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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2 (목) 19:5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3899      
[미술] 한국미술 (두산)
한국미술 韓國美術

관련항목 : 한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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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족에 의해 형성된 미술.

I. 개관

한국 민족의 미술활동은 신석기시대 후기 무렵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은 불교가 전래된 4세기 말경부터이다. 한국 민족은 한민족(漢民族)과 다른 퉁구스족이므로 뿌리 깊은 북방계 계통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삼국시대(三國時代) 초기의 불교전래와 거기에 잇따른 중국문화의 유입은 한국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지역적으로 민족적인 표현형식상의 특색을 가지면서도 미술상의 분야·계통·이코노그래피(iconography:도상학) 등은 중국미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분야에 따라서는 중국미술의 한 지방형식으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도 있다.

한국 민족의 미술활동은 왕조(王朝)의 변천과 더불어 약 30년을 한 시대로 양식·기술상의 성쇠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한국미술 중 그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민중의 생활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공예이다.

온대지역의 풍요로운 자연과 노년기 지형(老年期地形)에서 오는 완만한 산과 골짜기는 평화로운 자연주의와 농민예술의 소박성을 키워나갔다. 재료와 원료 자체가 지닌 미(美)와 나무의 성질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목공예품이 그 대표라 할 수 있으며, 백자(白瓷)와 청자(靑瓷)는 세부보다 전체로서의 통일을 지향하여 자연의 아름다움을 살리려는 의도가 반영되고 염담(恬淡)과 탈속(脫俗), 소탈한 운치로 공간의 미를 나타내고 있다.

ll. 선사시대

한국미술에서 신석기시대 전기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대체로 기형(器形)·문양(文樣) 등이 간단하고 볼 만한 것이 많다. BC 1900∼BC 1800년경부터 시작되는 신석기시대 후기의 토기에는 압날권점(押捺圈點)을 시문(施文)한 낙승(落繩)·절대(折帶)·중호(重弧)·뇌(雷)무늬가 나타나 미적 감각의 발전을 반영하고, 토제(土製)의 작은 동물·인물상도 후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졌다.

BC 600년경부터 청동기시대로 접어드는데, 주동술(鑄銅術)은 BC 3세기 이후의 초기 철기시대에 크게 발전하여 마형대구·소형 녹두(小形鹿頭) 등 북방계 동물미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장신구·의기(儀器)와 더불어 정교한 거치세선(鋸齒細線)무늬가 있는 세문경(細文鏡)이 만들어졌다.

lll. 삼국시대

삼국시대 때부터 커다란 고총(高塚)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그 때의 장신구 ·일상생활품 등이 부장품으로서 남아 있다. 불교는 372년에 처음으로 고구려에 전해졌으며 이로부터 한국미술의 중심적 추진력이 되었다. 목조와가(木造瓦家) 건축은 이미 낙랑군(樂浪郡:BC 108∼AD 313)의 중국인을 통하여 소개되어 있었으나 불교건축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불탑(佛塔)은 처음에는 중국식 고루목탑(高樓木塔)으로 동 ·서 ·북의 3면이 각각 독립된 금당(金堂)으로 둘러싸인 8각탑(角塔)이 있던 흔적이 고구려에서도 발견되고 있으나, 6세기경부터 화강암에 의한 석탑이 건조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경에 이르러 한국 석탑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을 완성하게 되었다.

불상조각(佛像彫刻)은 고구려가 북위(北魏)를 주로 한 중국 북조(北朝)의 조각을 본보기로 하고 있는 데 반해서, 백제에서는 남조(南朝)의 영향을 받아 둥그스름한 얼굴에 온화한 ‘백조의 미소’라고도 할 수 있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머금은 불상이 만들어졌고, 고신라(古新羅)는 기본적으로는 북조불(北朝佛)에서 영향받아 엄숙하고 침울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냈다.

