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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2 (목) 16:41
분 류 문화사
ㆍ조회: 2392      
[고려] 고려시대의 미술 (민족)
미술(고려시대의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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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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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고려시대 목조 건축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쌓는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전통적인 제1양식과 남송(南宋) 때의 푸젠성(福建省) 지방 양식이 새로 가미된 제2양식의 두 가지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 12세기)은 제1양식의 건물이다. 그리고 굽받침을 가진 소로와 주두(柱頭)·반첨차(半檐遮)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제2양식 건물로는 수덕사대웅전(1308년, 국보 제49호)·강릉객사문(국보 제51호)·부석사무량수전(1316년, 국보 제18호) 등이 있다.

한편, 고려 말 원나라로부터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는 다포 양식(多包樣式)이 들어와 심원사보광전(心源寺普光殿, 1374년)·석왕사응진전(釋王寺應眞殿, 1386년) 같은 건물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의 석탑은 통일신라의 3층 위주와는 달리 5·7·9 등 층수가 늘어났다. 그리고 중부 이북에서는 중국의 영향으로 육각탑·팔각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한 탑의 지붕돌에서는 공포에 해당하는 계단식 받침이 신라의 5단에서 4∼3단으로 감소되어서 지붕돌이 두껍고 무거워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따라 키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시대의 탑에 비하면 고려시대의 탑은 둔중한 인상을 주게 된다.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는 개심사지오층석탑(1010년, 보물 제53호)·금산사오층석탑(金山寺五層石塔, 보물 제25호)·광주서오층석탑(光州西五層石塔, 보물 제109호), 후기의 것으로는 천곡사지칠층석탑(泉谷寺址七層石塔, 보물 제309호)·경천사지십층석탑(국보 제86호)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도 부도탑(浮屠塔)이 많이 조성되었다. 팔각당 이외 석종형(石鐘形)·석등형·골호형·석탑형·사각전 등 여러 형식의 것이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것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화여자대학교 소장 석조부도(930년, 보물 제351호)·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普賢寺朗圓大師悟眞塔, 940년)·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 975년, 보물 제7호)·거둔사원공국사승묘탑(居屯寺圓空國師勝妙塔, 1018년, 보물 제190호)(이상 팔각당)·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1017년, 骨壺形, 국보 제102호)·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1085년, 四角殿形, 국보 제101호)·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 1379년, 보물 제228호)·영전사지보제존자사리탑(令傳寺址普濟尊者舍利塔, 1388년, 石塔形, 보물 제358호) 등이 있다.

[조각]

고려시대는 불교 조각의 퇴화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초기 불교가 가지던 정열과 순결이 9, 10세기경부터 변질, 타락해 간 데 원인이 있다. 10세기의 불상 조각에는 8세기 신라 조각을 본으로 하는 복고 양식(復古樣式)과 9세기 신라 철불을 계승하는 신라 말기 양식의 두 파가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춘궁리철조여래좌상(春宮里鐵造如來坐像, 보물 제332호)·적조사철조여래좌상(寂照寺鐵造如來坐像)·부석사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등은 고려 초기의 복고 양식이다. 석굴암본존을 모방하면서 날카로운 선의 처리, 수평으로 길어진 눈, 작은 입 등 고려 불상의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말기 신라파 작품으로는 강원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철불들이 남아 있다. 신라 불에 비하면 옷주름이 양식화되고 얼굴에서 인간미가 없어졌다. 하지만 말기 신라불에서 볼 수 없는 힘차고 청신한 웃음을 띠고 있으며, 생기 있는 체구와 함께 새 왕조의 북방적인 힘을 보여 주고 있다. 월정사석조보살좌상(月精寺石造菩薩坐像, 보물 제139호)과 신복사지석불좌상(神福寺址石佛坐像, 보물 제84호)도 이러한 힘을 보여 주는 초기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0세기 양식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1세기가 되면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일명 은진미륵, 보물 제218호) 같은 조형성을 상실한 졸작으로 퇴화하여 신라 석불의 전통은 소멸하고 만다. 그리하여 그러한 조각 전통의 상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암벽에 몸을 선각하고 그 위에 머릿돌을 얹는 석불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편, 13세기 후반부터는 원나라 불교 조각의 영향을 받아 번잡한 장식과 중국식 얼굴을 가진 조그만 동불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4세기가 되면 두꺼운 옷에 감긴 무표정하고 차가운 불상들이 나타나 조선 불상에로의 전환 과정이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전반적인 조각 쇠퇴 속에 있어서 특이한 존재는 안동 하회동의 나무탈들이다.

이 탈들이 그 서방적인 굴곡 깊은 얼굴과 활달한 도법(刀法)으로 미루어 당나라를 거쳐서 신라로 들어온 서역계 탈 조각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불교 조각에서 볼 수 없는 활력과 감정이 표현되어서 주목된다. 그 제작 시기는 고려 전기 아니면 전기 양식을 충실하게 모방한 후기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회화]

고려시대의 회화가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은 송나라의 ≪도화견문지 圖怜見聞志≫에 “그 기교의 뛰어남은 다른 나라에 비하기 어렵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작품이 적어 그 실상을 파악하기 힘들다.

