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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5 (금) 15:28
분 류 문화사
ㆍ조회: 6087      
[미술] 도자기 (한메)
도자기 陶磁器

가소성(可塑性)이 뛰어난 점토(粘土)를 이용하여 어떤 주어진 형으로 만들어 고열로 구운 그릇의 총칭. 토기ㆍ도기(陶器)ㆍ석기ㆍ자기(磁器)를 통칭한다.

인류가 일상적인 용기로서 토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전인 신석기 시대부터이다. 토기 출현의 계기는 자비용기(煮沸用器;펄펄 끓이는 그릇)로서의 기능 획득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대 문명의 성립과 전후하여, 원시 시대 이래 오랜 전통을 가진 산화염소성(酸化炎燒成)에 의한 붉은 소소토기(素燒土器) 외에 환원염소성(還元炎燒成)에 의한 회색 경도(硬陶)가 나왔으며, 이어서 회유(灰釉)를 칠한 고화도소성(高火度燒成)의 시유도기(施釉陶器)가 출현하였다.

[제법(製法)과 소재]

원료ㆍ성형법ㆍ소성법(온도)ㆍ경도ㆍ투수성(透水性) 및 유약의 유무와 용도 등에서 많은 종류로 분류된다.

<원료>

원료로서는 규석ㆍ점토ㆍ견운모(絹雲毋)ㆍ장석(長石)ㆍ도석(陶石) 등이 있다. 이러한 원료의 역할은 ① 골격성분(骨格成分) ② 성형성분 ③ 소성성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골격성분에는 규석 SiO₂이 있어 내열성ㆍ내식성이 뛰어나지만, 이것만으로는 원하는 형상으로 성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형성분인 점토를 첨가한다. 점토는 무과의 혼합비를 제어함으로써 유동성이나 가소성(可塑性)을 갖게 할 수 있고, 건조에 의하여 좀더 기계적 강도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규석과 점토의 혼련물(混練物)은 열처리하여도 단단하게 잘 구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저온이 되면 굳어지는 성분인 소결성분(燒結成分)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광물이 장석ㆍ견운모이고, 알칼리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광물보다 저온에서 융해한다. 도석이란, 주로 견운모와 규석을 함유한 것이다. 견운모는 점토와 마찬가지로 층상구조(層狀構造)이므로 성형성에서는 비슷한 성질을 나타내고, 알칼리성분을 포함하므로 소결(燒結)을 촉진시켜 장석과 비슷한 성질을 나타낸다.

<성형>

이들 원료는 일반적으로 잘 분쇄ㆍ혼합되므로 물과 잘 섞이도록 이긴다. 이것을 배토(杯土)라고 한다. 배토는 알맞게 숙성(熟成)된 뒤, 목적에 알맞게 성형법에 따라 성형한다. 보통 성형법에는 이장(泥漿)주입성형과 물레성형이 사용된다. 특수도자기에서는 닥터브레드법ㆍ사출법(射出法)ㆍ압출법(押出法)ㆍ열간가압법(熱間加壓法) 등이 사용된다. 이장부입법이란, 배토에 다량의 물을 첨가하여 유동성을 지니게 한 것(이것을 이창이라 함)을 석고틀에 부어 일정시간 후에 틀 표면에 적당한 두께만큼 수분이 흡수되어 유동성을 잃은 층이 생겼을 때, 아직 유동성이 남아 있는 부분을 씻어 낸다.

석고틀 벽에 붙어 있는 부분이 목적하는 형상의 성형체이다. 이 성형체를 말리면 수축하기 때문에 석고틀에서 떨어진다. 단순한 형상인 경우에는 이장 속에 석고틀을 집어 넣어 외벽에 적당한 두께로 유동성을 잃은 층이 부착되었을 때 꺼내는 경우도 있다. 물레성형에서는 배토를 적당한 수분과 섞어 가소성이 있게 만든 다음 반죽하여 물레의 회전판 위에 얹어 회전시키면서 성형한다. 이것은 항아리나 병ㆍ대접ㆍ컵 등과 같은 회전체형상(回轉體形狀)의 성형에 적당하다.

<소성>

도자기의 소성용 장치는 요(가마)인데, 이것은 작업형태에 따라 단독요와 연속요로 분류된다. 단독요는 가마에 넣기, 소성, 냉각, 가마에서 꺼내기를 매회마다 하는 것으로 열효율은 좋지 않지만 소성조건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소규모 생산에 적당하다. 연구용이나 공예품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자기 제조용의 연속요는 터널요라 불린다. 성형체는 대차(臺車)에 실려 고온으로 유지된 터널 속으로 이동된다.

