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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4 (목) 05:5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378      
[삼국] 신라미술 (두산)
신라미술 新羅美術

신라 때 생성된 미술 및 미술품. 신라의 미술은 초기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나, 뒤에는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6조(六朝) ·수(隋) ·당(唐) 등 중국문화와 멀리 인도 등의 남방문화까지 받아들임으로써 패기 있고 섬세한 양식으로 발전하였고, 통일 후에는 보다 화려하고 세련된 면을 보여준다.

[신라 건축]

분황사 모전석탑신라의 건축으로서는 궁터[宮址] ·사지(寺址) ·첨성대(瞻星臺) ·분황사탑(芬皇寺塔) 등이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는 처음 금성(金城)에 도읍하였다고 하나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월성(月城)뿐이다. 월성은 반달 모양의 성으로서 성벽은 언덕 위의 지면을 까고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성이다. 그리고 남천(南川)에 임한 벼랑에는 성벽을 쌓지 않았다. 대체로 이 월성, 즉 반월성을 중심으로 하여 궁과 관청들이 모이고 그 주변에 민가(民家)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경주에는 고신라 시대의 절터가 많이 남아 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6세기 초에 가장 먼저 건축된 사찰은 흥륜사(興輪寺) ·영흥사(永興寺) 등이다. 그 뒤를 이어 황룡사(皇龍寺)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廟寺) ·삼랑사(三郞寺) 등의 사찰이 창건되었다. 흥륜사는 경주 안의 7개 큰절의 하나로, 기록에 의하면 544년(진흥왕 5)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금당(金堂)과 남문(南門), 좌우회랑(左右廻廊) 그리고 남지(南池) 등이 있었다고 한다. 경주시 남교 남천 못미처에 남아 있는 금당터는 동서길이 50m, 남북길이 30m, 높이 2.4m의 흙단을 이루고 있다.

황룡사지 전경황룡사의 건물들은 남으로부터 중문 ·탑 ·강당의 차례로 남북 중심축 위에 세워졌었다. 이렇게 남북 선상에 있는 일당 ·일탑의 가람 배치는 고신라의 형태이나 통일기에 들어가서 쌍탑제로 바뀌게 된다. 고신라의 건축물 중 돌탑으로 유명한 것에는 분황사석탑이 있다. 이 탑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축된 것으로,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돌로 쌓았으면서도 마치 벽돌로 쌓은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특징을 가졌다.

또 고신라의 건축예술에서 발전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건조물에 첨성대가 있다. 첨성대는 화강석을 다듬어 축조한 건축물로서 기단과 몸체 그리고 4각 돌귀틀로 이루어겼다. 기단은 사각형이고 한 변의 길이는 6m이며 그 각 면은 동 ·서 ·남 ·북의 방위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몸통은 둥근 병을 세워놓은 것 같다. 몸통은 화강암을 다듬어 27단으로 쌓아올렸는데 각 단의 높이는 약 30cm이고 총높이는 9.4m가 된다. 그리고 27단의 몸통 위에는 4각의 돌귀틀이 놓였다. 이 첨성대는 세운 지 1,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것은 첨성대를 세우는 데 정밀한 설계와 발전된 건축기술이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국사 전경신라의 정치 ·문화는 경주를 중심으로 개화되고 경제면 역시 진골귀족들의 권익을 위해 수도에 편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건축미술 분야에서도 국왕을 중심으로 한 귀족예술에서만 그 시대의 양상을 살필 수가 있다. 당시 경주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기와집으로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 자취는 알 수가 없고, 궁성의 규모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다만 현존하는 안압지 ·포석정 ·임해전 등을 통하여 전제왕권하의 귀족들의 연회장임을 알 수가 있다.

통일 후의 건축을 보면 불국사 ·사천왕사(四天王寺) ·망덕사(望德寺) ·감은사(感恩寺) 등은 금당(金堂) 앞 좌우에 쌍탑식 가람배치 양식을 취하면서 중간과 강당(講堂)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금당을 중심으로 배열된 것이 특징이다.

