현철 사건으로 인한 김영삼 정부의 도덕성 상실과 경제위기라는 결정적인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보수세력의 담론에 투항하였다. 곧 김영삼의 실정(失政) 부패, 도덕성 실추, 경제적 실패 과 대비되어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 청렴성, 자기 희생, 경제성장 국민들이 박정희의 장점이라고 간주하는 측면들 이 부각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왜 국민들은 이러한 보수세력들의 담론에 포섭되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박정희 시대에 공유되었던 지배적인 통치원리들의 집합체로서의'박정희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구축이 실패"했다는 지적에서 찾을 수 있다. 정해구는 1990년대의 한국사회가 탈군부독재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반 구축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변화하는 국제 경쟁체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자본·노동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새로운 경제운용방식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성장 및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박정희식 민족주의를 대체할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개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덧붙여, 박정희의 지지도가 높은 다른 이유는 정치사회화의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박정희 시대를 정확히 기억하거나 또는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향수에 빠져 있다. 한편으로 현재 우리 국민 중 30대 이하는 박정희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보수세력에 의해 주조된'훌륭한'박정희 시대를 학교교육과 언론을 통해 습득하였다. 그들에게 그 시대의 민주주의와 인권 파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경제발전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는 측면만이 중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학교교육은 당시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경제발전이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현실도 돈 또는 경제가 이상(理想)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30대 이상의 대부분은 당시의 독재체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 아래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당시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단지 대학생, 종교인들을 포함한 소수의 용기 있는 사람들만이 권위주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민주화 운동에 나섰을 뿐이다. 아마 박 정권에 대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인해 투옥, 고문, 사형을 당한 사람들은 전 인구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박정희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권탄압을 받은 경험이 없고 권위주의에 친숙해 있었으며 그 시기에 시작된 경제발전이'한강의 기적'을 가져왔다고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에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게다가 전두환 정권과 같은 권위주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유사민주화 정권이었던 노태우 정권 및 스스로를 '문민정부'라 칭했던 김영삼 정권의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은 국가폭력의 지배 아래 강요된 안정과 성장을 구가했던 박정희 정부의 시기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희 신드롬은 인권이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가 현재 한국인들의 사고와 행태를 지배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이 박정희를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사실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논리에 내포되어 있던 배금주의(拜金主義)와 물신주의(物神主義)가 이제 한국인들의 사고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세기말 박정희의 등장은'부활'이 아닌 병리적 현상을 의미하는 신드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박정희 신드롬은 IMF이후 한국의 경제침체와 연계되면서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 정권은 10년 이상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대구·경북 지역과 자신에 대한 뿌리깊은 반대세력인 보수세력의 친 박정희 정서에 영합하여 지지 기반을 확장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 지원을 주도하였다. 또한 보수세력 역시 박정희와 함께한 자신들의 명예를 온전히 보존시키려는 의도로 여기에 동참하였다.

3. 박정희의 영웅화 작업 : '불세출의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

그러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의 다른 한 축인 박정희 추종 세력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박정희를 어떻게 찬양하고 있는가? 그들의 박정희 영웅 만들기 담론을 살펴보자.

박정희 또는 그의 시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이다. 박정희 사후 이 시기까지 그에 대한 출판물들이 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폭로하는 비사(秘事)류였다면, 1980년대 말에는 박정희 개인과 시대를 찬양하는 출판물들이 등장하였다. 이는 1980년대 중반부터 박 정권 시기의 인물들 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금지자로 묶였다가 해금된 인물들 이 재등장하기 시작한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우선, 전직 공화당, 유정회 의원 및 장·차관 등은 1984년 12월 민족중흥동지회를 결성한 후 처음에는 박정희의 추도행사를 주도하다가 점차 정치 활동에 참여하였다. 일부는 1987년 창당된 신민주공화당에 참여하였고, 다른 일부는 1988년 5월 조직의 이름을 민족중흥회로  바꾼 후 1989년 10월24일 10주기 추도행사를 위해 박정희의 휘호집『위대한 생애』를 출간하고 분기별로『민족중흥』이라는 회보를 발간하였다. 또한 박정희 기념사업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하였다.

