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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15 (일) 10:12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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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건축 (한메)
건축 建築 architecture

건축물을 만드는 인간의 행위 또는 그 행위로 만들어 낸 건축물. 일반적으로 건축물은 생활장소로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생활에 관계되며, 그 기술도 인간의 생활을 긍극의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건축은 건축물을 만드는 행위를 통하여 생존하고 생활하는 인간존재의 모든 국면(局面)에 관여하고 책임을 지는, 인간에게 밀착된 주체적 행위로서의 기술이다.

건축들은 그 형태가 생활목적에 적합하도록 주어진 소재를 가지고 고정된 공간으로 구성된다. 지진이나 눈·비 등에 오래 견딜 수 있고, 화재에도 안전하며 쾌적하고 편리한 공간으로 구성되어야 하고, 또한 아름다운 구조물이며 시설이어야 한다. 건축물은 도시나 자연의 넓은 공간에 세워지므로 환경과 조화된 연관성이 필요하다,

따라서 건축은 건축군과 거리의 조화를 창출(創出)해 내는 도시조형(urban design), 도시 전체를 조직하는 도시계획, 정원과 공원을 설계하는 조원(造園)기술 등과 관계가 깊다. 건축은 넓은 지역에 걸친 생활환경의 거시적(巨視的)인 전체 맥락을 근거로 하여 조형성·편리성·안전성·사회성·경제성 등의 다양한 시점에서 계획하며, 이러한 여러 기술과 상호 협력하여 이루어 진다. 또한 토목기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도로나 교량·철도·항만·댐 등의 토목시설은 건축물에 비해서 규모가 크다는 차이는 있지만 다 함께 지상에 고정된 물적 구조물(構造物)이라는 의미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토목시설은 노후화(老朽化)가 진행되면 새로운 시설로 다시 만들어지고 개량되지만, 건축기술에서는 1개의 작품이 인간의 정신에 호소하는 바꿀 수 없는 귀중함도 지닌다고 생각하여 역사적 건축물이 문화유산으로 보존되는 경우처럼 쉽게 대체되지 못하며, 이런 관점에서 양자가 구별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토목기술에서도 건축이 지니는 이러한 가치관에 주목하기 시작하여 양자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지고 있다.

[건축기술에서의 소재·형태·목적·건축가]

소재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덩어리이지만 질서 있는 형태로서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나무·돌·철·벽돌 등은 각각 고유한 모습을 취해야만 그 특성이 충분히 발휘된다. 나무는 기둥이나 대들보의 형식으로 특성을 발휘할 수 있고, 돌이나 벽돌은 벽모양으로 쌓아야 하며 특히 벽돌은 그 재료의 특성이 벽에 아치형입구를 만드는 데 적당하다.

그렇지만 현대건축에서 많이 사용되는 철근콘크리트는 다른 소재와는 달리 그 특성이 중성적(中性的)이므로 어떠한 형태의 요구에도 적당하여 몰소재적(沒素材的)인 각종 형태의 자의적(恣意的)인 선택이 가능하다.

현대 초기의 건축사조(思潮)에서 이른바 기능주의라든가 구조주의를 내세우는 입장에서는 형태의 규정은 소재와는 별도로 기능·역학적인 구조의 요인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고전 건축의 형태에서는 재료의 잠재능력에 제어당한다는 필연성 뿐만 아니라 형태 그 자체 속에서도 제약이 가해져 있었다. 그것은 형태의 수적·양적인 비례관계의 조화에 관한 원리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시대의 M.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그의 저서 《건축십서(建築十書)》에서 균형의 건축원리를 특히 거론하였다. 그것은 우주의 커다란 조화 속에 겸허하게 참여하는 지상의 건축물에게 가장 중요한 원리로 이해되었으며, 서양에서는 현대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균형에 의해 건축의 질서가 보장되는 것이다. 수비적(數比的)인 이 건축관은 음악에서의 질서인 조화에서 본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통일의 질서란 단적으로 선(善)이라고 생각하였다.

건축기술의 목적으로서 그 제작과정을 이끌어가는 가치는 포괄적으로 선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일가치로서의 전이 보다 적극적으로 주제화되어 선으로서의 질서가 건축물의 생성을 이끌어 나갔다. 건강이라든가 쾌적, 미(美)라는 하나하나의 가치는 모두 최선의 활동으로 통일된다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미란 흔히 선·미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또한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건축가의 창조행위는 잠재(潛在)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에 관련되며, 필연성을 지니지만 자유스러운 행위이다>라고 하였다.

고전적인 생각에서는 보통 건축가는 제작하는 건축물의 바깥에 서서, 말하자면 방관적으로 고안하고 제작한다. 이에 대해 자연계에서는 생성하는 힘이 자연물에 내재(內在)한다. 자연은 내재하는 힘, 즉 <맹목적인 의도>에 따라 생성을 목표로 한다. 이처럼 건축기술자는 자연을 모방하여 스스로 만들려고 하는 물건 속에 당사자로서 내재하며 스스로 자신이 그곳에 살면서 필연적민 물건으로서의 건축물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건축의 예술성과 도구성(道具性)]

종합기술로서의 건축에서 찾을 수 있는 선과 미라고 하는 근본적이고 통일적인 가치는 이미 비트루비우스 폴리오의 건축관에서 보다 표면적으로 분화되었다. 건축은 미(美)·용(用)·강(强)의 기본적인 3가지의 가치로 성립된다고 한다. 이들 가치의 상호관계에 대한 지적은 현대에까지 이르는 건축에 대한 시각을 강하게 규정하였으며, 건축은 분화된 3가지 가치의 내밀적(內密的)인 관련성에서 존재한다.

근·현대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술과 기술의 세계가 관계없이 분열되었는데, 이들은 다시 통일되어야 한다. 18∼19세기의 생활형태가 급격히 다양화·세분화된 시점에서, 그 이전에는 오히려 미분화(未分化)로 융화되어 있었던 건축의 도구성과 예술성이 별개로 주제화되었다.

즉 생활용기로서의 건축의 도구적 기능이 그 자체로서 주목받았으며, 이것은 해명되어야 할 정도로 비대(肥大)하기 시작하였다. 건축에서의 유용성의 가치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강성·쾌적성·효용성·편리성의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여기에 안전성까지 추가되어 각각 별도로 분석된다.

