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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19 (화) 07:3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6472      
[삼국] 백제의 예술 (백제역사문화관)
백제의 예술

1. 백제 미술의 특징

부여 석조. 보물 제194호, 높이 1.57m, 국립부여박물관 소장우리 나라의 고대 문화는 각기 독특한 성격과 양상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이중에서도 백제의 문화는 고구려 신라와 다르게 섬세함과 온아함을 가진 미술 문화로 평가되어 왔다. 백제의 문화는 여러 측면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겠으나, '바다와 강을 이용할 줄 안 사람들의 문화'로 불려져도 좋을 듯하다.

이 열린 창구를 통하여 백제는 중국 남조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백제는 문화면에서 주변의 여러 나라와 서로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발전하였다. 같은 부족계통인 고구려는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한족으로부터 문화적 영향을 받고, 다시 이를 동쪽의 신라나 바다 건너 후진의 일본에 전해주었던 것이다. 대체로 백제 초기의 문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여지지만, 웅진 시대부터는 고구려와의 정치 관계가 끊어짐과 함께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특히 중국 남조 문화의 영향은 백제의 문화와 예술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백제의 문화는 백제가 처한 지리적인 조건, 즉 한강유역의 평탄하고도 비옥한 자연환경과 금강, 영산강 등등 충청 호남지역의 넓은 농경지와 바다라는 풍요로운 자연조건을 기반으로 하면서, 점차 고구려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백제특유의 온유하고도 세련된 성격으로 변모되어 갔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백제문화가 전반적으로 다양하면서도 온화함과 섬세함이 곁들여진 것임은 이러한 고대 농경사회의 풍요가 밑바탕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백제는 스스로 발전시킨 문화를 이웃 일본이나 신라에 전파하는 교량 역할도 충실히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는 백제의 문화적인 왕성한 활동성과 자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 금동 향로백제가 신라에 비하여 문화적 선진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화 전파의 흔적들은 많은 곳에서 발견된다. 신라가 국력을 기울여 세운 황룡사도 동양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창건할 수 있었던 백제의 기술 원조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었다. 백제 문화는 중국과 고구려의 서북 문화와 관계를 가지면서 신라와 일본의 남동 문화와 연결되는 이를테면 동아시아 문화 전파의 중요한 거점이자, 교량 역활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삼국의 미술 문화는 모두가 불교 사상과 불교 미술이 주류를 이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불교 미술의 특징은 장엄미와 신앙심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따라서 각 시기 최고 수준의 조형미술을 대변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전하는 백제의 미술 문화는 고분 출토품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불교 문화 유적과 관련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백제 문화가 그 이전 시기에 발달했던 마한의 여러 지역 문화를 아우르면서 다양한 모습을 가미하였다는 사실이다.

2. 조각

1) 백제 불교 미술

백제는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12년 후인 침류왕 원년(384년)에 동진으로부터 건너온 호승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385년엔 한산에 사찰을 건립하고 그곳에 승려 10인을 두었다.

그 후 백제의 불교는 아신왕을 거쳐 성왕대에 이르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고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고대 한-일 문화관계에 있어서도 그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성왕 이후 그 뒤를 이은 위덕왕 및 무왕대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불교는 사상 뿐만 아니라 불교 미술에 있어서도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백제의 불상은 현재 대부분이 사비기의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한산 및 웅진기의 백제사지가 아직까지 한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물론 고기록을 통해서 전술한 한산의 사찰, 그리고 웅진의 수원사에 위덕왕 때 신라의 승 진자(眞慈)가 미륵 선화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살필 수는 있지만 지금까지 기록과 합당한 사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반면 사비 도읍기의 사지의 경우는 고고학적인 성과에 의해서 다수가 확인되었고 아울러 불상도 최근까지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백제의 불상은 현재 금동불이 대부분이며 그 이외 석불 및 마애불도 소수가 전하고 있다. 특히 금동불의 경우는 그 크기가 대부분 한자 이내이기 때문에 그 이동성이 원활하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가까운 일본에도 많은 수가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따르는 석불 및 마애불의 경우는 자연적 혹은 인위적인 훼손이 심해 현존상태가 양호하지 못한 것이 많은 편이다.

