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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23 (목) 01:15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498      
[고려] 고려 시대의 미술 (두산)
고려시대미술 高麗時代美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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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개관

10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서 고려 시대에 일어난 미술.

10세기 초 통일 신라에 이어 성립된 고려도 치국(治國)의 정신적 배경이 불교에 있었던 만큼 이 시기에 생산된 미술 작품 역시 직접 불교와 관련이 있음은 물론, 일상 용구에 이르기까지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게 반영되었다. 즉, 사원 건립의 성행으로 많이 세워진 당탑(堂塔)은 물론 이에 부수되는 각종 건조물과 상설(像設), 불교 행사에 필요한 불구(佛具)들은 직접 불교와 관련된 작품들이기에 말할 나위도 없으나, 도자기와 와전(瓦塼)에까지도 불교와 직결되는 문양이 채택되거나 불교적인 정신 세계가 문양을 통하여 표현되었다.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정신 세계를 배경으로 그들이 남긴 미술 작품에는 시기에 따라 양식으로 변화하는데, 그 변화는 무신 정권의 성립을 기준으로 하여 크게 전기·후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전기는 신왕조 건설에 따르는 기백과 의욕에 넘쳐 건실한 작풍이 나타난 시기로, 석탑이나 석불의 제작에서 거대한 작품들이 나타나고 부도(浮屠)에서는 정교한 표면장식이, 공예부문에서도 청자의 비약적인 발전과 각종 금속제품의 발달로 나타났는데, 그 절정기는 아마도 문종(文宗) 때인 11세기 중엽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여 후기가 되면 목조건축의 가구형식(架構形式)의 변화, 도자기 요법(窯法)의 변화, 서화에서 원(元)의 서법이나 화법의 추종, 불상 조각의 퇴보와 새로운 양식의 도입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여러 방향에서 고찰되겠으나, 정치의 문란, 종교관의 변화, 중국 원나라 미술의 침투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의 변화가 반드시 퇴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미술의 전체 흐름에서 볼 때, 전기에 나타났던 새로운 방향으로의 활발한 진전은 후기에 와서 창조로의 연결을 보지 못하고 오직 변화에 그치고 말아 일부를 제외하고는 쇠퇴일로를 걸었다.

고려의 건축

건축은 재료에 따라 목조와 석조건축으로 구분할 수 있고, 용도에 따라 불교적 건축과 비불교적 건축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러나 목조건축 중에는 불사와 궁전같이 용도의 구별은 있으나 양식적으로는 동일하며, 석조건축은 석탑·부도 같은 불교적 건축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용도별 구분보다는 재료에 따른 분류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고려 시대의 목조건축은 13세기 이후에 건립된 10동 미만의 사찰건축이 남아 있을 뿐인 데 비해 석탑·부도 등의 석조건축은 상당수가 전하고 있다. 고려가 불교국가였던 만큼 국초부터 사원건립이 매우 왕성하였으며, 국도 개성(開城)에 남아 있는 유지(遺址)로 보아 모두 대규모의 건축이었으나, 목조건축물은 그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오직 석조건축물만이 남아 있다.

건축 부문에서 주목되는 점은 원의 건축 양식의 영향이다.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다포계(多包系) 목조건물의 양식이나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 등은 모두 원의 영향 아래 나타난 것이다. 목조건축은 전기한 바와 같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13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이며, 양식적으로 주심포계(柱心包系)와 다포계로 대별할 수 있다. 이 두 계통의 양식적 차이는 가구수법(架構手法)을 통해서 비교할 수 있으나, 다음 몇 가지로도 뚜렷이 구별된다.

