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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7 (일) 17:4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80      
[현대] 5.18광주민중항쟁 1 (부상자회)
5·18광주민중항쟁

관련문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0.26사건과 12.12사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경
5.18광주민중항쟁 1
5.18광주민중항쟁 2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1. 광주민중항쟁의 발발-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가.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국무회의가 비상계엄 확대선포안을 의결하자 신군부는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전국 대도시에 신속히 군대를 투입했다.

특히 서울과 광주가 신군부의 주요한 공격 목표였다. 서울에는 1, 3, 5, 9, 11, 13공수여단이 배치되었고 광주에는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전남대와 조선대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수개월동안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온 신군부의 정예부대로서 전투장비를 잔뜩 가지고 내려왔다.

공수부대는 유사시 적 후방지역 깊숙히 침두하여 비정규전을 수행하고 적의 비정규전을 대비하는 특수한 부대다. 평시에는 대침투작전 및 충정작전에 대비하여 교육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공수부대는 강한 훈련과 체력단련을 통해 육군 최강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부대이다.

이 공수부대는 낙하훈련 등과 정기적인 천리행군 등의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임무의 특수함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훈련의 어려움은 일반 보병부대와는 다르게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시켜 최고의 군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수부대를 박정희 정권 이래 소요진압을 위한 충정작전의 중요 수행부대로 사용하여 왔으며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당시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에 투입되어 무력 진압하였다.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7공수여단 33, 35대대 광주투입경위와 병력 및 출동장비 현황

일시 내용 출처
5. 14. 13:40 특전부대 이동을 위한 차량 245대 지원지시 육본, 정기작전보고 80-5
17:05 885수자대, 전남 광주에서 7공수(금마)로 차량 31대 이동 육본, 정기작전보고 80-5
5. 17. 22:30 부대 투입 작전명령 하달 육본, 정기작전보고 80-5
22:37 7공수여단 33, 35대대 금마 출발 육본, 작전상황일지

☞ 자료출처 : 정상용외, 광주민중항쟁, 1990, 돌베개, 156쪽에서 인용

대대 / 구분 33대대 35대대 본부 계 비고
출동 병력 45/321 39/283 10/76 148/1,143 장교 /사병
M16 실탄 24,600발 24,600발  600발 85,880발 개인당 60발
권총 실탄 154발 154발 84발  700발
캐리바50                            630발/1정
개스탄 (사과탄) 100발 100발     400발
M60 실탄 3,200발 3,200발        12,000발
분말 개스 (CS) 3통 3통            12통
차량 ¼톤 1대 1대                     4대
2½톤 19대 18대                       66대

☞ 자료출처 : 정상용외, 광주민중항쟁, 1990, 돌베개, 139, 140쪽에서 인용  

나.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계엄확대로 인한 당국의 연행을 일단 피한 전남대 총학생회 지도부는 계속 상황을 점검하면서 상호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학생지도부의 상당수는 이미 검거되었으며, 검거되지 않은 지도부와의 연락은 두절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불과 몇시간 뒤에 일어날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일단 몸을 피하게 된다.

그 결과 광주민중항쟁의 최초의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의 전남대 교문 앞 시위는 도서관에 공부하러 나왔다가 계엄군에 의하여 제지를 당하게 된 학생들이나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10시에 교문 앞에 모이자'고 했던 당초의 약속을 기억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던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전남대 정문 앞에는 완전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가 교문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휴교령이 내린 사실을 말하면서 학생들에게 귀가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쉽게 돌아서지 않았고, 10시가 넘어서자 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이 정문 앞 다리에서 농성을 시작하였다. 이들의 수가 200∼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자연스럽게 노래와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함성을 지르며 돌격, 진압을 개시하였다. 특수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와 맨손인 학생들의 저항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진압봉으로 가차없이 머리를 갈기는 공수부대원들에게 학생들은 부상자 십여 명을 남긴 채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냥 도망치지 않았다. 뒤로 밀려나는 와중에서도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광주역 광장에 재집결하여 대오를 정비한 300∼400여 명의 학생들은 우선 금남로 도청 앞 광장을 목표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날을 지나서 카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이들이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씨 석방하라''휴교령을 철회하라''전두환은 물러가라''계엄군은 물러가라'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시위대는 아직 소수였으며, 진압경찰에 대항하지 못하고 쫓겨다니는 정도였다.

