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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2 (금) 00:05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395      
[삼국] 백제미술 (두산)
백제미술 百濟美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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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와당백제의 건국 시기인 BC 18년부터 7세기 후반 멸망하기까지 백제 영역에서 일어난 미술 활동.

백제는 마한(馬韓)의 한 국읍(國邑)세력의 일파로써 백제국(伯濟國)이 성장, 발전하여 이룩한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북방 이주민으로, 종족적으로 고구려와 같은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 미술의 근간은 고구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가 국가를 성립, 거듭 발전하면서 각국간에 정치·경제·지역적인 환경의 차이, 대외관계 등에 따라 상호 견제와 영향으로 독자적인 미술 활동을 하였다.

부여 군수리 출토 백제 호자백제 시대 미술의 발전 단계는 정치적인 변천과 맥락을 같이하여 3기(期)로 나누고, 한성 시대(漢城時代:BC 18∼475년), 웅진 시대(熊津時代:475∼538년), 사비 시대(泗姐時代:538∼663년)로 왕도의 천도와 같이 구분하고 있다.

삼국 시대의 가장 큰 사상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대륙에서 전래된 불교 사상과 그 영향을 받은 미술품이다. 불교는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보다 12년 후인 침류왕 2년(384년)에 전래되었지만, 중국에서는 남조에 해당되는 동진(東晉)으로부터의 전래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전에도 외국의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있음을 고분(古墳)의 축조나 출토 유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 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은 백제의 한성 시대부터 사비 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한성 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 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 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黑釉)거친무늬 토기 등이 있다.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적과 유물이 없다. 이 시기에 예배대상인 불상 등은 전래되거나 제작되었지만 귀걸이 이외의 장신구 등의 금속 공예품은 거의 없다.

부여 구아리 출토 백제 토제곰웅진 시대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으로 백제 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로 초기에는 지방 호족과의 다툼으로 혼란하였으나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梁)나라와 문물을 교류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 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大統寺) 창건, 수원사(水源寺) 등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불교 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 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을 볼 수 있다.

사비 시대는 백제의 웅비(雄飛)의 시기이며, 부여는 마지막 천도로 123년 동안 수도였다. 성왕(523∼554)은 백제의 중흥의 왕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 미륵사(彌勒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찰을 창건하여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南朝) 문화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조 예술의 요소도 보이며, 백제 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이 가늠된다.

백제 미술의 특성은 북방적인 고구려 문화 요소를 토대로 하여 시대성·자연환경·토착성·인위적 창조성을 갖고, 서남의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외교를 통해 받아들여 진취적으로 수용, 창조적으로 융화하여 찬란한 백제적인 미술품을 재창조하였다. 나아가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파하여 일본 문화 형성의 기조를 이루게 하였다.

[건축]

건축은 재료와 용도에 따라 목조 건축과 석조 건축으로 구분하고, 불교 건축과 일반 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 건축으로는 고려 시대 건축은 남아 있으나, 삼국 시대의 현존하는 건축물은 없다. 다만 궁궐과 사찰의 창건과 중수기록, 이 밖에 회화적인 그림, 금속 공예품을 통해 단편만을 유추할 수 있다. 백제의 가람(伽藍)은 대부분 절터만 남아 규모나 성격이 확연하지 않으나, 발굴조사에 의하면 가람의 배치는 1탑 3금당식에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배치되고, 가람의 중심을 회랑이 둘러싼 1탑 1금당식으로 변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궁궐>

《삼국사기》에 백제 온조왕(BC 18~38)이 한성에 세웠던 신궁이 매우 검소하면서도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초기의 궁궐 건축이 소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진사왕(385~392) 때에 궁전을 수리하고, 연못을 새로 파고, 그 속에 산을 만들고 기이한 금수(禽獸)와 초화를 길렀다는 기록에서는 궁궐 건축의 화려함과 조경술을 짐작할 수 있다. 아신왕(392~405)이 한성의 별궁에서 탄생했다고 하여, 궁궐에 많은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개로왕(455 ~475) 때 고구려 승려 도림(道琳)이 건의하여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들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 국력을 소모하여 한성이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 웅진으로 천도하여 궁궐을 짓고, 동성왕(479~501)은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6장의 높이로 세웠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수(奇獸)를 기르고 초화를 심었다. 왕궁지로 생각되는 공산성내의 굴건식 건물 터와 연지(蓮池)터가 있다.