[조각]

사탑과 불상

배리삼존불불교의 융성에 따라 사탑 ·불상 등을 통하여 신라인들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예술의 특징은 초기는 부족국가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토우(土偶) ·기마인물(騎馬人物) 모양의 토기 등 소박성을 반영했으나 차차 고구려 ·백제 ·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려하고 섬세한 귀족사회의 예술이 등장하여 말기에는 엄격하고도 조화미가 넘치는 신라 고유의 특징이 나타났다.

통일 전의 조각물로는 선덕여왕 때에 완성한 호국사찰인 황룡사와 백제인 아비지(阿非知)가 건축한 황룡사 목조 9층탑과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인 장륙존상이 있었으나 몽고의 병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황룡사지 발굴 결과 사원의 가람(伽藍) 배치는 백제 ·고구려의 형식이 혼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분황사의 모전석탑(模塼石塔)과 패기에 넘치는 인왕상(仁王像) ·사자상(獅子像)의 조각과 원통형(圓筒形)으로 27단이나 석재로 쌓아올려 만든 첨성대와 석빙고(石氷庫) 등이 남아 있다.

불상은 미륵반가상(彌勒半跏像)이 많이 만들어진 것이 특색인데 마애불(磨崖佛)로는 경주 삼화령의 미륵삼존불, 월성군 단석산 신선사(神仙寺) 석굴의 마애상, 경주 인왕동의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경주 선도산(仙桃山)의 마애삼존불, 군위 석굴의 삼존불상, 영주 가흥리의 마애삼존불상, 특히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의 반가사유상은 동양 최대의 반가상으로 장중한 위엄을 강조하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이나 출토지가 분명치 않아 국적이 불분명하다. 이 때의 조각가 양지(良志)는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과 천왕상, 법림사(法林寺)의 삼존불상을 만들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석굴암 본존불불국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고 현존하는 것은 석조물(石造物)뿐인데 자하문에 이르는 청운교 ·백운교와 석가탑 ·다보탑은 균형과 조화미를 이룬 걸작으로 구례화엄사 사자탑과 함께 신라 석탑의 일품이다. 이 밖에 감은사지 3층석탑, 나원리 5층석탑, 창녕 술정리 3층석탑 등은 일반적인 석탑으로 꼽힌다. 석굴암 석굴은 인조(人造) 화강암 석굴로서 구조는 전실과 후실로 되어 있는데, 전실 벽에는 팔부신상(八部神像) ·금강 역사상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후실 중앙의 대좌(臺座) 위에 본존불상(本尊佛像)이 있다.

