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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3 (일) 10:1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41      
[근대] 허백련 (진도)
해방후 이나라 화단(畵壇)의 거성(巨星)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

1891년 11월 2일 진도군 진도면 쌍정리에서 태어난 의재 허백련은 남종화의 전통을 꿋꿋이 지켜온 대가로서 75년 동안의 긴 작가 생활을 통해 1만여 점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때는 명치대 법학부에 입학하여 법관의 꿈을 꾸어 보기도 했으나 그림을 잊을 수 없어 곧 중퇴한 뒤 일본 남화의 대가 소실취운(小室翠雲)에게 사사, 남화의 기법을 익혔고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추경산수(秋景山水)」로 1등 없는 2등의 최고상을 차지한 후 그의 작품활동은 본격화되었다.

의재는 일본에서 기법을 익혔으면서도 일본 색채에서 탈피하면서 소치와 미산의 남화산수를 계승하여 굳게 토착화 시켰다. 처음에는 화조, 송하 등에도 손을 댔으나 만년에 들면서 산수화만을 즐겨 그렸으며, 채색을 하는 듯 마는 듯 엷디 엷은 담채(淡彩)가 아니면 묵으로 그린 그의 수묵 산수화는 선이 부드럽고 소박한 것이 특징이다. 짙은 채색이 없어서 화사하지 않는 서민적이고도 토착적인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의재의 화풍은 한국적이면서도 호남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명예 철학박사 학위(전남대학교)를 받았고, 예술원 종신 회원이기도 하였던 진도가 낳은 의재 허백련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아버지는 경언(京彦), 어머니는 박동애(朴東愛)로 다 같은 1870년(병오)생이다. 의재는 양천허씨로 진도에 처음 자리잡은 허씨의 12대 손이며 현재 진도에 있는 대, 중, 계 3파 가운데 계파에 속한다. 대파는 입도조인 허대(許隊)의 큰 손자 즙의 후손이며, 중파는 둘째인 순(珣)의 후손으로 소치와 미산, 남농이 여기에 속하고, 의재는 계파인 셋째 방(芳)의 후손으로 의재 때까지 해서 7대 종가이다. 백련이란 이름은 태어난지 며칠되지 않아 지어졌다. 하루는 어머니 박씨가 꿈을 꾸는데 백발 신선이 나타나 의재를 「백년돌」이라고 불렀다 한다. 꿈을 깬 어머니는 백련돌이란 말은 곧 장수한다는 말로 생각하고 아명을 「백년」으로 지었다. 여기에 아버지 경언이 한문으로 백(百)자와 련(鍊)자로 붙여주어 결국 아명이 본명으로 되고 말았다.

8살 때 의재가 찾아간 서당은 진도읍 동외리 원동에 있었는데 20여명이 다녔다. 선생은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였다. 1889년에 병과에 급제한 뒤 예조참의와 내부참의 등을 지낸 사람이나 1896년 무고를 받고 진도군 의신면 접섬에 귀양 와 있었다. 이것을 안 소치가 진도군수에게 청을 넣어 소치 집이 있는 사천리로 옮겨 왔으며 그 뒤 진도면 동외리 원동에 글방을 열고 글을 가르쳤다. 이 무정을 만난 것이 의재의 인생에 큰 자극을 주었다. 무정은 의재에게 학문과 글씨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주입하기도 했다. 의재가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간 것도 무정의 영향이 컸으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뿌리치고 그림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무정의 격려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 의재가 서당 동무들과 풍월을 즐기던 쌍계사 동남쪽엔 소치가 마련한 운림산방이 자리잡고 있었다. 의재가 쌍계사에 놀러 다니면서 운림산방에 드나들 때 소치는 이미 타계(他界)하였고 그의 아들 미산이 집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의재 선생이 어렸을 때 마을에서 미산의 그림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잠재적인 소질이 싹텄다고나 할까?