입구에서 차례로 새로운 대차를 넣어 출구로부터 차례로 꺼낼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제품을 연속적으로 생산하는 데 적당하다. 가정용 일반 식기, 또는 제품 품질의 안정성이 엄격히 요구되는 일렉트로닉스용 세라믹 등이 터널요를 사용하여 제조된다. 도자기의 소성공정에는 초벌구이ㆍ유약구이ㆍ광택구이(본구이)ㆍ채식(彩飾)구이 등이 있다. 초벌구이는 각종 성형법에 의하여 성형된 소태(素胎)에 유약을 입히지 않고 소성하여, 도자기로 사용하기에 적당한 강도를 갖도록 굽는 공정이다. 이 공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도 초벌구이라고 한다.

유약구이는 유약을 바르고 소성하여 초벌구이에 채식하거나 물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공정이며, 광택구이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광택구이는 초벌구이에 유약을 입혀 체소도(締燒度)를 높인 것인데 소태와 유약을 잘 융합하는 공정이다. 채식구이란, 유약구이 또는 광택구이를 한 면에다가 안료(顔料)를 저융점 유리질의 프리트와 섞은 것으로 채식하여 융착시키는 방법이다. 유약을 입히기 전에 소태에 직접 안료로 채식하는 것을 밑그림이라 하여, 유약을 바른 뒤에 채식하는 윗그림과 구별하고 있다.

<시유ㆍ채식>

유약은 유약구이를 할 때 융해시켜 소태에 무색 투명한 유리층을 형성하여 물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열팽창률이 소태의 열팽창률에 가까운 것과 화학적으로 안정한 것이 요구된다. 일반적으로 고령토ㆍ장석ㆍ석영ㆍ석회석을 혼합하여 사용한다. 밑그림용 안료로는 산화코발트ㆍ산화크롬ㆍ산화철처럼 고온에서 안정한 것이 사용되며, 색은 안정되어 있으나 색의 가지수는 한정되어 있다. 윗그림용 안료는 가지수가 많다. 같은 물질이 몇 가지의 서로 다른 색을 나타내는 것은 소성온도ㆍ소성분위기ㆍ유약배합비율의 차이 또는 유약성분의 차이에 있다. 유약에 색이 들어 있어서 채식과 유괘(釉掛)가 동시에 가능한 것이 색유(色釉)이다.

[서아시아ㆍ이집트]

<고대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강ㆍ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은 석재와 목재는 빈약하였지만 강렬한 태양과 진흙과 물이라는 자연의 은혜를 입어 BC6000년경부터 토기가 제조되었다. 처음에는 녹로를 사용하지 않고, 햇볕에 말린 토기였지만 곧 불로 굽게 되었다. BC5000년경으로 추측되는 자르모 유적(Jarmo 遺蹟)에서 출토된 각문토기(刻紋土器)는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이란고원에서는 BC4000년경 채문토기가 만들어졌다.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우바이드기(期)에서 잠다트 나스르기(期)에 걸쳐 능형문(菱形紋)과 지그재그문(紋) 등의 기하학문ㆍ동물문ㆍ식물문을 그린 채문토기가 현저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초기 왕조 시대에 들어와 채문토기는 점차 모습을 감추고, 그 대신에 흑색ㆍ갈색ㆍ적색의 토기가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시유도기의 소성(燒成)은 바빌로니아의 타르 우말에서 출토된 점토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이미 BC1700년경에 녹색과 황색의 금속산화물에 의한 다색(多色)의 연유도기(鉛釉陶器)가 제작되었다.

<고대이집트>

이집트에서는 BC4000년경 테베 근처의 바다리에서 블랙 톱이라 불리는 흑두적색토기(黑頭赤色土器)가 많이 제작되었다. 또 선왕조(先王朝)의 게르제문화기에 이르러 토기의 제작기술은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자기의 성형에는 수동 녹로가 사용되었다고 추측된다. 또 띠 모양의 기하학적 무늬 외에도 동물ㆍ식물ㆍ물고기 등을 그린 채문토기가 다수 제작되었다.

이어서 고왕국시대(古王國時代)에는 청색이나 청록색의 시유도기와 타일이 제작되었다. 이들 시유도기는 메소포타미아지방의 연유도기와는 달리 모두 소다 석회유리유도기(石灰琉璃釉陶器)이다. 또 이 시대에는 기름ㆍ술ㆍ곡물을 넣는 대형의 무문토기가 대량 제조되었다. 제26왕조의 사이스기(期)에 일시적인 고전부흥의 기운이 고양되었지만, 그 후 이집트문명은 서서히 쇠퇴하였으며, 오리엔트의 부조장식(浮彫裝飾)이 있는 시유도기와 타일 및 영국ㆍ로마 도기의 영향을 받았다.

<이슬람 세계>

7세기 초에 발흥한 이슬람은 7세기 중엽에는 메소포타미아ㆍ시리아ㆍ이집트를 정복하였고, 8세기 초에는 지중해의 이베리아반도도 그 지배하에 두었다. 이처럼 광대한 영토확장 중에 이슬람도기는 그 때까지 볼 수 없었던 뚜렷한 발전을 하였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슬람이 사치를 금하였기 때문에 금ㆍ은 제품 대신에 도기의 수요가 증대한 것이며, 이슬람의 사원ㆍ궁전ㆍ공공건조물의 내외를 아름다운 시유타일로 장식한 것, 또 11세기 이후 중국도자기의 유입에 의한 영향 등을 들 수 있다.

