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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7-21 (월) 19:4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207      
[삼국] 경주 황룡사 9층목탑 (민족)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

황룡사 구층목탑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탑의 높이가 약 80미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 나라 최고의 목탑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황룡사(복원모형). 경북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에 있었던 목탑 복원 모형이다.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으로 건립된 우리 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이며, 현재는 목탑지가 남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사적 제6호)에 있었던 목탑. 황룡사 가람 배치 때 중심 불탑(佛塔)으로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 있다. 1976년부터 10년간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과정에서 이 목탑지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목탑지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지(金堂址)와 같이 기단 상면에 초석이 드러나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정면과 측면은 모두 7칸의 평면형식이었고, 건물내부는 외진주(外陣柱 : 겉에 내보이지 않게 된 기둥)초석 배치와 같은 주열상(柱列上)에 모두 초석이 배치되어 있어, 심초석(心礎石)을 중심으로 4천주(四天柱)초석·제1내진초석·제2내진초석·외진주초석의 순으로 초석들이 놓여 있었다.

현재 외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28개이고, 안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36개로, 기단상에는 총 64개의 초석과 하나의 심초석이 놓여 있다. 평면 4각형의 탑 자리에는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만 남아 있다.

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 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 ”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이 탑은 신라와 고려 두 왕조에 걸쳐 593년 동안 여섯 차례 중수되는 등 호국성보(護國聖寶)로 숭앙을 받아왔다. 또한, 이 탑은 우리 나라 최초의 목탑양식을 알 수 있는 것으로, 황룡사지와 더불어 사찰 및 목탑의 규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문헌≫

新羅皇龍寺九層塔誌-刹柱本記에 대하여-(黃壽永, 考古美術 116, 1972).

<정영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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