금강변 장방형의 계단식 연지는 취수와 연지를 겸한 다목적 연못으로 백제인의 창의력을 보여준다. 성왕(523~554) 때 사비로 이도(移都)하여 궁궐을 짓고, 벽해궁(碧海宮) ·황화궁(皇華宮) ·태자궁 등의 기록이 있다. 무왕(600~641) 때 궁남지(宮南池)를 축조하여 20여리에서 물을 끌어오고 방장선산(方丈仙山)섬을 만들어 화초를 심은 것들은 도교에 보이는 삼신사상(三神思想)의 표현이며, 신라 안압지 연못의 전형이 되었다. 최근 조사된 건물지 부소산성 아래에서는 연못 ·도로유적 ·건물터 기단 ·석축 시설이 발견되어 궁궐터로서의 가능성을 더해주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고구려의 안악궁이나 신라의 월성과 같이 화려한 궁궐의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사찰>

익산 미륵사지 복원 모형한성 지역은 불법이 전해진 다음해인 침류왕 2년(385)에 한산주에 사찰이 건축되었다고 하였으나 알 수가 없고, 한강유역의 암사동(岩寺洞)이라는 지명과 서울 삼성동 출토 연판무늬기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웅진지역은 현재 공주시를 중심으로 성왕 5년(527)에 중국 양나라 황제를 위해 대통사(大統寺)를 창사한 기록과 공주시 반죽동과 중동 사이에 강당지로 추정되는 석조기단과 그 남쪽에 금당지와 탑지가 있고, 당간지주가 있는 1탑 1금당식 가람이 조사되었다. 이곳에서 대통(大統) 명문기와와 석조 2기가 발견되어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다. 수원사는 공주 월성산 기슭에 탑 기단 유구가 있다. 이는 위덕왕(554~598) 때 미륵설화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이 밖에 흥륜사 ·계룡산 갑사 ·반용사 ·마곡사 ·석굴양식의 동혈사, 서혈사와 주미사 등 10여 개가 있다. 특히 주미사지에는 석등 ·탑 ·금당이 정남향의 1탑 1금당 가람으로 보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전경사비 지역은 부여읍을 중심으로 많은 사찰 기록과 조사된 유적이 있다. 부여 규암리 소재 왕흥사는 사지(寺址) 주변에 방형초석과 석열 등이 있으며, ‘왕흥’이라는 명문기와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 20여 개의 사지가 있으며, 명칭과 발굴 조사에서 알려진 사지는 군수리 금강사 ·정림사 ·임강사 ·동남리 천왕사 ·백마강가에 고란사와 성주산성의 대오사 등이다. 외곽지역은 10여 개의 사지가 있으며 가장 유명한 사찰로는 익산시에 있는 미륵사지와 제석사 ·수덕사 ·보령시 성주사 등이 있다.

특히 미륵사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사찰이며 그 유적이 잘 남아 있어,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행하여졌다. 백제 무왕이 창건하고,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 중문지 ·3탑지 ·금당지 ·강당지 ·회랑 ·석등대좌 등이 현존하고 있다. 3개의 탑 중 중앙탑은 목탑지로 추정되며, 동서탑은 석탑으로 동탑은 새로 복원되고, 서탑은 반파(半破)되었다.