다음으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1988년 10월'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키고, 이 단체의 명의로 1990년『겨레의 지도자 -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육영재단)를 출간하였다. 이 단체 역시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박정희를'겨레의 지도자'로 지칭하면서 박정희의 일방적 찬양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정재경은 1979년 출간하였던『한민족의 중흥사상 -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보완하여 1991년『박정희 사상 서설』을, 그리고 1994년 박정희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한『박정희 실기-행적초록』을 출간하였다. 정재경은 박정희가"정치권력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적인 정치인이기 이전에 사회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가"이고 그의 사상이"방대하고 심오하며 고매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품고 있던 포부와 이상, 그리고 그가 깨닫고 있었던 진실을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책의 발간 목적을"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박정희는 분명히 한 시대를 창조했던 위대한 민족지도자임이 틀림없고,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그는 한국사회의 선구적 개혁자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올바르게 발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박정희 실기』를 편찬"한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정재경은 박정희를 범인(凡人)이 아닌 '위인'(偉人)의 반열에 올려놓고 그를 찬양한다.

한편, 1980년대 말부터 박정희 정권 아래서 고위관료를 지냈던 인물들이 언론을 통해 회고록을 연재하고 이를 책으로 묶어 출간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의『한국경제정책 30년사』이다. 이것은 1989년 중앙경제신문에'한국경제정책사'로 연재된 후 1990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여기서 1960·70년대 등장했던 여러 경제 정책들의 배경·동기·내용·추진과정 및 결과 등을 중심으로 경제정책사를 서술하였는데, 곳곳에서"박대통령의 탁월한 선견지명과 위대함"을 찬양한다.

김정렴은 스스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참여한 사람의 시각에서 설명하기 때문에 변호에 빠지지 않았는가 염려된다고 기술했는데, 사실 그가 염려한대로 박 정권 경제정책의 일방적 변호와 찬양에 빠졌다. 그리고 그는 1997년 박정희 시대의 경험들을 묶어『아, 박정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박정희 신드롬을 국민들이 박정희를'불세출의 위대한 민족의 영도자로 공감'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박정희뿐 아니라 자신들 청와대 비서실 까지도 미화하고 있다.

또한 박 정권의 경제수석이었던 오원철은 1993년부터『월간 중앙』과『WIN』에 '경제발전사'를 연재하였고, 이를 묶어 1995년부터『한국형 경제발전』(전6권)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주로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을'한국형 개발방식'이라고 지칭하면서 그것의 독특성과 우수성을 자랑하고 있다. 이 책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절대적인 선(善)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책은 박정희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절대화하는 데 기여한다.

다른 한편,「중앙일보」는 1997년 7월10일부터 매주 2회씩 6개월 동안 연재한'실록 박정희시대'를 엮어『실록 박정희』라는 단행본을 1998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그냥 소문으로만 알고 있었던 박대통령의 인생에 대해 관련 인사의 생생한 증언과 구체적인 추적을 통해 그 내막을 밝혀"주었다는 김정렴의 추천사를 싣고 있다. 비록 이 책이 박정희 개인을 둘러싼 묻혀진 사실을 밝혔는지는 모르지만, 한 인물의 명암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전기의 기본 원칙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책은 각 장들의 제목  '김일성에게는 지지 않겠다','박정희 경제의 막전막후','현해탄을 뚫어라','무궁화 꽃은 진짜 피었는가' 에서 볼 수 있듯이, 박정희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인상을 확인시키는 내용들로 채웠으며, 박정희의 가장 취약점이었던 만주군 장교의 경력을 변명하는 장('광복군이냐 친일장교냐')을 마련하여 박정희의 친일경력을 정당화한다. 더욱이'절대권력의 내면 풍경'이라는 장에서는 개인으로서의 박정희를 다루면서 그의 인간적인 풍모를 미화하고 있다. 또한'권력 말기의 피로 증후군'이라는 절에서는 박정희 말기의 부정적 현상들을'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정당화해주고 있다. 결국 이 책은 박정희의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하기보다 그의 업적만을 강조함으로써 형평성을 잃은 대표적인 서술로 후대에 길이 남을 저작이 되었다.

