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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06 (일) 23:09
분 류 사전4
ㆍ조회: 729      
[삼국] 백제 (한메)
백제 百濟

삼국 시대 고대 국가 중의 하나. 서력 기원 전후에 성립되어 마한 소국들을 병합하면서 한강 유역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이왕(古爾王;재위 234∼285) 때 고대 국가의 기반을 갖추었으나 660년 신라에게 멸망하였다.

[역사]

<성립>

백제의 건국설화로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2가지가 실려 있다.

하나는 온조왕(溫祚王;재위 BC 18∼AD 28) 중심의 설화로, 온조왕은 고구려 건국자인 동명성왕(東明聖王;재위 BC 37∼BC 19)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앞서 부여에서 낳은 유리(瑠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그의 형 비류(沸流)와 함께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지금의 仁川)에, 온조는 한강 북쪽 지금의 서울 부근에 있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으나 비루가 죽자 그의 무리들을 통합하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비류 중심의 설화로, 비류와 온조왕은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동명성왕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동명성왕에게 개가하여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동명성왕의 원자가 태자가 되자 비류는 온조왕과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2가지의 설화로 미루어 볼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 세력은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이 분명하다. 온조왕 집단은 남하한 뒤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 그 뒤 하남위례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가졌다가 후기에 온조왕계로 넘어간 시기는 초고왕(肖占王;재위 166∼214) 때로 짐작되며,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왕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고이왕 때에 이르면서 연맹체의 영역도 확대되어 한강 유역의 새로운 맹주 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마한을 결합, 통일의 지도권을 잡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 고이왕은 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여 지배 체제의 확립을 도모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토대를 갖추었다.

<외세와의 투쟁>

고이왕 때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그 뒤 몇 번에 걸친 왕위 교체 후 근초고왕(近肖古王;재위 346∼375) 때 와서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근초고왕은 왕권을 강화시켜 내적으로 기반을 다진 뒤 대외 정복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냈으며, 마한의 나머지 땅을 합치고 북으로는 대방군(帶方郡)의 땅을 점령하여 낙랑군을 차지하고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371년에는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재위 375∼384)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게 하여 평양성까지 쳐들어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1)을 죽였다. 그뒤 조금 후퇴하여 수곡성(水谷城) 부근에서 고구려와 상대하였다.

당시 전진(前秦)ㆍ고구려ㆍ신라의 3국연맹에 대항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동진(東晉) 및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이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396년(아신왕 5)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재위 391∼413)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임진강 유역을 잃었고, 399년에는 신라와 가야에 침입했던 일본군이 고구려군에게 소탕되어 백제의 위치는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개로왕(蓋鹵王;재위 455∼475) 때에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의 압력이 한층 심해져 백제는 중국의 북위(北魏)를 통하여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려 하였으나 실패, 475년(文周王 즉위년)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함락되고 개로왕도 사로잡혀 죽었다.

따라서 같은해 문주왕(文周王;재위 475∼477)이 즉위하자 서울을 웅진(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기고 국가 재건에 힘썼다. 그러나 초기의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고, 문주왕이 피살된 뒤 삼근왕(三斤王;재위 477∼479)을 거쳐 동성왕(東城王;재위 479∼501)이 즉위하였다. 당시 백제는 서해의 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 세력이 이탈해 나가는 등 국제적 고립 위기에 있었으나, 동성왕이 신라 왕족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하는 등의 노력으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성왕이 백가의 난으로 피살되자 뒤를 이어 무녕왕(武寧王;재위 501∼523)이 즉위하였다. 그는 난을 평정한 뒤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국제 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안정된 기반을 바탕으로 성왕(聖王;재위 523∼554)은 중흥과 왕권 강화의 목적에서 538년 사비(지금의 扶餘)로 천도하여 국호를 한때 남부여(南夫餘)라 하였다. 그는 신라와 화친하고 남조(南朝)의 양(梁)나라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나라의 부흥에 힘썼고, 551년에 신라와 연맹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같이 북상하였던 연맹국인 신라가 군대를 되돌려 벡제가 점령한 지역을 빼앗고 말았다. 이에 분격한 성왕은 554년 약속을 어긴 신라군을 관산성(管山城)에서 공격하다가 실패하고 전사하였다.