다. 광주를 무차별 진압하라.-작전명령 '화련한 휴가'

공수부대는 아직은 광주시민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18일 오후까지의 학생시위는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경찰력만으로도 충분히 진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7공수여단은 주둔지였던 대학교내를 나와 오후 1시경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이어 오후 2시경 수창초등학교 부근에는 학생 60여명이 "계엄해제"구호를 외치며 공수부대와 마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오를 정비한 공수부대는 순식간에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무자비한 강제해산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오후 4시경 7공수는 도청방향으로 전진하면서 금남로 및 카톨릭센타, 충장로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시위진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시위진압을 개시하자마자 시위가담여부와 상관없이 도로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리고 구타하였다. 또한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색이 보이면 여럿이 몰려들어 무차별로 때리고 짖밟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람들을 질질 끌고가 트럭에 실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위진압이 아니었다.

오후 5시쯤에는 청산학원 근처에서 처참한 살상극이 벌어졌다. 공수부대가 진입한 곳은 단 30분도 못되어 거리가 조용해졌으며 길 바닥에는 군데군데 핏물이 흥건히 고였다.

이날 계엄군은 전국의 모든 주요도시에 진주하였다. 그러나 계엄확대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학생시위를 감행했던 곳은 오직 광주 뿐이었다. 사실 학생운동 지도부의 지도력이 마비된 상태에 있기는 광주나 다른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의 학생들의 행동지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이미 18일 오후부터 학생시위를 통해 '김대중의 체포와 전두환의 쿠데타' 소식에 접한 시민들은 충격 속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대중이라는 동향 출신 정치인의 핍박과 수난을 자신들의 그것과 동일시 해 온 광주시민들은 그의 투옥을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기대가 무참하게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시민들은 시위학생들에 대해 야만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에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하면서도 이같은 유혈극에 너무도 겁에 질려 항의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7공수부대원들의 행동반경은 금남로 등 시내중심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민가에까지 들어가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팬 후, 옷을 벗기고, 포박하여 연행해 갔다.

단지 소수의 학생들만이 두려움에 떨면서도 서로 격려해가며 7공수병력의 추격을 피해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을 뿐이다. 오후 5시 15분경 전남도청 옆 노동청 앞에 약 500∼600명정도가 모여 시위를 벌였지만 공수부대가 강력히 돌진하자 곧바로 해산된다. 오후 7시경 계림동 광주고 부근에 수백명의 청년, 학생들이 나타나 공수부대에 맞섰지만 역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밤 8시 15분경 금남로 카톨릭센터 앞에 학생, 시민 약 600여명이 대오를 형성하고 공수부대와 투석전을 벌였지만 단 10분만에 해산당하고 만다,

5월 18일의 시위는 이것이 전부였다. 상무대에 있는 전남·북 계엄분소는 오후 6시 '계엄공고 제4호'를 발표하여 자정부터 새벽4시까지였던 통금시간을 밤 9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로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밤 11시 20분경에는 계엄군 1개 지대와 경찰 1개 분대씩을 묶어 광주시내 36개 주요지점에 전투경찰과 합동으로 배치시킨 뒤 삼엄한 경계를 폈다.