그리고 1997년부터「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동명 단행본은 1998년 출간)는「중앙일보」와 달리 본격적으로 박정희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조갑제의 박정희에 대한 관심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1987년『유고』에서 1979년 10월에 일어난 부산과 마산의 민주화운동을 다루었고, 1992년에는『박정희』를 출간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갈수록 훨씬 찬양으로 변했다는 점이다.『유고』에서 그는 박정희가"우리의 역사에서 굵은 고딕 활자로 길게 기록될 것"이며"유교적 실용주의자"였지만, "쓸쓸함을 채우고 허무해지는 자신을 지탱해줄 철학적 신념이 부족하였다"라고 조심스런 평가를 내렸는데, 1997년 재출간된『국가와 혁명과 나』의 서문이나『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는 박정희를'자신의 정신을 맑게 유지했던 초인(超人)','1급 사상가','부끄럼 타는 영웅','눈물이 많은 초인','소박한 서민','토종 한국인','민족의 한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근대화로써 그 한을 푼 혁명가','근대화 혁명가'등으로 표현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개인에 대한 평가는 상황에 따라 변할 수도 있지만, 인물을 평가하는 객관적 기준없이 영웅주의로 박정희를 평가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였다.

진중권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지적하고 있듯이,"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조갑제는 박정희에게 너무 매료된 나머지 박정희의 부정적 측면마저 긍정과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민주화의 첫걸음이 내디뎌진 뒤에라야 사람들은 박정희를 차분한 마음과 냉정한 머리로써 찬찬히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유고』에서 보여준 그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이후의 글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과 같은 지적은 그가 88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을 어떻게 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년의 민주화는 지역 이익, 개인 이익, 당파 이익을 민주, 자유, 평등, 인권이란 명분으로써 위장하여 이것들을 끝없이 추구함으로써 국익과 공익을 파괴해 간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논리는 박정희가'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유신체제를 도입했던 논리와도 일맥상통한다. 이런 면에서 조갑제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박정희의 그것과 다르지 않고, 따라서 그는 박정희를 숭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라는 사실은 박정희의 등장을"6백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사회에 상무(尙武) 정신과 자주 정신의 불씨를 되살렸다"는 언급이나"1988년 군사정권 시대가 끝났고 그 뒤에 우리 사회는 다시 상무 자주 정신의 불씨를 꺼버리고 조선조의 문약성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언급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그는 민주사회에서는 행위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노력하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자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는 1988년 이후 민주주의의 공고화 과정을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결론은 박정희에 대한 우상화로 나아갔다.

이렇게 1990년대 이후 박정희 추종자들은 언론과 출판을 통해 박정희를 영웅화하는 담론을 생산해냈고 1990년대 중후반 김영삼 정권 시기의 정치·사회·경제적 실정과 맞물리면서 박정희 신드롬은 확산되었다. 이런 박정희 영웅화의 담론이 존재했기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 주장이 가능했던 것이다.

4.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의 정치적 의미와 올바른 역사 복원의 길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은 2000년 총선에서 대구경북지역의 지지 확보를 위한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목적과 지역출신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대구·경북의 정신적 '공황'및 개발독재의 향수가 복합적으로 빚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이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던 김대중에 의해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박정희 정권 이래 안고 있던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못하고 확대 재생산되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정치사의 맥락에서 김대중 정부가 이 사업을 추진한 것은'타협에 의한 민주화'라는 한국 민주주의 이행의 특징, 과거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던 야당세력이 1988년 대선을 계기로 분열한 점, 그리고 1987년 민주화로의 전환 이후 도리어 강화된 지역주의라는 고질병에 기인한다.