다마스커스에 최초의 도시를 건설한 우마이야왕조의 문화는 사산조 페르시아문화를 답습하는 한편, 로마와 비잔틴문화의 영향을 받아 초기도기의 장식에는 로마풍(風) 압형(押型)의 포도문(葡萄紋)과 사산조의 원문(圓紋), 비잔틴도기의 무유각문(無釉刻紋)을 모방한 것이 다수 이용되었다. 12ㆍ13세기에는 카스피해 남쪽 연안 근처와 테헤란 남부ㆍ유프라테스강 상류 등지에 가마가 건설되어 백유도기ㆍ다채도기, 사랑스러운 여성을 그린 다채색의 미나이도기, 라카비의 채화선각문도기(彩畵線刻紋陶器) 등 이슬람도기는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14세기 몽골이 이 지방에 침입하여 주요 도요지를 파괴하였지만, 1517년 서아시아에 오스만제국이 발흥하여 아나톨리아지방의 이즈닉을 중심으로 도기 생산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식물문을 주로 한 백지청채도기(白地靑彩陶器)와 청ㆍ적ㆍ녹색 등의 다채색을 사용한 타일이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유럽]

<고대ㆍ중세>

BC3000년경 에게해(海)의 남단 크레타섬에서 탄생한 미노스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시대에 속하며, 크레타에서는 음각문 또는 흑갈색의 무채토기가 만들어졌는데, BC 1700년경부터는 녹로를 사용한 대담한 문양의 카마레스도기가 구워졌다. BC 1500년경에 들어와 크레타에서는 자연의 초화(草花)나 문어를 사실적으로 그린 아름다운 단채도기가 출현하였다.

한편 BC2000년경 발칸반도에서 남하해 온 민족이 BC 1400년경 크레타섬을 정복하여 미케네를 전국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크레타도기를 모방하였으나 그 후 점차로 도식화한 그들의 도기를 생산하였으며, 도예는 전반적으로 저조하였다. 이에 비하여 같이 남하해 온 도리아인(人)에 의하여 수립된 그리스의 도자기 예술은, BC1000년경부터 뇌문(雷紋)과 능형문, 지그재그문의 경직된 기하학 양식의 채문토기를 발전시켰다. 로마의 선사시대를 장식한 빌라노바기(期)에서 에트루리아시대의 BC10세기∼BC5세기에 걸쳐서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인물을 모방한 장골호(藏骨壺)와 도관(陶棺), 부케로라고 불리는 흑색도기 등 독자적인 도예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로마시대는 1세기 전후의 수십 년간 이탈리아의 아레초에서 테라시길라타라는 압형의 부조가 있는 적색 도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로마의 속주(屬州)인 알프스 이북까지 운반되어 독일의 쾰른과 영국의 카스틀에서 모방되었다. 로마시대의 도기에서 테라시길라타 이외에도 큰 발전을 이룬 것은 연유도기이다. 청록색의 연유도기는 그 후 유럽의 중세를 대표하는 도기로서 거의 1000년간 이어졌다. 또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세계에서는 오리엔트와의 접촉이 빈번하여 종교적인 상징과 성수(聖獸)를 모티브로 하여 백ㆍ황 바탕에 무늬를 새긴 도기나 채색도기 등이 제작되었다.

<근세>

서양 근세 도기의 탄생은 중세 이래 이슬람교도가 거주한 이베리아반도에서 시작되었다. 오리엔트에서 개화한 은ㆍ동의 산화물인 금속으로 그린 아름다운 주석유도기(朱錫釉陶器)가 11∼12세기경에 말라가ㆍ세비야ㆍ그라나다 등지의 남에스파냐에 전해져 그 기법은 곧 이 지방의 에스파냐인에게도 보급되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발렌시아의 마니야스와 파테르나에서도 활발하게 번조(燔造)되었다. 이스파노 모레스크도기라고 하는 금속광택을 띠는 이 도기는, 14세기∼15세기초 에스파냐 동해상의 마요르카섬을 거쳐 이탈리아에 다량 수출되었다.

<유럽의 자기>

16세기 후반 포르투갈ㆍ에스파냐의 극동진출에 이어 17세기 초에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다양한 동양문물을 유럽에 운반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양의 자기는 유럽의 지배계급 사이에서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유럽 각국은 자기소성에 노력하였지만 반투명한 자기는 쉽게 변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도예의 전통이 전혀 없는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J.F.뵈트거가 작센왕 아우구스트 2세의 명을 받아 1709년에 그 위업을 달성하였으며, 마이센에 왕립자기제작소를 설립하여 마이센자기생산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서양 도예는 근세도기를 대표하는 주석유도기 대신에 자기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도 각지에서 자기소성 실험이 거듭되어, 루앙 등지에 자기소성을 위한 가마가 만들어졌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브르요는 1757년 루이 15세의 총비(寵妃)로서 도자기 애호가였던 퐁파두르부인이 그때까지 파리 근교에 있던 반센요를 세브르에 이전시킨 것으로, 프랑스왕립자기제작소로서 로코코 취향의 최고급자기를 번조하였다. 프랑스의 모든 자기는 독일의 경질 진정자기(眞正磁器)와는 다르며, 유리와 석고를 주원료로 한 연질자기이다. 프랑스에서 진정자기가 제조되기 시작한 것은 68년 리모주에서 고령토광상이 발견된 이후이다.