즉, 공포( 包) 배치에 있어 주심포집은 기둥 위에만 있고 다포집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형식이니, 주심포와 다포의 명칭은 바로 이 공포의 배치형식을 따른 명칭이다. 공포의 출목(出目) 수가 주심포집에서는 2출목에 그치고 다포집에서는 3출목 이상이다. 주두(柱頭)와 소로(小쥐) )의 굽의 단면이 주심포 형식에서는 곡선이고, 굽 밑에 받침이 있으나 다포 형식에서는 직선이고 받침이 없다. 첨차(檐遮) 끝의 모양은 주심포 형식에서는 복잡하나 다포 형식에서는 간단한 곡선이다. 내부 천장은 주심포집에서는 기둥 위의 가구(架構)를 노출시키고 단청을 한 연등천장이지만, 다포집에서는 기둥 위를 막아서 그 위의 가구를 볼 수 없게 만든 우물천장이다.

이상과 같은 외관상의 차이만 보더라도 주심포집은 간결·명쾌하나 다포집은 화려·장중하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주심포계 집으로는 안동(安東)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영주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조사당(祖師堂), 예산(禮山) 수덕사(修德寺) 대웅전(大雄殿),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 거조암 영산전(居祖庵靈山殿) 등이 있고, 다포계 집으로는 황주(黃州) 심원사(心源寺) 보광전(普光殿),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응진전(應眞殿) 등을 들 수 있다.

석조건축은 석탑과 부도가 질·양 양면에서 모두 고려시대 석조건축을 대표한다. 석탑은 기본적으로 전대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변화가 있는 한편 전대의 작품을 모방한 석탑이 나타난다. 전대의 석탑이 평면 사각형인 데 비해 다각형이 새로 등장하고, 재료에 있어서도 암청색의 점판암(粘板岩)을 사용하여 백색의 화강석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

고려 시대 석탑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을 보면 탑신부(塔身部)의 옥개석(屋蓋石)과 옥신석(屋身石)이 폭에 대한 높이의 비례가 커져서 전체적으로 고준(高峻)해지고, 옥신석 밑에 별석(別石)이 삽입되며, 옥개석 받침의 층급 수가 적어지고, 옥개석 처마 밑이 전각(轉角)에서 위로 들리며, 옥신석 밑의 별석 또는 기단(基壇) 갑석(甲石)에 연화무늬가 조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는 11세기 초의 개심사(開心寺) 5층석탑이나 현화사(玄化寺) 7층석탑 등에 이미 나타나 있는 점으로 보아 아마도 건국 초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대의 작품을 모방한 예로는 화엄사(華嚴寺) 4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에 대한 사자빈신사(獅子頻迅寺) 4사자9층석탑(四獅子九層石塔), 정림사지(定林寺址) 5층석탑에 대한 부여 장하리(扶餘長蝦里) 3층석탑, 미륵사지(彌勒寺址) 석탑에 대한 무량사(無量寺) 5층석탑, 의성 탑리(義城塔里) 5층석탑에 대한 빙산사지(氷山寺址) 5층석탑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모방작들은 다만 외형의 모방에 그쳤을 뿐 전체의 비례나 조각의 수법이 전대의 작풍을 따르지 못하고 형식화되었다. 다각탑(多角塔)으로는 금산사(金山寺) 6각석탑,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영명사(永明寺) 8각석탑, 보현사(普賢寺) 8각석탑 등이 대표작인데, 이들은 모두 9층 이상의 다층탑이다. 고려 시대에 다각탑이 출현하였는지는 해명하기 어려우나 다각탑의 분포가 지방으로 확산되어 있으며, 특히 평남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전형적인 석탑이나 다각탑과는 전혀 취향을 달리하는 탑으로 경천사(敬天寺) 10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탑은 원의 공장(工匠)이 만든 탑인데다가, 건립 연대가 1348년이어서 여러 모로 보아 한국 석탑의 테두리 안에서 설명될 수 없으나, 그 모방작이 조선 시대에 나타나고 있음은 주목된다.

끝으로 점판암제 석탑이 크게 유행하여 전기한 금산사(金山寺) 6각탑을 비롯하여, 해인사(海印寺) 원당암(願堂庵) 석탑, 영월무릉리(寧越武陵里) 석탑 등 각 지방에 상당수가 건립되어 있다.

