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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05 (목) 01:35
분 류 사전3
ㆍ조회: 1350      
[근대] 이동녕 (독립)
이동녕

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1989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터줏대감이었던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은 혁명가로서 그리고 독립운동가로서 조국 광복을 실현시키고자 평생을 바친 독립운동의 화신이었다. 석오의 고향은 현대 독립기념관 터전이 된 충남 천원군 목천면이다. 독림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는 그 터전위에 우뚝선 흑성산의 정기를 이어 받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석오의 그 독립정신은 오늘에도 독립기념관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먼저 석오 이동녕의 정신적인 요체요, 독림운동에서 제일 강조하였던 내용이 담겨있는 어록비의 문안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그 내용은 "동포여! 우리 나라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굳건한 독립을 되찾는 데는 하나는 내 동지들의 단결이요 둘은 우리 동포들의 단결이며 셋은 모든 대한민족이 대동 단결 함에 있으니 오로지 뭉치면 살고 길이 열릴 것이요 흩어지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석오가 1920년 3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장으로 3·1선언 1주년 기념 연설 내용 중 일부이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중국 상해에서 민족운동의 통합체로서 출발된 임시정부의 초대 진용에서 의정원 의장이라는 격에서 석오 이동녕의 당시 독립운동 선상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석오의 독립정신을 이해키 위하여 그의 일생을 개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석오는 17세 되던 1885년경 고향 목천에서 그 일가가 서울로 이주함에 따라 중앙 정치 무대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오는 부친의 직장을 따라 평양·원산 등지를 함께 다니며 문을 넓힐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후 석오는 28세 되던 당시 독립협회가 결성되면서 그 협회의 개신유학자계열의 인물로 참여하면서 본격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즉, 만민공동회의 운영위원, 그리고 독립협회의 간사부 연락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자주의식의 발로인 독립협회 활동을 진압하는 당시 위정자들의 폭압에 의해 이승만·박용만등과 함께 감옥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이후, 1904년에 들어와서는 기독교청년운동의 일환으로 독립운동선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상동교회에서 민족의식 고취에 적극 나서서 자주자강·자립의식을 교육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1905년 일제에 의해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동지들과 그 조약 무효를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여 대한문 앞으로 달려가 혈서로 그 의지를 구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차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후 석오는 더욱 큰 웅지를 품고 북간도로 가서 민족학교인 서전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2세 교육에 앞장 서 그 정열을 바쳤던 것이다. 비록 60여명의 학생 수에 현대적인 교육시설에는 감히 미치지 못하는 상태이었지만 우리말·역사·지리·풍속 등을 열과 성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가 자금부족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자 국내로 들어와 비밀 결사조직체로서의 신민회(臣民會)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신민회의 해외독립운동지지 설정의 일환으로, 만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에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곳에 가 역시 교육에 진력하였다. 이후에는 불라디보스톡으로 가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그곳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산전수전의, 각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수행중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에 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되자, 석오 이동녕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서 민족운동 구심체인 임시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당당히 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당시 상해 임시정부가 출발한 때는 하성·노령 등지에서는 임시정부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에 석오는 이러한 각지의 임시정부를 상해 중심으로 통합시켜 단일화 작업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9월 경에는 단일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동녕은 신내각의 내무총장·국무총리로서 그 소임을 다하였었다. 석오는 내무총장직을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임시정부를 쇄신시키고, 밖으로는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면서 본토 수복을 위한 제 정책을 진행하였다. 당시 발표한 포고문 제1호에서 '고국의 남녀청년에게'라는 제목하에 애국심을 호소하였으니, 그 내용을 보면

"···포악한 적의 수중에 있으면서 자유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여러분들의 고결한 정신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오호 통재라! 조국의 위기를 구원할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여러분이 분기할 때는 또 다시 도래(到來)하였다. 주저함을 허하지 않는 위기는 목전에 핍박하였다··· 세계의 인류는 침을 삼키며 금후 오족(吾族)의 행동에 주목한다. 아(我)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하게 되어질 뿐이다. 적의 심담(心膽)을 서늘하게 하려고 천지를 움직일 만큼 만세를 합창하였다. 세계에 의혹을 풀기 위하여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 국기를 게양하자.···오족의 분기점은 목전에 박두하였다. 오호라! 위대한 자유! 무참한 패망···노력하라. 국가를 의뢰한다.

대한민국 원년(元年) 10월 15일

내무총장 이동녕"

이라고 된 바와 같이, 애절하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역시 같은 날 석오는 포고문 제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라는 것을 통하여 애국고취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으니

"전국민의 분기와 세계의 동정이 제자(諸者)의 이 의거(3·1만세시위운동)에 힘입은 바 적지 않으며, 국가는 영원히 제자(諸者)의 충성에 감사할 것이다··· 단지 독립이라는 것을 전국민이 일치하여 성명함을 필요로 한다. 그 첫째는 아국민이 독립을 요구하는 의사와 요구 그 자체를 일본이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국제연맹에 참가하는 우리의 전권대표를 승인하고, 또한 후원하는 것이다. 동포여! 이 사활(死活) 분기의 지두(指頭)를 당하여 3월 1일의 맹약대로 최후의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용맹한 대한민국의 본성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내용에서는 석오의 인간미와 지칠 줄 모르는 혁명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석오는 포고문 제3호인 '재내외(在內外) 일반 국민에게'라는 데에서 그의 혁명정신의 논리를 새삼 강조하고 있으니