그리고 본존불상이 있는 벽에는 천부상(天部像) ·11면관음보살 ·유마거사 등이 본존불상을 옹위하고 있다. 이 석굴암의 불상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이루는 작품이다. 불교는 통일 후 산간불교(山間佛敎)로 발전하는 경향이 나타나 부석사, 지리산의 화엄사, 팔공산의 미리사, 계룡산의 갑사 등 오악(五岳) 중심으로 발전한 화엄종(華嚴宗)의 사찰이 유명하고 이 밖에 해인사 ·범어사 ·금산사(金山寺:母岳山) ·법주사 등 법상종(法相宗) 계통의 대 ·소 사찰이 전국 각지에 건립되어 불교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8세기를 맞이하면서 특히 이와 같은 석탑과 장중한 불상을 제작한 것은 국가안태를 기원하는 호국적 성격도 있으나 전제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국왕의 위엄을 종교적인 세계에서 나타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조물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신라의 석조물 중에서 석등(石燈)은 화엄사의 각황전 석등(覺皇殿石燈), 법주사의 쌍사자석등 ·사천왕 석등이 대표적 작품인데 각황전 석등은 높이 6m가 넘는 최대의 거작이다. 석조(石槽)로는 경주 보문리 석조와 법주사의 석련지(石蓮池)가 귀족적인 색채를 풍기는 화려한 작품이다. 비석으로는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촬首)와 귀부(龜趺), 경주 서악리 귀부가 대표적 작품인데 이것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태종무열왕릉비의 이수는 여섯 마리의 용(龍)이 모두 중앙을 향해서 흐뜨러지지 않고 통일을 이루고 있는 형태는 귀족들을 지배한 정신적 자세에서 소산된 작품이라 하겠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또는 경주의 망덕사지(望德寺址)의 당간지주, 영풍군 부석사의 당간지주, 공주 반죽동(斑竹洞)의 당간지주, 금산사의 당간지주 등이 있는데 모두가 안정감을 주고 있다. 특히 공주 갑사(甲寺)의 당간은 철당간(鐵幢竿) 지주로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음양사상과 관계를 가진 12지신상(支神像)은 12간지 신상인데 분묘의 호석(護石)에다가 무덤의 주인공을 수호한다는 뜻에서 쥐[子] ·소[丑] ·범[寅] 등의 동물 모양을 조각하여 12방향으로 방위를 지키는 방위신(方位神)의 역할을 담당토록 하였다. 12지신상의 대표적 작품은 성덕대왕릉(圓彫形) ·괘릉과 김유신묘(浮彫)의 것이 유명하다. 또한 12지신상은 탑의 기단부 등에도 조각되었는데 구례 화엄사 사자탑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12지신 사상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신라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창안된 것으로 고려 ·조선 왕조의 왕릉에까지 계승되었다.

[공예품]

경주 금관총 출토 금제 허리띠삼국 중 공예품을 가장 많이 남겨놓은 것은 신라이다. 그 이유는 신라 고분의 구조가 도굴하기 어려운 구덩식 돌무지 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墳]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분묘에서 볼 수 있는 벽화 등의 회화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분묘에서 출토된 공예품을 보면 금관 ·금띠 ·금귀고리 ·금팔찌 ·금가락지 ·목걸이 등 순금제품과 유리잔 ·숟가락 ·구리솥 ·은제 합(盒) ·방울 ·순금제 고배(高杯) 등이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서봉총(瑞鳳塚) ·천마총(天馬塚) 98호고분 등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들 공예품을 통해서 신라인의 호화로운 사치성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은 미적인 우수함보다는 왕권의 상징물로서 더 큰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통일 후의 공예품을 보면 경애왕이 당나라 대종(代宗)에게 주었을 때 “신라의 巧는 天造요 人造가 아니다”라고 경탄했다는 만불산(萬佛山:침단목으로 만든 假山)이 있었는데 현재 전해지지는 않으나 신라인의 공예술을 짐작할 수 있다.

성덕대왕신종공예품 중 주목되는 것은 범종(梵鐘)이다. 상원사동종(上院寺銅鐘)은 725년(성덕왕 24)에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며,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奉德寺鐘)은 경덕왕 때 착수하여 혜공왕 때 완성(771)된 것으로 현존하는 최대의 종이다. 이 종은 견대(肩帶) 아래 4곳에 유곽(乳廓)이 배치되었고, 한 유곽 내에 종유(鐘乳)의 수가 각각 9개씩 배열되어 총 36개이며, 종신(鐘身)에 있는 비천상(飛天像)은 생동하는 미적 감각을 나타낸다. 종신 상단부에는 소연화무늬, 중간에는 섬세한 당초지(唐草地)무늬에 복련화(覆蓮花)무늬, 하단에는 보상화(寶相華)무늬의 띠를 둘렀다.

이러한 종의 형식은 신라종만이 갖는 특이한 양식이며 후대까지 계승되어 한국 종의 특색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신라종은 일본에도 현재 몇 개 전해지고 있다. 9세기 선종(禪宗)의 보급에 따라 고승의 사리를 안치했던 부도(浮屠)가 나타났는데 부도에서 발견된 사리구(舍利具)도 대표적인 공예품이다. 그 중 감은사지 석탑 사리구와 불국사 석가탑 사리구가 미술적으로 뛰어난 작품이다.