또한 전탑(塼塔)과 모전탑(模塼塔)도 수는 많지 않지만 여전히 건립되었는데, 신륵사(神勒寺) 다층전탑(多層塼塔), 제천장락리(堤川長樂里) 7층전탑(七層塼塔) 등이 그 대표작이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으로 보이는 보협인탑(寶瑩印塔) 1기(基)가 전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고려 시대의 석탑이 대체로 전기에는 양식의 변화를 일으키면서 5층 이상의 거대한 탑들이 건립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형식화의 경향이 농후해지는 한편 신라 시대와는 달리 국도 개성에서 서경(西京)인 평양(平壤)에 이르는 지역에 특히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또 우수한 작품들이 전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석탑에 비하면 부도의 건립은 전대의 작례(作例)를 능가하는 많은 작품들을 남겼고, 형식의 다양함이나 표면의 장엄함과 화려함에 있어 월등한 발전을 보인 걸작품들이 많다. 먼저 형식은 전대의 부도가 8각원당형 일변도임에 비해 전대 형식의 계승은 물론, 그 외에 4각당형·석등형(石燈形)·석종형(石鐘形)·불탑형(佛塔形) 등 새로운 형식이 나타났고, 8각원당에 있어서도 부분적으로 새로운 의장이 가미되었다.

8각원당형은 기단·탑신·옥개로 구성하되 모두 8각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점은 전대의 형식과 다를 바 없으나,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과 같이 기단 중대석이 커지면서 표면에 운룡(雲龍)을 입체적으로 조각하거나,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과 같이 탑신이 구형(球形)이 되는 등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4각당형은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면 방형이며, 표면에 장식문양을 만조(滿彫)하였다.

석등형(石燈形)은 불국사(佛國寺) 부도 1기가 있을 뿐인데, 기단 중대석이 석등의 간석(竿石)같이 높아지고, 탑신에는 사방에 감형(龕形)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여 마치 화사석(火舍石)의 화창(火窓) 같은 느낌을 준다.

석종형(石鐘形)은 넓은 건축기단 중앙에 범종(梵鐘) 같은 형태의 탑신부를 안치한 형식으로, 탑신의 형태가 범종과 같은 데서 온 명칭이며, 신륵사 보제존자부도(神勒寺普濟尊者浮屠)가 대표작이다. 불탑형(佛塔形)은 전형적인 3층 석탑의 형태인데 외형으로는 불탑과 구별하기 어려우나, 이 형식을 취한 영전사 보제존자 사리탑(令傳寺普濟尊者舍利塔)에서는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보제존자의 부도임이 밝혀졌다.

이 밖에 또 하나 주목되는 형식으로는 진전사지(陳田寺址) 부도가 있다. 이는 석탑에서와 같은 기단 위에 8각의 탑신을 올려서 마치 8각 기단 위에 방형 탑신을 올린 도피안사(到彼岸寺) 3층 석탑과 통하는 착상이라고 하겠다. 8각원당형 부도에서는 표면이 장엄하고 매우 화려하니 이는 전대 이래의 형식이라고 하겠으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더욱 정교(精巧)해졌다.

한편 사원의 건립에 따라 당탑(堂塔)과 함께 석등 또한 많이 건립되었는데, 형식에 있어 전대의 평면 8각형을 답습하는 한편 평면 방형의 새로운 형식이 창안되었고, 현화사석등(玄化寺石燈)과 같이 화사(火舍) 형식에서 화창(火窓)을 내는 대신 4우주(四隅柱)를 세우고, 옥구발산리석등(沃溝鉢山里石燈)과 같이 간석(竿石)은 운룡(雲龍)을 조각한 원주로, 또 고달사석등(高達寺石燈)과 같이 전대의 형식을 모방한 쌍사자(雙獅子)는 간석으로 대치하는 형식도 나타났다.