<멸망>

관산성 패전 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에 대해 무왕(武王;재위 600∼641)은 왕권을 회복하고자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기도 하고, 익산(益山) 천도로 귀족 세력의 재편성을 계획하였으나 무산, 좌절되었다.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은 초기에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를 강화하고, 신라를 공격하는 등 국권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심화되고 무절제해진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로 백제의 지배 질서는 문란해졌다.

그 결과 660년 3월 나ㆍ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마저 항복함으로써 31왕, 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의자왕이 항복한 뒤 흑치상지(黑齒常之)ㆍ복신(福身)ㆍ도침(道琛) 등에 의한 백제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당(唐)나라에서 설치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잠시 통치되다 신라의 판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도]

<정치>

《삼국사기》에 의하면 260년(고이왕 27) 중앙의 초기 관제인 6좌평(佐平) 16관등(官等)이 마련되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근초고왕 때까지는 그 대략이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평은 행정부의 장관으로서 내신(內臣)ㆍ내두(內頭)ㆍ내법(內法)ㆍ위사(衛士)ㆍ병관(兵官)ㆍ조정(朝廷) 좌평을 말하며,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16관등제는 솔계관등(率系官等)ㆍ덕계관등(德系官等)이 핵심이 되고, 좌군(佐軍)ㆍ진무(振武)ㆍ극우(剋虞)는 하부 구조를 이루었다.

그 뒤 538년(성왕 16) 사비에 천도, 새로이 22부(部)를 마련함으로써 6좌평 16관등 22부제가 정비되었다. 22부는 왕실ㆍ궁중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중앙의 정무(政務)를 맡아보는 외관(外官) 10부로 이루어졌다. 한편 6세기 초까지 지방에는 22담로(擔魯)가 설치되고 여기에 왕족이 임명되어 지방 행정을 맡아보았다.

사비 시대에는 서울을 5부(部)로, 전국을 5방(方)으로 나누었는데, 각 부는 500명의 군사를 거느린 달솔(達率)이 다스렸으며, 각 방의 중심인 방성(方城)에는 700∼1000명의 군사를 배속시켜 방령(方領)ㆍ방좌(方佐)가 이를 통솔하게 하였다. 방 밑에는 많은 군(郡)이 설치되었고 군에는 군장(郡將)이 있어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다스렸으며, 한편 요지(要地)에는 성(城)을 쌓아 수비병을 두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는 5부 37군 200성(또는 250현)이었다고 한다.

<사회ㆍ경제>

지배 신분층의 중심은 왕실이었으며,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를 성립시켜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 토착세력의 족장들은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하여 갔다. 이들은 지배군(支配群)을 형성하여 국가의 정치를 맡아보고 국토 방위에 앞장을 섰다.

일반 평민들은 귀족의 사전(賜田)이나 국가의 대여지(貸與地)를 경작하고 조(租)ㆍ용(庸)ㆍ조(調)를 부담하였으며, 부역과 병역의 의무가 있었다. 이들 평민 밑에는 노예가 있었는데, 노예는 주로 전쟁포로ㆍ형벌ㆍ구매ㆍ약탈ㆍ채무 등으로 생겼다. 이 중에서도 전쟁포로가 노예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형벌은 매우 가혹하여 살인자ㆍ반역자는 물론 전쟁터에서 퇴군(退軍)한 자도 참형(斬刑)에 처하였으며, 여자를 범간(犯姦)한 자는 그 여자 남편의 노예가 되었고, 도둑질한 자는 유형(流刑)에 처하는 동시에 훔친 물건값의 2배를 배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살인자가 노예 3명으로 형벌을 모면하는 제도도 있었다.

토지 제도는 국유제를 원칙으로 하였으나, 부분적으로는 국유제를 전제로 한 촌락 공유제도 병행하였다. 당시 왕은 최대의 지주였으며 공신에게 식읍(食邑)ㆍ사전 등을 주었다. 일반 백성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경작하는 대신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조세 형태는 물납(物納)으로서 전조(田租)로는 포(布)ㆍ견사(絹絲)ㆍ마(麻)ㆍ미곡(米穀) 등을 그 해의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어 냈다. 이 외에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던 호조(戶調)도 시행하였으며, 또한 부역도 지게 하였다.

백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조ㆍ피ㆍ수수ㆍ콩ㆍ보리ㆍ팥 등은 선사시대부터 심어온 것이지만 벼농사는 비교적 늦게 시작되어,33년(다루왕 6) 무렵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물자의 유통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의 농업 경제에서 수공업은 자급 자족을 목적으로 어느 정도 발달했고, 직조술ㆍ염색술ㆍ금속 공업도 발달하였다.

