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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2 (목) 16:55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886      
[근대/현대] 근현대의 미술 (민족)
미술(근대 및 현대의 미술)

세부항목

미술
미술(한국미술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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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근대 및 현대의 미술)
미술(참고문헌)

근대 한국 미술의 전개는 전통적 수법의 변화 있는 계승과 서양 문화 수용에 따른 서양식 방법의 급속한 정착으로서의 두 흐름이 병존하는 시대적 특수성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문화 상황의 형성은 느닷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적 합리성과 실증적 가치관 그리고 창조적 개성주의를 근대적 문화 정신의 특징이라고 할 때, 근대 한국 미술의 직접적 배경은 정선과 김홍도 등의 18세기 사실주의였다.

그 새바람은 바람직하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76년의 개항(開港)에 이은 1882년부터의 미국·유럽과의 수교로 인한 서양 문물의 유입 그리고 개화 사상의 급격한 번짐 등이 관념적 가치관에서의 탈피와 새로운 움직임을 계속 자극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미술’이라는 포괄적 의미의 새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적 한국화 외에 양풍 회화(洋風繪怜)가 나타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서양식 조각·공예·건축이 근대 미술의 전개를 다채롭게 하였다.

그러나 그 자율적 움직임은 1910년의 국권 상실 이후 일제 식민지 형태의 미술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내면은 1945년의 광복 때까지 지속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근대 및 현대 미술의 시대적 구분에는 여러 관점이 있겠다. 그러나 1945년까지 또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를 근대, 그 이후를 현대로 설정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근대]

(1) 한국화 전통

회화의 근대적 전환기에 활약한 대표적 화가는 안중식과 조석진이었다. 이들은 19세기 후반의 탁월한 화가인 장승업에게 직접·간접으로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인물(주로 신선도)·산수·화조·기명절지(器皿折枝)·영모(翎毛) 등 모든 화제에서 풍부하고 폭넓은 기량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거의가 관념적 전통주의 수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과 일본을 내왕하며 안식을 넓힐 수 있었던 안중식의 1910년대 작품 중에 근대적 사실주의를 시도한 작품이 몇 점 있을 따름이다.

1911년 근대적 미술 학교를 지향한 서화미술회(書怜美術會) 강습소가 창덕궁 왕실 후원으로 개설될 때 화법 지도를 맡은 중심적인 선생은 안중식과 조석진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1920년대 이후의 전통 회화를 새 방향으로 이끄는 재능 넘치는 새 세대들을 배출함으로써 신진 양성에서도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난초 그림으로 유명한 김응원(金應元)은 서화미술회에서 문인화법을 가르쳤다. 일찍이 중국에 유학한 김규진(金圭鎭)은 대나무와 난초를 비롯한 묵화와 글씨에서 활달한 필치를 발휘하며 독자적으로 서화연구회를 개설하여 후진을 지도하였다.

1920년대 초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들은 인습적 중국 화풍의 테두리는 말할 것도 없고, 형식적 필법 위주의 어떠한 옛법〔古法〕의 추종이나 답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화법 추구와 연구를 염두에 둔 시대적 변화를 조성시켰다.

1920년 시인 변영로(卞榮魯)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동양화론〉에서 한국화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시대정신과 새 화법의 절실함’을 역설한 일은 그러한 변화를 계몽적으로 촉구한 것이었다.

1921년부터 해마다 열린 민족 사회의 서화협회전람회와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으로 운영한 조선미술전람회의 동양화부 출품 및 경연을 통하여 부각된 신예들은 대체로 세 가지 경향의 작품 양상을 보였다.

하나는 전통적 필법을 계승하되 주제를 사생(寫生)에 입각한 친근한 현실 풍경의 수묵 담채화 계열이다. 서화미술회 출신의 신진이던 이용우(李用雨)·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과 변관식(卞寬植) 등이 그 주도자들이었다.

그들은 1923년 동연사(同硏社)라는 이름의 연구 모임을 만들고, 전통 회화의 창조적 새 방향을 실천적으로 적극 시도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박승무(朴勝武)도 처음에는 그 경향이었다.

또 하나의 경향은 역시 생활 주변의 현실미를 사실적으로 대상 삼은 정밀하고 섬세한 선묘 채색화 지향이다. 서화미술회에서 공부한 김은호(金殷鎬)와 일본 유학을 한 이한복(李漢福) 등이 취한 시대적 화취(畵趣)였다. 최우석(崔禹錫)도 한때 그러한 채색화를 그렸다. 앞의 두 경향은 양화의 현실적인 사실주의와 일본화의 근대적 채색주의에서 자극과 영향을 받고 있었다.