건축이 전일적(全一的)인 세계에서 유리되는 것은 시대와 함께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런 속에서도 건축의 여러 가치간의 관계를 새삼 끄집어 내려는 견해가 미와 용의 관계를 중심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른바 기능주의(機能主義)라고 하는 합리적인 근·현대건축사조의 대두이다. 기능주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라는 명제로서 요약되며, 건축물에는 각각 고유한 역할·기능을 합목적적으로 다하는 각각의 고유한 형태가 일의적(一義的)·단능적(單能的)으로 선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축가는, 형태가 사용상 용도에 필연적으로 의존하고 표현에 있어서도 그 유용성의 기능을 웅변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명제는 건축의 도구성과 예술성의 관계를 기능과 형태와의 선행·의존관계로서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건축에서의 가치의 다원적인 분열, 모순에 직면하여 그러한 사태를 어떤 일원론(一元論) 밑에서 수렴시키려 하는 것이다.

건축가의 새로운 정신은 위와 같은 사상적인 골격에 따르면서, 한편으로는 근대의 기계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물체의 형태와 기능과의 관계를 융화(融和)라는 점에 착안하여, 건축기술은 이것들을 겸허하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대체적으로 건전한 주장이었지만 기능주의의 지나친 국제적인 전파로 인해 본래 건축이 각각 고유하고 독자적인 곳에 뿌리를 두고 그곳으로부터 생성된다고 하는 건축의 특성에 관계되는 한 가지 사실을 잃어 버린 경향이 있다.

[건축의 종류]

건축은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재료에 따라 목조·석조·벽돌 등으로 구분되며, 단층·고층 등 형태나 규모에 의하여 착안하는 경우도 있고, 또 설계나 시공법에 따라 현장에서 건설하는 재래공법과 공장생산되는 부제(部材)에 의한 공법으로 대별할 수 있다. 주택·공장·학교·병원·교회·레저시설·역사(驛舍) 등 용도에 따라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BC1세기의 로마건축가 비트루비우스 폴리오는 건축의 실기와 이론을 다룬 그의 저서 《건축십서》에서 이러한 용도별 분류에 앞서 대분류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건축을 우선 공적(公的)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크게 구별하였다. 전자는 공공부시(公共敷地)에 공공의 이용을 목적으로 공동체가 세우고 소유하며, 후자는 주로 개인의 주거를 생각할 수 있다.

공공건축은 다시 종교적 건축과 세속적·실용적 건축으로 나누었는데 현대에는 이 건축 종목이 학교·병원·도서관 등으로 매우 다양화되었다. 다양화된 데에는 시대적 필연성이 있다. 즉 산업혁명 이후, 생활의 여러 형태가 비약적으로 분화되고 이에 대응하는 여러 가지 건축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사적인 주거는, 이를테면 출산·관혼(冠婚)·장제(葬祭) 등 생활의 각양각색의 국면이 영위되는 공간이었는데 차츰 이 여러 활동들이 주택에서 배제되었다.

주택의 기능축소에 수반하여 주택 이외에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위한 건축시설의 설립을 개별적으로 요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효율성이라는 가치의 비대에 따른 것이다. 건축이 여러 종목으로 분화되면, 개개의 건축시설은 개개의 목적에 합당하게 되며 여러 시설이 일의적(一義的)으로 단일기능의 시설로서 효능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추세는 이점(利點)뿐만 아니라 단점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생활이 개개 여러 기능의 단순한 집합이라고 보는 경우, 명확하게 그런 여러 기능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불명료한 기능, 예컨대 일상적인 이웃간의 접촉과 같은 중간적인 생활부분이 간과되는 것이다. 공적·사적이라는 분화의 큰 테두리는 현대의 건축분류로서도 의의가 깊다.

현대의 도시는 사적인 권리를 보증받은 개인의 거대한 집합체인데, 개인의 사사로운 권리를 넘어서 공공에 관여하고, 공공에의 참가가 도시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기대된다. 이 경우 공적·사적이라는 2분극(分極)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양자의 중간적인 존재방법도 새롭게 착안했는데 일조권(日照權) 혹은 경관(景觀)문제로 주목되듯이 이웃과 공공에의 영향없이는 사적인 증거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건축에서의 사회윤리·도시생활의 윤리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서양건축의 역사]

<이념과 기술의 변천>

개개의 건물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는 취락(聚落)이나 도시의 설계와 건설도 또한 건축적 행위로 볼 수 있다. 발생적으로는 물리적·생리적으로 인간을 외계로부터 보호하는 피난처로서의 기능을 가진 실용적인 구축물이 선행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실용목적이 상징성과 결함된 정신성의 표현으로서의 건조물도 일찍부터 건설되었다.

<초기문명기의 건축>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천연(天然)의 동굴을 거처로 하였는데, 이들의 유적으로 프랑스의 랑그도크지방에서 에스파냐의 피레네산맥 부근에 걸쳐 발견된 다수의 동굴이 있다. 그 후 농경과 목축생활을 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에 따라 인공적으로 주거나 창고를 건설하게 되었다.

대부분은 갈대·나무·진흙 등을 소재로 한 간소한 건물이었는데, 햇볕에 말린 벽돌이 일찍부터 쓰였고, 오리엔트에서는 BC4000년 이전의 선사시대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BC4000년 경부터 메소포타비아와 이집트에서 고도의 문화가 전개되고, 장대한 종교건조물을 건조하기 시작하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정상에 신전(神殿)을 올려 놓은 지구라트(聖塔)라고 하는 탑상건조물을 중심으로 한 신전복합체(神殿複合體)가 다수 건설되었다. 질이 좋은 석재가 부족한 이 지방에서는 햇볕에 말린 벽돌 외에 소성(燒成)벽돌도 사용하였으며 아치와 볼트(vault;곡면천장)의 기술도 일찍 개발되었다. 바빌론에서는 마르둑신전과 바벨탑으로 유명한 지구라트를 포함한 신역(神域)이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형식을 답습한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건축은 풍부한 석재(石材)를 주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주로 쓰였으나, 제2왕조 이후의 왕릉(王陵)과 신전은 모두 석조로서 주로 석회암이 사용되었고, 왕궁과 주택은 벽돌과 목재가 주로 이용되었다. 신전의 건축은 선(先)왕조시대에는 비교적 간단한 형식이었으나, 왕조시대 초기부터 본격적인 건축물로 되었으며 형식도 복잡하게 되어 <신의 전당>으로 손색이 없게 되었다.