5월 18일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 시위진압 행위는 광주시민을 상대로 한 학살극이라 불러야 할 만큼 무자비하고 광폭했다. 그들은 진압봉을 주로 사용했고 부분적으로는 대검을 진압무기로 사용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에 의하면 5월 18일 하루 연행자가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 405명이나 되었는데 이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 등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연행자와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전해진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2. 5월 19일의 상황

가. 11공수여단의 광주 추가 증파

신군부는 7공수여단이 광주시내 도청주변 시위진압 출동이전인 5월 18일 오후 2∼3시경 광주에 11공수여단을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한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5월 18일 점심직후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광주사태가 악화될 조짐이 있어 3특전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자 이를 11공수여단으로 교체할 것을 전언, 11공수여단이 광주에 증파된 것이다. 정호용 사령관은 11공수여단의 광주증파 이유가 "7공수여단의 2개 대대가 소요진압작전을 못하고 고전을 치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7공수여단의 광주시위진압 출동시간은 그런 결정보다 2∼3시간 뒤인 오후 3시 50분에서 4시 사이였다. 따라서 이날의 11공수여단 병력증파 결정은 광주현지 상황의 실제상황이나 현지 지휘관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내려진 것이다.

5월 18일 오후 3시부로 광주 출동명령을 받은 11공수여단은 오후 4시30분경 K-57(성남비행장)에서 C-123 수송기 5대에 탑승, 광주로 이동하여 오후 6시 30분경 광주 조선대에 도착하였으며 잔여부대 병력은 다음날 5월 19일 밤1시50분경, 조선대에 도착하였다.
 
11공수여단 출동병력 및 장비 현황

계 61대대 62대대 63대대 본부
162/1,038 (장교/사병) 43/277 43/306 42/275 34/180

구분 종류 수량 탄약 비고
화기 M-16 1,139정 개인당 60발 대간첩작전 기준에 의거, 각종 탄약을 휴대하였음.
      50MG 2정
      M-60 3정
      M-203 81정
화학 C.S.탄 1,143정
      사과탄(M25 A7) 303정
      화염방사기 6개
통신 P-77 130개
      U-87 18개
      메가폰 12개
기동 2.5톤 차량 4대
      ¾톤 차량 2대
      ¼톤 차량
      방송차 1대

☞ 자료출처 : 평화민주당 광주민중항쟁 백서, 72, 73쪽에서 인용

나. 공포의 금남로

공포와 불안으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인 19일 광주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는 정상수업을 계속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은 대체로 정상근무를 하였지만 일손을 거의 놓고 18일의 공수부대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들이 시내 전지역에 걸쳐서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고, 금남로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서 시민들은 그냥 이렇게 있을 것이 아니라 시내로 나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자며 몇 명씩 짝을 지어 금남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군중은 2,000∼3,000명으로 불어났으며, 자연스럽게 군경의 저지선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이미 학생들은 별로 없었고, 일반 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10시 40분부터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적극적인 해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던 시민들은 그냥 쫓겨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서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 진출하여 시위군중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19일 새벽 4시경 모든 이동을 마친 11공수여단 병력 1,140여명이 시위진압에 나선 것이다.

11시 30분경 다시 공수부대의 시위진압이 시작되면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인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기사, 무등고시학원에서 공부하던 어린 학원생들 그 모두가 그들의 진압대상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으며, 그 안에서 젊은 사람이 발견되면 무작정 두들겨팬 뒤 연행하였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기고 발가벗겨진채 군 트럭에 실려갔다. 당시 광주지역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그들의 작전명칭이 그러했듯 '화려한 휴가'를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시내 중심가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 시가지 전역에 걸쳐서 자행되고 있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잔인한 만행이 백주대로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19일 오후로 접어들면서 시위의 양상은 수세에서 공세로 바뀌는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위의 중심세력이 대학생에서 시민대중으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바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시위진압행위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시민들이 시위대열에 합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을 이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무자비한 손길을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가는 사람 수에 비해 광주 시내 병원시설로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도 정부측에서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하여 아무런 입장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매체들도 계엄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19일 밤, 시위를 마치고 해산한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한 저주와 분노의 일념으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대대적인 민중항쟁의 조건이 조성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항쟁은 신군부 스스로 자초한 또는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이다.