제3의 경향은 종래의 화법으로 형식적·정신적 전통주의를 고수하려고 한 허백련(許百鍊) 등의 태도였다. 1930년대의 새 세대들은 전통 화단의 시대적 움직임을 한층 활기 있게 하였다.

그들은 주로 조선미술전에서 각광을 받으며 화단에 진출하였다. 김은호의 문하생인 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 등은 스승의 채색화 기법을 배워 여인상과 꽃 등을 주제로 작풍을 더욱 다채롭게 하였다.

그리고 이상범의 제자인 배렴(裵濂)과 그밖에 여러 경로로 화가의 길을 연 허건(許楗)·이응로(李應魯)·김영기(金永基) 등도 스승의 화풍으로 혹은 자신의 필법으로 향토적 실경의 수묵 담채화를 자유롭게 그렸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으로 인한 현저한 일본화 취향의 채색화에는 민족 사회의 반일 감정을 수반한 비판이 따르기도 하였다.

1940년을 전후해서는 김정현(金正炫)·김화경(金華慶)·안동숙(安東淑)·박내현(朴崍賢)·천경자(千鏡子) 등의 화단 진출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확실한 활동은 광복 이후에 이루어졌다. 한편, 1936년에 중단될 때까지 서화협회와 그 전람회를 이끈 고희동(高羲東)과 이도영(李道榮)은 명성에 비하여 작품 업적이 뚜렷하지 못하였다.

(2) 양화

우리 나라에 서양화 기법이 중국의 북경(北京)을 통하여 알려지고, 서울의 일부 화가가 초상화와 동물화에서 그 수법을 원용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양화〉 항목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나오는 유화 해설 등은 19세기 전반 이전의 서양화법 지식과 더불어 적극적인 관심을 알려 주는 기록들이다. 1880년대에 시작된 구미와의 외교적·문화적 교류는 서양화법의 자연스러운 수용의 배경이 되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새롭게 정착된 서양식 학교 제도의 교과 과목 중의 〈도화(圖怜)〉는 바로 서양화법을 따른 것이었다. 1899년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중국을 거쳐 서울에 와서 고종 황제와 황태자(뒤의 순종)의 전신상(全身像)을 생동감 넘치는 사실적 묘사의 유화로 그린 일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최초의 정상적 서양화법의 접촉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양화가의 탄생은 1910년대에 가서야 보게 된다. 동경의 미술 학교에 유학한 고희동과 김관호(金觀鎬)·나혜석(羅蕙錫) 등이 처음으로 서양화법을 전공하고 돌아온 것이다. 1920년대에는 이종우(李鍾禹)·도상봉(都相鳳)·김주경(金周經), 뒤이어 오지호(吳之湖)·길진섭(吉鎭燮) 등이 등장하여 한국 양화 개척에 활기를 더해 갔다.

1930년대에는 여러 경로로 더 많은 양화가가 출현하여 뚜렷한 양화계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화는 대체로 본고장인 유럽의 근대적 내면과는 거리가 먼 일본 양화의 초창기 수준을 배운 데 지나지 않았다. 화가의 개성적 특질이나 자유로운 창조성은 미흡했다. 거의가 초기 단계의 사실적 표현과 보편적 구도의 인물화·풍경화·정물화의 범주였다.

고희동은 1920년대 중엽 이후 사회의 몰이해를 이유로 유화 제작을 스스로 포기하고 전통 회화로 전향하였다. 미술 학교 시절 특출한 재질을 발휘하여 주목을 샀던 김관호의 활동도 10년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다. 유화의 예술적 작품성에 대한 전통 사회의 일반적 이해 부족 내지 냉담은 오래 계속되었다. 때문에 양화가들의 사회적 작품 행위는 활발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에는 두드러진 신예가 속출하였다. 김종태(金鍾泰)·김중현(金重鉉)·이마동(李馬銅)·이인성(李仁星)·이봉상(李鳳商)·심형구(沈亨求)·김인승(金仁承)·박영선(朴泳善) 등이다. 그들의 다양한 작품 역량은 양화계에 확연한 발전을 나타냈다. 1940년을 전후해서는 김원(金源)·윤중식(尹仲植)·손응성(孫應星)·조병덕(趙炳悳)·박득순(朴得錞) 등이 주목을 사기 시작하였다.

극히 소수였으나 미국과 유럽에 가서 수학하고 온 유화가의 존재는 민족 미술계의 양화가 일본 수준의 테두리에서 직접 세계성을 지향하려고 한 실마리였다. 1920년대 초 미국과 독일로 유학한 임용련(任用璉)·장발(張勃)·배운성(裵雲成), 그들보다 약간 늦게 파리로 갔던 이종우·나혜석·백남순(白南舜) 등이 그 촉매자들이었다.