영혼불멸을 믿었던 이집트 사람들은 묘의 건축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선왕조시대에는 원형 또는 타원형의 구덩이었으나, 제1왕조시대부터 직사각형의 돌이나 벽돌로 만든 측면이 경사지고 정상(頂上)이 편평한 마스타바분(墳)이 출현하였다. 제3왕조시대부터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왕릉의 형식으로 출현하였고, 제18왕조시대에 인적이 드문 산중 암굴분(岩窟墳)이 등장하였으며, 신전은 분리되어 장제전(葬祭殿)이 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로는 카르나크의 아몬신전, 기자의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베니하산의 암굴분 등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에게해지방에서도 일찍부터 독자적인 문명이 전개되었고 크레타섬에서는 BC2000년경부터 도시적인 미노스문화가 번창하였다. 크레타의 궁전으로는 크노소스왕궁이 대표적인데 이 왕궁은 가운데에 직사각형의 커다란 뜰이 있고, 그것을 둘러싸고 여러 종류의 방들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아래로 갈수륵 가늘어지는 목조의 원기둥을 특징으로 한다.

BC1400년경부터는 그리스본토를 중심으로 미케네문명이 번영하였는데 미케네적 특색은 특히 건축에 잘 나타나 있다. 크레타와 달리 미케네의 궁전은 언덕 위에 거석의 성벽을 특징으로 하는 거대한 성(城)을 건설하였으며 미케네나 티린스의 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에게문명을 계승한 그리스인은 동쪽은 이오니아에서, 서쪽은 남(南)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걸쳐서 고전문화의 꽃을 피웠다. 건축구조는 하중(荷重)과 지지(支持)와의 관계를 조형적으로 세련시켜, 명석하게 표현하는 기둥과 대들보의 구성을 발전시켰다. 이 기둥과 그 위에 얹히는 수평재의 배열형식을 오더(order)라 하고, 오더는 이것을 조성하는 각 부의 비례관계나 기둥머리의 형태에 따라 3가지로 구분된다.

즉 고대 그리스에는 남성적이고 간소한 도리아식, 여성적이며 우아한 이오니아식, 섬세하고 장식적인 코린트식이 있다. 그리스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는 도리아식으로 헤라이온신전, 페스툼의 포세이돈신전, 제우스올림포스신전 등이 있고, 이오니아식으로 아테네의 에레크테이온신전·아르테미스신전, 코린트식에 아테네의 올림피에이온신전 등이 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신전(BC447∼BC432)은 도리아식의 이오니아화를 통해서 그리스정신의 명석성을 우아하고 아름다운 조화에 의하여 결정(結晶)시킨 영원한 예술작품이다.

로마시대에 와서는 건축의 사상·조형·기술 등이 크게 전환되었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되는 그리스 건축의 구성과, 에트루리아의 성문이나 분묘에 쓰이고 있는 아치형을 채용함으로써 기념비적인 건축을 건조하였다. 오더의 양식에서는 그리스의 3가지 양식 외에 이오니아식과 코린트식의 기둥머리를 합친 콤퍼지트양식, 도리아양식의 변형인 토스카나양식이 생겨났다. 구조면에 있어서는 아치형의 채용에 수반해서, 벽돌이나 돌을 가루로 만든 일종의 시멘트가 건축공업에 쓰이게 되어, 거대한 건축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

가장 대표적인 콜로세움은 80년에 완공된 타원형의 투기장으로 벽돌과 콘크리트를 이용한 외관(外觀) 4층의 대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외관상의 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 달라서, 내부 공간의 충실을 기하고 있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인은 내부의 거주성에 중점을 두고, 내부를 넓게 하기 위하여 벽돌로 아치형을 만들었다. 아치형은 상부의 중력을 원 둘레의 각 부분에 균등하게 분산하기 때문에 기둥의 수를 줄이고 내부를 넓힐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황제에 의한 판테온신전은 둥근 대청의 입구에 코린트식 기둥 8개를 나란히 세운 현관랑(玄關廊)이 있다. 그 외관은 극히 간소하여 충실한 내부의 아름다운 공간과는 대조적이다. 로마건축의 특징은 실용성과 주제의 다양성을 들 수 있는데 이 시대에는 신전을 비롯하여 바실리카·극장·욕장(浴場)·개선문·수도(水道) 등이 건조되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바실리카, 개선문 등이 대표적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건축예술>

중세건축은 고대그리스·로마건축의 인간존중이나 현실주의와는 달리 상징적이고 초자연적이며,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교회였다. 중세 건축의 전개는 일반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비잔틴·로마네스크·고딕의 4기(期)로 나누어진다.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313년의 그리스도교 공인(公認) 후 로마제국에서 건설된 초기 그리스도교건축은 고대가 중세로 옮겨지는 과도기의 건축이었다. 고대의 종교적 신전과 그리스도교회와의 커다란 차이점은 전자가 단순히 거처하는 곳인 데 비해 후자는 성직자와 신도가 모여서 예배상의 의식이나 집회를 행하는 장소였던 점에 있었다. 따라서 후자는 제실(祭室) 이외에 보다 큰 공간이 필요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가 채택한 건축의 한 양식은 고대로마의 바실리카와 유사한 장축적(長軸的)이고 다랑식(多廊式)인 바실리카 형식의 평면에 기준을 두고 건설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로마의 성 클레멘트성당, 성 마리아 마조레성당 등을 들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시대의 또 다른 하나의 건축방식으로는 집중식이 있다. 로마시대의 묘당(廟堂)·신전 등으로부터 발달하여, 주로 세례당(洗禮堂)의 건축양식으로 쓰였다. 기둥을 원형으로 배열하고 둥근 지붕을 씌우는 형식으로 노세라의 세례당, 라벤나의 세례당 등이 있다.

비잔틴건축은 동로마제국에서 급속히 발달되어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가 최초의 전성기가 되었다. 비잔틴건축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이미 궁정의 지지를 배후에 입은 그리스도교건축으로서 장대함과 호화로움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집중식에 알맞은 등 공법(工法)과 직사각형의 바실리카식과의 융합은 주로 돔을 중심으로 4방향에 반(半)원기둥형을 붙이는 형식으로 시공되었고, 또는 4방향을 작은 돔으로 둘러싸는 형식도 쓰였다. 콘크리트나 벽돌조법은 로마의 기술을 이어받아 구체(軀體) 구성을 하였고, 그 표면을 대리석으로 포장하는 방법을 썼다.