전투교육사령부가 항쟁이 끝난 직후 군의 시각에서 정리한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은 광주시민이 공수부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해산보다는 체포 주안으로 협공, 소요진압간 지역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파괴, 가족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 폭발"

"소요진압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방치로 주민들의 감정을 촉발"

군의 자료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7공수와 11공수여단의 초기진압작전은 정당한 진압이니 과잉진압이니 하는 논쟁자체가 무의미할 정도의 명백한 학살이었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인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내에 한국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3. 5월 20일의 상황

가. 31사단의 반발과 3여단 증파

7여단과 11공수여단은 형식상 광주의 31사단에 배속되었지만 실질적 통제는 신군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 공수부대들은 31사단과 전교사에 작전상황조차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웅 31사장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18일 저녁까지 시내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외부로부터 광주시내의 공수부대 만행을 전해들은 정웅 31사단장은 '31사단 작전명령 제3호'를 통해 유혈진압이 아닌 무혈진압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군부는 '군 충정작전지침 추가지시'를 통해 광주에서 '바둑판식 분할 점령'과 '시위대를 조기에 분할 타격 체포할 것' 그리고 '소요군중의 도피방지책 강구'와 더불어 '과감한 타격'을 가하라고 더욱 강력한 시위진압명령을 내린다.

또한 신군부는 19일 오전 6시 30분경 3여단 5개대대를 다시 광주에 증파하기로 결정했다. 7여단이 시위진압에 투입되기 전에 11여단의 광주 증파 결정이 내려진 것처럼 11여단이 광주시내에 투입된 19일 오전 10시보다 훨씬 이전에 증파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5월 19일 밤 12시, 청량리역에 도착한 3공수여단은 5월 20일 새벽 1시와 1시 10분에 제1 제대 및 제2제대로 부대를 나누어 열차를 이용, 서울을 출발하여 5월 20일 아침 7시 3분과 7시 35분경 광주역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총원은 3,400여명으로 불어났다.

3공수여단 출동병력 및 장비 현황

계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 16대대 직할대
255/1,137(장교/사병) 40/198 47/192 45/205 45/206 44/220 34/116

구분 수량 탄약 비고
화기 M16소총 1,307정 개인당 60발 대간첩작전 기준, 각종 탄약휴대
      권총 85정 개인당 14발
      M60 기관총 5정 정당 2,000발
      M203 104정 개스발사기 : 24정 장약 : 102발 자대 제작, 지역대당 1정씩 사용
화학 화염방사기 9대
      E-8 발사통 6대
      콤프레샤 : 2대
      개스탄 2,880발 C.S.탄 : 1,837발 사과탄 : 1,043발
      진압봉 2,102개                         추가 수령 : 700개
통신 P-77 145대
      U-87 7대                                 대대당 1대씩 사용 통신근무대대 2대 사용
기동 ¼톤 차량 12대
      방송차 1대
      레카차 1대

나. 항쟁의 징후와 첫 발포

지난밤부터 내리던 비는 20일 오전 9시경까지 내리다가 그쳤다. 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비를 맞으며 변두리 지역에서부터 시내 중심가로 몰려들고 있었다. 시내에는 여전히 공수부대가 지키고 있고, 어제의 공수부대 만행으로 보아 오늘은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집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시위대와 공수부대의 접전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어제와 좀 다른 데가 있었다. 그들은 M16소총에다 대검을 착검하지도 않았고, 말씨도 공손했다. 술 냄새를 풍기거나 눈이 벌겄게 충혈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20일 오전은 이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별다른 사건 없이 대체로 소강상태를 이루면서 지나갔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도 10만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이제는 시장의 상인들까지 장사를 치우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시내의 도처에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이 수천매식 뿌려지고 있었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된 광주지역의 사회운동 진영에서 관제언론과 정부의 거짓된 선무방송을 이겨내기 위하여 발행한 것이었다.