영국에서는 1743년 니콜라스 스프리몬트가 런던의 첼시에서 자기소성에 착수한 것이 최초이며, 그 후 50년에 웨일스의 더비ㆍ보우ㆍ우스터 등지에서 가마가 만들어졌다. 영국의 자기는 프랑스자기와 매우 다르며, 첼시요나 더비요에서는 프랑스풍의 연질자기가 변조되었지만 보우요에서는 동물의 골회(骨灰)를 첨가한 이른바 골회자기(骨灰磁器)가 발명되었고, 우스터에서는 동석(凍石)을 주원료로 사용한 연질자기, 또 후에 고령토를 사용한 조정자기 등 4종류의 자기가 번조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6세기 후반에 피렌체에서 메디치자기가 제조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진정자기의 소성은 마이센의 기법을 전승한 베네치아의 베치요, 35년 C.지놀리에 의하여 창설된 도치아요, 43년 나폴리왕 카를로스 4세의 카포디몬테요 등을 들 수 있다.

[중국]

<전사(前史)>

중국의 도자기는 한국ㆍ일본ㆍ타이ㆍ베트남ㆍ캄보디아 등 주변 여러 나라의 도자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항상 선구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중국에서는 토기ㆍ도기ㆍ자기를 포함하여 <도기>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토기를 제외한 도자기를 고찰한다. 중국에서 유약을 입힌 도자기는 은(殷)나라 중기, 즉 정주기(鄭州期)라고 불리는 BC15∼BC14세기경에 나타났다. 얇은 솔로 칠한 것 같은 시유도(施釉陶)이며, 1200℃의 고온에서 구어진 존형(尊形)ㆍ호형(壺形)ㆍ두형(豆形) 등의 도자기가 있으며, 기면(器面)에는 인문(印文)을 한 것이 많다.

은나라 후기인 안양기(安陽期)에는 회유도자기의 생산도 왕성해졌으며, 열효율이 좋은 가마에서 구워졌다. 안양기에는 백도(白陶)라는 고령토를 이용한 흰 경도(硬陶)로 만든 술잔과 항아리 등이 만들어졌으며, 기면에는 도철문과 기봉문(夔鳳紋) 등이 그려져 있어, 기형ㆍ문양은 청동기와 거의 같다. 서주(西周)시대에는 저장[浙江]ㆍ장쑤[江蘇]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유도(釉陶) 생산이 이루어져, 안후이성[安徽省]ㆍ툰시[屯溪]의 서주시대 유적에서는 전체에 유약을 고루 입힌 술잔ㆍ제기(祭器)ㆍ항아리 등이 출토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의 시유도를 자기에 가깝다고 하여 <원시자기(原始磁器)>라고 부른다. 강남지역에서는 회유도와 같이 기면에 깊게 스탬프상(狀)의 인문을 전면에 새겨 고온에서 구워낸 인문도(印文陶)가 발달하였으며(인문토기), 곧 인문경도의 기법과 회유도의 기법이 바탕이 되어 한대(漢代)의 유도로 발달해 간다.

화베이[華北]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는 뚜렷한 도자기의 발전은 볼 수 없으나, 이른바 방동도기, 방칠도기라고 불리는 동기(銅器)ㆍ칠기를 모방한 회도(灰陶)가 만들어졌다. 허베이성[河北省] 중산왕묘에서 출토된 흑칠조형존(黑漆鳥形尊)과 흑정(黑鼎)ㆍ흑칠호(黑漆壺) 등은 춘추전국시대 화베이의 대표적인 도자기이다. 또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연유도(鉛釉陶)가 대영박물관(大英博物館) 등에 전해지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한(漢)에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한나라에 들어와 도자기는 크게 발달했으며 다양한 각종 도자기가 생산되었다. 이른바 회도를 기본으로 한 회도가채(灰陶加彩)ㆍ회유도, 그리고 녹유(綠釉)나 갈유(褐釉) 등의 연유도 등이다. 근래 중국에서는 흡수율ㆍ유약ㆍ태토(胎土) 등 자기로서 필요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것이 후한(後漢)시대 초에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장성의 상위[上虞]ㆍ치시[慈溪]ㆍ융자[永嘉] 등 후한시대 닝보[寧波]의 자기요(磁器窯)가 발굴되어, 결정이 부드러운 태토에 연속적인 스탬프 문양을 새기고 아름다운 투명유(透明釉)를 골고루 입힌 항아리와 꽃병 오련호(五連壺)ㆍ타호(唾壺)ㆍ벼루 등이 출토되고 있다.