벽돌쌓기는 색을 달리하여 가로줄을 만드는 독창적인 쌓기법이 창안되었고, 벽의 위쪽·아치·돔·천장은 금색을 바탕으로 하는 다채로운 대리석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대표적인 건축물은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성당, 라벤나의 비탈레성당,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성당 등이다.

서로마제국의 멸망(476)과 함께 건축문화도 쇠퇴했는데, 프랑크제국의 카를대제는 라벤나의 성에 팔각당형의 예배당을 건설시키는 등 문화·예술의 부흥에 힘썼다. 초기 중세의 서유럽건축에서는 로마와 비잔틴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게르만이 지닌 낭만적 심성이 그리스도교의 영적 원리와 결합해서 마침내 로마네스크에서 고딕으로 전개해간다.

6세기에 성 베네딕투스에 의하여 확립된 서유럽의 수도원제도는, 8세기 말에 카를대제 밑에 건설된 캔투라의 산 리키에수도원에서 시작하여 장려한 수도원예술을 로마네스크양식에 의하여 꽃피웠다. 석조의 견고한 벽체 위에 돌천장을 설치하여 통형(筒形) 볼트에서 시작해서 교차볼트를 발달시킴으로써 물질적 중후성으로 둘러싸인 로마네스크교회당은 신의 비호(庇護)를 구하는 인간을 지키는 성채(城砦)이며, 동시에 상방지향적 구성에 의하여 그것이 하늘에 이르는 문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건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상징성은 고딕교회당의 조형에서 최고도의 표현을 이룩하였다.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지방적으로 다양하고 의미심장한 형식을 전개한 가운데,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초엽에 파리 주변은 특히 클뤼니대수도원이 있는 부르고뉴지방과 노르망디의 건축 및 산티아고에 이르는 순례로에 이어서 건설된 순례교회당에서 많은 것을 채택하면서, 독창적인 고딕건축을 창조·육성시켰다.

고딕예술의 창시자라고 하는 생 드니대수도원장 스게리우스는 그의 수도원교회당에서 빛의 공간을 추구하였다. 돌의 골조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소재로 해서 현상(現象)하는 <스스로 빛나는 벽>은 물질계를 비추는 신의 빛에 다름없었다(샤르트르대성당의 1194년 착공 부분).

물질성을 소거(消去)시키면서 구조논리를 명쾌하게 표현하는 프랑스 고딕대성당의 공간은, 신의 나라인 궁극적으로 성스런 공간에 이르는 문이며 통로이자, 지상의 세계와 천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로서의 동적인 공간이다. 프랑스성당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랭스대성당(1211년 착공)은 일관된 시각논리를 통해서 성당 내에 비물질적인 공간을 형성하여 구조의 논리를 외부의 조형적·역학적인 구성이 완벽하게 표현하는 건축예술의 극치다.

고딕의 영적인 내부공간을 가능하게 한 것은 첨두(尖頭)아치와 리브가 달린 교차볼트와 비량(飛梁) 등의 구성요소를 통합함으로써인데 본래는 조적조(組積造)인 석축(石築)을 골조구조로 하여 그 최고도의 석조구법(石造構法)을 발전시킨 기술의 시행착오적인 추구에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의 새로운 문화·예술의 사상은, 고딕의 본질을 정당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오더로 대표되는 고전적 질서만을 유일의 판단기준으로 한 G.바사리가 중세 그리스도교 건축 전반을 야만인의 것이라고 하면서 <고트풍>으로 불러 고딕이라는 호칭이 유래되었다.

<근세의 건축예술>

중세에 있어서도 본질적으로 로마·라틴적 성격을 유지했던 이탈리아에서 15세기에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중세적 신에 대한 관념의 부정, 인간중심관의 회복이라는 시점에서, 고대 예술의 부흥(復興)을 위하여 건축가의 개성이 중요시되었다.

이 시기의 건축가들은 건축을 오로지 예술작품으로서 제작하는 것을 추구하고, 고대건축의 질서 원리를 아름다운 형태로 창작하기 위한 비례론적 조형원리(比例論的造形原理)로서 전개하였다. 그 결과 정적이며 자기완결적인 조형을 추구하였다. 거기서는 당연히 고전 오더가 부활하였는데, 그것은 벽면을 분절(分節)하는 장식적인 조형부재(造形部材)가 사용되었다.

내부공간과 정면의 유기적 일체성은 대부분 무시되었으며 교회당의 정면은 하나의 완결된 예술작품으로서 조형되었다. 교회당에서는 기하학 질서의 구현으로서 유심화가 추구되고, 기능적인 장축식 라틴십자형평면에 돔을 걸치는 것이 과제로 되었다. 14세기에 건설된 교황청(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은 D. 브라만테에 의한 그리스십자형 평면의 계획으로 착공되어,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의해 대돔을 만들면서 일단 완성되었다(1590).

그러나 유심적 평면은 다수의 신자를 수용할 교회당의 기능과는 합치되기가 어렵고, 17세기에 C.마데르나가 신랑부(身廊部)를 확장하여 장축식으로 개조하고, 다시 G.L.베르니니에 의하여 당의 전면에 장려한 타원형 광장이 건설되었다(1656∼67). 16세기 르네상스건축은 수법의 세련을 추구해서 이른바 마니에리스모건축을 탄생시키고 17세기의 바로크건축에 대립적으로 계승되어 갔다.

르네상스가 인간의 절대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교적 정신과의 갈등에 빠지면서 결국은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운동을 야기시켰기 때문에, 교황청은 그리스도교적 반성에 입각하여 반종교개혁적 운동을 추진하고 바로크예술의 지주가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개축은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바로크는 고전사상을 그리스도교와 융화시켜서, 완벽하기는 하지만 정적이고 냉엄한 르네상스건축에 생명을 불어넣어 동적이고 격정적인 건축을 탄생시켰다. 성 베드로광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타원형은 정적 유심성에 동적 성격을 부여한다고 하는 로마 바로크의 형태적 특질이며, F.보로미니에 의한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교회당(1638∼46)의 종축적(縱軸的)타원형으로 결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장축적인 유심식 평면이면서 동시에 유심적인 장축식 평면이기도 하다. 비로크의 동적 성격은 똑같은 건축가에 의한 성형(星形) 육각형이라는 기하도형에 근거한 산티보 델라 시피엔차교회의 극적인 공간표현에서 정점에 달한다. 로마의 바로크는 G.구아리니에 의해 토리노에 인계되는데 바로크적 조형은 북유럽의 게르만적 성격에 적합하다. 근세는 세속건축 특히 팔라초(이탈리아의 저택)와 궁전, 저택의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근대에서 현대로>

19세기 초기에는 전유럽적으로 고대예찬과 프랑스 나폴레옹의 로마제국에 대한 동경을 반영하여 고대 그리스의 양식을 채택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로마시대의 양식을 계승한 건축이 많이 세워졌다. 이러한 고전주의 건축의 대표적인 예로는 프랑스의 개선문과 마들렌성당을 들 수 있다.