고려의 조각

고려 시대의 조각 작품으로는 약간의 능묘조각(陵墓彫刻)이 있기는 하나 불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태조(太祖)는 건국의 대업이 불력(佛力)에 있었음을 깊이 믿어 사원건립과 불상 조성이 자못 활기를 띠었으며, 한편으로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도 중요시하였다. 건국 초에는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고 9세기 이래의 유행을 따라 철불(鐵佛)의 조성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 불상의 몇 가지 특징을 지적하면, 첫째 전대의 이상주의적인 표현이 사라지고 현세구복(現世求福)을 위주로 하는 현실주의적인 조형(造形)으로 변하였다. 전대의 불상은 단정장중하며 이러한 외형을 통하여 내재한 불성이 표출되고 있으나, 고려시대가 되면 세속적인 인간을 대하는 듯 감동 없는 조형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감각은 조형 그 자체의 차이에 기인하지만, 전대의 불상이 거의 완전한 데생을 기반으로 제작되어 안정된 시각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 데 비해 고려 시대의 불상은 인체의 비례나 세부적인 표현 기법에 있어 표현력의 부족에도 기인하는 바 크다.

북한산 구기리(北漢山舊基里)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 안동 이천동(安東泥川洞)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등의 석상이나, 광주 춘궁리(廣州春宮里)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적조사 철조여래좌상(寂照寺鐵造如來坐像) 등의 철불들은 전대의 양식을 계승한 수작임에도 불구하고 전대의 불상과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며, 고려 시대에 다시 나타나는 불상의 미소도 역시 삼국시대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 시대 불상의 하나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작풍이 나타나게 된 정신적인 배경과 조형 기술이 분명히 일보 퇴화하게 된 이유는 간단히 설명될 수 없겠으나, 선풍(禪風)의 진작으로 인한 조형미술 제작의욕의 퇴색경향과도 관계가 깊으리라고 생각된다.

둘째, 지역적으로 특색 있는 양식이 나타나는 점이다. 강릉(江陵) 한송사 석조보살좌상(寒松寺石造菩薩坐像)을 대표로 하는 신복사지(神福寺址) 3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 월정사(月精寺) 8각9층석탑 앞 석조보살좌상 등의 동해안 지역의 불상, 또는 충주(忠州) 대원사(大圓寺)와 단호사(丹湖寺)의 양구(兩軀)의 철조여래좌상 등의 양식은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닌 불상들로 지역적인 특색이 뚜렷하다. 이와 같이 불상에서 지역적 특색은 지방 호족들의 세력 기반과도 관계가 깊을 것이지만 고려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고려 후기에 라마교 불상형식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이다. 라마교 불상의 형식은 매우 환상적이지만, 그 형식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불상의 기본형식 위에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그것은 고려 후기 금동보살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장신구나 대좌의 형식에서 현저하게 나타난다.

또 라마탑(塔)의 형식을 마곡사(麻谷寺) 석탑의 상륜부(相輪部)에서 엿볼 수 있는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라마교 불상형식의 전래는 원(元)의 세력침투에서 비롯된 듯하니 고려 후기 미술 전반에 걸쳐 원의 영향이 나타나는 추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불상을 재료면에서 분류하면 석불이 가장 많고 금동불·철불도 전대에 이어 많이 제작되었으며, 이 밖에 소조불(塑造佛)·건칠불(乾漆佛) 등도 다소 제작되었다.