가마의 형식도 용요(龍窯)의 형태이며, 삼국시대에 발달한 고월자(古越磁)의 선구적인 도자기가 기원 전ㆍ후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점은 극히 중요하다. 삼국ㆍ양진(兩晉)ㆍ남북조(南北朝)시대는 화베이와 화난[華南]에서 독자적인 도자기 생산형태를 갖추었다. 우선 화난에서는 저장성의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청자ㆍ흑유자(黑釉磁) 생산이 활발해졌으며, 특히 청자는 신정호(神亭壺)ㆍ호자(虎子)ㆍ양형기(羊形器)ㆍ반구호(盤口壺)ㆍ천계호(天鷄壺)ㆍ등(燈)ㆍ벼루ㆍ청자용(靑磁俑;인물ㆍ猪圈) 등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의 청자를 특히 <고월자>라고 부른다.

저장에서 고월자가 활발하게 제작되자 주변 여러 도요지(陶窯址)에서도 저장 고월자와 닮은 자기를 구워내게 되었다. 푸젠[福建]ㆍ광둥[廣東]ㆍ장시[江西] 등에서 볼 수 있는 이 시기의 청자는 고월자를 모방한 것이고, 저장성의 상위요와 닝보요 등에서 만들어진 좁은 의미의 고월자와는 별개의 것이다. 또 저장성의 더칭요[德淸窯]에서는 흑유자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남조시대에는 화베이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그릇도 생산되어 남ㆍ북조의 교류가 빈번하였음을 추측케 한다.

화베이는 화난에 비하여 자기의 생산이 상당히 뒤떨어져 6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자기생산이 시작되었다. 화난과 달리 녹유와 갈유 등의 연유도가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5세기 말경의 사마금용묘(司馬金龍墓;山西省 大同市 소재)로부터 녹유와 갈유를 입힌 말ㆍ무인 등의 토용(土俑)이 출토되고 있다. 북위(北魏)ㆍ북제(北齊)시대에는 화베이에서도 자기가 생산되어, 허베이ㆍ산시[山西]의 북위묘에서는 청자연병형 (靑磁蓮倂形)의 대존(大尊)과 황유자(黃釉磁)가 발굴되고 있다.

또 화난의 남조자기에는 기면장식이 적은 데 반하여, 화베이의 북위묘에서 발견되는 황유자ㆍ청자 등은 첩화장식(貼花裝飾)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것도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북제시대에 화베이 여러 지역에서는 백자도 생산되었는데 허난성[河南省] 범수묘(范粹墓)와 허난성 이운묘(李雲墓)에서는 백자녹채병(白磁緣彩甁)과 황유녹채육이호(黃釉綠彩六耳壺) 등이 발견되었으며, 당(唐)의 삼채도(三彩陶)의 초기적인 것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수(隋)ㆍ당(唐)>

수ㆍ당 시대에는 청자ㆍ백자ㆍ흑유자 등의 자기류와 함께, 이른바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연유도 등 송대(宋代) 이후에도 계속되는 각종 중국 도자기가 모두 나타나게된다. 당시의 도요지로는 웨저우요[越州窯]ㆍ웨양[岳陽]ㆍ싱저우[刑州] 등지가 유명하다. 도요지에서는 은과 눈[雪]에 비유될 만큼 완벽한 백자의 그릇과 항아리가 출토되어 당대(唐代)에 백자가 완성된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삼채는 인물과 동물, 가옥과 각종 그릇이 모두 명기(明器)라고 일컬어지는 부장품(副葬品)이고, 남유(藍釉)나 녹유ㆍ갈유ㆍ백유(白釉)를 단독으로 또는 2가지 이상의 유약을 섞어 완성된 연유도로, 허난성 궁현[鞏縣] 도요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당삼채는 8세기 초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당나라 중기에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당나라 말기ㆍ송대에 삼채로서 계승되었다.

<송(宋)ㆍ원(元)>

당대 말기와 오대(五代)에 웨저우요에서 <비색청자>라는 양질의 청자를 만들어 내어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하나인 오월(吳越)의 전씨왕실(錢氏王室)에 <공자(貢瓷)>로서 전씨의 보호 아래 관요적(官窯的) 성격을 띤 가마로 되었다. 또 이 때 웨저우요의 청자는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한국ㆍ일본ㆍ동남아시아ㆍ서아시아 등지에 널리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도자기가 수출품으로 널리 이용된 것은 이 때부터이며, 저장성의 닝보에 시박사(市舶司)가 설치되었다.

