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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2 (목) 16:1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836      
[고대] 고대의 미술 (민족)
미술(고대의 미술)

세부항목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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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근대 및 현대의 미술)
미술(참고문헌)

[건축]

선사시대의 움집식 원시 건축에서 보다 밝고 전망을 좋게 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공포(慊包) 또는 두공(枓慊)을 짜 올리는 발달된 목조 건축법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의 원삼국시대에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늦어도 2, 3세기경이 되면 남한에서도 유력자의 집은 기와를 덮은 지상 가옥이었다고 추측된다.

≪신당서 新唐書≫에 의하면 고구려의 서민층 가옥은 초가집이었으나 공공 건물과 사찰은 기와집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공공 건물과 사찰 이외는 겹처마〔浮椽〕나 막새기와를 쓸 수 없고, 또 4두품(四頭品) 이하의 신분은 널천장이나 두공을 쓸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삼국시대의 건물지로서 남아 있는 것은 주로 절터이다. 그 가람 배치는 목탑(木塔)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의 사찰 건축을 거쳐 인도의 사원 건축 전통에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금당(金堂 : 대웅전)의 배치에서는 한국적 개성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교를 먼저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고 고구려의 사찰 건축법이 백제·신라로 퍼져 들어갔으나 지역에 따른 차이가 생겼다. 즉, 평양 청암리사지(淸巖里寺址)에서는 팔각목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각각 세 개의 금당이 서 있는 구성이다.

하지만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는 탑 북쪽에 금당 세 채가 동서 일렬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다시 강당이 서 있는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569년에 건축이 시작된 경주 황룡사는 이 군수리식 가람 배치를 본뜬 것으로 9층의 방형 목탑 북쪽에 금당 세 채가 동서로 나란히 선다. 그리고 다시 그 북쪽에 강당이, 탑 앞쪽 좌우에는 경루(經樓)·종루(鐘樓)가 세워지고 있다. 경루·종루 남쪽 가운데는 중문(中門)이 서고 이 중문 좌우에서 시작되는 회랑이 북으로 꺾여 올라가며 강당에 연결된다.

그러나 익산의 미륵사지에서는 금당 하나, 탑 하나가 회랑에 둘러싸인다. 그리고 그것이 세 개 동서로 연립하는 특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석탑 자리 두 곳은 쌍탑이 아니라 동원(東院)·서원(西院)에 각각 소속되는 독립탑이고 중원(中院)의 탑은 원래 목탑이었음을 발굴 결과에 의하여 알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가람 배치는 경주 사천왕사지와 불국사의 배치가 대표적이다. 금당 앞에 쌍탑·경루·종루·중문, 북쪽에 강당이 있고 방형의 회랑이 중문과 강당을 연결하는 일금당쌍탑식(一金堂雙塔式)이다. 다만, 불국사에서는 서쪽에 한 단 내려 서방정토(西方淨土)를 상징하는 극락전이 부설되어 있다.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석굴암은 인도나 중국의 암벽을 파고 들어간 석굴 사원을 배운 것이다. 하지만 굴착한 석굴이 아니라 큰 돌을 쌓아 올린 인공 석굴이라는 데 특색이 있다.

석굴의 평면은 후원전방식(後圓前方式)이며 전실(前室)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이 둘러 있다. 그리고 주실(主室)에는 본존불좌상을 가운데 두고 보살(菩薩)·천(天)·제자(弟子)들의 돋음새김·두리생김상이 벽면 또는 그 위의 감실(龕室)에 배치되고 있다.

불탑은 원래 불사리를 보존하는 석가모니의 무덤과 같은 것으로 불교 사찰의 중심적 존재이다. 인도의 복발형(覆鉢形) 수투파(stupa)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고루 형식(高樓形式)으로 바뀐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에 삼국이 모두 목탑이었으나 백제에서 비로소 석탑으로 바뀌게 되었다.