미륵사지 가람은 삼원병렬식(三院竝列式)으로 동 ·서 및 중원으로 구획되고, 각원에는 중문과 탑, 금당을 1동씩 두어 1탑식 가람을 동서 축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었다. 미륵사의 3탑 3금당도 분리하여 보면, 1탑 1금당식의 병렬이라 할 수 있다. 신라의 황룡사 가람과 비교하면 황룡사는 1탑 3금당식이다. 창건 시기가 비슷하고, 기술공들이 서로 왕래하였지만, 근본적인 가람 구성의 차이는 각국의 문화가 서로 독자적인 문화와 사상적 배경을 달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석탑과 석조물]

익산미륵사지석탑석탑은 목탑을 원형으로 하여 제작되고, 그 대표적인 석탑으로 미륵사지석탑 ·정림사지5층석탑 등이 있다. 목탑 유적으로는 부여 군수리와 금강사지에 정방형 목탑의 유구가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한국 최고 최대의 석탑이다. 현재는 6층만 남아 있지만 본래는 7층 혹은 9층의 탑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한국 초기 석탑의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엔타시스의 석주와 사방에 뚫린 문의 창방과 평방의 표현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백제 석탑은 신라 탑의 2중기단과는 달리 낮은 토단에 1층 기단을 세우는 것이 특징이며, 2층 이상은 초층에 비해 폭과 높이가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옥개석이 얇고, 네 귀가 가볍게 반전되어 전체적으로 날렵하면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이러한 목조건축 양식을 완전히 소화하여 새롭게 번안(飜案)한 간략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리하여 목조탑의 모방에서 벗어나 석탑 자체의 정형을 이루었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한때 평제탑(平濟塔)이라 불렸으나, 고려시대의 ‘정림사(定林寺)’ 명문기와가 출토되어 정림사지로 밝혀졌다. 석조유물로 석등과 석조 등을 들 수 있다.

석등은 불교의 유입과 더불어 석탑과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되된 것으로 추측되며, 미륵사지와 가탑리 출토 파편 등이 있다. 미륵사지석등은 화사석과 옥개, 하대가 남아 있다. 옥개석 상면은 8조의 합각이 간단히 묘사되어 단출한 느낌이며, 화사석에는 장방형의 화창이 4면에 뚫었다. 하대는 8엽의 복련판과 원형의 간주석을 끼울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형 양식은 이후에도 하나의 전통 형식으로 남아 통일신라 시대로 이어졌다.

부여 석조석조는 장방형 또는 원형으로 부처에게 공양하는 연꽃을 심었던 용기로 석련지(石蓮池)로 해석하고 있다. 공주 대통사지와 부여 관북리 ·가탑리 ·동남리 출토품이 있다. 대통사지 석조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짧고 가는 간석은 약간 불안해 보이나, 복련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 위에 발우형(鉢盂形)이 놓였다. 부여 동남리 석조는 자연 굴곡을 살린 고식이며, 가탑리 석조는 외형을 연꽃이 피어나는 모습, 관북리 석조는 원형대좌에 발우형으로 구연부의 일부가 파손되고, 한쪽에 출수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적인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잘 표출되어 있다. 기타 석조물로는 무령왕릉 지석 ·석수 ·곰나루석제 곰상 등과 사택지적당탑비(砂宅智積堂塔碑) 등이 있다.

[불상 조각]

서산마애삼존불현재 남아 있는 한성 시대의 조각품은 없다. 다만 사찰을 건립하고 승려를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예배의 대상인 불상과 용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의 백제는 공주 시대와 부여로 천도하는 시기로 무령왕릉의 연화무늬벽돌, 인동당초무늬 등 불교적인 요소를 보인다. 예산 4면불상·정림사소조불상·보원사금동불입상에서와 같이 이 시기의 조각품들은 아직 고구려의 강인함과 우아한 세련된 기법이 혼용되고, 불상조각은 부드러운 신체와 옷주름, 밝고 잔잔한 미소가 강조된 얼굴 등에서 백제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중국의 북위 양식이 상당히 남아 있으면서도 나아가 백제의 세련된 기법으로 변화하여 백제화된 양식의 확립기이다.