"천리의 순조와 2천만의 성혈로 건설된 임시정부는 정신상의 기초가 공고하여 천하의 하물(何物)이라도 이를 요동할 수 없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세력 범위는 전세계에 확장되고 2천만의 정신은 이에 집중됨을 말아야 할 것이다··· 임시정부가 폐쇄되었다는 등 무언(誣言)하야 항간에 퍼뜨리고 있다.··· 대의를 변절할 이유가 있으리오마는, 혹은 내정을 아지 못하는 동포가 있을까 하여 이에 포고한다···"

임시정부를 조국 독립의 구심체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잘 나오고 있다. 이러한 석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임시정부는 그 기틀을 잡아가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후 1924년에는 대통령 대리, 1927년에는 주석 겸 법무장이 되었다. 이후에도 석오는 임시정부와 함께 끝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1940년 조국 광복을 목전에 두고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위대한 석오 이동녕의 서거에 임하게 된 백범 김구는 추도문에서 "공고노고하신 선생은 우리 민족의 선각자이며 우리 혁명운동계의 도사이시다. 이제 조국광복의 대업이 완성되려 하는 조석에 있어서 믿고 있었던 선생은 떠나 가셨으니 선생인들 어찌 가고 싶어 가셨으리까마는 살아 있는 우리는 노를 잃은 배와 같이 되었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은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아래와 같은 뇌사(腦司)를 선생의 영전에 바치였던 것이다.

"··· 아! 위대하도다. 겸양, 근검, 모든 미덕은 우리 민족의 전범이며 지사의 모형이며 정부의 주석(柱石)이며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며 여러 영수(領袖)의 영수셨도다.

아! 슬프도다. 민족의 거대한 짐을 지고 선생을 길잡이로 세운 우리는 비린 바람과 작탄비를 맞으며 간관만리(間關萬里) 촉남(蜀南)에까지 함께 와서 우리의 통일을 함께 성취하렸더니, 우리의 잔족을 함께 함께 소탕하렸더니, 우리의 대업을 함께 완성하렸더니, 창해파도(滄海波濤)중에 돛대가 부러지도다.···"

출전 : 독립기념관-이달의 독립운동가 1989년 11월

이동녕

독립기념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2000년 4월

임시정부의 터줏대감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올해는 석오 이동녕이 머나 먼 중국땅 기강에서 서거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석오는 구한말에 태어나 20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한 이후, 『제국신문』을 통한 언론활동, 서전서숙·경학사·신흥무관학교의 창설을 통한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등 50여년의 생을 오로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 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석오 이동녕은 1869년 2월 충남 천안군(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문가인 연안(延安)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석오는 조부인 이석구(李錫九)의 문하에서 사서삼경 등 전통학문을 익혔고, 24세 때인 1892년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석오는 유학이라는 전통사상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1860년대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사상의 영향과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청·일 전쟁을 직접 경험하면서 민권·평등이라는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896년 서재필·이상재 등이 설립한‘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각종 상소문과 만민공동회의 참여를 통해 부국강병과 국권수호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이종일(李鍾一) 등이 창간한 민족 언론지『제국신문』의 논설위원으로 날카로운 항일필봉을 휘두르며 민족의식, 근대화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게재하면서 구국언론에도 앞장 선 석오는 상동교회 내에 청년학원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청년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 늑결되자 결사대를 결성하여 을사오적 등 친일매국노에 대한 응징과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데에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06년에는 북간도의 용정으로 건너 가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재만 한인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상설이 고종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헤이그로 떠나게 되자 석오는 귀국하여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총서기라는 직책을 역임하면서 국외독립운동기지 개척사업에 전념하였다. 신민회에서는 이를 위해 서간도를 최적의 장소로 결정하고 몇 차례에 걸쳐 답사까지 마쳤다.

그리고 19 10년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의 유하현 삼원보로 망명한 석오는 이회영 형제 등과 함께 한인자치 단체인 ‘경학사(耕學社)’ 를 설립하여 재만 한인의 안전과 권익신장,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신흥강습소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되었다.

1914년 석오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 가 이상설·최재형 등이 결성한 한인자치단체‘권업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대한 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의 결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권업회는 재러한인동포의 권익보호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독립군의 양성을 통하여 독립전쟁론의 구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기관으로 191 4년에 건립한 것이 대한광복군정부였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1914년 9월에 해체되었다. 1차세계대전에 일본과 함께 연합군으로 참전한 러시아 정부가 한인지도자들의 정치·사회활동을 일체 금지, 탄압하면서 한인지도자들에 대한 체포·추방령 등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블라디보스톡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진 석오는 1919년 3월에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서는 3·1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국내로부터 들어와 독립임시사무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분주하게 활동 중이었다. 석오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을 수행하였다.

석오는 이후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특히 임시정부가 이념의 분화와 갈등,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 등으로 내분이 계속되고, 또한 국무령의 미취임과 이에 따른 내각조직의 실패 등으로 임시정부가 존폐의 곤경에 처했을 때, 백범 김구를 국무령으로 추대하여 임시정부를 곤경에서 구해 낸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석오는 또한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등 독립운동정당에도 참여하여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석오는 임시정부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이후 불가피하게 상해를 떠나 중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고난과 시련에 처할 때마다 백범 김구를 뒤에서 후원·지지하면서 임시정부를 항일독립운동의 최고지도기관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기둥이었다.

임시정부가 기강에 도착하여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파견하는 등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정당의 통합노력 등 일제와의 결사항전을 준비하던 중인 1940년 3월 13일에 석오는 차디찬 기강 땅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석오가 마지막까지 강조하였던 것은 대동단결이었다. 독립을 위해서는 모든 이념과 파벌, 지위고하를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의 유해는 1948년 9월 백범 김구의 주선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1962년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의 항일독립운동선상에서의 업적을 기렸다.

출전 : 독립기념관-이달의 독립운동가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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