고려시대는 화원(怜院) 또는 화국(怜局)이 있었다. 송나라 휘종(徽宗)이 격찬한 〈예성강도〉를 그린 이령(李寧)도 궁중 화가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사대부 화가로는 김부식(金富軾)·김군수(金君綏)·이인로(李仁老)·정홍진(丁鴻進)·정지상(鄭知常)·차원부(車原琅)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일반 회화의 실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비하여 불화는 일본에 80여 점이 남아 있다. 동경(東京) 센소사(淺草寺)에 있는 화승 혜허(慧虛) 작 〈양류관음도 楊柳觀音圖〉는 채색 세필(彩色細筆)이면서 관음보살의 자비와 기품이 화면에 가득 찬 걸작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벽화로는 공민왕릉·장단군 법당방고분(法堂坊古墳)·개성 수락암동고분(水落巖洞古墳)·거창 둔마리고분 등이 알려져 있다. 개성 부근 벽화는 선화의 십이지입상(十二支立像)을 벽에 돌려세운 것이다. 하지만 거창 벽화는 채색의 도교(道敎) 옥녀(玉女) 그림이며, 개성 벽화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 옥녀도는 같이 나온 고려청자로 미루어 13세기경의 작품이라고 추측된다. 세밀한 그림이 아닌 거친 필치의 그림이지만 선에 억양이 있고 고분 벽화로서의 효과를 잘 나타내고 있다.

[공예]

(1) 도자기

고려는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중국 청자 영향을 받아 이미 10세기경부터 황록색 또는 회록색의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초기 가마 자리로 인천경서도요지가 알려져 있고 연대가 확실한 실물로는 이화여자대학교 소장의 순화 4년명(淳化四年銘, 993년)의 항아리가 남아 있다.

그러나 11세기가 되면 강진·부안 지방 가마에서 양쯔강(揚子江) 지방 용천요(龍泉窯)의 기술에 의한 본격화한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형태·유색(釉色) 등에서 고려청자라고 할 수 있는 독립 양식의 청자를 생산하고 있다.

11, 12세기의 청자는 옥과 같은 질감의 청록색 유색을 나타내는 데 주력하였다. 그 독특한 색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또 고려 비색이라 하여 송나라에서도 당시의 28가지 최고품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순청자(純靑磁)의 대표적 유물로는 인종의 능인 장릉(長陵)에서 발견된 참외모양병·네모받침·오리연적(간송미술관 소장)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형태·유색 모두 섬세하고 정교한 고려청자의 정수(精粹)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1세기 후반이 되면서 철분이 많은 자토(蜚土)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청자유를 씌우는 철회 청자(鐵繪靑磁)가 중국의 자주요(磁州窯) 또는 광주서촌요(廣州西村窯)의 영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자토를 그릇 전면에 씌워서 검은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백토(白土)로 삼엽(蔘葉) 따위를 그리는 백퇴화 청자(白堆花靑磁)로 발전하였다.

12세기 중엽부터는 진사(辰砂)라고 불리는 산화동(酸化銅)으로 무늬를 그리거나 음각·양각·상감 등 무늬 위에 덧칠해서 장식 효과를 내는 진사 청자(辰砂靑磁)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려청자를 고려 특유의 독특한 양식으로 완성시킨 장식법은 무늬를 음각하고 백토나 자토로 메운 뒤 청자유를 씌우는 상감법이다. 그것은 12세기 중엽 금속 상감법에서 착상하여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상감 무늬로 자주 쓰인 것은 학·구름·국화·석류·수양버들 따위이다. 그리고 따로 위아래 구획선으로서 연화문(蓮花文 : 연꽃무늬)·뇌문(雷文 : 번개무늬)·여의두문(如意頭文) 같은 것이 있다. 상감 무늬는 처음 그릇의 공간과 잘 조화되도록 하며 유약의 빛도 순청자의 전통을 남기려 하였다.

그러나 상감 무늬의 효과를 더 내기 위해서는 청자색이 보다 밝고 투명해져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순청자 시대의 비색은 점차 퇴화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청자의 유색이 아니라 상감 무늬로써 그릇의 질이 평가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따라서 무늬가 그릇 전면을 덮는 복잡한 형식으로 바뀌거나 그릇과의 조화는 생각하지 않는 거친 솜씨와 구도의 무늬로 변화해 갔다.

더구나, 13세기 후반이 되면서 산소의 공급을 제한하는 종래의 환원염(還元焰) 굽기 전통이 흐트러져 공기가 많이 들어가는 산화염법으로 바뀌어 갔다. 그래서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발색하는 제일산화철(FeO)이 아니라 황록색으로 발색하는 제이산화철()로 바뀌어 14세기에는 청자색이 갈색 또는 탁한 회록색으로 변하였다. 그리고 고려 비색의 전통은 거의 끊어진 채 조선 초기의 분청(粉靑)으로 변해 갔다.