사비 시대는 천도 이후로 백제 최대의 번영 시기이므로 불교계에도 이에 힘입어 사찰과 탑의 축조가 늘고, 불상의 질과 양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군수리 납석제불상·금동보살입상·부소산금동삼존불상·예산 사면석불 등의 불상과 서산 마애불·태안 마애불 등은 중국의 동·서위 및 초기 북제·주의 양식의 영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백제인의 얼굴과 백제적인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완전히 정착된 시기이다. 근년에 조사된 예산 4면석불은 3 m의 거대한 하나의 자연암석에 각면에 심도 있게 부조상으로 불상을 조각하여 양감이 풍부하고, 힘이 넘쳐 흐른다. 이 불상의 발견으로 한반도 초유의 사방불이 백제에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후기는 7세기 초에서 7세기 말인 무왕 때부터 멸망 시기까지로 불상 조각은 익산 연동리 불상, 규암 금동보살상, 공주 금동보살상·현북리 금동보살상, 예산 교촌리 금동보살입상 등 불사의 성행과 불상의 조성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역사상 그 절정기를 이루었다. 인체의 모사(模寫)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관찰력으로 만들어진 불상은 백제조각의 부드러움과 육체미가 표출되는 체구 등에서 사실적인 양식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중국 수(隋)·당(唐)나라 양식의 영향을 보이면서 백제 조각의 진전된 양식을 나타내었다.

7세기 초에 이르면 하나의 조형 형식을 갖춘 유파로 양식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청량불상대좌는 불상은 없지만 백제 불상 조각사에 획기적인 자료라 하겠다. 대좌는 상현좌(裳懸座)로 결가부좌한 부처가 입고 있는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는 형식이다. 이 대좌는 대형으로 흙을 구워서 제작했는데 7개로 나누어 소성한 후에 결합한, 동양 3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독창적인 제작 기법을 사용하였다.





[금속 공예]

<관모>

공주 무령왕릉 왕과 왕비의 관식관모(冠帽)는 삼국시대 사람들이 머리에 썼던 모자로 백제왕은 검은 비단모자에 금화장식, 일반관리는 은화장식을 꽂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과 익산 입점리, 나주 신촌리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릉관모의 형식은 인동투작된 장식과 연화좌 위에 화병에서와 같이 특이한 것으로, 이는 백제의 재래식이라기보다는 중국 남조와의 교류에서 얻은 새로운 창작품으로 생각된다. 입점리의 관모는 반원형이며 뒷편에 깃꼿지가 붙은 것이 특이하며, 일본의 후나즈카야마[舟塚山]고분 출토품과 동일하다. 신촌리 금관은 내모와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관은 입식이 3개로 수목형(樹木形)으로 신라 ·가야지역의 도식화된 금관보다는 사실적인 수목형으로 주목된다. 일반관리의 머리장식인 은화(銀花)는 부여 하황리, 논산 육곡리,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에서 출토되었다. 이 관식은 가운데 줄기에서 인동당무늬가지가 좌우로 뻗은 간결한 형식이나,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관식이다. 상당한 기간동안 사용되었으며 출토지역도 광범위한데, 이는 관리들이 사후(死後)엔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지낸 귀장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이식>

한성 시대의 공예품은 석촌동고분 출토 금제귀걸이가 있다. 단순히 금봉을 휘어 만든 소환과 작은고리에 사슬형으로 길게 늘어진 중간식에 심엽형금판을 매단 것들이 있다. 귀고리 중에는 도읍지를 벗어난 청주 신봉동 출토의 소환에서와 같은 사슬 중간식이나, 감옥된 것들도 보인다. 청원 상봉, 서울 정동 출토 귀걸이의 태환이식 작은 투조의 중간식과 끝장식들은 백제의 제작품인지, 고구려와의 교류에 의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풍납리 토성과, 법천리 출토 청동초두가 있지만,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의 전래와 사찰 건축으로 금속공예품이 있을 가능성만 보이며, 초보적인 단계에 머무른 것으로 파악된다. 웅진·사비시대의 유물은 매우 적은 편으로 무령왕릉, 공주 주미리, 부여 동남리, 장수 봉서리 등에서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세환의 투작구체 중간식과 두 줄기의 수식곡옥과 심엽형·초실·탄환형·입점리 수식 등은 고구려식과 신라의 형식의 복합이나 신라 장신구형식과 가깝다.