철불은 9세기부터 다수 제작되어 수구(數軀)의 재명불(在銘佛)도 현존하지만 고려시대에도 그 제작이 성행하여 전기한 광주 춘궁리(廣州春宮里) 철조여래좌상이나 개성(開城) 적조사지(寂照寺址) 철조여래좌상, 충남 보원사지(普願寺址) 철조여래좌상 등은 그 대표작들이며, 이 밖에도 많은 수작들을 남겼다. 불신(佛身)의 표현이나 옷무늬의 처리는 매우 착실하며 특히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고려 철불의 하나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철불이 현저하게 증가하는 반면 동불 및 금동불이 현저하게 감소하는데, 이는 동 생산의 감소에 기인한 듯하며 고려시대 철불은 그 수나 질에 있어서 한국 불상의 대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소조불이 삼국 시대에도 제작되었음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양지사(良志師)에 관한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고, 경주(慶州) 능지탑(陵旨塔)에서 통일기의 대소조불(大塑造佛)의 존재가 알려졌으나, 고려시대 이전에는 거의 없다. 고려시대 소조불로서는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의 여래좌상(如來坐像)을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으며, 상호(相好) ·옷무늬 등에 변화가 있지만 전대 불상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수작이다. 건칠불도 구 덕수궁미술관(舊德壽宮美術館)에 수장되었던 몇 가지가 있을 뿐, 고려 시대 이전에 제작된 유례가 없으며 제작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고려 시대에 이르러 송나라의 영향 아래 그것이 한때 유행하였음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송나라에서 건칠불이 전래되었다는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조불과 건칠불의 유례가 매우 드문 이유는 내구성이 떨어지는 탓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조각으로 능묘의 상설(像設)을 뺄 수 없으나 고려의 역대 왕릉은 워낙 퇴락이 심해서 겨우 공민왕(恭愍王)의 현릉(玄陵)과 왕비(王妃)의 정릉(正陵)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현릉과 정릉은 동서로 나란히 있고 각각 난간을 돌렸다. 두 능 앞에는 3단의 축대가 있어 상단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를, 중단에는 문인석(文人石)을, 하단에는 무인석(武人石)을 각각 배열하였고, 호석(護石)에는 연화(蓮華) ·삼고령(三뭘鈴) ·수관인신(獸冠人身)의 십이지상(十二支像)들이 조각되었다. 이들 조각은 고려 말기의 조각에서는 보기 드문 걸작이나 장식성이 지나치고 평면적이며, 석인(石人) ·석수(石獸)의 표현도 전대의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

끝으로 귀부(龜趺)와 이수( 首)의 조각이 있다. 귀부는 일찍이 신라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에서부터 나타나 능비(陵碑)나 승려(僧侶)의 탑비(塔碑)로서 많이 제작되었고, 고려시대에도 부도 건립의 성행에 따라 탑비의 건립 또한 성행하였다. 귀부의 기본형은 거북의 형태이지만 두부(頭部)를 함주(含珠)한 괴수형(怪獸形)으로 표현한 조각 기법은 환상적이다. 또 귀갑(龜甲)무늬 속에는 이따금 王자를 조각하였는데, 조각 자체가 매우 정교하여 부도의 표면조각과 함께 고려 시대의 하나의 특색 있는 작품이 되고 있다.

이수에 운룡을 조각하는 수법 역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비롯하여 고려시대까지 계승되었으나 약간의 변화가 나타난다. 즉, 이수 상면에 화염보주(火焰寶珠)를 장식하게 되고 전체의 형태가 차차 옥개(屋蓋) 형식으로 변해서 무열왕릉비의 이수가 중국의 원규형(圓圭形) 이수형식을 따르고 있는 점과는 대조적이며 이 또한 고려 시대 이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개성(開城) 현화사비(玄化寺碑), 원주(原州)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에서와 같이 비신(碑身) 좌우면에 웅건한 수법으로 용을 조각한 걸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비석(碑石)에는 건립연대가 명기되므로 이에 딸린 귀부나 이수의 제작 연대가 분명하게 되어, 고려 시대의 이러한 유형의 조각 연대 설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고 있다.

고려의 서화

이 시대에도 적지 않은 서가(書家)가 있었고, 도화원(圖畵院)이 설치되어 상당수의 화가와 작품이 문집(文集)이나 사기(史記)에서 산견(散見)되지만 그들의 진적(眞跡)을 대하기는 힘들다. 서(書)는 사경(寫經)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형편이고 다만 몇몇 석비의 비문 각자(刻字)를 통하여 미루어 살펴볼 뿐이다.