즉,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은 여러 개의 부재(部材)를 써서 목탑을 재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석탑 제일 층에는 엔타시스(entasis)를 가진 돌기둥이 탑신(塔身)을 받치고 있으며 지붕 처마 밑의 계단형 받침은 공포 같은 효과를 주고 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640년경으로서, 이 탑의 양식을 정리해서 보다 석탑적인 양식으로 만든 것이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1979년의 정림사지 발굴 결과에 의하면 탑의 연대는 6세기 중엽 이하로 내려갈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그것이 확실하다면 백제에서는 이미 6세기 중엽 독자적인 석탑 양식이 성립되어 있었고, 정림사탑과 미륵사탑은 서로 계통을 달리하는 별개 양식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두 양식은 대표적인 백제 양식으로서 백제 멸망 후에도 전라도·충청도 지역에 그 전통이 남게 되었다.

한편, 신라에서는 중국의 전탑(塼塔)을 본떠서 만든 분황사석탑(634년 작, 국보 제30호)이 유일한 고신라 탑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기로 들어가면 미륵사탑을 본으로 한 것 같은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 국보 제77호)을 거쳐 곧 신라 탑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적 양식을 완성하고 있다.

통일신라 탑의 대표적인 예는 감은사지삼층석탑(682년 작, 국보 제112호)과 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 8세기 중엽 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 758년 작, 국보 제99호) 등이다.

탑은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으로서 위로 올라갈수록 층의 높이와 너비가 작아져 안정된 균형을 보여 준다. 아래 기단 너비와 탑의 높이가 같고 위 기단의 너비가 탑 높이와 황금비(黃金比)를 이룬다.

그리고 각 층 지붕돌의 네 귀를 위에서 아래로 연결하는 사선은 상층 기단의 네 귀까지 내려오는 직선이 되는 등의 특징 때문에 전형적 신라 석탑은 매우 안정되고 짜임새 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9세기로 들어가면 탑 높이가 종래의 9∼10m에서 4∼5m 정도로 작아지고 기단·탑신 등에 팔부중, 십이지신상 등을 새기는 따위의 장식 경향이 나타난다. 그래서 탑이 섬세해지고 우아하였던 운치를 잃게 된다.

9세기 탑의 예로는 진전사지삼층석탑(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 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 국보 제105호) 등이 있다.

이러한 정형 양식이 아닌 특수 형식 탑으로는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화엄사사사삼층석탑(華嚴寺四師三層石塔, 국보 제35호)·정혜사지십삼층석탑(淨惠寺址十三層石塔, 국보 제40호) 등이 있다.

그리고 안동 지방에는 8, 9세기경의 전탑이 4기 남아 있다. 이 탑들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며 안동 지방에만 모여 있는 특이한 현상을 이루고 있다.

한편, 고승의 유골을 보존하기 위한 부도(浮屠)는 844년의 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居和尙塔, 국보 제104호)을 위시하여 여러 개가 남아 있다. 이들은 거의 모두 I자형 대석에 팔각당(八角堂)을 올린 형식이며 대석 둘레에는 사자·연화·구름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조각]

삼국시대는 선사시대 조각의 전통을 따른 토착 양식의 종교적 조각이 있었다. 또 신라 토우에서 보는 바와 같은 간단한 토우도 만들어졌으나 삼국시대의 본격적 조각은 372년의 불교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이론상으로는 4세기 말경부터 불상들이 만들어졌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예로는 4세기는 물론 5세기로 올라가는 불상도 없고 6세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실물이 나타나고 있다.

불상은 소상(塑像)·목상(木像)·동상(銅像)·석상(石像) 등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623년 신라에서 일본으로 보낸 미륵반가사유상이 일본 호류사(法隆寺)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상은 평양 원오리(元五里) 출토의 고구려 불상 파편들, 부여 출토의 불상 파편들 이외는 완전한 것이 없다.