오후 3시, 금남로의 시위대는 수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드디어 경찰의 최루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금남로의 시위군중과 경찰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고, 시민들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몰려드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또다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과 시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시민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그중에서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들 결사적이었다. 도청 앞 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에는 시민들의 대열이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흥분한 택시운전사들까지 시민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다. 200여대의 자동차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하여 저녁 7시쯤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이 엄청난 자동차 시위행열은 일시적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다시 새로운 불을 질렀다. 차량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지선 앞에서 대치중이던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이날 저녁 도청 앞 금남로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공방전으로 지옥이 되었다. 공수부대원들은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트라이트를 부수며 전진하였고, 닥치는대로 운전기사들을 끌어내려 두들겨팼다. 그러나 잠시 물러나던 시위대는 공용터미날에서 버스를 타고 온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하여 계엄군을 압박하였고, 계엄군 저지선은 금남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후퇴하였다. 7시 30분이 되면서 금남로에는 전체적인 형세로 보아 시위대가 계엄군을 포위하고, 계속해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계속되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시위대들은 시간이 지나도 흩어지지 않았으며, 밤이 깊어갈수록 쌍방의 공방전은 고조되었다.

이윽고 MBC와 KBS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전혀 보도하지 않고 정부의 발표만을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태도에 극도로 흥분한 시민들이 더 참지 못하고 방송국에 불을 지른 것이다.

이제 시내 곳곳에서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다소 경험을 가진 몇몇 지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아직 무기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주위에서 무기가 될만한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계엄군에 저항하고 있었다.

밤 11시경 광주 신역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신역을 지키고 있던 3공수여단과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고 시위대의 맨 앞의 시민들이 쓰러졌다. 또한 비슷한 시각에 광주세무서 앞과 조선대학교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계엄군은 바로 주요 거점만을 장악하고 있을 뿐항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시외로 통하는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면서 광주를 고립시키고 있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4. 5월 21일 상황

가. 마침내 가자, 도청으로!

20일 자정이 지나 21일 새벽이 되어도 시민들의 항쟁은 그칠 줄 몰랐다. 새벽 1시에 시민들은 세무서로 몰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국민들의 삶과 복지를 위하여 쓰라는 세금이 자신들을 죽이고 두들겨팬 군대와 그들이 갖고 있던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시민들은 경찰서나 기타 공공건물을 오히려 보호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방송국과 세무서 방화는 극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초기에 파출소를 공격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질적으로 달랐다.

항쟁 나흘째로 접어든 21일 아침 지난 새벽의 광주역에서 사망한 시민의 시체 2구가 시민들의 손에 들어왔다. 시민들은 손수레에 시체를 싣고 대형 태극기로 덮어 천천히 시내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식사는 각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하였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제공하였으며, 그외에도 각종 음료수와 부식 등이 지나가는 시위대에게 전달되었다.

오전 10시경, 금남로를 메운 10만여명의 인파 속에는 쇠파이프나 몽둥이로 원시적인 무장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무렵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정부 당국으로서는 처음으로 '광주사태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의 담화문은 '광주사태'를 '불순분자 및 간첩들의 파괴·방화·선동'에 기인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계엄군의 자위권을 강조함으로써 발포명령이 이미 내렸졌음을 암시한 셈이다. 그날 오전 10시 10분경에는 벌써 도청광장에 있던 공수부대에 실탄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나. 도청앞의 집단발포

21일 오후 1시 정각, 도청 건물 옥상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애국가에 때맞춰 일제히 요란한 총성이 터져나왔다.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집단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전일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들이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는 시민들을 겨냥하여 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때까지 약 10분간 계속되었다. 이로써 광주시민들이 간절하게 품고 있던 소박한 '사태의 평화적 해결에의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금남로는 피바다를 이루었다. 시민들로 가득찼던 거리는 적막에 빠졌고 죽은 이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만이 금남로를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태앞에 시민들은 넋을 잃고 분노와 공포감으로 치를 떨었다.