첫째, 구세력의 청산이 아닌 그들과의 타협에 의한 민주화라는 한국정치의 특성은 권위주의 정권 시기의 정치세력들을 정치사회에 온존시켰을 뿐 아니라 민주화 이후의'정초선거'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후자는 물론 유신 이후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던 야당의 두 축이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로 인해 가능했다. 게다가 정치지도자 및 정당의 지역분할 구도는 5공 세력에 의해 배제되었던 3·4공 세력까지도 부활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권위주의 세력의 미청산 외에도 이들의 보호 아래서 성장했던 경제계 및 보수언론의 미청산 역시 박정희 지지 세력의 온존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었다. 곧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 영역에서 과거 청산의 미비는 박정희 신드롬 및 박정희 기념사업의 인적, 물적 기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둘째, 민주화 이후 강화된 지역주의가 1988년 대선 시기 양김의 분열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 양김의 분열 이후 증폭된 지역주의의 공고화는 이후 한국정치의 지형을 왜곡시키고 과거청산을 불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3·4공 세력의 부활을 가능하게 했다. 사실 지역주의, 특히 영호남의 대결을 부축인 것이 박정희 정권이었는데 도리어 박 정권 대신 양김이 더 비난받는 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민주화 이후 양김의 분열이 한국정치에 너무나 뿌리 깊은 폐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양김이 단합하였다면 권위주의 정권에서 권세를 누렸던 보수세력들이 정치사회에서 활보하지도, 그리고 지역주의에 기반하여 지속적으로 권력을 휘두르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김대중 정부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가지원을 결정했던 주요한 이유는 지역주의 때문이다. 김대중 정부는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이다. 김대중 정부가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호남의 적극적인 결집과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자민련과의 선거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대중 정부는 자민련의 뿌리인 박정희 정권을 무조건 비난할 수 없었다. 또한 김대중 정부는 피해자로서 관용을 베푸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박정희 추종세력의 근거지인 대구·경북 지역의 유권자들과 보수적인 계층이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남에서 국민회의의 전멸과 충청에서 자민련의 몰락을 가져온 2000년 총선은 이런 김대중 정부의 정치적 계산이 오판임을 잘 보여주었다.

결국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 사업 추진은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지닌 문제들의 연장선에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분석이 김대중 정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를 비롯하여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이전의 권위주의 정부들에 비해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정당들은 사회적 요구에 기반을 둔 정책대안을 거부하고,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국회의원은 정치적 대의를 위해 헌신하기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증대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렇기에 정치에 대한 국민의 혐오와 반감이 커지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은 이 의제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모두에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다시 한번 국민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데 일조하였다.

국민들이 김대중 정부 아니 민주화 이후 정부에 원했던 것은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과 같은'술수의 정치'가 아니었다. 뚜렷한 역사의식과 이에 기초한 원칙을 바탕으로 한'소신 정치'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국고지원 연장이라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한편 박정희 정권과 투쟁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두 김 대통령이 모두 1990년대 박정희 신드롬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양자는 상이한 역할을 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실정(失政)으로 의도하지 않게 박정희 신드롬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한 반면, 김대중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으로 의도적으로 박정희 영웅화에 초석(礎石)을 다지려 했다. 또한 비록 정치적 타산에서 기인했을지라도 김영삼 정부는'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5·16을'군사혁명'이 아닌'쿠데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사실은 그의 다른 과오 곧 경제위기를 통한 박정희 신드롬의 확산 에 비하면 초라한 것일지 모르지만, 권위주의 세력의 청산이라는 문민정부의 임무의 일단을 수행하였다는 측면에서 공적(功績)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국고지원은 지역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 노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권위주의 세력에 대한 정당한 자리매김을 역행한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없다. 구 정치세력에 대한 인적청산이 자민련과의 연립정권이라는 한계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박정희의 영웅화에 기여하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은 김대중 정부가 역사에 남긴 큰 오점이 될 것이다.

만일 김대중 정부가 진정 원했다면 박정희를 재평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존재했다. 역사학자들이 제기했듯이, 먼저 민주화 기념관을 만들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 박정희 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의 치적과 오류를 공정히 제시해 놓은 '역대 대통령 기록관' 또는 '도서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보다도 못한 대한민국의 기록보존 체계를 고쳐서 국가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의 기록만이라도 온전히 보존하고 미래의 사가(史家)들이 평가할 수 있도록 남기는 것이 김대중 정부에게 부여된 역사의 책무였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에 실리도 명분도 모두 잃어버렸다.

