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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6 (목)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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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분쟁 (두산)
아랍이스라엘분쟁 Arab-Israeli wars

아랍 제국(諸國)과 이스라엘의 대립.

I. 개관

일명 중동전쟁이라고도 한다. 긴 역사적 배경과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서 제2차 세계대전 후 중동지역에 끊임없는 긴장을 몰고 왔으며, 4차에 걸친 전쟁까지 겪어야 했던 이 중동분쟁은 아랍·이스라엘 양민족의 숙명적인 대립에서 유래한다. 즉, 기원전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한 유대인은 망국 후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으나 조상의 땅인 가나안의 언덕으로 돌아갈 것을 민족의 비원(悲願)으로 삼아 왔다.

이 '시오니즘(Zionism)'은 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재건하려는 정치운동으로 전환해 갔다. 한편 예루살렘은 636년 이슬람에게 공략되었고,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에 의해 점거됨으로써 이슬람교도에게도 성지(聖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전쟁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독일측인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교란을 위해 아랍인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에 대해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모순된 언질(아랍에 대해서는 맥마흔선언, 유대에 대해서는 밸푸어선언)을 주었던 것이 이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전후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밸푸어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국가재건을 약속받은 유대인이 내주(來住)하면서 이곳에 정착하고 있던 아랍인과 충돌이 생기게 되었다.

II. 제1차 중동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대 난민의 대량 유입으로 분쟁이 격화되자 영국은 분쟁의 해결을 국제연합에 위양하였다. 1947년 제2차 국제연합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과 유대의 쌍방에 분할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은 영국군의 철퇴와 동시에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자 5월 16일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측 약 2만의 병력이 팔레스타인에 침입, 전세는 당초 아랍측이 우세하였으나 이스라엘의 공세로 아랍측은 패퇴를 거듭하였다. 이 사이 국제연합의 팔레스타인 조정관 백작 B.W.베르나도테가 유대인 과격분자에게 암살되는 불상사도 있었으나 국제연합의 조정으로 1949년 2월 휴전이 성립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 결과 100만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고 이른바 아랍게릴라가 조직되었다.

III. 제2차 중동전쟁

제1차 중동전쟁의 휴전 후에도 사태는 악화를 거듭하여 쌍방은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였다. 1952년 7월 이집트에서는 혁명이 발발, 왕제가 붕괴되고 공화제가 실시되었다. 1956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G.A.나세르는 그해 7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하여 이스라엘로 향하는 선박의 통항을 거부하고 티란해협을 봉쇄하였다. 이로써 큰 타격을 입게 된 영국 ·프랑스는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한 2일 후에 수에즈운하를 공격하였다.

전세는 3국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미국의 압력, 소련의 위협, 국제여론의 악화 등으로 영국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국제연합은 긴급특별총회를 소집하여 11월 14일 즉시 철수와 유엔군 파견 결의를 채택, 정전(停戰)과 감시를 위한 유엔긴급군을 편성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고, 영국 ·프랑스는 연내에, 이스라엘은 1957년 3월에 점령지로부터 철수하였다.

IV. 제3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서전의 기습공격으로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V. 제4차 중동전쟁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전력의 재건을 서둘렀고, 아랍게릴라는 1969년경부터 파괴활동을 격화하였다. 요르단에서는 1970년 9월 화평에 반대하는 게릴라와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있었다. 1970년 9월 28일 대통령 나세르의 급서로 M.A.사다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사다트는 이스라엘 기습을 계획하여 1973년 10월 6일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이스라엘 공군과 탱크대를 소련제 미사일과 로켓으로 격파, 서전을 승리하였으나, 북부에서는 시리아군이 패퇴하여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이에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22일 미 ·소공동제안에 의한 즉시정전, 1967년의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242호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이 채택되고, 당사국의 수락을 얻어 같은 날 정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연말에는 제네바에서 중동평화회의가 개최되고, 1974년 1월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병력격리협정이 조인되어 그 이행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군이 파견되었다. 이 전쟁 중에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는 석유전략을 발동, 생산제한과 금수(禁輸)를 실시했기 때문에 세계는 심각한 석유위기를 겪어야 했으며, 각국 경제는 막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VI. 이후 정세

1977년 11월 19일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이집트 경제재건의 길을 이스라엘과의 화평에서 찾고자 내외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을 결행했으며, 이스라엘의 총리 베긴도 이집트를 방문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미국의 대통령 J.E.카터는 1978년 9월 메릴랜드주(州) 캠프데이비드에서 카터 ·사다트 ·베긴 3국 수뇌의 비밀회담을 추진함으로써 중동화평은 크게 진전하였다.

9월 17일에 ‘중동화평의 개요’와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의 개요’의 2개 문서가 조인되었고, 10월 12일부터는 워싱턴에서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조약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은 이집트의 움직임에 아랍 강경파는 크게 반발하였고, 또 이집트 ·이스라엘의 당사국 사이에서도 기본적 입장의 차이가 해소되지 않아 평화조약의 조인기한인 12월 17일까지 양국의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아 조약교섭은 그 후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교섭의 교착을 타개하기 위해 1979년 3월 대통령 카터는 총리 베긴을 미국으로 초치(招致)하여 새로운 제안을 한 다음 직접 이집트를 방문, 대통령 사다트와 회담 후 이스라엘로 가서 총리 베긴과 회담하였다. 교섭은 결렬 직전인 12일 타결로 향했으며, 13일 대통령 사다트가 미국의 신제안을 수락하고, 14일 이스라엘 각의도 그 제안을 수락, 26일 워싱턴에서 대통령 카터 입회하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30년 동안에 4회씩이나 대격전을 벌였던 양국의 전쟁상태에 종지부가 찍혔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며,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승인하여 정상의 외교관계를 수립함을 골자로 한다. 조약 발효 후 이스라엘은 3년 예정으로 단계적으로 점령지에서 철수하고, 1980년 1월에 양국은 대사를 교환한다는 내용이다. 현안의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의 자치에 관해서는 조약 발효 후 1개월 이내에 자치권부여의 교섭을 시작하여 1년 이내에 종료시키되, 최종적인 지위를 정하는 교섭은 1985년 4월 이후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중동분쟁의 중심이 되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이 아직도 모호하기 때문에 태반의 아랍 제국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심한 반발을 나타냈으며, 단독화평으로 나간 이집트의 배신을 비난하며 이른바 이집트 제재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이 조약이 중동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며 아랍 제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포괄적 평화로 이어질 수 있는가가 의문시되었다.

게다가 1981년 10월 이집트대통령 사다트의 피격사망, 동년 11월 미국대통령 카터의 선거패배,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그 해 8월 PLO 의장 아라파트의 베이루트 철수 등 격동하는 중동정세의 변화는 중동평화의 정착을 요원한 앞날로 밀어내고 있는 듯 하더니 1993년 팔레스타인을 대표한 PLO와 이스라엘이 9월 상호승인을 교환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에 관한 타협안을 마련, TV화면을 통해 전세계인이 양측 수뇌의 서명장면을 시청하였다. 이 사실로 중동에 전면적 평화가 올 것이 기대된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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