교환 수단으로는 귀금속이 등장하여 대외무역에 쓰이고 퇴장 화폐(退藏貨幣)의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는 곡물과 천이 화폐의 구실을 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상업도 발달하여 시장을 관리하는 도시부(都市部)라는 관청까지 설치되었다.

[문화]

<학문>

고대 국가 형성 이후 백제는 귀족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 도덕으로서 유교를 중시하였다. 유교의 확대ㆍ보급으로 국사도 편찬되었는데, 근초고왕 때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편찬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한문학도 발달하여, 초기부터 교육 기관에 시(詩)ㆍ서(書)ㆍ역(易)ㆍ예기(禮記)ㆍ춘추(春秋)의 오경박사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였고, 기타 각종의 전문(專門)에 관한 박사가 있었다. 그 중에는 일본에 초빙되어 가서 그들의 문화에 공헌한 사람도 적지 않다. 무녕왕 때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ㆍ고안무(高安茂) 등을 일본에 보냈고, 다음의 성왕 때에는 오경박사 유귀(柳貴)와 의박사(醫博士)ㆍ역박사(易博士)ㆍ역박사(曆博士) 등을 보냈으며, 그 후에도 이러한 전문가를 교대로 파견하여 일본의 상대 문명을 계발, 지도하였다.

541년(성왕 19)에는 중국 양(梁)나라에서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를 청구한 것을 보면 백제 학술의 수준이 상당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 국민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일에 열중하였지만 경사(經史)를 읽어서 문장에 능한 자도 많았다.

<종교>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으로써 불교가 시작되었으며, 후에 계율종(戒律宗)ㆍ삼륜종(三輪宗)ㆍ성실종(成實宗)의 3종파가 생기고, 한산불사(漢山佛寺)ㆍ왕흥사(王興寺)ㆍ미륵사(彌勒寺)ㆍ수덕사(修德寺)ㆍ경복사(景福寺) 등 유명한 절이 건축되었다.

백제의 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도장(道藏)은 일본에 건너가 성실종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혜총(惠聰)ㆍ도침 등의 고승이 연이어 일본에 건너가 일본 불교와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밖에도 겸익(謙益)은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율부(律部)》 72권을 옮겼다.

한편 백제에서는 도교가 어떠하였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으나 최근에 발견된 <산경전(山景塼)>이라는 백제 때의 벽돌에 도사와 비슷한 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은 신선 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왕 때의 작품인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에는 세련된 문장의 노장 사상이 나타나 있다.

<예술>

백제의 음악에 관해서는 기록이 적어 상세히 알 수 없으나, 일본에 악공(樂工)ㆍ악사(樂師)ㆍ악기(樂器)를 전한 사실을 보아 고구려나 신라에 못지않게 발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존하는 백제의 대표적 건축물은 석탑으로, 부여의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백제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목조 건물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여, 초층(初層) 탑신의 부재(部材)는 모두 다른 돌을 사용하였고, 기둥 위의 3단 층계받침이 있고 옥개석이 넓게 퍼져 추녀 끝이 들려 있다.

당시에는 백제 기술자들의 기술이 높이 평가되어 신라에서도 경주(慶州)의 황룡사구층탑을 쌓을 때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불러갔다. 그 밖의 건축물로는 임류각(臨流閣)ㆍ태자궁(太子宮) 등 궁실 누각과 대통사(大通寺)ㆍ왕흥사ㆍ미륵사 같은 대사찰의 이름이 기록에 남아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없고,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몇몇 사지(寺址)가 발굴된 정도이다.

회화는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송산리(宋山里)와 부여군 능산리(陵山里)에 각각 1기의 벽화고분이 있고, 공주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비 두침(頭枕)에 그려진 세화(細畵)가 있다. 석등ㆍ기와 등에도 백제 미술의 우수함이 나타나 있는데 와당(瓦當)의 연꽃무늬를 보아도 고구려의 것은 지나치게 힘찬 것만을 표현한 데 비하여, 백제의 것은 온화하고 아름다운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백제가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남조(南朝)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토기는 고구려ㆍ신라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드러운 곡선과 정교한 무늬, 회백색의 기표(器表)ㆍ색조에서 오는 온건한 조형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윤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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