개혁을 내세운 노무현 정부는 이런 김대중 정부의 패착(敗着)을 교훈삼아 위와 같은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2003년 6월 국민연대가 제시한 비전사업은 노무현 정부가 참조해야 할 내용들이다. 이런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당장은 보수 세력의 많은 저항에 부딪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역사를 바로세우고 원칙을 지키는 정부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참고 문헌>

강준만. 1988. "왜 박정희 유령이 떠도는가?" 『인물과 사상』2. 서울: 개마고원.
강준만. 1998. "『월간조선』 조갑제를 해부한다"『인물과 사상』2. 서울: 개마고원.
강준만. 1999. "'박정희 신드롬'을 해부한다."『월간 인물과 사상』. 2월.
김동춘. 2000.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반역사성." 『박정희 기념사업 반대 국민대토론회』.박정희 기념사업 정부지원 반대를 위한 대구경북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
김상봉. 1999. "도덕의 파탄."『한겨례21』. 11월18일.
김성진. 1995.『박정희 시대』. 서울: 조선일보사.
김정란. 1999. "누가 영웅을 찾는가."『당대비평』. 6.
김정렴. 1990.『한국경제정책 30년사』. 서울: 중앙일보사.
김정렴. 1997.『아, 박정희』. 서울: 중앙 M&A.
김종신. 1997.『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 서울: 한국논단.
김진명. 199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2. 서울: 해냄.
박상훈. 1997. "민주적 공고화의 실패와 그 기원: 한국문민정부의 경험."『동향과전망』. 34호.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2001. 여름 ~ 2003. 8월. 『박정희기념관반대국민연대 소식』.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 1990.『겨레의 지도자 -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을 중심으로 한 한국 현대사』. 육영재단.
손호철. 2003. 『현대 한국정치: 이론과 역사 1945 - 2003』. 서울: 사회평론.
오원철. 1995/1996. 『한국형경제발전』 1-6. 기아경제연구소.  
임재학 1997.『선글라스와 목련꽃: 박대통령의 숨은 이야기』. 서울: 태일.
정재경. 1991. 『박정희 사상 서설: 휘호를 중심으로』. 서울: 집문당.
정재경. 1994.『박정희 실기 - 행적초록』. 서울: 집문당.
조갑제. 1987.『유고』1. 2. 서울: 한길사.
조갑제. 1992.『박정희』. 서울: 까치.
조갑제. 1998/1999.『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Ⅰ-Ⅵ. 서울: 조선일보사.
중앙일보. 1998.『실록 박정희』. 서울: 중앙M&A.
전재호. 2000. "박정희로부터 역사를 구출하자." 『정치비평』. 7호.
진중권. 1998.『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1. 2. 서울: 개마고원.
최장집. 2002.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울: 후마니타스.
하신기. 1997.『한국을 강국으로 이끈 대통령 박정희』. 서울: 세경사.
한국정치연구회. 1998.『박정희를 넘어서』. 서울: 푸른숲.
한승조. 1976.『한국민주주의와 정치발전』. 서울: 법문사.
한승조. 1977.『한국정치의 지도이념-유신개벽사상의 과거, 현재, 미래』. 서울: 서향각.
한승조. 1980. "70년대 한국정치의 이념과 체제". 정신문화연구원.『70년대 한국정치의 이념과 체제』. 성남: 정신문화연구원.
한승조. 1999. 『박정희 붐, 우연인가 필연인가』. 서울: 말과창조사.

출전 : 인터넷시민학교-자료실-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과 그 정치적 함의
   
윗글 [조선] 독립협회 (브리)
아래글 [현대] 박두진 (한미르)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678 사전3 [종교] 대종교 (민족) 이창호 2003-05-24 1381
2677 사전3 [현대] 5.16군사정변 (이현미) 이창호 2003-12-03 1380
2676 사전3 [현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정해구) 이창호 2003-11-25 1380
2675 사전3 [현대] 5.18광주민중항쟁 1 (부상자회) 이창호 2003-12-07 1379
2674 사전3 [근대] 러일전쟁 (민족) 이창호 2003-03-23 1374
2673 사전3 [근대] 문학사조 (민족) 이창호 2003-11-16 1373
2672 사전3 [조선] 폐정개혁안 (브리) 이창호 2003-03-15 1373
2671 사전3 [현대] 박정희 (전재호) 이창호 2003-12-03 1372
2670 사전3 [조선] 독립협회 (브리) 이창호 2003-03-18 1372
2669 사전3 [현대] 박두진 (한미르) 이창호 2004-01-02 1366
1,,,3132333435363738394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