귀국 후 그들이 서울의 양화계에 뚜렷이 새바람을 조성시킨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일제 총독부 주관의 조선미술전람회를 배격하며 1934년 이마동·김용준(金瑢俊)·길진섭·구본웅(具本雄) 등과 조직하였던 목일회(牧日會 : 뒤에 牧時會로 명칭을 바꿈) 동인전에 참가한 그들의 구미 수법의 작품은 표현 기법과 색채 구사에서 참신하고 독특하였다.

그들과는 달리 김주경과 오지호는 국내에서 프랑스 인상파의 색채와 빛의 미학으로 한국의 자연미를 표현하려 하였다. 구본웅은 동경에서 유럽의 야수파와 자유로운 표현주의에 공명한 뒤 그 경향의 대담한 작품으로 서울 양화계의 창조적 이단자가 되었다. 그밖에 조선미술전에서 최대로 각광받은 이인성은 독학에도 불구하고 천부적 재기로 다감한 기법의 수채화와 유화 기량을 발휘하였다.

1940년을 전후하여 동경에서 전위적인 순수조형주의와 추상주의 작품을 적극 추구한 김환기(金煥基)·유영국(劉永國)·이규상(李揆祥)은 새로운 미술의 탐구파였다. 주경(朱慶)도 추상 작품을 충동적으로 손댄 화가였다. 그밖에 독자적 표현주의로 신선한 창작성과 민족적 정서를 나타낸 길진섭·이중섭(李仲燮)·이쾌대(李快大)·최재덕(崔載德) 등이 있었다.

(3) 조각·공예·건축

이 분야의 근대적 전개도 서양 미술 수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이었다. 종래의 한국문화 형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서양풍이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술적 조형성에만 치중되는 양풍 조각 미술이 한국에서 처음 수용된 것은 1920년대 초기에 김복진(金復鎭)이 동경의 미술 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뒤를 이어 문석오(文錫五)·김두일(金斗一)·이국전(李國銓) 등이 동경 유학을 거쳐 근대 조각 개척에 기여하였다.

1940년을 전후해서는 김경승(金景承)·윤효중(尹孝重)·김종영(金鍾瑛)·윤승욱(尹承旭)·조규봉(曹圭奉) 등이 등장하여 조각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은 초기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미술전 조각부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석고 습작의 나부상과 소녀상, 그밖에 인물 두상(頭像) 등이었다. 당시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윤효중의 몇몇 목조 작품과 1970년대에 주물화된 윤승욱과 김경승의 청동 작품 정도이다.

근대적 공예 미술의 인식이 사회적으로 넓혀지기 시작한 것은 1932년부터 조선미술전에 공예부가 개설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그전에는 각종 전통 공예의 기능적 전승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모든 종류의 입체적 공예와 시각 디자인을 포괄하는 이 분야에도 동경의 미술 학교에 유학한 작가의 탄생이 있었다. 도안 전공의 이순석(李順石), 건칠과 염색 및 도예 분야의 강창원(姜菖園)·김재석(金在奭) 등이었다. 김진갑(金鎭甲)·장기명(張基命)은 조선미술전에서 목칠 공예로 두각을 나타냈다.

벽돌과 석재의 양풍 건축이 한국의 전통적 목조 양식과 대체된 양상의 근대 건축은 1880년대부터 서울과 전국의 도시에서 서서히 정착되어 갔다. 초기의 등장은 주로 외국 공관과 성당 및 교회 건물이었다. 서울에 현존하는 옛 벨기에 영사관 건물과 명동 성당, 정동 교회 그리고 덕수궁 석조전 등이 그 기념물들이다. 그 초기 양풍 건축의 설계자는 서양인 아니면 일본인이었다.

한국인 근대 건축가의 활동은 1920년대에 가서야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문적 교육을 받고 공공 건물·학교·은행·신문사·오피스 빌딩·개인 저택 등을 설계한 박길룡(朴吉龍)·박동진(朴東鎭)·김윤기(金允基)·박인준(朴仁俊)·강윤(姜鈗) 등이었다. 1930년대 이후에는 이천승(李天承)·김재철(金在哲)·김희춘(金熙春) 등이 진출하여 건축계의 근대적 움직임도 궤도에 오리게 되었다.

[현대]

1945년의 광복은 그간 일제에게 상실당하고 혹은 변질당했던 민족적 자율성의 회복과 자주적 미술 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전환점이었다. 그것은 광복과 더불어 이내 등장한 대학 과정의 미술 전문 교육과 그를 배경으로 한 새 세대의 배출 그리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미술계 움직임과 다채로운 작품 양상 및 다양한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1) 한국화

일제 강점기에 전통 화단에 침투하였던 일본 화풍은 필연적으로 배격되었다. 문제는 새로운 정신과 창조적 수법으로서의 한국화 추구와 전통 계승이었다.