정면시(正面視) 위주의 평면조각에서 입체조각으로 발전한 것은 900년경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 구리 또는 돌로 만들어졌다. 이 반가사유상을 포함하여 7세기 전반(前半)의 삼국 불상은 종래의 북위 전통에서 벗어나 북제(北齊) ·수(隋) ·초당(初唐)의 양식을 차례로 반영하여 의복 밑의 신체에 보다 주력하였다. 7세기 중엽이 되면 고신라의 불상도 한국적인 온화함을 되찾고, 구리 ·돌의 조각기술이 원숙해져 이후 통일신라의 황금기를 예시하고 있다.

회화는 압록강 중류 북안(北岸)의 퉁거우[通溝]와 대동강(大同江) 하류 북안의 용강(龍岡) 부근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에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후한(後漢)과 삼국시대의 중국벽화 고분에서 배워온 것으로, 발생기는 4세기 말경으로 추정된다. 4~5세기에 걸친 초기 고분벽화는 중국식인 주인 부부의 초상화를 주로 하고, 6세기에 접어들면 부부를 중심으로 한 중요 생활기록, 즉 풍속화로 바뀌며, 7세기 전반(前半)에는 사신도(四神圖)와 수목(樹木) ·연화(蓮花)를 제재로 한 풍경화가 주류를 이룬다.

벽화고분은 백제의 공주(公州)와 부여(扶餘)에서 각각 볼 수 있으나 가야(伽倻) ·고신라 땅에도 전해져 근래에 고령 ·영주(榮州)에서도 1기(基)씩 발견되었다.

금속공예는 처음에 낙랑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중국의 육조미술(六朝美術)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크게 발전하였다. 고신라의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순금제 외관(外冠)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3개의 수목형(樹木形) 입식(立飾)과 2개의 녹각형(鹿角形) 입식을 단 시베리아 초원(草原) 일대에서 유래된 특수 형식인 데 반해서, 고구려 ·백제는 일보 전진하여 포제(布製)의 모자에 수목형 또는 초화형(草花形) 투조(透彫)로 된 전식(前飾)을 달았고, 71년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유물은 고신라의 것보다 세련되었다.

고신라 토기는 3세기경에 성립한 초벌구이의 경도(硬陶)로서 고배(高杯) ·감(뜁)을 주체로 하고 있다. 표면 장식은 파상집선(波狀集線) ·기하학적 선(線)무늬 등으로 한정되어 소박 ·고졸(古拙)한 기형(器形)과 더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lV.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로 들어서면 고총의 조명이 없어지기 때문에 고분 출토의 유품은 거의 없고 유품은 불교미술뿐이다. 불교는 더욱 더 융성해져 거대한 사찰이 건조되는데, 가람 배치는 삼국시대의 3금당 1탑(三金堂一塔) 또는 1금당 1탑식에서 1금당 쌍탑식으로 바뀌고, 석탑은 8세기 중간의 불국사(佛國寺)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아래위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 형식으로 귀결된다. 9세기로 접어들면 석탑의 기단에 불상 등을 부조(浮彫)하여 장식적으로 되며, 또한 점차로 각부의 비례가 허물어져 쇠퇴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조각은 처음에 초당양식(初唐樣式)을 받아들여 삼국시대 말의 온화함이 상실된 것처럼 보이나, 8세기에 들어서 성당양식(盛唐樣式)을 반영하여 새로운 신체의 양괴(量塊)와 동적(動的)인 아름다움을 지니기 시작하였고, 8세기 중엽의 경주석굴암(慶州石窟庵)의 조각이 그 대표적 작품이다. 석굴암은 화강암재(花崗岩材)를 쌓아올려서 만든 원형석굴(圓形石窟)로, 중앙에는 석가 좌상이 있고 주위의 벽면에는 나한(羅漢) ·보살(菩薩) 등의 부조상(浮彫像)이 배치되어 종교적인 엄숙함과 인간적인 온화함이 잘 조화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석불도 8세기 말이 되자 중국과 마찬가지로 급속히 쇠퇴하였다.

