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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31 (일) 02:3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8555      
[삼국] 삼국의 예술 (한국사)
삼국의 예술

예술에 있어서는 삼국이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닌 것은 공통된 점이나, 각국의 지리적 위치와 민족성에 따라 독특한 점이 나타난다. 또한 불교가 수용 된 후 조형미술의 발달로 그 특징적인 면이 곧 조형물에 나타나 오늘날 유적ㆍ유물로서 각기 특질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고구려를 실질 강건하고 호전적인 기풍에서 웅장한 건축술이 발달되어 웅건하고 야성적인 예술이라 하면, 백제는 온유한 민족성으로 유리한 조각술이 발달되어 풍만하고 아름다운 곡선미의 예술이라 하곘고, 신라는 보수적인 민족성에서 아담하고 섬세한 예술의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건축에 있어서 고구려는 궁실 짓기를 좋아했다고 하였으나 현재 남아있는 지상 건축물은 전혀 없으며 다만 옛 도읍지인 집안과 평양 주변에 많이 남아있는 고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집안의 장군총과 평안남도 용강군의 쌍영총을 들 수 있는데, 장군총은 피라밋식으로 석재를 쌓아올린 독특한 형식의 석총으로서 웅대한 건축 기술의 정교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쌍영총은 입구 양쪽의 8각형 석주와 두입(斗入) 천장의 특수한 구조와 그림으로 나타낸 네 귀퉁이의 기둥 두공, 동량(棟樑) 등 다채로운 구조가 고구려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 불교적인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는 것은 법당과 불탑들이 모두 목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의 목조 건축물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유구는 지하에 묻혀있어 발굴 조사에 의하여 그 규모 등 여러 가지 내용을 알 수 있으니, 대표적인 예로 평양의 청암리사지와 정릉사지, 대동군 임원면의 상오리사지, 봉산군 토성리사지를 들 수 있다.

백제에서는 역대 국왕들이 굉장한 규모의 궁실과 누각을 지었고 특히 불사 건축에서는 무왕대에 충청남도 부여의 왕흥사를 30여 년이나 걸려서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백마강 건너에 옛터만이 남아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석탑으로서 전라북도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석탑을 들 수 있다. 이 2기의 백제 석탑 증 미륵사지 석탑은 최고최대의 석탑으로 목조 탑파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백제 시대 목조 건물의 형식과 기법 등을 연구하는 데 특히 귀중한 존재라 하겠다.

신라에도 거창한 사찰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없고 그 옛터를 살필 수 있을 뿐으로 유명한 경주의 황룡사 9층목탑도 고려 때 몽고의 병란으로 타서 없어지고 그 터만이 남아있다. 그러나  분황사 모전석탑과 첨성대에서 웅대하고 아름다운 곡선미 등 신라의 건축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삼국 모두 불상 조각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고구려의 불상은 작은 형태의 금동불상과 토불이지만 고졸한 미소를 머금은 우수한 불교조각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황해도 곡산에서 출토된 신묘명금동삼존불상과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반가사유상, 근년에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등을 들 수 있고 토불로는 평안남도 평원군 원오리사지에서 출토된 토불들이 있다.

백제의 불상으로는 충청남도 태안군 태을암의 마애삼존불상과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마애삼존불상을 대표로 들 수 있다. 금동불상으로는 부여 군수리의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과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된 금동관세음보살입상 등이 알려져 있는데, 이들 백제의 불상에서는 우아한 상호에서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는 특유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다.

신라의 불상으로는 금동 혹은 석조의 미륵반가사유상에서 곱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인자한 상호를 볼 수 있는데 모두 따뜻한 정이 통할 듯한 느낌을 준다. 경주의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이나 남산 삼화령 삼존불상 등은 다 같은 인상을 풍기는 걸작들이다. 특히 분황사 모전석탑 초층탑신 각면의 인왕상들은 건실한 수법이면서도 아취가 있는 불교 조각이라 하겠다. 조각가로 알려진 사람은 신라의 양지라는 승려인데 그는 불상과 신장상, 기와와 큼직한 벽돌 등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한편 삼국 시대의 기와와 벽돌에는 막새기와에 아름다운 연꽃문양 등을 조각하였으며 벽돌의 앞면과 옆면에는 여러 가지 문양을 조각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의 산경문전과 산수봉황문전은 화려하고 섬세한 솜씨로 유명하다.

회화에 있어서는 종이나 비단 등에 그려진 것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고분의 벽화에서 당시의 회화를 알 수 있다. 고분의 현실 4면 벽과 천장 등에 그려진 이 고분벽화는 여러 가지 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데,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풍속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인물을 그린 벽화에서는 당시의 복식과 즐겨 쓰던 채색을 알 수도 있다. 이러한 벽화고분은 고구려가 가장 유명하며 그림의 제재에 의하여 사신총ㆍ각저총ㆍ무용총ㆍ수렵총 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벽화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은 강서군 우현리 대묘의 청룡ㆍ백호ㆍ현무ㆍ주작의 사신도이다. 패기가 넘치는 선의 묘사나 색채의 조화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박력을 느끼게 하고, 바로 눈앞에 말을 타고 달리는 고구려 무사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집안시에 있는 무용총의 사냥하는 벽화 중에서 활로 사슴 사냥을 하는 그림은 당시 사회 풍속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용총 벽화 중 우차의 그림 또한 당시의 풍속을 알 수 있게 한다.