1946∼1948년에 거듭 동인전을 가지며 새로운 민족 회화 창조를 다짐했던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 회원 이응로·김영기·장우성·이유태·조중현·배렴 등의 의욕은 광복 직후 전통 화단의 의지를 대표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1949년부터 정부 정책으로 운영된 국전의 동양화부는 현대 한국화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출한 신진이 그 관문을 통하여 계속 배출되었다. 서세옥(徐世鈺)·박노수(朴魯壽)·장운상(張雲祥)·권영우(權寧禹)·안상철(安相喆)·나상목(羅相沐)·김옥진(金玉振) 등은 1950년대 국전에서 수상하며 각광받은 신예였다.

국전에서 심사를 맡거나 중진·원로로 참여한 허백련·김은호·이상범·노수현·변관식 등의 존재와 그들의 서로 다른 특질적 화필 세계는 현대 한국 화단의 커다란 울타리로 작용했다.

그들의 뒤를 이은 중견 작가로서 김기창·이유태·허건·김영기·김정현·박내현·천경자 등이 1957년에 창립한 백양회(白陽會)는 현대적 한국화 지향으로 뜻을 같이한 움직임이었다. 1970년대까지 지속된 그 연례전에는 뒤에 성재휴(成在烋)·조중현·김화경 등도 참가하였다.

그들과는 달리 배렴·장우성은 독자적 작품활동으로 전통적 화의(怜意)를 주제 삼았다. 이응로는 유럽으로 건너가 〈문자(文字) 추상〉 연작 등의 현대적 조형 방법으로 자신을 전환시켰다.

1960년 서세옥을 중심으로 일단의 서울 미대 출신 젊은 한국화가들이 형식적 전통주의를 거부하고 현대적 표현 정신으로 전통의 혁신을 내세운 묵림회(墨林會)를 조직하여 실험적 작품전을 시도한 것은 그 자체로 혁신적 집단 행동이었다.

구미의 추상 미학에 자극을 받은 그들의 의욕은 양화계 일각의 진취적 새 움직임과 궤도를 같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묵림회는 애초의 이념적 결의를 유지하지 못하고, 성격의 난맥을 보이다가 1965년에 가서 좌초하고 말았다.

그 맥을 계승하여 1966년에 새로 한국화회(韓國怜會)가 발족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1962년에 나타난 여러 성향 작가들의 청토회(靑土會)나 그 다음 해에 생긴 신수회(新樹會)의 학교 동문 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다만, 초기 한국화회에는 묵림회의 정신을 이은 반전통(反傳統)의 비구상 지향자가 많았다. 그들은 전체 전통 화단에서 여러 방법으로 자유롭게 많아지던 다른 비구상 실험자들과 함께 1974년부터 설정된 국전 동양화 비구상부에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체험적 실경주의로 한국의 현실자연을 주제 삼은 수묵화와 다양한 채색화 추구의 작가들이 전통적 흐름의 폭을 발전적으로 넓히는 움직임을 보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그 양상이 신세대 화가들의 지속적 증대와 더불어 거듭 다양함을 나타냈다. 수묵화 전통의 두드러진 창조적 계승자는 서세옥이었다. 그는 생동적 먹 붓 선으로 심의적 비구상 작품을 실현시켰다.

안동숙은 정밀한 채색화 작업으로 비구상 화면을 창조했다. 안상철은 고목의 일정 부분과 자연석으로 자연계의 자율적 영성미(靈性美) 표현에 열중했다. 그런가 하면, 권영우는 먹 붓도 채색도 일절 거부한 채 흰 화선지 자체만으로 순수 조형 작업을 지향했다.

한편, 박생광(朴生光)은 말년의 새로운 열정으로 한국의 민속과 불교의 토착성을 강렬한 원색조와 변용의 주제 전개로 독창성을 부각시켰다. 앞의 현대적 선행자들을 뒤이어 신영상(辛永常)·정탁영(鄭晫永)·송영방(宋榮邦)·송수남(宋秀南)·이종상(李鍾祥)·황창배(黃昌培) 등이 각기 전통의 재창조 및 개혁의 정신과 현대적 비구상 방향의 작품 행위를 취했다.