의재가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시작한 것은 11살 되던 1901년부터였다. 의재가 미산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어지간한 붓글끼는 익힌 뒤였다. 맨처음 흰 모란을 그리는데 유의해야 할 붓 쓰는 법과 먹 쓰는 법 등 몇가지를 가르쳐 준 뒤 그대로 그려보라 했다. 대개 꽃을 그릴 때는 붓 쓰는 법을, 잎사귀를 그릴 때에는 먹 쓰는 법을 유의하면서 그리도록 가르쳤다. 더욱이 의재 선생의 그림공부를 측면에서 적극 지원한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서당 선생인 무정 정만조였다.

15살이 되자 「의재」라는 호까지 내려 주었다. 의재가 15살되던 1905년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고향 진도에 와있던 안국선이란 사람이 무정과 손을 잡고 당시 진도면 동외리 가마골에 있던 서당 자리에 광신학교를 설립교장이 되었다. 이때 의재 허백련도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던 중 1908년(18살 때) 가을에 의재의 어린시절 중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무정 정만조가 귀양이 풀려 진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의재는 무정의 뒤를 따라 상경하기로 결심하고 서울에 간 의재는 무정 정만조 선생댁에 기거하며 김용식, 지석영 등이 세운 기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당시 한일합방으로 국치를 당하여 그만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에 들어갔으니 그 고생 이루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신문배달 등 일생에 가장 허기졌던 나날이었다고 하니 그런 중에서도 배워야겠다는 일념에 1913년 5월 도오쿄에 온지 두달 뒤 평소에 생각했던 명치대학에 등록하였으나 그해 11월에 그만 집어 치우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 당시 일본 남종화의 제1인자였던 소실취운(1874년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일본 미술전의 심사위원이고 도쿄 미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있었으며 「우에노」공원 옆의 조용한 2층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재의 말을 들은 그는 우선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다. 의재는 입학시험을 치루는 기분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산수 한 장을 열심히 그렸다. 『솜씨가 대단하군. 열심히 하면 대성할 소질이 있다』하면서 자기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의재 허백련 선생은 안정된 일본 생활속에서 그림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알차진 것이다. 우연욕서(偶然慾書)-추사 김정희의 말과 같이 행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림이고 글씨고 하고 싶을 때 그리고 써야 한다』추사가 했다는 이 말은 의재가 오래전에 구전으로 들은 것인데 그림을 그릴 때마다 문득 문득 떠올라 자세를 가다듬게 했다.

1918년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김영수를 만났다. 김영수는 강진 한 부호의 출신으로 변호사였고 일본에서 의재를 많이 도와준 친구였다. 그때 김영수는 불치의 병인 폐병에 걸려 허덕이는 처지라 의재는 일본에 가려던 계획을 잠간 멈추고 김영수를 광주부립병원(전남의대병원)에 입원시키고 병원 옆 여관방에 들었던 것이 후에 의재가 광주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의재는 광주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면서 주로 목포와 강진을 자주 왕래했다. 미산과 김영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특히 목포에 가서는 미산의 소개로 많은 일본인들과도 사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의재는 화순에 있는 박현경의 별장에서 잠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인촌 김성수를 만난 것이다. 당시 인촌은 자기가 세운 경성방직 주식회사가 운영난에 봉착하자 주주인 박현경에게 출자를 요청하기 위해 화순까지 찾아왔다가 의재와 만난 것이다. 동갑인 두 사람은 도쿄에서 헤어진 이후 오랜만에 엉뚱한 곳에서 해후를 했다.