9세기로 접어들어 불교 자체의 타락과 예술성의 쇠퇴로 말미암아 석불은 목이 없는 기형적인 것이 되어버렸고, 금동불은 천편일률적인 소상(小像)이나 험상궂은 모습을 가진 것이 되어버렸다. 또한 구리의 부족으로 철불(鐵佛)은 종래의 아미타(阿彌陀)와 석가 대신 약사(藥師)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주류를 이루었다.

신라 공예 중 가장 뛰어난 것은 범종(梵鐘)이다. 경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771년에 주조된 봉덕사(奉德寺) 동종(銅鐘)은 포탄형(砲彈形)의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4구(軀)의 윤곽과 2체(體)의 부조(浮彫)된 비천상(飛天像)으로 장식되었으며, 정부(頂部)에는 중공(中空)의 통형(筒形)과 용형(龍形)의 유(쐤)가 달려 중국의 종과는 다른 독특한 형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석탑에 격납(格納)하는 사리감(舍利龕)도 우수한 것이 있어, 682년에 건립한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에서 나온 금동제 사리감은 그 대표로서, 외함(外函)에는 정교한 부조사천왕(浮彫四天王)을 붙였으며, 주체는 복잡한 천개(天蓋)를 지닌 방단상(方壇狀)의 불단이다.

토기는 여러 꽃무늬를 스탬프로 찍은 골호(骨壺)가 대부분이며, 고신라 시대의 고배와 감(뜁)은 자취를 감추고 당기(唐器)를 모방한 병과 유개발(有蓋鉢), 그리고 경주(慶州)에서는 우수한 조각기법을 보인 귀와(鬼瓦), 복잡한 연화(蓮花) ·동물 ·당초무늬 등으로 장식한 엄청난 양의 와전류(瓦塼類)도 발견되었다.

V.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미술은 약 9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문화의 중심지가 경주에서 개성(開城)으로 옮겨짐으로써 쇠퇴하고 있던 10세기의 한국미술에 새로운 북방적 힘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런 르네상스적 현상은 조각에서 가장 뚜렷하다.

10~11세기에 걸쳐 커다란 철불(鐵佛)이 많이 만들어져, 그 중에는 석굴암의 본존(本尊)을 본뜬 것도 있고 신라 말의 무기력한 조각과는 달리 고려 초기의 불상은 희열에 넘친 웃음으로 가득차고 기다랗게 째진 눈, 날카로운 코 등에서 청신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위축되고 경직된 데다가 송(宋)나라와 원(元)나라 조각의 장식성을 곁들이면서 타락된 모습은 조선시대로 이어지나, 신라의 땅 안동(安東)에서 발견된 목제 가면의 일군(一群)과 백제의 땅에서 전통을 이어받아 인체(人體)의 유연성을 암시하는 소석불(小石佛) ·소불(塑佛)은 이채를 띠고 있다.

목조건축(木造建築)은 중국계의 고식소조양식(古式疎組樣式)이 채용되어 특수한 공포(뱀包)가 사용되고, 14세기에는 장식적인 힐조양식(詰組樣式)이 들어온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목조 건축은 안동(安東)에 있는 봉정사 극락전(鳳停寺極樂殿), 영풍(榮豊)의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 예산(禮山)의 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 등인데 극락전은 13세기의 건물이다.

석탑은 신라탑에 비하여 고준(高峻)해지고 옥개석(屋蓋石)도 두꺼워져 신라의 세련미가 상실되었으나, 묘탑(墓塔)에는 11세기적인 섬세함을 나타낸 작품도 많다. 회화는 한두 점의 고분벽화 외에 외국에 전해지고 있는 몇 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공예 중 동제(銅製)의 범종(梵鐘)은 초기의 흥천사종(興天寺鐘) 등 충실한 방고작품(倣古作品)도 있으나, 점차 형식과 기술이 타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짤막한 소형종(小形鐘)이 유행하였다. 형식도 신라종과는 달리 상대(上帶) 또는 견대(肩帶) 위쪽에 화형식대(花形飾帶)가 도드라지고, 부조(浮彫)된 비천은 선각(線刻)의 불상으로 바뀌었다.