그러한 양상 중의 완전 반전통의 형태는 전통적 배경이 전제되는 한국화의 개념이나 성격에서 명백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화 영역에 포함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제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년부터는 정부 정책의 보수적 국전에서조차 동양화부(한국화)를 ‘구상’과 ‘비구상’부로 분리한 작품 응모 및 심사의 운영을 채택하여 모든 형식과 방법의 비구상·비전통 현대주의 작업을 전폭 수용하는 변화를 나타냈다.

그런 가운데 1979년에는 황창배가 수묵 표현의 추상 작품으로 대통령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반면, 그와는 상반되게 이영찬(李永燦)은 현실감에 충실하려고 한 수묵 담채의 치밀한 풍경화로 1973년에 대통령상에 올랐다. 1980년대 이후에는 조평휘(趙平彙) 등이 활달한 운필의 수묵 필치로 실경 산수 전통을 대범하게 재창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양화계 일각에서 주목되게 자생한 사회적 내지 정치적 시각의 현실 표현 지향인 ‘민중 미술’ 운동에 한국화가로 동참한 작가는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 시대성을 반영한 새 세대들의 경쟁적인 새로운 창조적 시도와 다양한 표현 정신이 폭넓게 이루어졌다.

(2) 양화

양화가들이 주동한 광복 직후 미술가 단체 난립과 정치적 좌우익 대립 등은 1948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의 과도기적 혼란과 불안정한 미술계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1948년 연말에 창립전을 가진 김환기·유영국·이규상·장욱진(張旭鎭)의 신사실파(新寫實派)는 서울에서 새로운 조형주의와 순수한 표현주의를 지향한 선명한 성격의 첫 양화가 그룹이었다.

그들의 확실한 창작 정신과 독자적 예술 추구는 국전 서양화부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옹호를 받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단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일기 시작한 국제적 추상주의와 자유로운 현대 미술 전개의 선구적 움직임이었다.

6·25 전쟁 중 1953년 부산에서 가진 그들의 3회 작품전에는 이중섭이 가담하였다. 늘 비판이 따르기는 하였으나 국전의 서양화부도 뚜렷한 역량의 양화가를 해마다 부각시켰다.

류경채(柳景埰)·이준(李俊)·박상옥(朴商玉)·문학진(文學晉)·임직순(任直淳)·이종무(李種武) 외 1·4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온 윤중식(尹仲植)·최영림(崔榮林)·장이석(張利錫)·황유엽(黃瑜燁)·박수근(朴壽根)·박성환(朴成煥)·박항섭(朴恒燮)·박창돈(朴昌敦) 등이 1950년대 국전에서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작가들이다.

김흥수(金興洙)·이세득(李世得)·권옥연(權玉淵)·변종하(卞鍾夏)는 국전에 참가하다가 파리로 가서 추상 또는 신구상(新具象)의 세계를 새로이 구축했다.

남관(南寬)·박영선·김환기와 그밖에 김종하(金鍾夏)·장두건(張斗建)·손동진(孫東鎭)·김세용(金世湧)·한묵(韓默)도 1950년대 중엽부터 파리로 떠나 장기 혹은 수년 머무르며 국내에서와는 다른 특질적이고 참신한 표현질과 조형 내면을 각기 성취하였다. 같은 시기 서울에서는 여러 성격의 양화 단체가 발족하면서 이 분야의 발전적 활기를 가속화시켰다.

유영국·이규상·박고석(朴古石)·황염수(黃廉秀)·한묵이 만든 모던아트협회와 변영원(邊永園)·조병현(趙炳賢) 등이 조직한 독일 바우하우스운동 지향의 신조형파(新造型派), 유경채·이준을 비롯한 국전 수상 작가 중심의 창작미술협회, 그리고 무명 청년 작가들의 현대미술가협회 등이 1957년에 잇따라 등장하였다. 다음 해에는 사실주의 화가들의 단체인 목우회(木友會)가 창립되었다.

1957년은 조선일보사가 현대 미술 추구자들을 사회적으로 옹호하고 격려한 현대작가초대전을 시작한 획기적인 해이기도 했다. 김병기(金秉騏)·김영주(金永周)·한봉덕(韓奉德)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이 초대전은 1969년까지 13회를 지속하며 자생적인 새로운 조형 정신과 국제적 경향의 창조성 수용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현대미술가협회의 결성은 특히 구미의 새로운 미술 정보와 온갖 혁신적 방법에 고무되며 새로운 미술을 지향하려고 한 김창렬(金昌烈)·박서보(朴栖甫)·하인두(河麟斗) 등이 주도한 젊은 의욕의 추상 미술 운동이었다.

그 움직임은 파리에서 전파된 앵포르멜(非定形) 추상 미학의 충격에 열광적으로 공명한 것이었다. 그 정신은 국내 미술계의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려고 한 기세로 발전하면서 현대 미술 확산을 촉진시켰다.