그리스의 간결성을 담은 건축은 특히 독일에서 고전주의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F.싱켈의 작품인 베를린의 왕립극장이 유명하다. 나폴레옹 실각 후에는 전유럽에 공통적인 경향으로 낭만주의가 출현하여 중세 고딕양식의 근대화된 채용이 이루어졌다. 또한 동시에 중세의 교회와 건조물의 수리가 성행하였다. 독일에서는 싱켈이 이 방면에서도 활약하였고, 영국에서는 고딕 양식을 채택한 런던의 국회의사당이 유명하다.

19세기 후반에는 단지 한 가지의 역사적 양식을 채택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여러 양식을 결합시켜 새로운 건축비를 창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19세기 후반에는 모든 것이 현대를 향해 급변하는 시대로 궁전과 교회의 건축을 떠나 공중적(公衆的)인 건축이 크게 등장하였다.

재료의 변화도 현저하여 철의 사용이 일반화되고 유리의 성능도 새로워지고 철근·콘크리트의 등장 등 건축에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았다.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에펠탑은 과학적인 구조기술과 새로운 공간조형을 이룩한 철재 건조물이다. 한편 영국에서는 공예분야에서 W. 모리스의 운동으로, 과거의 양식을 물리치고 새로운 디자인에 의한 간결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개혁은 건축에도 크게 작용하여 과거와 같은 번잡한 양식을 버리고 참신한 건축을 지향하는 운동이 각국에서 일어나 현대를 향해 진전되어 갔다. 20세기에 이르러 철골조는, 특히 미국의 상업건축에 의하여 고층 건축을 대담하게 발전시켰다. W.L.B.제니에 의하여 건설된 시카고의 흄 인슈런스 빌딩(1884∼85)은 기둥이 주철인데, 10층 건물 중 하부의 6층의 대들보는 연철, 상층부의 대들보는 강철로 지어, 고층건축의 선구를 이룬, 시카고에서도 가장 빠르게 강철을 채용한 건물이다.

강철의 사용은 드디어 건축의 조형을 일변시키게 된다. 시카고의 선진적인 건축가 L.설리번은 <형태는 기능에 따른다>고 하는 생물학적 원리를 바탕에 놓고 표면장식을 배제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건축의 주된 위치로부터 끌어내렸다.

또 이미 유럽 체류(滯留)시대부터, 돌과 벽돌에 의한 조적조(組積造)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조형을 철과 유리를 가지고 추구하여 순수하고 추상적인 공간(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의 독일관, 1929)을 실현시키고 있던 M.로에는 미국 고층건축의 전통과 결연(結緣)하여, 철과 유리에 의한 조형을 완벽한 것으로 만들었다(뉴욕의 시그램 빌딩, 1958).

한편 영국의 기술자 J.스미튼은 고대 로마 이래 오래 잊혀졌던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1759년에 에디스톤 등대의 난공사를 완성하였는데, 1824년 포틀랜드시멘트의 발명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발전을 유도하여 건축의 역사를 일변시켰다.

아나톨 드 보드에 의한 파리의 장 드 몽마르트르 성당(1894)의 선구적인 시도 다음에 드디어 O. 페레의 여러 작품에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는 건축을 역사양식에서 해방시켜 구조와 조형의 통합을 편성하였다. 조적조의 양괴성(量塊性)은 부정되고 수평재와 수직재에 의한 경쾌한 골조구조가 조형의 원리가 되있다.

콘크리트의 호리호리한 원주 사이를 콘크리트블록과 색유리로 메꾸는 르 랑시의 노트르담 성당(1922∼24)은 고전의 단려(端麗)함과 고딕의 빛의 공간을 프랑스적 기지(機智)로 통합한 뛰어난 작품이다. 이미 19세기 말에는 역사 양식주의에 대한 반역운동이 새로운 조형을 구하기 시작하였다.

아르누보를 거쳐 양식주의의 거점인 O.바그너가 근대건축운동을 불타오르게 하였다. <예술의 유일한 주인은 필요성이다>라고 주장한 바그너는 새로운 재료, 새로운 구조법, 새로운 인간생활의 요구가 새로운 양식을 낳게 한다고 단언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고 과거양식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는 빈(Wien) 공방(工房) 등이 힘차게 활동하였으며 이와 같은 합리주의적인 움직임은 W.그로피우스가 주도하는 바우하우스운동으로 정점에 도달하였다.

건축의 본질은 그것이 충족시킬 기능에 있고, 건축의 형태는 기능에서 나온다고 하는 그 견해는 국제적인 평가를 언어 건축에서의 합리주의는 기능주의로서 인식되게 되었으며 따라서 근대 건측은 국제양식이라고 불리는 건축조형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능주의는 건축형태가 기능에 따라 일의적(一義的)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기능주의는 본질적으로 휴머니즘의 사상이었다. 인간과 건축에 대한 강한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기능주의는 껍질만 남은 양식주의에서 인간을 되찾는 일을 목표로 하였다.

근대건축의 또 한 사람 선도자로서 후대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르 코르뷔지에도 또한 건축을 예술의 수준으로 높일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새로운 건축의 5가지 요점(1926)》에서 공간의 연속성과 자유로운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필로티(pilotis) , 건물 밑에서 잃어버린 대지를 되찾는 옥상정원, 자유로운 평면, 자유로운 파사드, 그리고 골조와 벽면의 분리에 따른 연속창(連橋窓)을 근대건축의 특질로서 강조하였다.

1927년 제네바의 국제연맹본부의 경쟁설계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근대건축안이 무시되고 전통양식이 채택된 이듬해, 근대건축가들은 지크프리트 기디온과 르 코르뷔지에를 지도자로 하여 반(反)전통주의를 표방하는 근대건축국제회의(CIAM)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33년에는 기능적인 도시계획에 관한 <아테네 헌장>을 발표하여 이후의 건축운동에 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근대 건축 운동은 건축의 사회적 측면을 중시하고 주택과 생활환경의 개량 운동에 눈을 돌렸다. 예술·공업·공예의 협력하에 조형의 단순성과 합리적 즉물성(卽物性)을 추구하여, P.베렌스 등에 의해 1907년에 설립되었던 독일공작연맹이 27년에 M.로에를 정점으로 당대의 우수한 건축가들을 모아서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한 주택박람회나, 바이센호프지들룽은 이와 같은 지향성(指向性)의 결정(結晶)이었다.