청자(靑瓷)는 웨저우요계[越州窯系]의 영향 아래 10세기 말경부터 전북의 부안군(扶安郡) 보안면과 전남의 강진군(康津郡) 대구면(大口面) 방면에 발달하여 고려청자의 제1기(1010∼1150)로 들어간다. 이 시기에는 비색(翡色)이라 불리는 독특한 청록색 유기(釉器)가 만들어졌으며, 각문(刻文)을 시문한 것도 있으나 무문(無文)의 것도 많고, 유색(釉色) ·형태가 아울러 정교한 청자가 생산되었다.

제2기(1150∼1250)에는 바탕색 그 자체는 쇠퇴하고 구름 ·학 ·버들 등의 문양상감청자로써 특징지어지고 있다. 제3기(1250∼1392)는 쇠퇴기로서 상감청자 외에 회청자(灰靑瓷)도 많이 생산되었지만 청자의 색은 칙칙해지거나 갈색(褐色)을 띠게 되고 형태 ·기법 또한 말기적 양상을 드러냈으며 청자 외에 백자 ·철사유(鐵砂釉) 등도 만들어졌다.

Vl. 조선시대

조선의 지배자들은 철저한 화화사상(華化思想)으로 본디 중국인의 생활철학의 반영인 유교사상을 신봉하였으나, 한편 미술에서는 한국 사람들의 가식 없는 천성을 마음껏 표현하였다. 불교는 국시(國是)에 의하여 배척받았고 사찰은 산간으로 숨었으며 여신도에 의지하여 명맥을 유지하였다.

불교미술 또한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졌다. 조선 전기의 건축에서는 신건축양식인 소조(疎組)와 힐조(詰組), 그리고 그 절충양식이 행해졌으나 중기 이후에는 힐조가 주류가 되고 절충양식도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서울 남대문은 전기의 대표적 작례(作例)로서 정제(整齊)한 가운데 강건함이 느껴지고, 후기의 경복궁(景福宮) 건물에서는 두공(枓뱀)의 섬세함이 눈에 띈다.

불교조각은 처음에 원(元)나라와 명(明)나라를 직접적으로 모방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극도로 형식화(形式化) 또는 경직화됨으로써 무표정 ·무감정이 되어버린 데 비해, 무덤 앞의 석인(石人)이나 궁전 앞의 석수(石獸) 등 비종교적 작품에서 오히려 소박한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회화는 17세기를 경계로 하여 전후 2기로도 나뉘지만, 정확하게는 3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5세기 초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 화원(畵院)의 화사(畵師)가 중심이 되어 송 ·원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한 시기로, 북송(北宋) 곽희(郭熙)를 모방한 안견(安堅)의 산수화(山水畵)가 대표적이다.

중기(16세기 중엽∼17세기 말)로 접어들면 명초(明初)의 원체(院體) ·절파(浙派) 계통의 북종화(北宗畵)가 수입되어 이징(李澄) 등이 활약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중국화 계통이면서 이정(李霆) ·윤두서(尹斗緖) 등에서 한국화의 특색을 가진 화풍이 생겨난다.

후기(18∼19세기)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영향이 뚜렷한 시기였으나, 한편으로는 화풍(畵風) ·화제(畵題)에서 조선화(朝鮮化)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선(鄭敾)은 독특한 준법(熢法)을 써서 금강산 등의 실경(實景)을 묘사한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유명하며, 김홍도(金弘道)도 같은 경향의 대가였고, 강세황(姜世晃)은 서양화를 포함한 여러 화법을 경험적으로 구사한 불세출의 귀재였다.