2) 백제의 불상 조각

금동불이란 불상의 표면에 금색의 칠을 하여 엄숙함 및 장엄미를 갖추도록 한 것으로 불상의 조성 규범 중 하나인 32길상의 금색상(金色相) 및 장광상(丈光相)에 기인한 것이다.

백제의 금동불상은 다시 그 격에 따라 여래상 및 보살상, 그리고 나한상 등으로 나눌 수 있겠고, 부처의 자세면으로는 입상 및 좌상, 그리고 반가사유상으로 구분된다.

백제의 금동여래상으로는 서산 보원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을 비롯하여 부여 규암면 新里 출토 금동여래좌상, 남궁련 소장 금동여래좌상 및 부여 가탑리사지 출토 금동여래입상 등을 들 수 있다.

백제의 금동보살상은 크게 관음보살 및 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리고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의 경우 아미타여래의 좌협시 보살로서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 백제의 상에서는 오로지 독존(獨尊)으로만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미륵보살상은 금동 뿐만 아니라 석조상의 경우도 6세기 후반에서부터 7세기에 이르기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되는데 자세는 반가사유형이 대부분이며 이는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신라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서산마애삼존불마지막으로 석불의 형식으로는 군수리사지 출토 납석제 석조여래좌상 및 예산군 화전리 사면석불, 부소산성 출토 납석제 반가사유상, 정립사지 출토 납석제 삼존불상, 정읍 보화리 석불입상 그리고 익산연동리석불좌상 등을 들 수 잇는데, 특히 예산 화전리의 사면석불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방불이란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자못 크다고 하겠다.

마애불이란 절벽의 바위면이나 거대한 바위면에 선각 혹은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불상의 형태를 나타낸 것으로서 백제기의 것으로는 서산마애삼존불 및 태안마애삼존블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마애불은 그 이동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적 및 조각의 유파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이상에서 6세기말 7세기초는 백제 불상에 있어서 양식적으로 혹은 새로운 불상의 조성이란 측면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이전만 하더라도 백제 불상은 전반적으로 삼국의 공통성을 주로 보이면서 발전하여 왔다. 하지만 백제인은 단순한 모방만이 아닌 백제화를 이루는데도 노력을 보였는데 이는 군수리사지 출토 납석제 여래좌상에서 볼 수 있다. 이상은 원래 중국 5호16국 시대에 만들어진「석조건무사년명(石趙建武四年銘)」금동여래좌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인데 자연스럽게 웃는 모습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7세기대에 이르면 이상과 같은 X자형의 옷주름, 가름하면서도 세장한 얼굴 및 신체 등은 이제 북제 말, 수, 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조금씩 양식적인 변천을 보이게 된다. 즉 불, 보살의 복부 부위에서 교차되던 X자형의 옷주름은 이제 사라지고 그 대신 보살상의 경우 X자형의 영락이 유행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상의는 벗은 채 군의(裙衣)만을 걸친 나신의 보살상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상호 및 신체도 갸름한 형태가 아닌 둥글고도 굵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어다. 이와 함께 예산 대흥면 교촌리 출토 금동보살입상 그리고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입상 등에서는 통일신라시기에 유행했던 삼곡자세를 살펴볼 수 있는데 이도 당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새로운 양식임이 분명하겠다.

또한 7세기대를 전후하여 백제에서는 새로운 상인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이 중국 양과의 교류를 통하여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현존하는 상은 대부분 금동불인데 그 양식적인 특징을 보면 보관의 관대 양쪽으로 관식이 늘어져 어깨에까지 내려오게 하며, 천의는 허리 아래에서 X자형으로 교차되게 하여 몸 양쪽으로는 몇 갈래의 지느러미 모양으로 뻗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목걸이의 경우 밑의 뾰족한 심엽형을 공통적으로 걸치고 있는데 이상과 같은 전반적인 양식은 군수리사지 출토의 금동보살입상이나 평원군, 덕산면, 원오리 절터의 이조여래입상들과도 유사하여 대체적으로 삼국시대 초기에 유행한 보살상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겠다.