석상은 백제, 특히 신라에서 많이 만들어졌으며 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의 특색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도금을 하여 금빛을 내게 할 수 있는 동상이 사찰의 배례불(拜禮佛)이나 또는 일반 신자의 공양불(供養佛)·호지불(護持佛)로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기를 통하여 많은 동불이 만들어졌고 또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작품이 몇 점 남아 있다.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는 중국과의 교통이 편해서 북위(北魏)를 비롯한 북조(北朝)의 조각 양식이 들어왔다. 하지만 백제·신라는 고구려를 통해서 북조 조각 양식을 배우는 동시에 남조(南朝)의 조각 양식을 직접 받아들여 고구려와는 다른 부드러운 양식을 발전시켰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19호)과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국보 제72호)은 고구려의 북위 조각 수용 방법을 보여 주는 예이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에서는 북위 불의 홀쭉한 얼굴과 고졸(古拙)한 미소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금동계미명삼존불에서는 중국 북제(北齊) 조각 양식의 영향도 있어 얼굴이 둥글어지고 한국적인 따뜻함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한국화(韓國化)는 백제 불상에서 더 진전하여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軍守里金銅彌勒菩薩立像, 보물 제330호)은 둥글넓적한 얼굴, 인간적인 웃음, 도식화된 옷자락 등 백제 양식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 1979년 정림사지 출토의 도용(陶俑)들은 파편이지만 특이한 둥근 얼굴에 서역(西域)의 영향이 뚜렷한 것으로 백제 조각의 새 자료로서 귀중하다.

6세기 말경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미륵반가사유상이 유행하여 크고 작은 반가상이 남아 있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은 지금까지의 정면관(正面觀, frontality) 위주의 평면적 조각이나 옷주름의 시각적 효과를 노리는 선각식(線刻式)과는 달리, 육체를 괴체(塊體)로서 받아들이는 완전 입체 조각이라는 점에서 우리 나라 조각사상 기념비적인 존재이다.

또, 몸의 모델링뿐 아니라 인간성과 불성(佛性)을 융화해서 만들어낸 인간적이면서 숭고한 종교미는 고대 한국 조각의 가장 뚜렷한 특색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백제 불상들은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독특한 인간미 있는 미소를 띄우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서산마애삼존불상(국보 제84호),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 등이 대표적 예이다.

서산마애삼존불상은 7세기 전반에 속하지만 아직까지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마애불이다. 그것이 중국의 석굴사(石窟寺)에서 얻은 착상이라고 할 때 경주 석굴암으로 넘어가는 선구 양식(先驅樣式)이라고 할 수 있어 중요하다. 눈을 크게 뜨고 활짝 웃고 있는 본존불은 백제 양식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불상 중의 하나라는 데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불상은 6세기 말경부터 실물이 남아 있지만 7세기로 들어가면서 급속히 불상이 늘어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78호)·황룡사지 출토의 금동보살두(金銅菩薩頭)·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 및 제184호)·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慶州南山三花嶺石造三尊佛像)·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등 중국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의 조각 양식의 영향을 반영하는 불상들이 남아 있다.

이들 7세기 중엽의 불상들에서는 6세기 불상들과 같이 두꺼운 옷에 가리운 몸이 아니라 얇은 옷을 입은 새로운 조형성에의 관심이 고조된다. 이러한 조형성은 군위삼존불상석굴(軍威三尊佛像石窟, 국보 제109호)의 불상들에서 보는 따위의 경직된 괴량감(mass)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8세기로 들어가면 성당(盛唐)의 사실 양식(寫實樣式)이 가미된다. 그리고 거기에 전통적 인간미와 종교미가 복합되어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 제82호) 및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81호)의 중간 단계를 거쳐 8세기 중엽의 석굴암 조각이라는 절정기로 발전한다.

