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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6-06 (수) 11:40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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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미술] 1460. 경주 황룡사 복원 모형

1460. 경주 황룡사 복원 모형

불교를 공인한 신라는 진평왕과 그 왕비의 이름을 석가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과 같은 백정과 마야라고 하였다. 그들은 왕이 곧 부처라는 관념의 불교, 즉 부처인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식의 관념으로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 통합력을 높이려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 불교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그 목적을 위해 지어진 절이 황룡사이다.

황룡사에 세워졌던 황룡사 9층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 볼 수 있는 80여 미터의 거대한 탑이었다. 황룡사는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과 황룡사 9층목탑을 지닌 가장 대표적인 호국사찰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절을 처음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났기 때문에 절로 고쳐 짓고 절의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하였는다. 궁궐을 짓다가 절로 바꿔 지은 데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을 것이다.

즉 불교 공인에 저항이 심했던 귀족 세력을 의식한 것으로, 흥륜사를 완성한지 9년 만에 또 새로 절을 짓는다면 그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므로 짐짓 궁궐을 짓는다고 시작해 놓고 황룡의 출현을 핑계로 절을 짓게된 것이다.

이때에 지어진 황룡사를 1차 가람이라 한다(569년 완공). 그로부터 5년 뒤에 황룡사 장육존상을,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는 금당을 완성하였다. 금당이 완성된 뒤 60여 년이 지나 선덕여왕 때(645)에 황룡사 9층목탑이 세워졌다.

장육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의 경북 울주 지방에 큰 배가 와서 닿았는데 그 배에는 편지와 1불 2보살상의 모형이 실려 있었다. 편지에 인도 지방의 아육왕이 황철 5만 7천근과 황금 3만푼으로 석가삼존불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띄워 보내니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황룡사에 모셔 1장 6척(약 5미터)의 장육존상을 1차 가람의 금당에 모시니 금당이 너무 작아 다시 금당을 지었다 한다.

9층목탑은 중국의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護國龍)은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자장은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9층목탑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 100알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인왕회(仁王會), 국왕 참석 하에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경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 등이 통일 전부터 신라가 망해 가는 경애왕 말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발굴 과정에서 나온 금동사리함 안팎에 새겨진 찰주본기(擦柱本記)에는 경문왕 때인 87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다고 하며, 탑을 다시 세우면서 철반(鐵盤) 위에 작은 석탑 99개를 안치하고 각 탑에는 사리 한 알과 네 종류의 다라니를 넣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총높이가 225척[80m정도(40m 정도였다는 설도 있다)]이었다고 하는 황룡사 9층목탑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벼락을 자주 맞아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고 한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서도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며 9층 목탑의 보수를 위하여 목재까지 제공받았다. 그러나 1238년(고종 25) 몽고군의 침입으로 목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9층목탑의 건축 총감독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가 담당하였는데, 아비지가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주변의 구한(九韓) 즉 말갈, 고구려, 백제, 왜 등의 침범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삼국유사》와 《찰주본기(刹柱本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황룡사 복원 모형 사진이다. 비슷한 모형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독립기념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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