3. 그림과 글씨

1) 그림

부여 능산리 동하총 사신도백제인들의 그림 솜씨는 이미 463년(개로왕 9)에 왜의 요청으로 왜에 건너간 인기라아(因期羅我)가 일본 회화의 시조로서 알려진 것이라든가, 성왕의 후손인 진귀가 왜에 건너가 화가로 활약하였던 것, 그의 후손인 혜존과 음도 등이 화사로서 일본에서 활약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이밖에도 588년(위덕왕 35) 왜에 건너간 白加가 그림 뿐 아니라 서예로도 이름을 날렸고, 597년에는 위덕왕의 아들인 아좌태자가 유명한 쇼토쿠태자의 모습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쇼토쿠 태자의 모습은 섬세한 필치와 담백한 색채, 동작 묘사에 있어서 백제 회화의 수준을 잘 나타내는 걸작이다. 백제의 그림으로는 능산리나 송산리 6호준에서 보는 고분벽화가 중심이 되는데 그 예로 공주 송산리 전축분과 부여 능산리 석실분의 네 벽에 그려진 사신도와 연화문 구름문, 그리고 성숙도(星宿圖)가 있다.

6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벽면에 사신도의 윤곽을 따라서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채색된 사신도를 그렸다. 현재는 보존 상태가 나빠서 겨우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만, 발견 당시의 모습에는 사신도의 생동감과 유려한 필치가 엿보인다. 비슷한 시기의 사례로는 본격적 회화 작품은 아니지만,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두침과 족좌도 백제인의 회화 수준을 보여주는 편린이 남아 있다. 두침과 족좌에는 연꽃과 주작의 형태가 그려져 있는데, 이 역시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부여의 능산리 고분벽화는 사벽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연화문과 비운문이 그려져 있다. 능산리 6호분과는 달리 이 고분은 석실분이어서 잘 다듬어진 석벽에 직접 그림을 그렸으며, 백호도는 고구려의 역동적인 표현 기법과 대비되는 백제적인 유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2) 글씨

삼국 중에서도 특히 백제는 한문학이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중국 梁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강례(講禮) 박사를 초청하는 등 유교적인 학문 소양을 넓혀 나갔고, 특히 무령왕대에는 513년(무령왕 13) 오경인《시경》《서경》《역경》《예기》《춘추》에 통달한 전문박사였던 단양이(段楊爾)를 왜에 파견하였다. 5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무(高安茂)를 보내어 단양이와 교대시켰다. 그리고 554년(성왕 32)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되어 전임자인 마정안(馬丁安)과 교대하여 파견하는 등 백제 출신의 학자들이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기여케할 정도로 유교적인 소양과 수준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왕인은 전임자로서 왜에 파견되었던 아직기(阿直岐)의 천거로《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왜에 건너가 왜왕의 신하들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가와찌 아스카 일대에 거주하면서 문서 등을 맡아 보면서 고대 일본의 문화향상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한편 박사 고흥이 백제의 역사책인《서기》를 편찬한 사실도 백제의 한문학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이같은 백제 한문학의 수준은 오늘에 전하고 있는 몇몇 금석문들이 실제로 증명해 준다.

백제의 발달된 조형 문화와 예술은 한편으로 백제인들의 의식이나 사상과 밀접한 상관을 가지면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 표현과 기록의 수단으로서 문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무령왕 무덤에서 나온 돌로 된 매지권은 왕과 왕비의 간략한 사적과 함께 1만문의 돈으로 무덤을 쓸 땅을 사들였다는 관념적인 토지 구입 사실을 적어 놓은 것인데, 그 글씨가 그 무렵에 중국에서 유행했던 육조체의 예스러우면서도 매우 우아한 붓놀림으로 적혀 있어 그 시대의 한문학의 수준을 간접으로 나타낸다. 최근 금동용봉향로가 출토된 능산리 절터에서 위덕왕과 관련된 석함의 기록이 보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같이 세련된 글씨를 우리는 부여에서 발견된 사택지적의 비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사택지적비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유행했던 이른바 사륙병려체의 문장 양식을 지니고 있다. 사륙병려체의 글은 병문 또는 사륙문이라고도 하는데 넉자 구와 여섯자 구를 쓰는 것과 대우법을 쓰는 특징을 지닌 매우 수준 높은 것이다. 사택지적이라는 이름을 가진 백제의 한 귀족이 인간 세상의 무상함을 탁식하며 종교의 신앙심으로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내용이 담김 이 비문은 백제의 한학 수준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출전 : 백제역사문화관-백제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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