감산사여래입상은 몸의 입체감이 암시되면서도 아직 두꺼운 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석굴암 조각에 이르게 되면 얇은 옷이 몸에 밀착해서 육체의 굴곡이 완연히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육체 표현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관능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얼굴의 표정과 약간 도식화된 옷주름의 미묘한 조화에서 오는 것이다. 옷주름의 표현에 의한 관능미 감쇄 효과는 석굴암의 다른 조각에서도 마찬가지다.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은 석굴암 양식이 약간 정식화(定式化)한 단계의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옷주름의 표현이 어딘지 양식화되고 얼굴에서의 숭고한 종교미도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화는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柏栗寺金銅藥師如來立像, 국보 제28호)에서 한층 더 진전하고 있다.

신라의 조각은 석굴암 조각을 경계로 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9세기로 들어가면 석불과 동불 모두 양식화와 타성화(惰性化)가 진행해서 8세기 이전 불상이 가졌던 종교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석불에서는 목이 밭아지고 어깨가 좁아지는 등 경직과 비율 상실의 말기 상을 나타내게 된다.

9세기 불상의 또 하나의 특색은 철불(鐵佛)과 비로자나불(毘盧舍那佛)의 유행을 들 수 있다. 보림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858년 작, 국보 제117호)에서는 빈약한 체구와 옷자락의 미숙한 양식화가 눈에 띈다.

그리고 도피안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到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865년 작, 국보 제63호)에서는 육계(肉鉅 :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가 작아져서 달걀형으로 된 얼굴, 평행선처럼 처리된 옷주름 등 신라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 뚜렷하다.

[회화]

신라의 회화로는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실례이다. 백제에서는 무령왕릉 출토의 왕비 두침(頭枕)의 세화(細畵)와 능산리고분의 벽화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고구려에서는 40여 기의 벽화 고분이 남아 있어 회화의 수준과 변천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전기 벽화 고분 중 안악제3호분(安岳第三號墳, 일명 冬壽墓, 357년)·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 408년)·감신총(龕神塚)처럼 전실(前室)에 부부 초상화와 일상 생활도를 그리되 인물이 겹쳐서 공간의 깊이가 인식되고 필선(筆線)에 억양이 있는 중국화 양식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또한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 일명 수렵총)·쌍영총처럼 부부 초상화가 주실(主室)의 북벽으로 옮겨지고 대상물이 겹치지 않게 전개된다. 그리고 엄격한 정면관, 억양 없는 필선, 화면 공백의 강조 등 한국적 특색을 보여 주는 고구려화 또는 한국화 양식에 의한 그림을 볼 수 있다. 즉, 두 계통의 그림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기(5세기 후반 중심)가 되면 무용총에서 보듯이 부부의 초상화는 분해되어 남자가 중심 인물이 되는 일상 생활의 한 장면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림에는 보다 자유로운 힘과 동감(動感)이 강조되고 있다.

이 시기가 지나 6세기 초가 되면 강서삼묘(江西三墓)·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에서 보듯이 그림의 주제가 사신도(四神圖)로 바뀐다. 시대가 더 내려가면 진파리고분(眞坡里古墳)에서 보듯이 사신도의 배경으로 나는 구름, 인동당초(忍冬唐草), 사실적인 나무 등이 그려진다. 그리고 강렬한 필선과 화려한 색조로 화면이 생동한다.

7세기 초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사의 벽화를 그린 것은 이 후기에 해당된다. 그의 그림을 통해 보면 고구려의 회화는 중국화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를 통한 인도, 서역의 회화 기법까지도 반영한 세련된 수준과 양식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통일기의 그림은 일본 쇼소원(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신라제 악기(樂器)에 그려진 화조문(花鳥文), 또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돋음새김 비천상(飛天像)·덩굴무늬 등을 통해서 그 원숙한 필치를 알 수 있다.

1979년에 발견된 대방광불화엄경사경(大方廣佛華嚴經寫經, 754년 작, 호암미술관 소장)에 금은니(金銀泥)로 그려진 불화·초화(草怜)·누각(樓閣) 등은 비록 장식적인 선화이기는 하나 쇼소원 그림들과 똑같은 솜씨로서 당시의 당나라 그림과 조금도 손색이 없는 국제 양식인 것이 주목된다.