서도(書道)는 고려의 안진경(顔眞卿) 구양순체(歐陽詢體)와 달리 원말(元末)의 조자앙체(趙子昻體)로 바뀌어, 나쁜 의미로 조선화된 뼈대 없는 속악한 것이 됨으로써 예술성을 떨어뜨렸으나, 후기에 이르러 김정희(金正喜)가 추사체(秋史體)로 불리는 한예(漢隸)에서 출발한 독자적인 서풍(書風)을 개척하여 광채를 띠었고, 또한 궁체(宮體)로 불리는 우려(優麗)한 한글 서체(書體)가 궁녀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도자기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전후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15∼16세기)는 분청(粉靑)과 백자(白瓷)로 특징지어지는데 상감(象嵌) ·백토도(白土塗) ·철회(鐵繪) ·음각(陰刻) ·박지분청(剝地粉靑) 등의 수법으로 분장(粉粧)한 분청청자(粉靑靑瓷)는 기법상으로는 분명히 고려청자의 조선화(朝鮮化)이며, 기술적으로는 전대(前代) 이래의 상감이 조대화(粗大化)하여 분청의 스탬프 기법으로 생략화(省略化)되었다. 전기의 백자는 명자(明瓷)와 비슷해서 경질의 특수한 유색(釉色)으로, 기형(器形)도 고졸(古拙) ·호방(豪放)하여 고려와는 전혀 취향을 달리한다.

후기는 청화백자(靑華白瓷)로 특징지어지는데 청화백자는 15세기 중엽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전기는 경기 광주(廣州)의 번천리(樊川里) ·우산리(牛山里) ·도마리(道馬里) 등의 관요(官窯)에서 구워졌으나, 임진왜란 후는 같은 광주의 금사리(金沙里)로 옮기고, 18세기 중엽부터는 분원리(分院里) 관요에서 구워졌다. 그러나 우수한 제품은 대부분 분원리 이전의 것이다. 그 밖의 공예로서는 나전칠기와 목공품 등이 남아 있다.

Vll. 현대

현대 한국미술은 국권피탈 이듬해인 1911년 전통회화 육성을 위하여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창립되고, 조선 최후의 화원 화가 소림(少琳) 조석진(趙錫晉),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등이 초치되어 제자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 서화미술원은 8년 후에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으나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등 여러 대가를 배출하였다. 이들 전통화가들은 19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하여 활동의 기반으로 삼았으나, 1922년 조선총독부의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이 열리고 서양화가 유입됨으로써 1930년대에 이르러 신동양화라고도 할 수 있는 ‘교배양식(交配樣式)’이 주류가 되어 전통화도 무의식중에 그 영향을 받았다.

8 ·15광복 후 국권의 회복과 더불어 49년부터는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 열리기 시작하였고, 서울대학 ·이화여자대학 ·홍익대학 등에 미술학과가 설치되었다. 이 무렵의 한국화는 채색화(彩色畵)를 배격하고 남종 문인화(南宗文人畵)류의 수묵화가 주가 되었으며, 또한 1950년대부터는 서양화법(西洋畵法)의 도입이 뚜렷해져 신구(新舊)가 뒤섞인 온건파를 비롯하여 철저한 추상파까지 탄생하였다.

한편, 서양화는 19세기 말경부터 한두 사람의 서양인 화가의 내한(來韓)이 있었으나 별다른 반향이 없었으며, 1908년 최초의 서양화 학생으로서 도쿄[東京]미술학교에 유학한 고희동(高羲東)도 귀국 후 동양화로 복귀하였다.

서양화는 처음부터 일본을 통해 배웠으므로 8 ·15광복 전에는 일본 양화의 영향이 컸으나, 8 ·15광복 후에는 서양 미술계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증가함에 따라 급속히 발전하고, 1950년대부터는 비구상화(非具象畵)가 양화의 주체가 되어 1969년부터는 국전(國展)에도 추상화부가 독립 부문으로 등장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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