1960년에는 후속 신세대였던 윤명로(尹明老)·김봉태(金鳳台)·김종학(金宗學) 등이 60년미술협회를 결성하고 앞의 움직임에 합세하였다. 그러다가 1962년에 가서 현대미술가협회와 이념적으로 통합한 재편성의 악튀엘회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러한 현대 미술 돌풍은 정부 정책의 보수적 국전 운영에도 자극과 영향을 미쳐 1961년에는 김형대(金炯大)와 이봉렬(李鳳烈)의 추상과 서정적 비구상 작품이 서양화부에서 수상하는 변화를 나타냈다.

정창섭(丁昌燮)·정상화(鄭相和)·정영렬(鄭永烈) 등도 동참했던 악튀엘회는 내부 불협화로 1964년에 와해된다. 그리고 그간의 회원들은 개별적 작품 활동으로 현대 미술의 위세를 넓혀 갔다.

그 진행은 파리에서 귀국한 김환기·김흥수 등과 국내파 유영국의 비중 큰 활동, 그밖에 미국에 유학한 전성우(全晟雨)의 신선한 추상표현주의 작업 등과 더불어 활기를 더해 갔다. 파리에서 제작 생활을 하던 남관·이성자(李聖子) 작품의 서울 전시 등도 그 활기의 일환이었다.

1969년부터는 국전 서양화부가 구상부·비구상부로 분리 운영되었다. 그리고 그에 뒤따라 동양화부(한국화)와 조각부도 1970년부터 같은 분리 운영을 취하며 다양한 시대성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그 무렵에는 추상주의에 반동한 극사실주의가 미국 쪽에서 파급되어 새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신진 작가들 사이에서 형식과 방법의 부단한 경쟁적 시도와 추구가 잇따랐다. 그 경향은 종래의 일방적 구미(歐美) 사조 추종 내지 모방에서 자주적 한국 현대 미술 창출의 활력으로 움직여졌다.

1963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권위 있는 여러 국제 미술 전람회-파리 비엔날레, 카뉴 회화제, 상파울루 비엔날레 등에 출품되었던 작품들이 각별한 주목과 평가를 사곤 했던 것은 한국 현대 미술의 창조적 저력을 국제 사회에 알린 것이었다.

그 작품들의 동질성으로 말해진 하나의 측면은 간명하면서 깊은 정감이 조성되는 모노크롬(단색주의) 성향으로 한국인의 본성적 미의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박서보·정창섭·윤형근(尹亨根)·윤명로·이봉렬·하종현(河鍾賢)·최명영(崔明永) 등이 그 계열이었다. 파리와 일본에 정착해 활동하면서 국내와 줄곧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김창렬과 이우환(李禹煥)도 그 계열로 연계되었다.

물론 선명하고 풍부하게 색채 표현을 수반한 추상 및 신구상 표현주의 작가도 많아서 다양한 병존 관계를 이루었다. 황용엽(黃用燁)·오경환(吳京煥)·최욱경(崔郁卿)·서승원(徐承元)·하동철(河東哲) 등은 색채적 표현을 지향했다. 대구와 충무 지역에서 현대 미술을 선도한 뚜렷한 존재는 정점식(鄭点植)과 전혁림(全爀林)이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의 특기할 만한 돌풍의 움직임은 ‘민중 미술’이었다. 사회적 내지 정치적 시각과 의식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 현실 민중의 삶의 모습, 남북한의 민족적 동질성 등을 직설적 혹은 상징적으로 주제 삼으며 순수 미술과 대립하려고 한 리얼리즘이었다. 그 표현 행위는 1990년대까지 이어진 국민적 민주화 운동과 투쟁의 일익이 되기도 했다. 신학철(申鶴徹)·손장섭(孫壯燮)·김정헌(金正憲)·김용태(金勇泰)·임옥상(林玉相)·민정기(閔晶基)·강요배(姜堯培) 등이 주도했다.

(3) 조각·판화

조각은 회화 분야에 비하여 일반 사회와의 관계에서 오래도록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광복 후 주로 국전 조각부에서 신예들이 부각되면서 차차 두터운 작가층을 가지게 되고, 작품 양상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김세중(金世中)·백문기(白文基)·송영수(宋榮洙)·윤영자(尹英子)·김찬식(金燦植)·전뇌진(田浪鎭)·최기원(崔起源)·최만린(崔滿麟) 등이 1950년대의 그 신예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아직 보편적 사실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김정숙(金貞淑)은 미국에서 수학한 현대적 철조(鐵彫)와 추상 조각 활동으로 주목을 끌었다. 1960년 무렵 일본에서 돌아온 권진규(權鎭圭)는 독특한 테라코타 작품으로 독자성을 부각시켰다. 김종영도 이 시기에 중진 작가로 현대적 활약을 보였다. 젊은 조각가들 사이에서는 추상과 창의적 형상 추구가 자연스럽게 확산되어 갔다.