백제에서도 고구려의 영향으로 고분벽화가 알려져 있다. 송산리 고분은 벽돌로 쌓은 고분이어서 그 표면에 석회를 발라 평평한 벽면을 만들고 신수도를 그렸는데 석회를 바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이미 고구려에서 취하고 있었다. 능산리 고분은 석실분으로 백제의 고분벽화 중 가장 잘 남아 있는데 와 특히 천장의 연꽃문양과 구름문양 등은 백제 미술의 온유하고 유려한 솜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신라는 고분의 구조상 적석총이 대부분이어서 벽화를 남기지 못하였는데 근년에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대장리에서 어숙술간묘의 벽화 일부를 조사하였고, 순흥면 읍내리 고분에서 또한 벽화 일부를 조사함으로써 신라 고분벽화의 일면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경상북도 고령군 고아동의 고분에서 또한 벽화를 발견 조사하여 가야시대 벽화의 한 예를 찾게 되었다. 신라의 고분벽화는 여러 개의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든 벽면에 그린 것인데 여기에도 석회를 발라 평평한 벽면을 만들고 그린 것이다. 이렇듯 석회를 발라 그 표면에 벽화를 그리는 방식은 고구려의 솜씨가 백제뿐만 아니라 신라에게까지 미쳤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1973년 경주의 155호 고분에서 천마도 등이 출토되어 단편적이나마 신라의 회화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출토된 천마도이기에 155호 고분의 명칭이 천마총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이름난 화가로는 고구려의 담징, 백제의 아좌태자 등이 있는데, 일본으로 건너가 담징은 필ㆍ묵을 전하고 아좌태자는 성덕태자상 등 유명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전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솔거라는 천재 화가가 있어 황룡사의 벽화로 노송을 그렸던 바 새들이 날아와 몇 번씩이고 앉다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공예에 있어서는 삼국 시대의 전승품은 없고 각처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부장품에서 당시의 공예 기술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는 고분의 구조상 석실분이므로 도굴이 심하여 남아있는 것이 적다. 그러나 신라는 고분의 구조가 대체로 잔돌과 진흙을 섞어서 쌓아올린 것이어서 도굴이 곤란하여 다행히 많은 부장품이 전하고 있다. 즉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하여 금대ㆍ금귀고리ㆍ금가락지ㆍ금팔지 등 화려한 장신구들은 당시의 뛰어난 공예 기술을 짐작케 한다.

백제에 있어서도 공주시의 무령왕릉에서 많은 금은 장신구가 출토되었으나 왕과 왕비의 순금제관은 아니고 다만 관의 장식물들이다. 역시 신라의 금관이 당시 금속 공예의 극치라 하겠는데 금관총ㆍ서봉총ㆍ금령총ㆍ천마총ㆍ황남대총 등에서 금관이 출토되었으니 이들은 미적으로 뛰어나기도 하였지만 한편 전제적인 왕권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금속 공예로 금동관과 장신구가 있으나 현재의 유물로는 전모를 알기가 어렵다.

서예에 있어서는 당시의 금석문이 남아있어 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비의 명문과 평양성 벽의 각자명, 만포진 건너편 하반어두의 모두루묘지, 그리고 충청북도 중원고구려비명이 있다. 백제의 것으로는 부여에서 발견된 내지성주 사택지적비명이 있어 당시 중국 남북조 시대의 영향을 받아 고아한 풍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은 또 하나의 귀중한 백제 금석문이라 하겠다.

신라의 금석문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하여 많은 편인데 법흥왕대의 명문이 경상남도 울주의 천전리 각석을 비롯하여 진흥왕대의 단양 적성비ㆍ창녕비ㆍ황초령비ㆍ마운령비ㆍ북한산비와 진평왕대의 경주 남산 신성비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발견 조사된 울진 봉평 신라비와 영일 냉수리 신라비도 고신라의 석비로 금석학 뿐만 아니라 당시의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들 삼국의 석비에 보이는 글씨는 대개 고졸한 예서체로 이루어졌다.

음악은 고구려의 왕산악이 거문고를 만들어 작곡한 음악의 대가였으며, 백제에서는 악곡에 관한 문헌은 없으나 악사와 악기가 많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악기로는 날라리ㆍ공후ㆍ고각(鼓角)ㆍ쟁간(箏竿)ㆍ도급쟁간(桃及箏竿) 등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옥보고가 거문고의 대가로 이름났고, 백결선생은 청빈한 음악가로서 대악이라는 방아곡조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우륵은 가야금의 명수로서 진흥왕때 가야국에서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 후 충청북도 충주시의 탄금대에서 은거하며 많은 연구를 하여 제자를 길러 냈으니 법지ㆍ주지ㆍ계고ㆍ만덕 등이 유명하며 오늘날 전하는 '가야금'의 원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시가에 있어서는 본래 원시 사회의 종교적인 기축(祈祝) 의식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삼국 시대에는 문학적 시가로 발달하였다. 그런데 이들 시가는 대부분이 구전되어 온 것으로 거의 인멸되고 오늘날 그 일부분만이 기록에 전한다. 고구려의 한시로 황조가ㆍ영고석이 있고 을지문덕 장군의 오언시가 전한다. 백제의 것으로는 세칭 백제가요라는 정읍사(井邑詞)가 악학궤범에 전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일찍이 유리왕때의 도솔가, 내해왕때의 계자가(稽子歌) 등이 지어져 시가가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 향가가 유행하여 서동요와 혜성가가 유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경주 석장리의 석장사지 주변에서 발견 조사된 임신서기석에는 신라의 젊은이가 시경ㆍ상서ㆍ예기ㆍ춘추전을 익히고 국가에 대한 충도를 실천하겠다는 맹세의 내용을 우리말 식의 문체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화랑도의 한자 사용에 대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바 당시 유학의 발달의 일면과 시가는 모두 한시와도 같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영호>

출전 : [한국사 8, 삼국의 문화], 국사편찬위원회, 1998, pp.5∼9 삼국의 문화 개요 중 예술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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