유명한 서가로서 이환추(李桓樞)·구족달(具足達)·장단열(張端說)·이원부(李元符)·석탄연(釋坦然)·한윤(韓允) 등을 들 수 있는데, 서풍(書風)은 전대에 이어 구양순체(歐陽詢體)의 구양법(歐陽法)이 유행하였으며, 후기에는 원의 조맹부체(趙孟홰體)의 조법(趙法)이 유행하였다. 회화 또한 진적이 매우 드무나, 서적(書跡)에 비하면 유례가 많은 편이다.

화가로는 최사훈(崔思訓)·정지상(鄭知常)·이준이(李俊異)·이령(李寧)·이광필(李光弼)·정서(鄭敍)·정홍진(丁鴻進)·석혜근(釋惠勤)·이암(李灸)·공민왕(恭愍王) 등을 들 수 있으나 그들의 화적(畵跡)을 대하기는 역시 어렵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시대 회화는 인물화(人物畵:王의 眞影·功臣肖像), 불교회화(佛敎繪畵:탱화·변상도·사원벽화), 유교회화(儒敎繪畵:국학·문묘의 벽화), 자유화(自由畵:산수화·실경사생도·궁궐누각도·계회도), 경적도(經籍圖:삼례도·영헌도), 고분벽화 등 다양하지만, 현존하는 화적은 안향(安珦)과 원의 진감여필(陳鑑如筆)인 이제현(李齊賢)의 영정(影幀) 외에는 모두 불화와 고분벽화이며 그나마도 불화는 대부분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일본에 건너간 불화는 70여 점에 달하며, 관경변도(觀經變圖)·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제보살도(諸菩薩圖)·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 등이 포함되어 이들을 통하여 화사하고 정교한 표현으로 화법이 뛰어났음은 물론, 불화의 세계를 통하여 고려인의 불교관도 알 수 있다.

고분벽화는 개성(開城) 수락동(水落洞) 고분, 명종(明宗) 지릉(智陵), 공민왕(恭愍王) 현릉(玄陵), 철원 내문리 고분, 장단(長湍) 법당방(法堂坊) 고분, 거창(居昌) 둔마리(屯馬里) 고분, 안동(安東) 서삼동(西三洞) 고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화제(畵題)를 대별하면 주악도(奏樂圖)·사신도(四神圖)·십이지상(十二支像)·성수도(星宿圖) 등이다.

화법(畵法)은 전기에는 정교한 선을 주로 하고 색감도 명랑하나, 후기가 되면서 면을 주로 한 침울한 색감으로 변하는 듯하다. 특히 거창(居昌) 고분벽화에는 일렬로 선 5∼6인의 주악인물도(奏樂人物圖)가 그려져 있어, 그들이 가진 악기(樂器)나 복장을 통하여 당시의 풍습을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장례의식의 일단도 미루어 살펴볼 수 있다.

고려의 공예

고려 시대의 공예는 불교의 융성과 귀족사회의 팽창으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불교의 융성으로 각종 불구(佛具)가 제작되고 귀족취미에 맞는 화려한 도자기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상감(象嵌)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여 특색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현존하는 것을 기준으로 재료별로 분류하면 금속공예·도자공예·목칠공예·와당(瓦當)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금속공예로는 범종(梵鐘)·동경(銅鏡)·향완(香亶 )·반자(飯子)·정병(淨甁) 등 불구들이 대표작이다. 범종은 전기에 신라 종의 형식을 계승한 대종(大鐘)들이 제작되더니 차차 중종(中鐘) 또는 소종(小鐘)으로 형태가 작아지고 종구(鐘口)가 확대되며 종견(鐘肩)에 입화식(立花飾)이 가미되는 등 변화했다. 그러나 음통(音筒)이 달리고 4유곽(乳廓) 36유(乳)의 한국 종의 형식은 고수된다.