1963년에 결성된 원형회(原形會)는 새로운 조형 정신을 앞세운 신예들의 모임이다. 회원은 김영학(金永學)·김영중(金泳仲)·전상범(田相範)·김찬식·최기원 등이었다.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현대 조각 운동을 앞세웠던 이 그룹전에는 민복진(閔福鎭)·이승택(李升澤)·이종각(李鍾珏)이 한때 동참했다.

서울 미대 조각과 출신 신진들이 새로운 조형 지향과 젊은 실험 정신의 공동 의지로 낙우회(駱友會)를 만들고 주목받은 회원전을 시작한 것도 1963년이었다.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이 그룹에는 김봉구(金鳳九)·신석필(辛錫弼)·고영수(高永壽)·엄태정(嚴泰丁)·최병상(崔秉尙)·전준(全晙) 등이 처음부터 또는 일시적으로 참가하였다.

1968년에는 고영수·최병상·최종태(崔鍾泰) 등이 또 다른 젊은 조각가 단체로 현대공간회를, 그리고 1969년에는 앞의 원형회 창립 회원들과 신진 박종배(朴鍾培)·박석원(朴石元) 등이 새로 한국현대조각회를 결성하며 조각계 전반의 활기를 더해 갔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국전 조각부도 서양화부처럼 새로운 시대적 변화의 자유로운 비구상 작품들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1965년 국전에서 박종배의 비구상 철조 작품이 대통령상을 차지한 것은 그러한 변화를 확연하게 한 것이었다. 그 뒤로 순수 형상의 조각들이 국전에서 자연스럽게 수상과 특선을 거듭하며 그간의 나체와 인물 주제 중심의 사실주의 형식과 대립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창조적 정신과 방법들은 인물과 현실적 주제를 존중하려고 한 작가들에게도 조형적 변용 또는 창작적 표현성을 중요시하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구상·비구상의 중간 성격의 작품들도 있게 되었다.

1970년부터는 국전 조각부가 구상부·비구상부로 운영되면서 앞서와 같은 현대적 조각은 더욱 자유롭게 뒷받침되었다. 1970∼80년대에 국전과 여러 단체전·기획전 참가 및 개인전 활동을 통해 뚜렷이 부각된 작가는 앞에 언급한 이름들 외에는 다음과 같다.

구상 계열로는 강태성(姜泰成)·강관욱(姜寬旭)·김수현(金水鉉)·이정자(李正子)·고정수(高正守)·유영교(劉永敎)·박병욱(朴炳旭)·이일호(李一浩), 비구상 계열에서는 정관모(鄭官謨)·심문섭(沈文燮)·박석원·최의순(崔義淳)·김광우(金光宇)·강대철(姜大喆)·한창조(韓昌造) 등이 있었다. 이들 뒤의 신세대 움직임은 갈수록 다양함과 새로운 추구를 나타냈다.

한편 1960년대에 화가로서 파리에 갔던 문신(文信)은 조각 작업에 더욱 치중하여 자연적 생명감의 독특한 형상으로 국제적 활동을 보였다. 전통적 조각 개념에서는 벗어난 작품 행위로 어떤 3차원의 조형물 또는 옮겨 온 폐기물 등을 일정한 공간에 특이하게 전개하거나 설치하여 다의(多義)의 시각적 상황을 조성하는 구미 선행의 ‘설치 미술’이 주로 신세대 미술가들 사이에서 여러 형태와 착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90년대의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에서 활동한 백남준(白南準)의 국제적 비디오 아트 작업의 설치 연출과 영상의 방법도 국내의 젊은 미술가들-조각가·화가에게 지대한 영향과 자극을 미쳐 그 계열의 작품 행위를 확산시켰다. 백남준은 그러한 작품 연출로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수상하였다.

그리고 1995년, 1997년, 1999년에는 국제적 권위의 그 비엔날레에서 전수천·강익중·이불이 설치 미술 작품으로 잇따라 특별상을 수상하며 세계 속의 한국 현대 미술 위상을 높였다.

회화와 구분된 판화 예술의 정당한 인식과 이해가 뚜렷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선도자는 이항성(李恒星)·정규(鄭圭)·유강렬(劉康烈)·최영림·김정자(金靜子)·이상욱(李相昱) 등이었다.