미국에서는 F.L. 라이트가 미국의 풍토 속에서 유기적 건축을 장시하고, 대지에 뿌리박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 내어 유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화려한 근대건축운동과 나란히 건축구조학도 착실하게 발전하고, 철근콘크리트조의 영역에서는 셸 구조와 곡선상의 골조구조가 새로운 조형을 가능케 하였다.

이탈리아의 구조기술자 P.L.네르비는, 피펜체의 경기장(1932)에서 시작하여 아름다운 리브상 그물코구조에 의한 팔라초 델로 스포르토(스포츠 전당, 1958∼60)에 이르기까지 구조학과 조형과의 멋진 일치를 실현시켰다.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기술의 발달은 곡선을 사용하지 않고서 대(大)스팬의 가구(架構)를 가능하게 하고, 프리 캐스트 코크리트는 부재(部材)의 공장 생산을 진전시켜, 양자가 서로 작용해서 건축 산업의 근대화를 추진시켰다.

근년작으로는, 리브구조이면서 바람에 부푼 돛을 연상케 하는 셸 모양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자랑하고 있다. 강철구조의 분야에서는 스페이스프레임(입체 골조구조)에 의한 대스팬가구의 추구를 들 수 있으며 또 강(鋼)과 경금속을 골조로 하는 돔 구조의 연구도 왕성해졌다. 최근에는 현수지붕구조와 막(膜)구조 즉 플라이 오토 등의 새로운 형식도 시도되고 있다.

건축부재의 규격화와 공장생산에 의한 고품질·저가격·대량생산이 매우 진전되어 있는데, 조형과의 결합에는 아직도 충분히 성공하지 못하였다.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구조에서 뿐만 아니라 기능과 조형에서도 다양화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현재 가장 시급한 건축적 과제는 생활환경의 재구성과 쾌적성의 회복이다.

일찍이 1956년에는 스미슨 부부·바케메·캔딜리스 등 청년건축가들이 <팀텐>을 결성하여 근대건축 국제회의(Cl AM)를 제10회 회의에서 붕괴시키고 유동하는 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생활공간과 건축을 지향함으로써 근대건축국제회의는 최종적으로 59년의 회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탄생시킨 사무실 건축을 정점으로 하는 실용주의적 건조물이 발전하는 한편, 기능주의가 가지는 국제성에 대립해서, 일찍부터 지방성과 민족성이 다시 증시되기 시작하였다. 현대의 건축조형은 다양하고 통일적 이념이 결여된 다원론적 시대라고 하겠다.

[한국의 건축]

어느 민족이건 건축물은 그 지역의 지리적 조건에 맞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전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산지, 주요 건축자재인 풍부한 소나무, 온대계절풍 기후, 거기에 한민족(韓民族)의 성격이나 취향·습성 등이 반영되어 한국건축의 특징과 전통이 만들어져 왔다.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형태와 규모를 정함은 물론, 건축물을 배치함으로써 지맥(地脈)이 허술한 곳을 메우고 돋보이게 하는 방향으로 건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한국건축의 특색은 대륙성·장중성(莊重性)의 중국건축과, 도서성(島嶼性)·농연성(濃姸性)의 일본건축에 비해 반도성(半島性)·청초성(淸楚性)이라는 독특한 건축미에 있다.

<선사시대>

원시문화상태인 이 시대의 건축문화는 오히려 고고학적인 연구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석기를 거친 신석기시대의 한국에서의 원시주거형식은 건축기술 발전의 시발점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석기시대의 주거지로는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석장리(石壯里)와 함경북도 선봉군(先鋒郡) 굴포리(屈浦里)에서 발견되었다. 이를 건축학적 측면에서 다루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건축품이라고 할 수 있는 출토품이 발견된 곳은 황해북도 봉산군(鳳山郡) 지탑리(智搭里),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울특별시 강동구(江東區) 암사동(巖寺洞) 등의 신석기 유적지로 당시의 주거지인 움집〔竪穴住居〕이 발견되있다.

형태는 원형·정사각형·직사각형으로 규모는 지름 7m, 60㎝ 내외로 중앙에 화덕이 있고 그 곁에는 저장구멍〔貯藏孔〕이 있다. 지붕은 움집바닥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도리를 걸어 그 곳에 긴 나무들을 둘러쳐서 서까래를 삼고 그 위에 긴 풀이나 짚을 이었다.

이러한 움집은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평면형태의 변화만 있었을 뿐 꾸준히 이어졌다. 초기 철기시대에는 지붕이 땅에서 떨어져 기둥이 직접 지붕을 지탱하는 구조변화가 생기면서 완전한 지상주거인 귀틀집과 고상주거(高床住居)가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한국건축문화의 개화기라 할 수 있는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에 의해 발달된 건축기법과 건축자재를 사용하였다.

⑴ 고구려 건축:고구려건축은 고분벽화에 그려진 그림이나 사찰·궁궐 등의 유적, 약간의 문헌자료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고분벽화 가운데 성곽 그림이 있는 곳은 용강대충(龍岡大塚)·삼실총(三室塚)·요동성총(遼東城塚)·약수리벽화무덤분〔藥水里壁畵墳〕 등이며 전각도(篆刻圖)가 있는 곳은 쌍영총(雙楹塚)·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안리(大安里) 1호분·통구(通溝) 12호분·안악(安岳) 1호분 등이다. 이들 고분의 벽화를 보면 당시의 목조건축이 근세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건축은 불교가 도입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 성문사(省門寺) 등 많은 사찰이 창건되는데 이로 보아 건축기술이 매우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굴 조사된 유적지는 금강사지(金剛寺址;평양 淸巖里 절터) 등이 있다. 고구려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는 탑을 중심으로 탑을 향해 3곳에 금당을 배치하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궁궐건축은 평양시내의 안학궁지(安鶴宮址)의 발굴조사에서 건물배치가 일부 밝혀졌는데 이 궁은 한 변의 길이가 1㎞ 가량 되는 마름모꼴이고 궁궐은 58채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도성(都城)으로는 국내성(國內城)·환도성(丸都城)·장안성(長安城) 등이 있으며 산성으로는 지안〔輯安〕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평양의 대성산성(大城山城), 순천(順川)의 자모산성(慈母山城), 용강(龍岡)의 황룡산성(黃龍山城) 등이 알려져 있다.

