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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14 (화)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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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50      
[근대] 에스파냐내전=스페인내란 (한메)
에스파냐내전 -內戰 Spanish Civil War

1936년 7월부터 39년 3월까지 에스파냐에서 인민전선정부에 대하여 군부와 우익의 여러 세력이 일으킨 내전.

[내전의 발생]

1936년 2월 16일 에스파냐에서는 총선거의 결과, 공화주의자·사회당·공산당의 협력에 의한 인민진선이 우익인 국민전선에 대하여 승리를 얻고, 19일 공화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M.아사냐를 수반으로 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은 1931년의 제2공화정 성립 이후 격심해졌던 국내의 정치적 대립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1934년 10월의 반(反)파시스트 정부 봉기에서의 정치범 석방과 농지개혁, 가톨릭교회의 특권 축소 등의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대중은 철저한 사회변혁을 바라고 있었다. 특히 에스파냐에서 강력하였던 아나키스트계의 노동자·농민은, 인민전선정부의 의향을 뛰어넘어 혁명화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자유주의적인 중간층이나 사회당·공산당의 지도하에 있는 노동자 등은 인민전선 정부에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대자본·지주·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우익의 여러 세력은 군대를 중심으로 해서 은밀히 정부타도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음모는 F.P.H.T.프랑코 등 몇 사람의 장군을 지도자로 해서 추진되어 갔다.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의 주둔군 봉기를 계기로 다음날 18일 군부가 에스파냐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프랑코는 카나리아제도에서 쿠데타 선언을 방송하였다. 반란은 단기 결말을 노린 쿠데타로 시작되었으나, 노동자의 저항 등 인민전선 정부측의 반격에 부닥쳐,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프랑코의 지휘하에 모로코에 거점을 확보한 반란군은 독일·이탈리아의 원조를 받아 본토에 상륙하였고, 그 후 장기적인 내전에 들어갔다.

[내전의 국제화]

군부의 반란에 재빨리 대처한 이들은 노동자들이었다. 에스파냐의 양대 노동조합인 노동전국연합(CNT:아나키스트계)과 노동총동맹(UGT;사회당계)은 무기를 노동자에게 분배할 것을 요구하고, 마드리드·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자와 시민이 무기고와 총포점을 습격하여 무기를 입수하고 반란군과 싸웠다. 1936년 7월 19일 J.히랄이 새로이 공화제파(共和諸派)에 의한 정부를 조직하고, 노동자단체를 무장시킬 것을 결정하였다.

군부의 봉기는 같은 달 20일까지 에스파냐 본토에서는 카디스와 세비야를 제외하고는 거의 진압되었다. 모로코에서는 반란군이 거점을 쌓았지만, 해군의 대부분이 반란군에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모로코로부터 본토로 군대를 수송할 수 없었다. 반란군을 총지휘할 예정이던 산흐르호 장군은 사망하고 다른 유력한 지도자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 봉기에 성공한 프랑코 장군이 반란군의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원조를 구하매 독일과 이탈리아의 비행기가 모로코로 보내졌다. 이 양국의 개입 규모는 확대됨과 동시에 내전과 더불어 장기화하게 되었다. 독일이 프랑코측에 제공한 경제원조는 약 5억 4000만 마르크로 추정되며, 에스파냐에 보낸 병력은 약 1만이었다. 이탈리아는 독일의 2배인 약 68억 리라의 경제원조를 주었고, 보낸 병력은 약 7만 2000이었다. 또 A.O.사라자르 독재하의 포르투갈은 프랑코측을 지지하고, 국토를 독일·이탈리아군의 통로와 군수품의 수송로로서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본래 군대의 쿠데타로서 시작된 것이 단시일 내에 내전으로, 또한 국제적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초기의 전국과 영국·프랑스·구소련의 대응]

1936년 8월 모로코에서 본토로 상륙한 프랑코군은 북상하여 마드리드를 향하였고 또 북쪽의 레온·갈리시아 지방을 제압하여, 같은 해 9월 말에는 마드리드를 거의 반원형으로 포위하였다. 그리하여 에스파냐 본토는 공화국정부에 남겨진 지역과 반란군(내셔널리스트라고 자칭)에 점령된 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영국·프랑스 양국 정부는 공화국이나 내셔널리스트의 어느 쪽도 원조하지 않는다는 <불간섭>원칙을 제창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브름이 인민전선정부의 총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며, 그는 에스파냐의 공화국측을 원조할 방침이었으나, 영국의 압력과 국내의 우익이 위협하는 바람에 굴복, 불간섭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불간섭정책은 유럽 여러 나라에 받아들여져 불간섭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협정은, 합법정부로서의 공화국정부가 무기를 구입할 권리를 빼앗는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공화국측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독일·이탈리아의 무력개입은 계속되었고, 구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1936년 10월 말 공화국측에 전차·비행기·대포 등을 보냈다. 구소련에서 보낸 인원은 약 2000명 정도로서, 대부분은 기술적인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멕시코의 카르데나스정권도 에스파냐공화국에게 무기를 보냈다. 미국은 에스파냐내전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석유자본은 프랑코에 대한 석유 공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공화국측의 내부사정]