이들은 석판화·목판화·실크스크린 판화 등으로 개인전을 열며 창작 판화를 발표하다가 1958년에 한국판화협회를 결성하여 회원 작품전을 시작했다. 순수 예술로서의 그 판화 운동은 급속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1959년에 그 중심 회원들이 미국 신시내티미술관 국제판화비엔날레에 처음 참가하였고 이항성의 석판화 〈다정불심(多情佛心)〉은 입상했다. 그에 앞서 1956년과 57년에는 서울 국립박물관에서 국제판화전이 열려 판화 관심을 촉진시켰다.

1961년에는 조선일보사 주최 제5회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판화부’가 신설되어 이항성·이상욱 등이 초대 참가했다. 1962년의 그 초대전에는 강환섭(康煥燮)·배융(裵隆)·김상유(金相游)와 윤명로 등이 참가하고 김봉태·김종학 등이 신진으로 판화협회전에 가담했다. 1964년부터는 협회에서 판화공모전을 꾸미기도 했다.

그렇듯 판화계가 급속한 발전적 활기를 지속하였다. 국제 판화전 참가도 잇따랐고, 판화가들의 기법과 작품 양상은 거듭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한 이성자와 황규백(黃圭伯), 미국에서 시작한 박내현과 전성우 등의 판화전도 그 활기를 자극했다. 그러한 추세에서 송번수(宋繁樹)·서승원·김차섭(金次燮)·이승일(李承一)·오세영(吳世英) 등의 후속 신진 활동과 판화 예술의 현대적 확산이 이루어졌다.

(4) 공예·건축

공예와 건축 분야도 광복 후 처음 생긴 대학 과정의 전문 교육에 힘입어 폭넓은 현대적 전개를 나타냈다. 박철주(朴鐵柱)·유강렬·백태호(白泰昊)·백태원(白泰元)·이신자(李信子)·한도룡(韓道龍)·민철홍(閔哲泓) 등이 1950년대에 국전을 통하여 목칠·금속·염색 혹은 섬유 디자인 전문의 공예가로 등장하였다.

한편에서는 박성삼(朴星三)·한홍택(韓弘澤)·황종구(黃鍾九)·정규의 목공, 그래픽 디자인, 도예 작품 활동이 있었다. 그리고 이순석·김재석·김진갑·장기명의 중진 활약도 비중 있게 계속되었다.

1960년대 이후 사회 발전과 더불어 각종 공예와 디자인 분야의 새 세대 진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권순형(權純亨)·황종례(黃鍾禮)·박한유(朴漢裕)·김성수(金聖洙)·임홍순(任洪淳)·강찬균(姜燦均)·김교만(金敎滿)·원대정(元大正)·유리지(劉里知)·곽계정(郭桂晶) 등이 국전 특선·수상을 통해 신예로 등장하였다. 김기련(金琦連)·김익령(金益寧)·윤광조(尹光照) 등은 독자적인 금속 공예와 도예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대 이후 새로운 각광을 받은 것은 ‘섬유 미술’로 총칭된 비단·실·면사·모직·종이 등을 재료 삼은 다양한 조형 행위들이었다. 이신자·서재행(徐載幸)·성옥희(成玉姬)·이혜주(李蕙柱)·정경연(鄭璟娟) 등이 뚜렷한 활동을 보였다.

건축 분야는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서울과 부산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팽창 및 사회·경제 구조의 발전을 배경으로 국가 기관을 비롯한 각종 공공 빌딩·은행·호텔·대학 건물·아파트 및 개인 주택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역동적인 움직임을 나타냈다.

이천승·박동진·김재철·김희춘·정인국(鄭寅國)·강명구(姜明九)·김중업(金重業)·엄덕문(嚴德紋)·이희태(李喜泰)·김정수(金正秀)·나상진(羅相振)·김태식(金台植)·송민구(宋旼求)·배기형(裵基瀅)·김수근(金壽根) 등이 그 움직임의 중심적 건축가들이었다.

그 뒤로 여러 대학의 건축과에서 배출된 신세대 건축가들은 현대적 건축 문화를 다채롭게 이끌어 갔다. 1955년부터 국전에 설정된 건축부의 경연을 통해 신진이 부각되기도 했다. 1961년 국전에서 합작안으로 대통령상을 차지한 강석원(姜錫元) 등이 그러한 신예였다.

그 반면 대표적 현대 건축가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김중업과 김수근의 건축연구소에서 훈련을 쌓고 건축계에 진출한 김석철(金錫澈)·원정수(元正洙)·윤승중(尹承重)·유걸(兪杰)·김원(金洹)·장석웅(張錫雄)·황일인(黃一仁)·김종성(金鍾星)·조성룡(趙成龍) 등이 새로운 건축 예술 창조를 추구해 갔다.

<이구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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