⑵ 백제건축:백제건축에 관한 자료로는 2기의 석탑과 많은 절터 및 산성들이 있으나, 문헌은 아주 적다. 건축의 가구기법이나 구조는 고구려와 거의 같고, 세부양식은 중국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부드럽고 경쾌했으리라 짐작된다.

석탑으로는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미륵사지(彌勒寺址)석탑,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정림사지(定林寺址) 오층석탑 등이 남아 있다. 가람배치는 후기 사비시대의 것만 알려져 있다. 이 시대의 절터로는 군수리(軍守里)절터·동남리(東南里)절터·미륵사지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이들은 주로 일탑식 가람배치로 되어있으나 독특한 가람배치도 더러는 보인다.

도성은 건국 초기 한강 남안(南岸)의 위례성(慰禮城)을 비롯하여 한산성(漢山城)·공산성(公山城) 등이 축조되었으며 도성의 외곽에는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석성산성(石城山城) 등을 축조하였다.

⑶ 신라건축:신라건축에 관한 자료는 가야(伽倻) 지방의 집토기〔家形土器〕와 2기의 석조건물·황릉사지(皇龍寺址)·분황사(芬皇寺) 등의 사찰유적, 왕성인 월성(月城)뿐이다. 집토기는 창고·축사(畜舍)·주택 등의 안채를 모방한 것들이 발견되어 당시의 주거형태를 짐작케 해 준다.

이 시대의 목조건축은 황룡사지의 발굴로 고구려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석조건축은 첨성대(贍星臺)와 모전석탑(模塼石塔)인 분황사석탑이 있다. 가람배치가 밝혀진 곳은 황룡사뿐이고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를 변형한 신라식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로 탑 뒤에 삼금당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궁궐은 남산 서쪽 기슭 고허촌(高虛村)에 있다가 101년(파사왕 22)에 월성을 축조하면서 옮겼다. 산성은 경주를 둘러싼 여러 산과 다른 산에 쌓았다.

<남북국시대>

⑴ 통일신라건축:건축문화의 큰 발전을 이룬 통일 신라는 당(唐)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불교가 융성하여 국력을 기울인 장대한 규모의 사찰들이 건축되었다.

이 시대의 목조건축은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의 내용과 당시의 기와나 벽돌무늬 및 석조건물에 표현된 목조건축의 요소 등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잘 다듬어진 석재로 만든 2중 3중의 기단, 치미·귀면와(鬼面瓦)·막새기와로 장식된 지붕, 겹처마, 이출목(二出目) 이상의 두공, 오색단청과 각종 장식금구(裝飾金具)로 꾸며진 호화로운 건축이 성행했으리라 짐작된다. 석조건축으로는 석굴사원(石窟寺院)·석탑·부도 등이 있다.

석굴사원은 당대 제일의 석굴암과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에 있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이 남아 있으며 석탑은 경상북도 경주시(慶州市)의 감은사지(感恩寺址) 동·서 삼층석탑 등 신라의 전형적 석탑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軍) 탑리(塔里)의 오층석탑(五層石塔), 불국사(佛國寺) 다보탑(多寶塔), 정혜사지(淨惠寺址) 십삼층석탑 등 이형답(異型搭)이 있다.

석조부도는 844년(문성왕 4)에 건립된 염거화상탑(廉居和尙塔)이 남아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최초로 세운 사찰은 사천왕사(四天王寺)이며, 이어서 감은사·망덕사(望德寺) 등을 건립하였다. 가람배치가 밝혀진 감은사지·망덕사지·고선사지 등은 모두 쌍탑식(雙塔式) 가람배치 사찰이었다.

궁궐건축에 관해서는 최근에 발굴 조사된 안압지(雁鴨池) 주변에 나타난 건물유구가 유일한 구체적 자료이다. 발굴을 통해 안압지 서쪽은 임해전(臨海殿)을 비롯한 궁궐의 중심부이고 남쪽은 궁궐의 부속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⑵ 발해건축:발해는 고구려가 망한 뒤인 699년 고구려의 유신(遺臣) 대조영(大祚榮)이 무단강〔牧丹江〕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한 나라로 통일신라를 남조라 부르는 데 대하여 북조(北朝)라 부른다. 옛 고구려 지역에 고구려의 유민을 중심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에 모든 측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컸다.

발해의 건축은 도읍지였던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와 그 밖의 5경(五京) 유적에서 엿볼 수 있다. 상경용천부는 동서 약 5㎞, 남북 약 3.4㎞의 직사각형 외성(外城)을 쌓고 그 주위에 해자(垓子)를 둘렀다. 성 안은 조방(條坊)에 따라 주택·사찰·시장 등을 배치했고 북쪽 끝에는 궁궐을 지었다.

궁궐은 한변이 1㎞ 정도의 정사각형이며 내부를 중심구와 동·서·북 구로 나누고 중심구에는 궁궐을, 그 밖에는 궁궐의 부속시설을 두고 궁궐의 정문 앞에는 관아를 배치하였다. 사찰터는 상경용천부에서 10여 곳, 그 이외의 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가람배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기와나 전돌의 무늬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많고 특히 수막새 기와의 4엽 또는 6엽의 연화문은 고구려의 것과 흡사하다. 따라서 발해의 건축은 고구려건축의 구조나 양식을 바탕으로 얼마간의 변화를 보이며 발전해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신라를 계승한 고려 초기의 건축은 중기로 접어들어 남송(南宋)과의 고류가 활발해지면서 두공이 기둥 위에만 설치되고 천장가구가 없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 정착되었고, 말기에는 원(元)나라와의 교류로 두공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설치되는 다포(多包)양식이 정착되었다. 주심포 양식으로는 부석사무랑수전(浮石寺無量壽殿)·수덕사대응전(修德寺大雄殿)·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등이 남아 있으며, 다포양식은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 등에서 볼 수 있다.

석탑은 장식적인 조각이 많아진 외에는 대부분 신라의 것을 계승하고 있는데 평면이 육각 또는 팔각인 다층석탑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월정사(月精寺) 팔각 구층탑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도는 팔각당형(八角堂形)이 기본형태이지만 이형부도(異形浮屠)도 나타나 석탑형의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 보련형(寶輦形)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이 전한다.