한편, 고려시대는 백자도 만들어졌으며 순백자 이외 철화 백자(鐵怜白磁)·상감 백자도 있다. 또 백자 흙과 자토를 함께 빚어서 연리문(練理文) 또는 주름 무늬를 낸 것도 있다. 상감 백자의 예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모란무늬병은 병의 위아래에 청자 흙으로 연꽃무늬 띠를 돌리고 허리에는 청자 흙으로 여섯 군데에 나뭇잎 모양을 상감하였다. 그리고 그 안에 자토와 백토로 상감 모란 무늬를 나타내고 있다.

(2) 금속 공예

고려의 금속 공예물로는 불구(佛具)와 거울〔銅鏡〕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고려의 범종은 입 지름에 대한 종 높이의 비율이 신라시대의 1:3 정도에서 1:2∼1:1로 작아져 종의 날씬한 몸매가 덜하여졌다. 그리고 시기가 내려올수록 40㎝ 미만의 작은 종이 되었다.

또한 종의 상부 무늬 띠〔上帶〕의 위쪽, 즉 종의 머리판에서 어깨로 꺾어지는 부분에는 비스듬하게 채양처럼 뻗어 나오는 연꽃잎 띠〔立狀花文帶〕가 생겼다. 그리고 종 허리의 비천상은 여래나 보살상으로 바뀌어 신라 종의 전통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종은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일본 히로시마(廣島) 쇼렌사종(照蓮寺鐘, 963년 작)·천흥사종(天興寺鐘, 1010년 작, 국립중앙박물관)·청녕4년명종(淸寧四年銘鐘, 1058년 작, 국립중앙박물관)·정풍2년명종(正豊二年銘鐘, 1157년 작, 국립중앙박물관)·대흥사종(大興寺鐘, 1346년 작)·연복사종(演福寺鐘) 등이 있다.

이중 천흥사종은 높이 1.7m, 입 지름 1m의 큰 종으로 형태·형식 모두 신라 종 그대로의 복고작(復古作)이다. 그리고 정풍2년명종은 높이 22.5㎝의 작은 것이지만 고려 종의 특색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연복사종은 머리에 용통도 없고 종구(鐘口)도 팔화형(八花形)으로 된 원나라 종 양식이다.

고려시대의 청동 향로(靑銅香爐)는 전이 달린 깊은 화로형 몸에 높은 굽이 달린 굽그릇 모양이다. 그리고 몸과 굽에 구름·용·당초 등 무늬와 범자(梵字)를 은으로 상감(立絲라고도 함)하고 있어 형태·기법 등 고려의 특색을 잘 나타낸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구리 그릇의 상감 무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아류산염(亞硫酸鹽)이나 비소계염(砒素系鹽) 같은 화학 약품을 쓰거나 열을 가하는 방법 등으로 표면이 검은 오동(烏銅)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현존하는 주요 향로로는 표충사청동함은향완(表忠寺靑銅含銀香湄, 1177년, 국보 제75호)·일본 동경국립박물관의 향로(1178년)·건봉사향로(乾鳳寺香爐, 1214년)·봉은사향로(奉恩寺香爐, 1344년)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구리거울은 무덤에서 발견된 것이 상당수 남아 있어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의 거울이 매우 희소한 것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려 거울은 대체로 송경(宋鏡)을 본으로 한 것이 가장 많다. 따라서 송나라에서 만들어진 복고경(復古鏡) 형식도 그대로 받아들여져 한나라·육조·당나라의 거울 형식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경·육조경 형식의 방격경(方格鏡)·일광경(日光鏡)·TLV경(鏡)·신수경(神獸鏡), 당경 형식의 서수포도문(瑞獸葡萄文)·수하탄금문(樹下彈琴文)·보상화문(寶相華文)의 둥근 거울 등과 함께 팔릉경(八菱鏡)·팔화경(八花鏡)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송원경 형식으로는 동물·산수·인물·항해도·누각 무늬의 방형·4릉·6릉·8릉·나뭇잎 모양 등 다양한 형식이 만들어졌다.

(3) 칠기

칠기는 신라시대의 나전 칠기 기술을 보여 주는 악기들이 일본 쇼소원에 남아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나전 칠기는 더욱 유행한 모양이며 ≪고려사≫에 의하면 원나라 황실에서 대장경칠함(大藏經漆函)을 만들도록 한 일이 있다.

그러한 경함(經函)이 동경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다. 이것은 높이 26.5㎝, 길이 38㎝, 너비 19.5㎝의 함으로서 뚜껑에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글과 전면에 국화 무늬가 자개 상감과 구리선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국화들은 대모(玳瑁)로 화심(花心)이 표시되어 있다. 이밖에도 국당초무늬〔菊唐草文〕나 버드나무 무늬의 나전 칠기함·합(盒)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에 남아 있다.

<김원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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