공화국측에서는 마드리드를 비롯한 많은 도시에서, 시민들이 프랑코측에 호의적인 분자를 체포하고 또 교회를 불태우기도 하였다. 귀족과 부호들은 프랑코군 점령지역으로 달아났다. 경영자나 지주가 도망한 기업이나 토지는 인민전선 정당들의 대표에 의해서 관리되었고, 궁전이나 대저택은 노동자조직의 시설로 이용되었다. 제2공화국의 과제였던 토지개혁은 여기에서 그 실현의 기회를 맞이하였고, 프랑코군측으로 달아난 지주의 토지이용을 농민들에게 허락하였다.

아라곤 지방에서는 아나키스트에 의한 농업의 집산주의화(集産主義化)가 개시되었다. 집산주의란, 작은 촌락이나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협동조합과 비슷한 조직으로 공동작업이나 소비의 배분을 하는 것으로서, 그 규모나 형태는 똑같지 않았다. 카탈루냐에서는 공장의 대부분이 노동조합에 수용되었고, 자산가·경영자 등은 도망하거나 투옥되었고, 더러는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와같이 공화국측 내부사정은 내전 전에 비하여 두드러지게 변화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노동자가 부분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이 중요하다. 히랄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국정부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로 이루어졌고, 이전부터의 국가기구를 장악했으며, 사회당·공산당은 이것을 각외(閣外)에서 지지하고 있었다. 군부에서도 합법적인 공화국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일부가 있었다. 또, 카탈루냐에서는 자치정부의 대통령 L.콤파니스가 아나키스트를 포함하는 민병위원회나 경제평의회를 설치하여 노동자에 의한 군사와 경제의 관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는 정부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사회혁명에 일어선 것이었다. 아나키스트가 강한 지역에서는 상류계급이나 교회에 속하는 자에 대한 테러리즘이 통제도 없이 자행되는 등, 반란군에 대한 전투에는 불필요한 행동이 많았지만, 정부는 이것을 단속할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아나키스트의 조직이었던 이베리아 아나키스트연합(FAI)이나, 그 산하의 노동조합인 노동전국연합(CNT)은 인민전선협정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프랑코 등의 반란에 대하여 인민전선정부를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혁명의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반프랑코 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인민전선정부를 옹호하고 공화국의 질서를 확립한다는 전제에서 좌익세력들의 통일을 주장한 것은 공산당이었다. 1936년 9월 4일 히랄내각은 퇴진하고 노동자의 신망을 얻은 F.라르고 카바예로가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는 사회당·공산당 등도 입각시켰고, 또 11월에는 아나키스트를 입각시켰다. 공산당원이 부르주아지와의 연립내각에 들어가고, 또한 아나키스트가 정부기관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입각하였다.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성급한 혁명주의를 억누르고 아나키스트의 민병을 흡수하여 일원적인 정부군으로 개조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아나키스트측은 무기를 입수할 수단으로서 입각하였다.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얻는 채널이 되었으며, 내전 개시 후 그 세력을 두드러지게 신장시켰다. 공산당은 흩어진 민병조직을 정규군으로 전환하고, 지휘계통을 일원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내전의 실태]

에스파냐내전의 특징은 처형과 보복살인의 횡행이었다. 좌익의 테러리즘이 자연발생적이었고 격정적으로 이루어진 데 비하여 반란군측에 의한 테러는 조직적·계획적이고, 또 대량이었다. 전장에서의 전사자수는 10만∼15만으로 추산되지만, 처형 또는 보복살인은 공화국측에서는 약 2만, 반란군측에서는 내전후의 처형을 포함하여 약 30만∼40만 가량의 처형 또는 대량살인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반란군측에 의해 살해된 사람 중에는 시인 F.가르시아 로르카가 있었다. 그는 공화국측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던 것이다. 철학자 M.우나무노는 반란군의 반지성주의와 야만적인 행위를 비판했으므로 반란군에 의하여 연금되었다가 곧 죽었다. 외국의 신문기자도 반란군의 점령지역에서 추방되어 군에 의한 테러를 보도할 수가 없었다. 또 인민전선측, 특히 아나키스트의 교회 방화나 성직자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해는 온건한 민중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프랑코 체제의 형성]

원래 프랑코군은 대중운동으로서의 기초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카를로스당이나 팔랑헤당 등의 재야 우익단체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코는 내전의 과정에서 내셔널리스트측의 지도적 지위를 획득하고, 1936년 10월 스스로 <통령(統領)>을 자칭하고, 팔랑헤당으로부터 그 대중용 이데올로기를 차용하여, 이 당을 테러부대로 이용하였다. 팔랑헤당의 지도자 M.프리모 데 리베라는 1936년 3월에 인민전선측에 체포되어 같은 해 11월 처형되었다.