[공예품]

부여 능산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백제 시대에 대표적인 공예품은 무령왕릉 출토품이다. 관모 ·귀걸이 ·목걸이 ·팔찌 ·허리띠 ·신발 ·청동거울 ·청동그릇 ·숫가락과 수저 ·동탁은잔 ·다리미 ·각종 구슬 등이 있다. 순금제 목걸이 2개는 마디의 도안이 세련미가 돋보이는 현대식이다. 팔찌는 금제와 은제, 동제가 있으며, 명문이 있는 은제는 제작년대와 제작자 이름이 있는 삼국에서는 유일한 용무늬 팔찌이다. 은제허리띠로는 공주 송산리1호, 정읍 운학리 과판이 있다. 무령왕의 과대는 방형의 과판에 요패로 수식한 것으로 투조 방형과판과 심엽형 장식을 달았다. 대형요패는 도깨비 ·두꺼비투조무늬와 돋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이들 형식들은 거의 신라의 허리띠와 같은 형식으로 문물 교류 현상을 알 수 있게 한다.

청동 신발은 무령왕릉과 입점리, 나주 신촌리 등에서 출토하였다. 얇은 동판 2~3장으로 신발을 만들고, 능형의 구획에 타출무늬로 장식하고, 바닥에는 큰 못을 박았다. 큰칼환두대도는 소환 ·삼엽 ·원두 ·은장 등이고, 무령왕릉 금은장단용 대도의 환두표면에 일신양두용(一身兩頭龍)이 양각되고, 환두 아래, 위에는 귀갑 무늬 내에 봉황이 조각되었다. 남원 월산리 환두는 금 ·은으로 귀갑무늬내에 화문을 선상감(線象嵌)하였다. 이러한 상감품의 예는 백제가 4세기 후반에 하사한 유명한 칠지도가 일본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있다.

이 밖에 관장식 ·관못 ·은제병유리구의 화문과 뒷고지 ·부소산 청동향로 ·금동봉황장식 ·금성산 청동탑편 ·금강사지 청동수각(獸脚) ·구아리 청동귀면 ·미륵사지와 능산리 금동풍탁 등이 있다. 그 중 백제 금속 공예품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있다. 이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는 능산리에서 출토되었으며, 도교사상에서 보이는 동해신산을 표현하여 5인의 주악상 정상부의 봉황, 대족부에 용, 각종 식물과 동물 등을 실감있게 조각하였다. 이는 당시의 사상 ·공예기술 ·회화 ·풍습 ·장식 ·문양사 등 백제예술과 과학기술이 결합한 예술의 극치이다.

[백제 회화]

백제 회화는 남아 있는 양이 적어 단편적으로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대개 6세기 이후의 것들로 공주 송산리 6호 벽화, 무령왕릉 왕비 두침 ·족자, 부여 능산리 고분벽화와 약간의 칠기, 미륵사지 벽화 등이다. 송산리 6호의 벽화는 사신도와 남벽의 주작이 있다. 벽돌로 쌓은 벽에 진흙을 바르고, 백회로 덧칠하여 그린 것으로 고구려 벽화고분의 수법과 4신의 주제도 같다. 무령왕의 왕비의 두침과 족자는 나무토막에 주칠을 한 목공예품으로 6각의 귀갑무늬 속에 봉황, 어룡, 비천 ·연화무늬, 운무늬 등으로 역시 고구려의 소재와 같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건한 필치보다는 부드러운 선으로 원숙함을 보여준다.

부여 능산리 동하총 사신도부여 능산리의 4벽의 사신도와 천정의 연화무늬 ·비운무늬 ·백호도는 역동적인 고구려의 형상과 묘사력에는 떨어지지만 백제적인 유연성을 갖추고 있다. 회화는 아니지만 산수의 표현은 무령왕릉 은제탁잔, 창풍납석제 불보살병립상의 배면의 산악,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 부여 외리 산수산과 산수봉황문전을 통해 고구려의 벽화 중 수렵도의 산악형식과 유사성을 보여준다. 한편 성왕 때에 중국 양나라에 화사(畵師)를 요청한 일과 일본에 쇼토쿠태자상(像)을 그린 아좌태자의 기록들이 단편적으로 백제회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사진들은 두산 엔사이버에서 가져오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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