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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2 (토) 19:3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721      
[미술] 회화-한국의 회화 (브리)
한국의 회화

회화
동양의 회화

우리나라에서는 선사시대의 바위그림과 청동기의 선각화(線刻畵) 등 주술성이 강한 도안적 단계를 거쳐 삼국시대에는 고대회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고분벽화가 성행했으며 불교회화의 유입 등으로 사실적인 묘사력이 크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솔거(率居) 등 전문화가의 활약과 아좌태자(阿佐太子)와 같은 왕족여기화가(王族餘技畵家)가 등장하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회화가 대종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고려는 고대적 질서에 반발하여 출현한 국가로 덕교(德敎)와 예교(禮敎)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왕도정치 수행에 필요한 인재등용을 위해 개국초부터 과거제도를 채택했고 유·불·도(儒佛道) 3교에 기반을 둔 문풍(文風)을 진작시킴으로써 한문학(漢文學)의 성행과 지배층의 문사화(文士化)와 함께 감상적 기능을 지닌 일반회화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이러한 일반회화는 왕권의 안정과 문신귀족체제의 확립에 따라 문운(文運)이 극에 달했던 문종(文宗:1047~83 재위)대에 왕공문신들의 한묵풍류(翰墨風流) 취향에 힘입어 여기적 문인화가가 출현하고 감상화로의 전환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해 전래되었던 북송의 그림으로부터 자극을 받으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중기에는 곽희(郭熙)의 화풍과 문인화론이 유입되어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며 도화원(圖畵院)의 설립과 이령(李寧)을 비롯한 화원들의 활약, 명승명소도 계열의 실경산수화 전통이 형성되었다.

무신집권기인 후기에는 새로운 문화담당층으로 등장한 문사들의 교양물로 정착되면서 그 성격과 기반이 보다 확고해졌다. 또한 이들을 통해 소식(蘇軾)을 중심으로 강조된 북송대의 문인화론과 묵죽(墨竹) 등의 문인취향 화목이 뿌리를 내렸고,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같은 수묵풍 이상산수의 성행과 선승화가(禪僧畵家)들의 활동에 따른 수묵선종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원나라 간섭기인 말기에는 그 이전에 형성된 토대 위에서 조맹부(趙孟 )의 화풍을 비롯한 새로운 원대의 양식이 유입되어 보다 다양하고 심화된 모습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조선 초기로 이어져 발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숭유정책에 따라 불교회화는 쇠퇴하고 일반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대의 회화는 왕조통치의 효과적 수행과 교화를 이룩하기 위한 시각매체로서 적극 활용되었을 뿐 아니라, 왕조 운영의 지도세력으로 문화상황을 앞장서 이끌었던 문인사대부들의 감흥교환·심의표출·심성수양의 미술로서 즐겨 애용되면서 크게 성행했다.

개국초부터 국가에서도 회사(繪事)를 전담하는 도화서(圖畵署)를 확장·설치하고 화원들을 양성하여 이러한 회화 상황의 정착·발전에 기여했다. 초기(1392~1550)에는 소상팔경도·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와 같은 고전적 이상경(理想景)을 소재로 한 정형산수화가 유행했고, 기록풍의 실경산수화와 계회도(契會圖) 등도 많이 제작되었다.

화풍은 북송과 남송, 원의 양식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고려 말기의 경향을 계승하여 넓은 공간개념, 삼단구도법, 농담의 대비가 심한 필묵법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주도했다. 이러한 조선 초기적 특색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안견파 화풍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 전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기(1550~1700)에는 사대부들의 처사적(處士的) 성향을 반영하는 소경(小景) 산수인물화가 유행했다. 자연과 인간과의 친화관계를 보여주는 이러한 소경산수인물화는 산수의 작은 한 부분을 배경으로 구성된 은일적(隱逸的) 고사(故事) 산수인물화의 성격을 띠며 전개되었다.

그리고 사대부들의 이념이나 정서와 밀착된 화조·동물·대나무·매화·포도 그림 등도 많이 그려졌다. 화풍은 초기의 안견파 화풍과 함께 명대의 절파풍(浙派風)이 가미된 짙고 평판적인 강렬한 수묵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1700~1850)에는 지배층의 분열과 두 차례의 파괴적인 전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은 기존의 전통사회를 다시 복구·정비·개혁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들이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였다. 이러한 왕조 재흥의 활기는 중세적 봉건질서의 해체와 근대 이행의 기반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민족문화를 새롭게 전진시키는 구실을 했다.

회화 분야에서는 이와 같은 시대적 조류와 밀착된 새로운 흐름이 1700년경을 전후하여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상승 욕구에 의해 문인층이 서얼출신과 중인들에까지 확대되면서 양반사대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시서화를 겸비하고 이를 향유하는 문인풍조가 저변화되는 동시에 그림을 그리고, 감상·품평·수장하는 등의 회화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으며, 진보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그림 자체에 대한 인식이나 창작에 관한 관념도 새롭게 제시되었다.

표현기법 또한 명대 후기부터 크게 발흥되었던 남종화법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기존의 화풍을 쇄신시켜 나갔으며, 사실적 묘사력의 강화를 위해 원근법·음영법 같은 서양화법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의 산천과 각 계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소재로 해서 그리는 실경산수화와 풍속화에서도 종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며 성행했을 뿐 아니라, 경제력의 전반적인 향상으로 길상성(吉祥性)과 벽사성(邪性)을 지닌 세화(歲畵) 등 민화류의 생활장식화가 크게 범람했다.

조선 말기(1850~1910)에는 후기에 대두되었던 여항문인화가(閭巷文人畵家)들의 활약이 더욱 커지면서 시서화 일치의 문인화 이념이 화단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사군자(四君子) 등 문인적 화목이 널리 성행했다. 화풍은 청대의 남종문인화풍을 토대로 간일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이색적인 경향이 유행했다.

1870년대 후반부터 개항을 통해 근대적인 외국문물이 유입되면서 조선시대 회화는 서구적 근대주의의 지배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는 1910년부터 본격화되어 서양화가의 출현과 함께 동양화와 서양화로 화단이 나누어졌으며, 1930년대 이후부터는 서양화가 한국회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종 미술교육과 총독부 주최의 조선미술전람회(선전) 등을 통해 일본화단의 사조와 화풍이 유입되면서 왜곡된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해소되었으나 새로운 민족분단의 상황을 비롯하여 작가들의 역사의식 빈곤과 대중적 기반의 취약 등으로 제한된 발전을 해오다가 1980년대부터 한국회화의 주체성과 국제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기반으로 세계 미술에 기여할 수 있는 질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 한국의 미술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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