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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6 (목) 20:41
분 류 사전2
ㆍ조회: 1808      
[현대] 중동전쟁 (한메)
중동전쟁 中東戰爭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으로 시작된 아랍 여러 나라와 이스라엘 사이에 벌어진 수차례의 무력충돌.

아랍·이스라엘 분쟁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 대규모의 전투국면은 제1차중동전쟁(1948∼49, 팔레스타인전쟁), 제2차중동전쟁(1956, 수에즈전쟁), 제3차중동전쟁(1967, 6일전쟁), 제4차중동전쟁(1973, 라마단전쟁;이스라엘측에서는 속죄일전쟁이라 한다) 등 4차례 있었으나 그 밖에도 전투는 여러 형태로 계속되었다.

대규모적 전투는 제4차중동전쟁을 끝으로 그쳐 아랍 여러 나라와 이스라엘의 국가적 공존을 노리는 중동평화 구상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변화와 함께 제3차중동전쟁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에 대한 게릴라투쟁이 극심해졌기 때문에 아랍 여러 나라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1970년 요르단정부가 일으킨 <검은 9월단 사건>, 1976·84∼85년 레바논내전에서 시리아군의 팔레스타인 특공대 공격 등) 아랍 여러 나라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무장투쟁에 대해 공동으로 공격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중동의 전투상황은 레바논내전(1975∼), 이란·이라크전쟁(1980∼) 등 아랍내전도 일어나 이미 <아랍 여러 나라 대 이스라엘>이라는 도식으로는 중동전쟁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아랍 여러 나라와 이스라엘 관계가 무력충돌에 의하지 않고 중동평화를 모색한다 해서 중동평화가 반드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며 중동전쟁, 중동평화 모두 중동을 둘러싼 국제정치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중동]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은 아랍세계에 여러 문제를 던져 주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19세기 후반에 동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생긴 <시오니즘운동>은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의 향토(국가)건설을 보장한다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여 영국위임통치령이었던(1923∼48)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살게 되었고 아랍 농지를 사들여 살 터진을 마련했다.

특히 1930년대 유럽에서 나치주의가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강화하자 국가 건설이 급속도로 추진되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유대인 국가의 실체를 나타낼 만큼 이주가 확대됨으로써 1945∼46년에는 유대인 이주자가 팔레스타인 인구의 31%, 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다. 1947년 시오니즘운동은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 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 쌍방에 주권을 부여한다고 하는 팔레스타인 분할결의를 얻어내었고 이듬해 영국의 위임통치가 종료된 후 국제연합의 승인을 받아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은 건국되었다.

국제연합은 이주자 유대인을 팔레스타인 민족으로 보고, 유대인 국가를 실제 국가로 인정하여 이미 차지한 땅을 휠씬 넘는 팔레스타인의 전체 60%에 해당하는 국토를 할당했다. 그러나 시오니즘운동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민족의 독립을 반대하고 아랍주민을 쫓아내어 오직 유대교도만으로 나라를 이루려는 유대인들의 건국운동이므로, 팔레스타인내 아랍주민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영국이 시오니즘운동을 인정한 것은 팔레스타인 주민 내부의 분열과 아랍민족 독립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 걸쳐 넓은 세력권을 가졌던 오스만제국의 쇠퇴로 인해 중동사회가 동요하게 된 19세기, 중동에 대한 전략적 지위의 중요성(특히 석유)을 노리는 유럽 여러 나라는 중동사회가 가진 종교적·민족적 다양성을 이용하여 중동의 내부적인 분열과 대립을 부채질하였다.

제1차세계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국민혁명으로 해체되자 구 제국령인 아시아지역은 유럽 여러 나라에 의해 분할되고 아랍지역은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아랍 여러 나라는 각각 <대 시리아주의>와 <비옥한 초승달지대>를 구상하는 등 아랍지역의 일원적 지배의 야망을 품기도 하고 레바논 등은 <그리스도교도 국가>의 의욕을 품기도 하여 아랍인들의 내분과 대립이 조장되었으며, 정치·경제·종교·사회체제가 다른 제각각의 국가가 유럽 대국의 지배하에 하나로 편성되어 현재의 중동지역 원형이 이루어졌다.

제2차세계대전 뒤 중동에서 발생한 분쟁의 구조적 요인은 다음과 같다. 제2차세계대전 말기부터 중동 여러 지역에서는 그리스와 터키 등의 국내변혁요구운동, 아랍제국독립운동, 아제르바이잔인과 쿠르드인 등의 소수민족독립운동이 극심해지고 때 맞추어 동서대립 상황이 국제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2차세계대전 뒤 세력이 약화된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해서 미국이 트루먼독트린과 마셜플랜 등 강력한 군사·경제원조를 발동하며 중동의 위기적 사태 즉 중동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개입하게 되었다.

미국과 서유럽은 중동의 한 귀퉁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가 있으므로 3종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성지를 독점하게 되었고 아랍 국가들의 민족운동 발전을 국가의 안전이라는 구실로 막아 중동의 내부 분열과 대립을 조장하기 쉬웠다. 이렇게 해서 미국과 서유럽은 전략적·경제적 요충지가 된 중동에서의 안정적 지배를 기대했다.

이슬라엘 건국은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의 추방>이라는 새로운 중동문제를 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반아랍국가의 등장으로 중동을 분쟁지역으로 만들었다. 이스라엘 건국으로 시작된 중동전쟁은 유럽의 식민지 이스라엘과 미국·서유럽에 예속된 아랍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을 막기 위한 <간섭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이 중동분쟁의 구조적 요인이다.