고려는 개국후 개성을 중심으로 많은 곳에 사찰을 세웠다. 태조가 창건한 법왕사(法王寺) 등 십찰(十刹)에 이어 흥왕사(興王寺)·불일사(佛日寺) 등이 건립되었다. 일탑식 가람배치를 비롯하여 가람배치 형식은 매우 다양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궁은 개경에 만월대(滿月臺)를 세웠고 문·회랑(回廊)·궁궐은 능선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을라가며 겹겹이 배치하였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목조건축은 주심포양식과 다포양식이 주요 건축양식의 주류를 이루다가 두 양식이 서서히 혼용되기 시작했다. 주심포양식에 다포양식이 혼용된 대표적인 건축물은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의 도갑사해탈문(道岬寺解脫門), 관룡사약사전(觀龍寺藥師殿) 등 규모가 작은 건물에서 나타난다. 한편 다포양식에 주심포양식이 혼용된 것으로는 평양보통문(平壤普通門), 전등사약사전(傳燈寺藥師殿)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익공양식과 기둥머리에 장식가구물이 없는 도리집 등이 있다.

익공양식은 궁전의 침전이나, 관아, 사찰의 2차건축물들과 같이 화려하지 않아도 되는 건물이나 향교·서원 등의 유교건물에 주로 채택되었다. 석조건축으로는 석탑·석조부도·석빙고 등이 있다.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을 계승하였으며 낙산사(洛山寺) 칠층석탑·원각사(圓覺寺) 십층석탑·신륵사(神勒寺) 다층탑 등이 전한다. 부도는 석종형부도가 유행하였다. 경상도 지역에 분포하는 석빙고는 안동(安東)·창녕(昌寧)·영산(靈山)에 남아 있다.

도성으로는 1394년(태조 3) 도읍 한양(漢陽)에 전체 길이 18㎞의 한성(漢城)을 축조하였다. 성에는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창경궁(昌慶宮)·경운궁(慶運宮;德壽宮) 등을 건립하였으며 전국 각지에는 읍성(邑城)을 쌓아 그 안에 군(郡)·현(縣)의 관아(官衙)를 두었다.

<근대>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서양 문물과 함께 건축양식이 들어오면서 건축에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의 개항이 열강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듯이 새로운 건축양식도 능동적인 도입이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에 따른 타율적인 것이었다. 개항에 따라 일본의 영사관·공사관이 1880년 원산(元山)을 필두로 인천(1883)·서울(1884)·부산(1884)에 차례로 세워졌는데, 이 건물들은 일본 기술에 의해 서양식을 본뜬 2층목조건물들이었다.

1890년 이후부터는 서양각국의 공관도 세워졌는데 러시아(l890)·영국(1890)·프랑스(1896)·독일(1900)·벨기에(l905) 등 유럽 각국의 공사관이 준르네상스식 2층 벽돌건물로 서울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유입으로 고딕양식의 학교와 성당·교회가 세워졌으며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독립문(1897)도 세워졌다. 1900년을 전후하여 경운궁이 중건되면서 몇개의 서양식건물이 세워졌는데 석조전은 고전주의적인 수법이 가미된 것이었다.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조선을 침작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탁지부건축소(度支部建築所)를 두고 의정부 청사(1907)·한성 재판소(1908) 등 관아건물을 세웠다. 그 밖에 기독청년회관 등이 이 무렵에 세워졌다. 이 시기의 건물은 벽돌 2층의 준르네상스식이 많았고 한·양옥 절충의 점포가 종로 등에 생겨났으나 상가의 대형화로 오래 가지 않았다.

1916년∼1926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세워진 총독부 건물은 르네상스식 석조건축으로 일제강점기 중 가장 큰 건물이었다. 1920년대 초반에 조선호텔·대한성공회·이화학당·연희전문 등 주로 종교 계통의 건물이 서유럽 기술자들에 의해 설계되었다. 1925∼1926년 무렵에는 기존의 양식주의(樣式主義)에서 벗어난 합리주의적인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 경성전기주식회사(1929)·상공장려관(1929)·부민관(1935) 등이 세워졌다.

1928년 무렵에는 조선의 향토적 정서를 건축에 반영하려는 경향이 나타나 유서 깊은 지방의 역사(驛舍)나 박물관 등에 채택되었다. 1929년부터는 박길룡(朴吉龍)·박동진(朴東鎭)·강윤(姜鈗) 등 한국 건축가들의 작품이 잇달아 만들어졌으며, 특히 이천승(李天承)과 김희춘(金喜春) 등은 광복후 건축설계의 선도자로서 한국건축을 다음 세대에 잇는 역할을 하였다. 광복 직후에 건축인들은 <조선건축기술단>을 조직하였고 1950년대에 들어와 <대한건축학회(1954)>로 개칭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50년대 주요 작품으로는 《명보극장(1957, 김종업)》 《국립중앙기상대(1959, 정인국)》 《혜화동 성당(1958, 이희태)》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대채로 국제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건설수요가 급증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주의적 경향이 기반이 되면서도 여기에서 벗어 나려는 의도를 보이는 작품들이 나타나는데 《프랑스 대사관(1962, 김중업)》 《자유센터(l964, 김수근)》 《남산 시립도서관(1964, 이해성)》 《유네스코 회관(1966, 배기형)》 등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에는 업무용 건축의 대형화라는 양상이 나타남과 아울러 주거건물의 변모가 이루어졌다. 고전적 근대주의와 한국 건축의 전통양식을 조화시킨 것으로 《국립극장(1973, 이회태)》 《세종문화회관(1978, 엄덕문)》이 있고, 합리주의적인 근대주의의 경향을 반영한 업무용 건물로는 《동방생명빌딩(1976, 박춘명)》 《대우센터(1977, 대우개발)》 등이 제작되었다.

주거건축은 합리적 기능주의가 강조되고 좁은 공간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 1970년대 후반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새로운 주거문화를 이루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건물의 기능과 조형미가 함께 고려된 건축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올림픽주경기장(1984, 김수근)》을 비롯한 을림픽 관련 시설물들과 《대한생명 63빌딩(1985, 박춘명)》 《국제빌딩(1985, 동해 엔지니어링)》 《한국무역회관(1988, 일신건설)》 《국립현대미술관(1986, 김태수)》 《롯데월드(1988, 노무라 구로카와>》 《예술의 전당(1988, 김석천)》 등은 선진건축의 새로운 장을 여는 초석이 되었다.

<김동한>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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