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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2 (토) 11:37
분 류 사전3
ㆍ조회: 1342      
[근대] 광무양전사업 (민족)
광무양전사업(光武量田事業)

관련항목 : 광무개혁

1898년부터 1904년 사이에 광무정권이 전국의 토지를 대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배경]

조선시대에 양전(토지조사)사업은 20년에 한 번씩 하게 되어 있었으나, 18세기 이후 전국적인 양전사업은 1720년(숙종 46) 이후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정(田政)의 각종 폐단이 발생하였고, 이는 19세기 후반 민란과 동학농민봉기를 야기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양전사업의 필요성을 계속 거론하였으나, 재정상의 이유 등으로 전국적인 양전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1894년 갑오농민봉기의 와중에서 성립된 개화파 정권은 개혁사업의 하나로서 양전사업을 실시하기로 하고, 1895년에는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에 의해 중단되었고, 결국 양전사업은 광무정권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진행과정]

광무정권의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1898년 6월 토지 측량에 관한 청의서(請議書)를 의정부 회의에 제출하였다. 의정부 회의에서 이를 통과시켰으며, 국왕은 의정부의 상주를 재가하였다.

이에 따라 7월에는 〈양지아문직원급처무규정 量地衙門職員及處務規程〉이 칙령으로 반포되어 양전을 위한 독립 관청으로서 양지아문이 설치되었다. 이 아문에는 총재관·부총재관·기사원(記事員)·서기·고원(雇員)·사령(使令)·방직(房直) 등의 직제가 있었다.

3명의 총재관은 처음에는 각 부서간의 협조를 위해 현임 내부대신·탁지부대신·농상공부대신이 겸임하였다. 그리고 실무진으로는 양무감리(量務監理)·양무위원·조사위원 등이 있었다. 양무감리는 각 도에서 양전 사무를 주관하도록 되어 있었다.

처음 임명된 양무감리는 경상남도에 남만리(南萬里), 전라남도에 김성규(金星圭), 전라북도에 이태정(李台珽), 충청남도에 정도영(鄭道永) 등이었다. 양무위원은 군(郡) 단위로 임명되었다. 맨 처음 임명된 양무위원은 이기(李沂)·이종대(李鍾大) 등이었다.

기술진으로는 수기사(首技師)·기수보(技手補)·견습생 등이 있었다. 수기사로는 미국인 크럼(Krumm, R.E.L.)이 초빙, 고용되었다. 양전사업은 1898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군 별로 양안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양전사업은 1901년 흉년이 들어 그 해 12월에 중단되었다. 그 때까지 양전사업이 마무리된 곳은 전국 331개 군 가운데 124개 군이었다.

한편, 광무정권은 이 양전사업을 진행하면서 지권(地券)의 발행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1901년 11월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지계 발행사업은 그 성질상 양전사업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양지아문과 지계아문의 통합이 거론되어 1902년 3월 마침내 양지아문은 지계아문에 통합되었다. 그 뒤 지계아문은 지계 발행사업과 양전사업을 병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계아문은 1904년 정부의 재정긴축방침에 따른 정부기구 통합작업에 의해 탁지부 양지국(量地局)으로 개편되었다. 탁지부 양지국은 규정상 지계아문의 사업을 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사업 수행이 곤란하게 되어 양전·지계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때 부임한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다(目賀田種太郎)가 재정 개혁을 따로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무정권이 추진해 온 양전사업은 영원히 중단되고 말았다. 당시에 지계아문이 양전을 실시한 군은 94개 군이었다. 따라서 양지아문·지계아문의 양전은 총 218개 군에서 실시된 셈이다. 이는 전국 총 331개 군의 약 3분의 2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때 작성된 양안은 그 사업이 채 마무리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용되지 못한 채 사장되어 있다가, 1924년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다수가 폐기처분되어 현재는 규장각도서에 39개 군의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광무 양전 당시 작성된 광무양안은 그 이전의 양안과 그 기록 내용에 있어 큰 차이가 있었다. 우선 완전히 새롭게 측량을 해서 지번(地番)을 매겼기 때문에, 같은 토지의 지번이 구래의 경자양안(1720년 작성)의 지번과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또 경자양안과는 달리 광무양안에서는 지형을 도시(圖示)하였다. 또 면적을 척수(尺數)로써 표시하고, 등급에 따라 결부수(結負數)를 산출하여 기록하였다. 또 지주·소작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토지는 시주(時主 : 지주)와 시작(時作 : 소작인)의 성명을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대지(家垈地)의 경우 가옥의 주인과 협호인(挾戶人)의 성명을 함께 기록하기도 하였다. 시작인의 성명 등을 기록한 것은 지세(地稅) 납부자가 시작인인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

광무양전사업은 기본적으로 구래의 토지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면서, 그 토지소유권을 근대법적인 소유권으로 추인한다는 목적, 그리고 양안의 불비에 따른 재정의 곤란, 행정상의 문란 등을 해결하려는 이중의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본의 러일전쟁 도발과 조선보호국화 정책에 밀려 끝내 중단되었다. 그 결과 근대법적인 토지 조사는 1912년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광무개혁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光武年間의 量田·地契事業(金容燮, 亞細亞硏究 31, 1968), 光武改革期의 量務監理 金星圭의 社會改革論(金容燮, 亞細亞硏究 48,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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