기마 인물형 토기토기(土器)를 보면 통일 전 토기는 정선된 바탕흙[胎土]를 사용하여 1,100 ℃ 이상의 고열로 구어서 제작하였다. 토기의 종류에는 다리가 긴 고배, 목이 긴 항아리[長頸壺] 등이 있는데 토기에다, 사람 ·거북 등의 동물 모양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에는 목이 긴 항아리, 다리가 긴 고배, 동물양식을 한 토기 등은 없어지고 다리가 짧은 고배, 뚜껑이 있는 합, 병(甁)이 나타나며 유약을 발라서 만든 토기가 특색이다(綠釉印花文壺: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와당(瓦當)은 삼국시대에는 연화(蓮花)무늬가 있는 숫막새와당이 주가 되는데 빈약한 편이다.

통일 후에는 숫막새 ·암막새 와당, 서까래기와, 귀면와(鬼面瓦) 등 종류가 다양하고 문양도 인동(忍冬) ·포도 ·연화(蓮華) ·원앙 ·용 ·사자 ·기린 ·토끼 ·앵무 ·봉황 등 다양하다. 특히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발견된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 흥륜사지에서 발견된 수렵문전,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사천왕문전(四天王文塼)이 뛰어난 작품이다.

[서화]

고신라의 화적(畵跡)은 삼국 중 가장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기의 벽화고분과 고분에서 드러난 단편적인 회화자료에 의하여 최소한의 수준을 헤아릴 수 있다. 벽화고분 1기는 순흥(順興)의 어숙술간묘(於宿述干墓)로서, 벽화는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의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려져 있는데, 대부분이 박락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돌문짝 표면의 인물상(人物像)과 연도 천장의 연화도(蓮華圖)뿐이다. 인물상은 얼굴과 손이 박락되어 완전한 모습은 알 수 없으나 발끝을 좌우로 벌리고 서 있는 입상(立像)이며 긴 저고리에 주름이 잡힌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다. 채색(彩色)은 적 ·흑 ·황 ·녹 ·자색 등으로 하였다. 돌문짝의 뒷면에는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여기 새겨진 을묘년은 서기 595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화도는 널길 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연꽃잎의 끝은 뾰족하고 화판(華瓣)에는 꽃잎 맥이 그려져 있는 붉은색의 7엽 3중 연꽃 무늬이다. 이 연꽃 무늬는 8엽이 아니라 7엽인 점이 특이한데 의식적으로 7엽으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수한 예술작품으로 그 형태는 백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벽화고분은 삼국시대의 신라벽화고분으로 유일한 것이며, 아름다운 채색과 가는 선으로 섬세하게 그린 벽화로 유명하다.

천마총 출토 천마도고분에서 드러난 단편적인 회화자료로서는 경주의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견된 자작나무껍질[白樺樹皮]로 만든 말다래에 그린 천마도(天馬圖)와 모자의 둥근 챙에 그린 기마인물도(騎馬人物圖) 및 서조도(瑞鳥圖), 금령총(金鈴塚) 출토품인 모자 챙의 당초무늬[唐草文樣], 황남대총(皇南大塚) 출토품인 칠기(漆器)에 그려져 있는 우마도(牛馬圖) 등을 들 수 있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벌 겹쳐 격자형(格子形)으로 꿰매어 만든 말다래 위에 채색하여 그린 일종의 장식 그림이다. 중앙에는 하늘을 달리는 백마(白馬)를 그리고, 사방 주변에는 인동당초무늬띠[忍冬唐草文帶]를 돌렸다. 백색의 천마는 혀를 길게 빼고 갈기와 꼬리털을 휘날리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백마의 몸에는 반달 모양의 무늬가 부각(浮刻)되어 있고 앞가슴과 뒷발 사이에는 각각 갈구리 같은 것이 달려 있다. 천마는 매우 사실적이고 색채도 선명하다. 이 천마도는 주 ·흑 ·녹 ·백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기마인물도는 부채꼴의 자작나무 껍질 8장을 잇대어 둥글게 만든 모자의 챙에 그려져 있는데, 8장의 부채꼴 자작나무 껍질에 질주하는 기마인물을 그렸다. 그림은 윤곽을 먹선으로 그리고 말은 흰색과 갈색을 교대로 사용하여 그렸다. 말꼬리와 말굽의 표현은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狩獵圖)에 보이는 것과 아주 흡사하며 말에 탄 인물은 말의 달리는 모양과는 달리 곧게 앉아 있다.