[중동전쟁의 전개]

이스라엘 건국 후 시작된 제1차중동전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진 팔레스타인인과 아랍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한 의용군은 참전 즉시 전열에서 쫓겨났고 전쟁은 <아랍여러 나라 대 이스라엘>의 도식으로 전개되었다. 아랍측 군대는 내부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영토적 야심을 품은 요르단과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의 상호불신 등의 문제로 서로 보조를 맞추지 못했고 각국의 무기도 영국이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측이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전황을 이끌었다.

1949년 이스라엘과 아랍 각 참전국마다의 휴전협정에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이집트·요르단 사이에 분할되고 이스라엘은 국제연합 분할결의 때보다 많은 팔레스타인령을 차지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몰수한 방대한 아랍인 토지와 가옥·묘지 등을 1949년의 부재자 재산법에 따라 무인부동산(無人不動産)으로 취급하여 국가에 이관했고, 전화를 모면하기 위해 이웃 아랍 나라로 피난했던 팔레스타인 거주 아랍인들을 귀국하지 못하게 막았다.

여기서 팔레스타인인의 추방·난민화가 시작되었다. 제1차중동전쟁 직후부터 아랍 여러 나라가 완전한 민족독립이나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아랍민족주의 폭풍에 휘말리는 데 맞서서, 미국·영국·프랑스·이스라엘 등은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한 간섭체제를 구축해나갔다. 1950년 미국·영국·프랑스 등 3국선언에서 아랍과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공급을 제한하는 한편, 미국은 이스라엘에 대한 원조를 강력히 계속하고 미국과 영국에 의한 전 중동 규모의 군사동맹 즉 중동방위사령부 구상과 바그다드조약기구 등을 통해 명목상으로는 반공을 내세웠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랍 여러 나라의 혁명을 저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제2차중동전쟁은 이집트혁명(1952)이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선언(1956)으로 연결되면서 이스라엘·영국·프랑스 등 3국이 이집트를 공격하는 간섭전쟁의 형태로 아랍 여러 나라의 민중결속 수행을 위한 혁명의 저지와 이스라엘령 확장 등이 겹쳐 일어났다. 이 전쟁 결과 중동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쇠퇴되어 이라크혁명, 레바논·요르단의 위기, 이집트·시리아의 합병 움직임 등 아랍민족주의가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대두되는 가운데, 미국은 국왕제를 취하고 있는 여러 나라를 기축으로 아랍민족주의에 대한 제동을 거는 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 예멘혁명 등 아랍 여러 나라에 사회주의 조류가 높아지는 가운데, 아랍 안의 진보파 체제 대 이슬람동맹 대립이 격화되었다. 1966년 시리아에서의 아랍부흥사회당인 바스당 좌파정권의 수립, 요르단왕국의 위기, 이집트·시리아공동방위조약의 체결 등으로 양자의 대립은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기회를 포착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게릴라활동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쪽으로 군사적 공격을 강화하여 이집트와 시리아가 대 이스라엘공동방위태세를 취하게 되자, 미국을 선두로 각국이 <국제수로의 자유항행권> <국가의 생존권>에 대한 국제적 요구를 두 나라에 강요하는 상황에서,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해 전면공격하는 제3차중동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와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제압하여 성지 예루살렘과 시리아의 고란고원까지 점령했다. 아랍 진보파체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나 1967년 11월 국제연합결의 제242호의 채택이 그 뒤 중동평화지침이 되어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역 여러 나라의 생존권이 보장되고(팔레스타인인 민족자결권의 부정) 이스라엘군의 점령지에서의 철수가 요구되어 이를 요르단과 이집트가 수락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지역을 포함한 점령지를 수중에 거두는 대신 많은 아랍·팔레스타인 난민을 떠맡게 되었다. 그 결과 아랍 여러 나라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존재를 부정하기가 어렵게 되어 W.로저스의 제안(1970)으로 미국 주도하의 중동평화를 조성할 움직임을 보였다.

1973년 10월 아랍 측의 기습작전으로 시작된 제4차중동전쟁은 결국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랍 산유국(OAPEC)의 석유무기화로 세계경제가 큰 타격을 입기도 했으나 그 뒤 미국 국무장관 H.A.키신저의 노력으로 중동평화는 활성화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1974·75)와 시리아(1974) 사이에서 병력을 갈라놓는 데 조인했고, 1982년 대 이집트, 1983년 대 레바논의 상호평화협정 체결(대 레바논평화협정은 1984년 파기)이 겨우 성립되면서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력충돌로 발생했던 중동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제3차중동전쟁 이후 아랍 여러 나라나 이스라엘 점령지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난민의 군사투쟁은 팔레스타인 민족자결권 요구를 내세워 국제적 여론의 지지와 함께 전개되어 중동평화에 최대 장애가 되었다. 아랍 석유 붐과 중동 경제개발로 1970년대 아랍 여러 나라의 도시 주변 난민캠프나 막벌이 노동자가 많이 모인 빈민굴에서는 종교와 이민족임을 초월하여 빈민들이 결속, 민족자결권을 요구하는 사태가 표면화되었다.

국가지배를 초월하여 발전하는 항만 여러 나라나 이집트 도시폭동, 레바논내전, 팔레스타인 점령지와 난민캠프의 민중저항, 이란·이슬람혁명 등 민중운동 조류는 중동 여러 나라의 체제적 안정을 흔들어 중동위기의 사태를 재차 재촉하고 있다.

<김일상>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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