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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05 (수) 01:1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42      
[조선] 을미개혁 (민족)
을미개혁(乙未改革)

을미사변(1895.8.20.) 전후 김홍집(金弘集)내각의 이름으로 추진된 일련의 개혁운동. 일반적으로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3차에 걸쳐 추진된 일련의 개혁을 넓은 의미의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제3차 갑오개혁을 을미개혁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개혁이 추진된 기간은 1895년 8월 하순부터 1896년 2월 초순까지로, 이 기간 동안 조선왕후 살해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전후로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논자에 따라서는 을미사변 직후 김홍집내각이 추진한 일련의 개혁을 구분하여 을미개혁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갑오개혁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에 가장 중요한 변화를 가져오게 했으며, 청일전쟁이 개시되는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기 직전까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비록 일본의 강압하에 이뤄졌다고 하지마는, 한국사상에서 그처럼 단기간에, 넓은 부문에 걸쳐, 일사천리격으로 추진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갑오개혁이 전근대와 근대를 획하는 분기점이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조선의 개화파 인사들과 농민층이 개혁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으니 문제가 되는 것을 고쳐 살 길을 찾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명치유신(明治維新, 1868) 이래 조선을 지배하고자 기도해 왔던 일본의 목표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 조선 ‘보호국화’의 기초작업으로서 그냥 침략하는 것은 명분이 약하니, 내정개혁을 표방하여 구실도 만들고 조선의 내정을 운영하기에 편리하도록 바꾸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넓게 보면 갑오개혁은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이었고, 좁게 보면 신내각의 인사들이 일본세력을 업고 추진한 근대화의 일대 개혁이었다. 다만 일본이 청국과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는 개혁의 세세한 부분까지 깊이 간여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갑오개혁에는 조선측 개화파인사들의 구상이 부분적으로는 반영되었다. 때문에 갑오개혁을 순전히 일본의 강요에 의한 타율적 개혁이라고 보지 않고, 일부는 자율적 측면도 있다고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체로 1차 개혁에서는 주로 청국과의 단절을 명기한 것과 왕실사무와 국정을 분리한 점, 그리고 중앙의 제도와 사회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2차 개혁에서는 지방제도를 중심으로 개혁한 것이다. 이처럼 1차·2차 개혁은 국가운영상의 큰 골격을 다듬고 가지를 정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3차 개혁, 즉 을미개혁에서는 일본이 주로 조선 ‘보호국화’를 강행하기 위한 극단적 조치로서 보다 원시적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에 막대한 배상금과 대만·요동반도·팽호도의 할양을 강요하여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였다(馬關條約). 그러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은 마침내 요동을 청나라에 환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환경은 곧바로 조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쳐,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조선 지배 기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을 기용한 반일적 내각이 형성되고, 러시아공사 베베르(W○ber, K., 韋具)의 활약과 함께 민비를 필두로 한 조선정부는 러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환부하게 된 데 이어 조선에서도 실세할 위기에 처한 일본은 조선정부가 러시아쪽으로 접근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비상수단을 취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후의 살해사건이다.

사건 직후 일본공사는 김홍집내각을 등장시켜 조종하였다. 김홍집내각에서는 그동안 중지되었던 개혁을 재개하여 내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의 개혁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을 비롯하여, 종두법시행,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1세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 군제의 개혁, 단발령의 공포 등이다.

군제는 훈련대와 시위대를 해산, 재편하여 중앙에는 친위대 2개 중대를, 평양과 전주에는 진위대(鎭衛隊) 각 1개 대대를 두어 육군을 편제하였다. 또한, 국내의 통신망 확장을 위해 개성·수원·충주·안동·대구·동래 등지에 우체사를 두었다.

교육제도 개혁에서는 〈소학교령 小學校令〉을 제정, 공포하여 서울과 지방 여러 곳에 관립·공립소학교를 설치하였다. 또한 이제까지 사용해 오던 음력을 태양력으로 바꿔,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기하여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건양(建陽)이라는 연호를 채택하였다.

이어 단발령을 공포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망건의 착용을 금지하였으며, 외국 의복의 착용이 무방함을 고시하였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시기적으로 을미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이뤄져, 국민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이른 상황에서 일본의 압제하에 강행된 것이었다. 개혁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왕후의 피살사건에 이어 강행로 시행된 단발령은 전국의 유생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반개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乙未義兵運動). “나의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나의 두발은 자를 수 없다”고 한 최익현(崔益鉉)의 항변은 강제적 단발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부는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중앙의 친위군대와 일본군을 파견하여 진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서울의 병력이 지방으로 내려가자 기회를 이용하여, 신·구러시아공사 스페이어(Speyer,A., 士貝耶)·베베르, 미국대리공사 알렌(Allen,M.N., 安連), 그리고 몇몇 친로·친미인사들의 협조로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피신(俄館播遷)이 이뤄졌다.

그 뒤 김홍집내각이 전복되고 조선에서 우세를 보인 일본의 입지가 추락하였다. 그리고 강제에 의한 개혁이 중단되었으며, 구내각의 인사 김홍집·정병하(鄭秉夏)·어윤중(魚允中) 등 정부의 몇몇 개화파인사들이 서울과 지방에서 각기 피살되었다.

개화에 대한 구상과 경륜을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의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이다. 개혁이 실패한 이유를 조선 대신들의 당파성이나 개혁 의지의 부족 탓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근복적인 이유는 일본의 압제때문이었다.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井上馨)는 조선정부의 각부에 근 40명의 일본인 고문들을 배치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대신들은 빈번한 인사교체로 인해 개혁의 큰 가닥을 잡는 것조차 용이하지 않았다. 또한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던 박영효는 이미 ‘반역음모사건’(1895.7.6.)의 날조로 일본으로 망명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환언하면, 개혁 내용의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인 일반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과도한 간섭과 왕후살해, 단발령의 강행 등으로 크게 반발을 산 때문이었다.

특히 강제적인 단발령 등에서는 일본의 정치적, 군사적, 상업적 목표가 뚜렷이 드러나 조선 조야의 반발을 거세게 받았다. 을미개혁이 초기의 갑오개혁에 비하여 긍정적인 평가와 의미를 상대적으로 덜 받는 이유는 바로 이점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을미개혁이 제한적이나마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는 이유는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근대화에 관건을 이루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舊韓國官報, 舊韓國外交文書, 續陰晴史, 大韓季年史, 尹致昊日記, 梅泉野錄, 勉庵集, 在韓苦心錄, 昭義新篇, 駐韓美國公使官報告, 駐韓英國公使官報告, 駐韓日本公使館記錄, 日本外交文書, 韓國史-現代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3), 韓國史講座-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1), 日淸戰爭と朝鮮(朴宗根, 靑木書店, 1982), 韓末初期義兵運動에 관한 硏究(李鍾春, 淸州敎育大學論文集 18, 1982), 淸日戰爭中 日本의 對韓政策(柳永益, 淸日戰爭을 前後한 韓國과 列强,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4), 韓末乙未義兵蜂起의 背景 및 原因分析(金項,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1986), The Korean Repository, The North-China Herald, Korean-Japanese Politics Behind The kabo-ulmi Reform Movement, 1984-1986(Lew Young Ick,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3, Seatle, 1981), 韓末乙未義兵運動의 起點에 관한 小考(金祥起,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 1986), 近代朝鮮に於ける政治的改革(田保橋潔, 近代朝鮮史硏究, 1944).

<이민원>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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