북송(北宋) 후기에는 저장성 남부의 룽취안요[龍泉窯]가 청자생산의 중심지가 되어, 송ㆍ원ㆍ명대(明代)의 약 500년간 활발하게 생산하였다. 오대에는 장시성의 징더전요[景德鎭窯]에서 백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1ㆍ12세기경에는 청백자(靑白磁)로 불리는 푸른색을 띤 백자가 후텐요[湖田窯]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룽취안요의 청자와 함께 중요한 무역품이 되었다. 화난의 여러 지역에서도 이 때 여러 가지 도자기가 완성되어, 무역품으로 동아시아ㆍ서아시아ㆍ한국 등지에 수출되었다. 주요 품목으로서, 푸젠성에는 젠요[建窯]의 천목(天目), 안시요[安溪窯]의 청자, 취안저우요[泉州窯]의 황유철화(黃釉鐵畵) 등이 있다. 장시성에는 징더전요 이외에도 지저우요[吉州窯]의 천목ㆍ백유철화ㆍ녹유 등이 있다. 화베이의 여러 도요지에서도 송대에는 활발한 도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허베이성의 딩요[定窯]ㆍ츠저우요[磁州窯], 산시성[陝西省]의 야오저우요[耀州窯], 허난성의 쥔요[鈞窯]가 유명하다.

송대 화베이의 주요한 도요지에서의 도자기 생산은 당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본격적인 도자기 생산은 북송 이후부터였다. 송대에는 위에서 기술한 화베이ㆍ화난의 도요지 이외에도 루요[汝窯]ㆍ게요[哥窯]ㆍ둥요[東窯] 등의 관요청자요(官窯靑磁窯)가 존재한 것도 중요하다. 송대 관요에서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청자가 유럽ㆍ중국ㆍ미국 등지에 전세(傳世)되었으며, 도요지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고 있지 않다.

원대(元代) 징더전요에서 백자에 유약을 입히기 전에 코발트(靑料)로 그림을 그리고 투명유를 입힌 청화(靑華)가 발명되어 징더전요는 중국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청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① 츠저우요ㆍ지저우요 등지의 철화채도(鐵畵彩陶)의 영향 ② 서아시아의 이슬람 도기의 영향 ③ 징더전요의 독자적인 발전 등 여러 가지 설(說)이 있다. 코발트를 정색재(呈色材)로 사용한 청화와 함께, 원대에는 구리를 정색재로 사용한 유이홍(釉裏紅)도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붉은색의 홍유(紅釉)로 그림을 그린 독특한 도자기이다.

중국 국내에서는 이러한 청화ㆍ유이홍은 일상적인 기명(器皿)과 함께 도교사원(道敎寺院)의 제사구로도 사용되었으며, 인도ㆍ이란ㆍ터키 등의 이슬람세계에 무역품으로 대량 수출되어, 이란 사파비왕조의 고지(故地)인 아르데발과 오스만투르크의 토프카프궁전에 원대 청화의 우수한 제품이 많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명(明)ㆍ청(淸)>

명대의 도자기는 징더전요를 중심으로, 게다가 선덕제(宣德帝) 때 어기창(御器廠)이 설치되어, 징더전요는 정부가 관리하게 되고 제품의 생산량이 엄격히 규제되었다. 그 결과 청화ㆍ적화ㆍ색화(色畵) 등에서 흘륭한 자기를 완성하여, 중국 도자기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영락제(永樂帝)∼선덕제(1403∼35) 시기에는 뛰어난 청화도자기가 많은데, 원대의 힘찬 청화와는 다르게 잘 다듬어지고 세련된 작품이 많다.

명대 후기인 가정(嘉靖)ㆍ만력기(萬曆期;1522∼1619)에 징더전요의 생산이 절정에 이르러 어기창에 대한 생산주문이 격증, 어기창에서는 일부를 민요(民窯)에 위탁하는 <관탑민소제(官塔民燒制)>가 일반화되었다. 이 결과 어기창은 한 때, 문양이나 그림만을 그리는 금요(錦窯)가 된 적도 있어, 어기창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다. 반면 징더전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자기를 제작하게 되어, 고청화(古靑華)ㆍ상서(祥瑞)ㆍ오수적화(吳須赤畵)ㆍ남경적화(南京赤畵) 등의 다도(茶陶)를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청나라 초기 징더전요에서는 민요가 활발하게 도자기를 생산하여 동남아시아ㆍ유럽 여러 나라에까지도 자기를 수출하였으며, 유럽의 제후들의 궁전 장식과 일상용품으로서 널리 이용되었다. 제4대 강희제(康熙帝;1662∼1722) 때 어기창이 부활되었고, 징더전요에서는 모든 복잡한 기법을 구사한 정교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청화, 색화를 덧붙여 유럽의 무선칠보(無線七寶) 기법을 응용한 법랑채(琺瑯彩)ㆍ양채(洋彩)ㆍ분채(粉彩) 등의 색화자기(色畵磁器)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분채는 청조(淸朝) 징더전요의 주류가 되어 (고월헌(古月軒)>이라는 매우 치밀하고 정교한 색화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옹정(擁正)ㆍ건륭(乾隆)시대(1723∼95)는 징더전요의 전성기로 어기창의 활동은 눈부셨다. 건륭 말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징더전요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등도 발생하여 어기창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였다.

