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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7-21 (월) 20:28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876      
[삼국] 경주 황룡사 9층목탑 (문화)
황룡사지(皇龍寺址)

황룡사지 추정복원도. 문화재청 사진

황룡사지전경. 문화재청 사진

황룡사지 목탑지유구노출상태. 문화재청 사진

종목 : 사적 제6호
명칭 : 황룡사지(皇龍寺址)
분류 : 사지
면적 : 380,087㎡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
시대 : 신라 미추왕
소유자 : 국유,사유
관리자 : 경주시

<기본 설명>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전문 설명>

경주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는 이 절터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황룡사는 규모나 사격(寺格)이 신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터는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의 연회좌석이 있는 곳으로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 땅이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황룡사는 553년(진흥왕 14)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으므로 절로 고쳐짓기 시작하여 17년만에 완성하고 황룡사(皇龍寺)라 이름하였다. 그후 574년 서천축의 아육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 금과 철을 바탕으로 장육존상을 주조하였다. 이 삼존불상 중 장육존상은 금 10,198분·철 35,007근으로, 두 보살상은 철 12,000근·금 10,136분을 들여 만들었으며 이들 불상을 모시기 위하여 금당을 고쳐지어 584년에 완공하였다.

643년(선덕여왕 12)에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국가를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지키고자 청을 올려 9층목탑을 조성하였는데 이 목탑은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와 신라의 용춘이 소장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하였다. 목탑은 전체 높이가 225척이었으며 자장이 부처의 진신사리 100립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신라 삼보인 이 목탑과 장육존상은 1238년 몽고의 침입에 의하여 불타고 그후 고쳐짓지 못하였다.

황룡사 가람배치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그 평면 배치와 가람의 변천상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황룡사의 가람배치에 변화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1탑식 가람배치이다. 즉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일직선상에 중심축을 두고 자리하며 이들 중심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이 있고 중문의 남쪽에는 남문이 있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되고 난 다음 완성된 황룡사 중창가람은 목탑의 북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중앙 금당의 좌우측에 규모가 작은 금당이 각기 배치되는 1탑 3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탑의 앞쪽 좌우에 경루와 종루가 대칭을 이루고 배치되기도 하였다. 황룡사의 종루에는 754년(경덕왕 13)에 구리 497,581근을 들여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몽고의 침입시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에서는 금동불입상을 비롯하여 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높이 182㎝에 이르는 치미는 황룡사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신라에 있었다는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황룡사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고 강당은 자장이 보살계본을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을 강설한 곳이다. 그리고 역대 왕들은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강당에 친히 와서 고승이 모여서 마련하는 백고좌강회에 참석하여 불보살의 도움을 빌었다. 즉 황룡사는 신라에서 가장 주요하고 규모가 큰 가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들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심 가람이었다.

출전 :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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