의재는 법률 공부를 집어 치우고 그림을 그리게 된 그간의 사정을 뚝 이야기 했다. 『그래! 어디 그림 구경 좀 하지』 의재는 그간 그려뒀던 그림 몇장을 꺼내 인촌에게 보였다. 그림을 감상하던 인촌은 감탄하며 그 가운데 한 폭을 원하므로 옛 우정을 생각하며 기꺼이 주었다. 그 후 인촌은 그 그림을 가져가 서울에 있는 서화미술회 회원들에게 보였다. 서화미술회라고 하면 당시 유명한 서화가들이 모인 단체로 1911년 3월경성서화미술회로 문을 열었는데 서화가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후진도 양성하는 모임이다. 의재의 그림을 본 회원들은 좋은 그림이라고 감탄을 했다. 그들은 도대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인촌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삼절 허소치의 집안 손자라고 소개를 하여 서울 화가들의 머리속에 의재를 심어 주었다.

1912년 저물어 가는 늦가을이었다. 의재는 금강산을 구경할 생각으로 개나리 봇짐을 챙겨들고 서울과 원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 두달을 머물렀다. 금강산에 들어선 의재는 지금까지 그 많은 금상산의 그림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장엄하고 아름답고 청아한 풍경을 어찌 붓끝으로 그려낼 수 있겠는가. 내, 외 금강을 두루 보고 장안사, 유천사, 신계사 등에서 묵으며 풍광에 취하여 스케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의재의 금강산 소묘는 수십장에 달했으나 6·25동란 중에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금강산 나들이는 그의 산수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의재는 금강산에 다녀온 다음해인 1922년 2월에 서울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나이 30살을 넘어 32살이었다. 동대문 밖 여관에 여장을 푼 의재는 오랜만에 서울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 나갔다가 뜻밖에 고하 송진우를 만났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던 그가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길가에 서있는 의재를 보고 깜짝 놀라며 인촌을 만나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오후에 동아일보사로 오라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사는 의재가 다니전 화동 기호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의재가 찾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고하가 인촌에게 전화 연락을 해주고 찾아 가도록 했다. 동아일보사 취재역이던 인촌은 계동 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 날부터 인촌 집 2층 방을 차지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촌은 항상 내가 어려울 때 나타나 도와준 은인이다. 그의 우정이 오늘날 나를 있게 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고 술회하며 인촌의 우정에 감사했다.

의재는 인촌 집에 있으면서 정말 차분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밖에 나갔다 돌아온 인촌이 조선미술전람회 개최를 알려 주면서 작품을 내라는 것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는 문화 정치를 표방한 총독부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1922년부터 열기 시작했다. 의재는 인촌의 말을 듣고 「하경산수」와 「추경산수」를 화선지 한 장 반 정도의 크기로 그려 출품하였다.「하경산수」는 완전한 묵화고, 「추경산수」는 담채였다. 출품한 2점 가운데 「추경산수」가 2등상을 차지하고 「하경산수」는 입선을 했다. 이때 이당 김이호는 「미인승무도」라는 작품으로 4등을 했다. 그 뒤 일본 명화와 중국 정통화법에 대한 견문을 넓혀 한국의 대가가 되라는 후원회의 격려를 받으며 의재가 다시 일본에 간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의재는 도쿄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여러 친구들과 사귀었다. 무호 이한복, 수운 김용수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김철 수 등이 그때 사귄 사람들이다. 어언 의재 20살 때 처음 서울 유학을 떠난뒤 20여년을 방랑으로 보내면서 34살의 노총각에 22살의 성연옥과 결혼하였고 이제 불혹의 나이 40살이 되었으나 의재의 떠돌이 생활은 여전했다. 1939년 광주에 있는 서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친목단체인 연진회를 만들었고, 1946년에는 일본 사람이 경영하던 차 밭을 구입하여 농업기술학교 건립도 추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4년 10월 21일 단군 무등산 신선인 천제단에서 개천궁 건립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인걸은 세설에 쓰러지는가! 1977년 2월 15일 오후 2시 15분 남종화의 큰 한 별은 떨어졌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또 그림을 그려야지』 평소에 이렇게 말하던 그는 지금도 저승에서 붓을 쥐고 있을 것이다.

출전 : 진도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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