이 집단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당했는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곳에서 최소한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날 도청앞 집단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광주특위 청문회에 불려나온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①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다 ② 실탄은 31사단 병력이 제공한 것이다 ③ 상부로부터 발포명령은 없었으며 대대장급 이상의 현장 지휘관들도 발포명령을 하지 않았다 ④ 정당방위 차원에서 누군가가 먼저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항쟁 1년후 육군본부가 각 부대의 상황일지를 종합·검토하여 정리·편찬한 「소요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동시에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 영광파출소, 금성파출소, 수안파출소의 예비군 무기 피탈과 오후 3시 50분경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로 기록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1988년 12월 21일 광주특위 제21차 청문회에서 80년 당시 광주로 투입된 11공수여단장 최웅은 "예하 대대장들이 그전 -도청앞 발포- 부터 벌써 실탄을 달라고 했지만 절대 발포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21일 아침부터 우리는 윤흥정 사령관에게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했다. ………… 상황이 너무 급히 돌아가고 보니까 부하들의 생존을 보장해주어야 하겠고, 불필요한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병력을 빼야 되겠다, 이런 강한 의지로 한단계 높혀서 결심권자에게 요청을 하였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윤흥정 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의 이런 건의를 받은 사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21일 서울에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받았다. 정호용은 "사태가 악화되자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이 날아와 나는 지휘계통에 있지 않았지만 절대 발포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1988년 5월의 월간「경향」이태원 기자와의 「정호용, 광주사태 책임자 밝히다」라는 인터뷰에서 그 내용을 말한 바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최정예부대인 공수부대의 지휘관들이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현지사령관에게는 발포건의를 하지 않고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발포여부를 묻는 급전을 보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도청앞 발포 명령 책임을 부하들에게 전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예로 아는 군인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하들에게 발포책임을 전가하려는 이들의 행태는 4·19당시 발포명령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을 감수한 최인규를 떠올리게 한다. 발포명령 책임자를 밝히는 일은 광주항쟁 진상규명의 핵심적인 사항이지만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그간 신군부가 구체적인 핵심증거를 5공화국 7년동안 모두 없애버려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다.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시민들은 무장을 서둘렀다. 계엄군의 총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총이 필요했다. 총을 확보하기 위하여 시위대중 일부는 광주 근교의 화순, 나주, 영산포, 장성, 영광, 담양 등지로 달려갔다. 화순 탄광에서는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이 확보되었고, 그외 각지역의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는 카빈 소총 등이 획득되었다. 획득된 무기들은 즉시 광주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들 무장시위대는 광주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고, 계엄군에 맞서 싸우는 '아군'으로 간주되었다. 무장한 시민군은 주로 광주공원에 있는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았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근방, 공원 근방,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비조직적인 시민군이 전투를 벌임에 따라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시민군들사이에 자발적으로 전투지도부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 지도부들은 무기를 소지한 사람들을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편성하였다. 이들은 각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지점으로 배치되었다.

무장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가자 계엄군은 오후 5시 30분 총퇴각이결정되었다. 시민군들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계엄군은 길 양옆에다 M60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뒷담을 넘어 철수했으므로 철수한지 한참이 지나도록 시민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저녁 8시경 시민군 일부가 총을 쏘면서 도청 안으로 뛰어들면서 드디어 시민군은 교도소를 제외한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이날의 총격전으로 광주 시내의 모든 병원들은 총상환자로 만원이었다. 버스나 소형차량들은 주로 부상자나 시체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 의약품이나 일손도 태부족이었다. 의사와 간호원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려고 글자 그대로 신명을 다했다. 또한 병원 앞에는 시위 대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못한 가정주부, 아주머니, 아가씨들이 헌혈을 하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어린이까지도 팔을 걷고 달려왔다. 적십자병원 앞에는 인근 술집아가씨들이 '우리도 깨끗한 피를 가졌다'고 절규하며 헌혈을 간청하고 있었다.

이날부터 전개된 새로운 사태의 하나는 항쟁이 더 이상 광주지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일원으로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미리 송정리로 빠져나가 군용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피신하였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하였다.

5월 21일 계엄군 퇴각은 한편으로는 광주시민들의 투쟁의 결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의 전술적인 작전이기도 했다. 계엄군은 이미 '광주지역의 봉쇄-내부교란-최종진압'이라는 단계적 작전개념을 수립하고 있었다.

한편, 시내의 모든 질서는 '시민군'에 의해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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