그 후 팔랑헤당에는 다른 지도자를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프랑코는 팔랑헤당과 카를로스당을 흡수하여 자기 지배하의 정당으로 조직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4월 내셔널리스트파의 모든 당파를 합동하여 <전통주의자(카를로스당)와 JONS의 에스파냐 팔랑헤>라는 신정당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팔랑헤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호세 안토니오가 창립한 것과는 조직적으로 달랐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1936년 11월, 프랑코정권을 에스파냐의 정통정부로 승인하였다.

[마드리드 방위전]

에스파냐내전의 특색으론 국제의용군의 활동을 들 수 있다. 1936년 10월 프랑코군은 마드리드시 교외까지 육박하여, 11월 6일에는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E.헤밍웨이·A.말로·G.오웰 등의 작가가 에스파냐에 간 것은 유명한데, 그 밖에도 이 무렵 영국·프랑스·미국 등 많은 나라의 지식인과 노동자, 또 독일·이탈리아로부터 망명자들이 공화국의 방위에 감격과 동정을 보내고 에스파냐에 모여 무명의 병사로서 총을 들었다.

그들은 국제여단으로 조직되어 마드리드의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 국제의용병을 조직적으로 에스파냐에 보내는 데 힘쓴 것은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당시의 공산주의자 국제조직)이었다. 이들 의용병의 숫자는 3만∼4만으로 추산된다. 공화국정부는 마드리드에서 발렌시아로 옮겼는데, 마드리드는 그 후 2년 반 정도 유지되였다.

<노파사란(놈들을 통과시키지 말라)>이 마드리드시민의 구호였다. 마드리드시의 공방전이 장기화하는 동안에 전국(戰局)은 점차 공화국의 패색이 짙은 쪽으로 기울었다. 프랑코군에 대한 독일·이탈리아의 무력원조와 영국·프랑스의 불간섭정책이라는 상황하에서는 공화국측이 압도적으로 불리하였다.

[게르니카 폭격]

에스파냐내전은 일면으로는 중앙집권에 대한 지역자치의 투쟁이기도 하였다. 내전 개시 후 곧 바스크 지방은 자치정부를 만들었고, 보수적인 가톨릭교도도 공화국을 지지하고 있었다. 1937년 4월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공군의 콘돌병단은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하였다. 화가 P.피카소는 게르니카 폭격에 분개하여 명작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이후 바스크 지방을 제압한 프랑코군은 바스크의 자치를 빼앗고 바스크어를 금지시켰다. 가톨릭교도도 공화국을 지지하는 한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 게르니카 폭격과 바스크탄압으로 프랑코는 국제여론의 비난을 받았다.

[공화국의 패배]

내전 동안 프랑코측이 통일을유지하였음에 비하여 공화국측은 구성요소가 점차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에스파냐 공산당의 세력 신장은 동시에 당시의 I.스탈린적인 정치지도의 과오를 에스파냐에도 받아들이게 하였다. 구소련에서의 <숙청>이 에스파냐에서도 실시되어, 반프랑코 세력의 내부에 치명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의 시가전에서 공산당은 아나키스트 및 반스탈린적 마르크스주의자를 일소하였다. 공화국측은 정치적 위기가 계속되고, 카바예로 내각을 대신한 네 그린내각 또한 이미 기운 대세를 만회시키지는 못하였다. 1939년 1월 바르셀로나는 함락되고, 3월에는 마드리드도 함락되어, 내전은 프랑코의 승리로 돌아갔다.

[내전의 총괄]

에스파냐내전은, 에스파냐의 역사상 19세기의 카를리스타전쟁에 이은 최대규모의 내전이었다. 왕당파·교회·군부·지주 등에게는 내전은 제2공화정을 타도하고, 전통적 에스파냐를 재흥하기 위한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에스파냐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전통적 세력의 지지를 받고 노동운동을 진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공화파 부르주아지로서는 제2공화정의 과제가, 프랑스혁명을 에스파냐에 실현시키는 일이었다. 또, 사회당이나 아나키스트의 노동운동에서는 러시아혁명의 임무를 다하는 것, 즉 자본주의사회의 타도가 목표였다. 이 두 혁명의 과제가 동시에 제시되었다는 것은, 당시 에스파냐 사회 구조의 복잡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파시즘 제국의 대두라는 유럽 정세의 변화가 에스파냐 국내의 대립을 자극하고, 또 에스파냐 내부의 움직임이 국제대립을 격화시켰던 것이다. 당시 유럽의 국제대립은 정치 이데올로기상의 대립과도 연관되어 있었고, 에스파냐는 이데올로기의 싸움터이기도 하였다.

<김현욱>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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