[한국]

<한국의 토기 문화>

한국 토기 문화의 기원은 BC6000년경부터 시작된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로는 부산직할시 동삼동 패총(東三洞貝塚)에서 출토된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紋土器]와 둥근덧띠무늬토기[圓底隆起紋土器]가 있으며, 뒤이어 패각(貝殼)으로 무늬를 그린 빗살무늬토기 [櫛紋土器]가 나타났다.

이어 청동기 시대에는 무늬 없는 토기가 발달하였으며 철기 시대에 들어와 평양 부근에 한(漢)나라의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어, 한대의 도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회도ㆍ회유도ㆍ녹유 등이 제조되었다. 한편 경주시 조양동고분(朝洋洞古墳)에서는 연질토기(軟質土器)가 출토되었고, 김해시 회현동(會賢洞)에 위치한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김해토기는 기면(器面)에 승석문(繩蓆紋)을 그려 넣어 고온에서 구워 만든 경질토기(硬質土器)이며, 그 중에는 자연유가 입혀진 것도 있다. 이 김해 토기는 삼국 시대 신라토기의 모체가 되었으며,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ㆍ이키섬[壹岐島]ㆍ기타큐슈[北九州]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유적에서도 출토된 점으로 보아, 일본의 경질도기인 수에기[須惠器]의 번조(燔造)에도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

삼국 시대에는 북쪽에 고구려, 남쪽에 신라와 백제가 형성되어 서로 영향을 끼치면서도 독자적인 도기문화를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도기는 회도인데, 중국 동북부의 도기와 유사한 점이 많으며, 후에 연유도도 번조되었다. 신라ㆍ백제에서는 환원염소성에 의한 회백색ㆍ회흑색의 경도 즉 신라토기가 주류를 이루어 발달하였다.

신라 토기는 돌이 섞이지 않은 고운 태토로 만들어 1000℃ 이상의 고열로 구운 것이며, 두드리면 금속성 소리가 날 정도의 경도를 가지고 있으나 유약을 입히지 않아 홉수성이 완전하게 제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마 속에서 굽는 도중 재가 기표(器表)에 떨어져 자연유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항아리ㆍ병ㆍ잔ㆍ굽다리접시ㆍ그릇 등 종류는 풍부하고, 기면에 선각(線刻)으로 문양을 그렸다.

신라 토기는 5세기 초 일본에 전하여져 고치[河內]의 스에무라[陶邑]에서 경질도기(須惠器)가 번조되었다. 신라 토기는 이러한 일상적인 기명 이외에 기마인물형토기(騎馬人物形土器)ㆍ압형토기(鴨形土器)ㆍ토우(土偶), 기면에 인물이나 동물을 붙인 부장용(副葬用)의 명기류(明器類)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경주시 황남동(皇南洞)의 황남대총(皇南大塚)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신라토기는 꾸밈새 없는 질감(質感), 음각(陰刻)으로 된 파상문(波狀紋)ㆍ삼각문(三角紋)ㆍ평행집선문(平行集線紋)ㆍ원권문(圓圈紋) 등의 기하학적 문양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고졸(古拙)하면서도 소박한 고대인의 정감이 넘쳐 흐르는 듯한 정신적 힘이 강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삼국시대에는 중국 화난 고월자의 청자ㆍ흑유자 등이 수입된 것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전통적인 신라 토기 위에 녹채(綠彩)ㆍ이채(二彩)ㆍ삼채 등의 연유도, 회유를 의도적으로 입힌 회유도 등이 새로 나타났다. 기면에 연속적인 인화장식(印花裝飾)을 하고 그 위에 회유ㆍ연유를 입힌 것인데 기본적으로 신라토기의 전통 위에서 만들어진 도기이다. 또 경주의 안압지(雁鴨池)와 황룡사(皇龍寺) 등지에서는 녹유와(綠釉瓦)가 대량으로 출토되며 건축장식에 연유도가 많이 이용되었다. 통일 신라 토기의 특징은 중국의 금속기의 영향으로 기형과 문양이 변화되었으며, 제기적(祭器的) 성격이 농후한 신라 토기에 비하여 합리성과 실용성이 강조된 점에 있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자기의 번조가 이루어졌다. 개성(開城)에 도읍지를 둔 고려왕조는 계속되는 중국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왔는데, 자기의 경우 웨저우요ㆍ야오저우요의 청자, 루요ㆍ딩요의 백자, 징더전요의 청백자, 허난 천목, 광둥ㆍ푸젠의 도자 등 거의 중국 전역의 도자기가 들어왔으며, 개성 부근의 고려시대 무덤에서 이러한 중국 도자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도자기는 중국 도자기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의 도자기는 청자ㆍ백자ㆍ흑유자ㆍ천목ㆍ철채수(鐵彩手)ㆍ철사유(鐵砂釉)ㆍ청자진사(靑磁辰砂)ㆍ화금자(畵金磁) 등의 자기가 번조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는 청자이다. 초기의 청자는 반자태(半磁胎)에서 회유를 입힌 녹청자(綠靑磁)였다. 본격적으로 청자가 제조된 것은 9∼10세기 초엽이며, 이 때의 도자기는 오대, 북송 초기 웨저우요 청자의 작풍(作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1세기경 고려에서는 중국 청자에 비하여 뒤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세련미를 가진 <비색청자(翡色靑磁)>를 만들어 냈다. 이를 본 중국의 서긍(徐兢)이 그의 저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事高麗圖經)》에서 <근래에 더욱 세련되고 색택(色澤)이 가히 일품이다(近年以來制作工巧, 色澤尤佳)>라고 절찬한 것은 유명하다. 비색이란, 물총새(翡翠) 날개의 푸르름을 비유한 미칭(美稱)이지만, 확실히 고려청자의 흘륭함은 세계 그 어디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오묘한 유조(釉調)를 띠는 것이다.