서조도는 부채꼴의 자작나무 껍질 6장을 잇대어 만든 모자 챙에 그렸는데, 안쪽 둘레에는 단엽연화판(單葉蓮華瓣)을 돌렸고 각부채꼴 만에는 주작형(朱雀形)의 서조(瑞鳥)를 한 수(首)씩 그렸다. 서조의 몸은 모양이 모두 같으나 머리는 쥐 또는 새 모양을 하여 서로 다르다. 그림은 먹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몸체는 주색과 황색으로 채색하였다. 서조의 날개가 반원형으로 올라간 것이라든지 머리에서 배에 이르는 선이 ‘S’자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강서(江西) 중묘(中墓)의 주작도와 비슷하다. 금령총의 채화판에 그려진 당초무늬는 당초(唐草)의 줄기에 불꽃무늬 같은 것이 부각되어 있으며 주색과 흑색으로 그려져 있다.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드러난 칠기판에 그려진 우마도는 흑색으로 칠한 면에 주색으로 윤곽을 뚜렷하게 그렸는데, 칠기판 윗단에는 소와 말이 서서히 걸어가는 모습을, 아랫단에는 또 다른 소 한 마리가 걸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위에서 보아 온 고분벽화와 회화자료에 의하여 고신라에서도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와 같이 회화작품이 활발히 제작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솔거(率居)가 그린 황룡사의 노송도(老松圖), 분황사의 관음보살상, 단속사의 유마거사상(維摩居士像)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백제나 고구려와 같이 고분벽화에서는 고분 구조상 벽화를 남기지 못했다.

다만 영풍군(榮豊郡:영주시) 순흥면에서 1971년에 발굴된 촌주(村主)인 어숙묘(於宿墓:石室)에서 연화무늬와 신장도(神將圖)가 발견되었다. 이 벽화는 6세기 말경의 것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73년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견된 천마도(天馬圖)는 마구(馬具)의 장니(障尼:말 배가리개)에 그린 것인데 2장이 한 벌로 되어 있는 것으로 패기에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고구려 고분의 기마도를 연상케 하고 있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한편 경북 고령군 고아동의 고분에서는 연화 ·운무늬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벽화의 형태는 고구려의 것과 같으나 고분 구조는 백제의 형태를 따르고 있어 고분은 6세기 중엽 대가야의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 후의 화가로는 김충의(金忠義)와 승려 화가 정화(靖和) ·홍계(弘繼)의 이름이 전해질 뿐이며, 현재 남아 있는 그림으로는 《화엄경(華嚴經)》 사경(寫經)의 《불보살상도(佛菩薩像圖)》(755)가 있다.

이 그림은 의본(義本) 등이 자주색 저지(楮紙)에 금은니(金銀泥)로 그린 것이다. 글씨는 통일 후 초기에는 왕희지(王羲之)체가 주축을 이루었는데 신라 최대의 명필가는 해동 필가의 조종으로 일컫는 김생(金生)이다. 그는 80평생(성덕왕 때) 서예에 활약, 원화첩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고려시대에 글씨를 모아 박은 집자비문인 백월서운탑비(白月栖雲塔碑)가 전해진다.

한편 석경(石經)으로는 《화엄경》 석경이 전해진다. 신라 말기에는 구양 순(歐陽詢)체가 유행하였는데 이 때의 화가로는 요극일(姚克一)과 최치원(崔致遠)이 대가로 꼽힌다. 1966년 석가탑 보수시에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은 751년(경덕왕 10)의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판 인쇄본이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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