동경의 제작은 유례 없는 성황을 이루어 형태와 문양(紋樣)이 극히 다양해진다. 그 가운데에는 한경(漢鏡)·당경(唐鏡)·송경(宋鏡)의 형식을 따른 것이 있고, 문양도 고려 특유의 것이 있는 반면 중국경의 문양을 재현한 것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형식은 중앙에 반구형(半球形) 유(쐤))가 있고, 주연(周緣)에 단면 반원형의 테가 있는 원경(圓鏡)이다.

향완은 심발형(深鉢形) 몸체 밑에 나팔형 받침이 달린 전형적인 형태 외에도 특이한 형태가 창안되었다. 향완에서 주목되는 점은 표면의 은입사(銀入絲) 장식인데, 가는 은사로 운룡 등을 감입(嵌入)한 화려한 문양으로 기표(器表)를 채워 화사한 아름다움을 나타내었다.

반자는 신라의 형식을 계승하였으나 문양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다. 이외에도 합(盒)·반(盤)·주전자·탁잔(托盞) 등의 걸작들이 국내외에 전하고 있다.

도자공예(陶瓷工藝)는 '고려청자(高麗靑瓷)'라는 말로 대변되듯이 청자가 가장 주목된다. 아마도 11세기에는 정교한 작품이 제작되었으리라고 보이는 청자는 '비색(翡色)' 또는 '비색(秘色)'이라고 불리어 동서양의 도자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으며 곧 상감(象嵌)이라는 새로운 장식기법이 창안된 듯하다.

청자는 순(純)청자·상감(象嵌)청자·화(畵)청자·퇴화문(推花文)청자·화금(畵金)청자·진사(辰砂)청자·철채(鐵彩)청자 등으로 분류되고, 순청자는 다시 소문(素文)·양각(陽刻)·음각(陰刻)·투각(透刻)·상형(象形)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장식기법은 때때로 양각·음각·투각·상감 등을 혼용하면서 장식효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 순청자는 양각·음각 등으로 문양을 장식할 뿐 다른 색조가 가미되지 않는 만큼 순청자의 생명은 기형(器形)과 색조(色調)에 있으며 많은 걸작품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에는 청자 이외에도 여러 종류의 자기가 생산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백자(白瓷)는 매우 주목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청자에 훨씬 미치지 못하나 순(純)백자·상감(象嵌)백자·화(畵)백자·진사(辰砂)백자 등 기형이나 문양의 표현수법은 청자와 거의 동일하다.

목칠공예(木漆工藝)는 현존하는 것이 매우 드물지만 원에서 나전경함(螺鈿經函)을 주문한 점 또는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나전으로 만든 안장을 '극정교(極精巧)'라고 표현한 점 등으로 보아 당시에는 상당히 우수한 작품이 제작되어 외국으로도 수출하였던 듯하다.

현재는 국내외에 10여 점이 전하고 있으나 모두 나전 수법에 의한 작품이며, 포류수금(蒲柳水禽)·야국(野菊)·당초(唐草) 등의 문양을 색의 조화를 고려해서 또는 동선(銅線)을 감입(嵌入)해서 정교하게 제작하였다.

목칠기(木漆器)의 제작은 예종(睿宗:재위 1105∼1122)대에 요(遼) 왕실에 '백동나전기(白銅螺鈿器)'를 보낸 사실로 보아 일찍부터 발달하여 고려 전시기를 통하여 우수한 작품이 생산되었던 듯하다.

와당은 대체로 전대의 형태를 답습하고 있으나 문양에는 큰 변화가 있다. 숫막새 기와 문양에는 연화(蓮華) 같은 전형적 문양 외에 새로이 봉황(鳳凰)·모란(牡丹)·범자(梵字) 무늬 등 새로운 문양이 등장하며, 암막새기와 문양에도 모란·사화(四花)·범자 무늬 등이 나타나나 두 가지 막새기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운(日暈)무늬는 고려시대 와당에 나타나는 특색 있는 문양이라고 하겠다. 또 청자의 막새기와가 전남 강진(康津) 사당리요지(沙堂里窯址)에서 발견되었음은 주목된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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