고려 청자의 최성기(最盛期)는 인종(仁宗)ㆍ의종(毅宗) 때이며 고려 특유의 작풍을 보이는 우수한 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청자의 도요지로는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보안면(保安面) 유천리(柳川里)와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용운리(龍雲里)ㆍ사당리(沙堂里)가 대표지역이다. 고려청자에는 이외에도, 백토나 흑토를 상감(象嵌)한 상감청자(象嵌靑磁), 철로 문양을 그린 후 청자유를 입힌 철화청자(鐵畵靑磁), 철유(鐵釉)를 전면에 바르고 청자유를 입힌 철사유청자(鐵砂釉靑磁), 금채(金彩)를 채색한 화금청자, 진사(辰砂)를 입힌 진사청자 등이 있다.

상감청자는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고려의 독자적인 청자인데, 치밀하고 섬세한 문양이 기면에 채색되어 그 은은함과 아담한 정취의 깊이는 고려 도자기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상감청자의 기법은 12세기경 절정을 이루어 고려 말에 쇠퇴하였는데 조선시대의 분청사기(粉靑沙器)에 그 기법이 전수되었다. 철화청자는 중국의 유하채자(釉下彩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며, 화금청자는 그 유례가 극히 드문데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청자상감원토당초문화금편호>가 대표작이다. 고려자기에는 청자 이외에도 백자ㆍ흑유자ㆍ철채수(鐵彩手) 등이 만들어졌지만, 청자만큼 우수한 자기는 많지 않다.

<조선 시대>

고려 왕조가 중국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데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민족의 독창적인 한글문자를 완성하였고 문화적으로도 독자적인 기풍을 세우려고 하였다. 도자기에서도 고려왕조는 청자가 주류를 이룬 데 반하여 조선에서는 백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작풍면에서 고려청자가 단정하고 엄격함을 보이는 데 비하여 조선의 백자는 중량감 있는 자유롭고 넉넉한 도자기로 만들었다. 1392년(태조 1) 도자기 생산을 감독하는 사선서(司膳署, 후에 司甕院)가 설치되어, 전국에서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기소(陶器所), 자기소(磁器所) 324개소를 감독하였다.

백자는 소박한 문양이 주체이지만, 15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코발트를 수입하여 청화(靑華;남빛 무늬를 넣어 구운 자기)를 번조하였다. 초기의 청화는 명나라 초엽의 작풍을 이어받아 당초문(唐草紋) 등을 기면에 그린 여백이 없는 도자기를 제조하였지만, 17세기경에는 여백을 많이 남긴 추초문(秋草紋)ㆍ어문(魚紋)ㆍ초화문(草花紋)ㆍ호도(虎圖) 등을 엷고 가는 선으로 그린 청화백자를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청화에서도 볼 수 없는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청화백자는 17세기 초에 일본에 전해져 이마리청화[伊萬里靑華]를 낳게 되었다. 청화와 함께 백자에는 백자철화ㆍ백자진사 등의 종류가 있다. 백자기면에 굵은 붓으로 용ㆍ호랑이ㆍ풀ㆍ꽃ㆍ난ㆍ대나무 등의 그림을 그려, 백자는 청화의 부드러움과는 다른 힘찬 약동감을 띠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백자만이 궁전의 집기로 사용되어 그 생산은 엄격히 감독되었으며,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분청사기가 발달하였다.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타난 것으로 초기에는 백화장(白化粧)한 기면에 청자유를 입힌 것을 번조한 것이다. 시문방법(施紋方法)은 고려청자로부터 이어져 온 인화문ㆍ상감문이 시문되었으며, 선각ㆍ철화 등으로 이어져 발달하였다.

철화는 계룡산요(鷄龍山窯)가 유명한데 부드러운 도태(陶胎) 위에 힘찬 선으로 어문이나 당초문을 날렵하게 그린 계룡산요의 철화 기법은 일본의 에카라쓰[繪唐津]로 전래되었다. 16세기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가마는 파괴되고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 조선의 도자기사(陶磁器史)에 큰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다.

<진성자>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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