[공예]

(1) 토기

삼국시대의 토기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각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 한식 토기(漢式土器)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의 와질 토기(瓦質土器)가 있다. 백제 토기는 처음은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반영하다가 공주로 천도하면서 신라 토기식의 단단한 석기(庠器)로 변한다.

세발그릇〔三足器〕·납작밑항아리·병 그리고 병을 자른 것 같은 중국식 그릇받침〔器臺〕 등 지역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김해 토기에서 발전한 신라·가야 토기가 있다. 즉, 세 가지 토기 양식을 볼 수 있다.

신라 토기는 1,0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단단한 석기이다. 그 이름은 가야 토기를 포함하여 삼국시대 영남 지방 토기의 총칭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낙동강을 경계로 해서 동쪽의 신라 토기와 서쪽의 가야 토기 사이에는 기형(器形)·태토(胎土), 기타 세부에서 지역적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신라 토기의 대표적 그릇 종류는 굽그릇과 목항아리이다. 전기(4, 5세기)는 톱니무늬, 각종 줄무늬 등 기하학 무늬로 장식된다. 하지만 후기(6세기)가 되면 톱니무늬와 반원문(半圓文)이 합쳐진 것이 한 줄 정도 돌려진다. 그리고 굽그릇의 다리는 짧아지고 목항아리의 아가리는 테를 낀 것처럼 옆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7세기로 들어가면 통일 양식의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뚜껑 덮인 대접, 병 모양의 항아리 등 당나라 도자기의 영향이 반영된다. 그리고 무늬도 여러 가지 작은 꽃무늬를 도박(陶拍)으로 두드려서 나타내는 기법이 쓰이게 되고 처음으로 유약(釉藥)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유약은 중국의 한나라 토기에서 쓰인 따위의 연유(鉛釉)였다. 불에 녹는 온도가 600∼700℃밖에 안 되어 그 이상 온도로 구울 수 없기 때문에 토기의 질이 약한 것이 결점이었다. 그러므로 일부에서는 용해 온도가 높은 회유(灰釉)를 썼다. 따라서 경주에서는 원시 청자(原始靑磁) 같은 녹색 유약의 그릇 파편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당삼채(唐三彩)’라고 불리는 유약 토기가 하나 둘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삼채(녹색·갈색·남색 또는 백색)가 아니고 철분이 많이 섞인 연유를 산화염으로 구워서 생기는 갈색 유약에 검은 반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안압지(雁鴨池) 발굴 결과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일상 사용된 토기는 무늬 없는 토기이다. 무늬는 골호(骨壺) 등 특수 토기에만 시문(施文)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2) 금속 공예

고구려의 금속 공예는 남아 있는 유물은 적다. 그러나 금동투작문(金銅透作文)베개마개(진파리고분 출토)의 구름무늬를 배경으로 한 봉황과 용의 뛰어난 형태 및 구도는 거의 완벽한 미술 수준을 과시하고 있다.

백제는 무령왕릉 출토의 금제관식(金製冠飾)·귀걸이·은팔찌·동경(銅鏡) 그리고 동제탁잔(銅製托盞)에 새겨진 무늬 등에서 역시 최고 수준의 공예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왕비의 은팔찌(520년 작)에는 ‘다리(多利)’라는 작가의 이름을 새겨 백제 장인(匠人)들의 작가적 정신과 자부심, 사회적 위치 등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초화형(草花形) 장식의 금동관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나주 옹관묘 출토의 금동관으로 이어지며 다시 가야지방출토금관(호암미술관 소장)에까지 맥락이 닿고 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 지역에서는 사슴뿔과 나무를 장식으로 하는 시베리아 전통의 出자형 관이 유행하였다. 신라에서는 고구려 양식을 더 발전시켜 신라화한 경주식 귀걸이 그리고 여러 가지 장식을 단 과대(敬帶) 등 신라적 개성이 강한 금제·금동제·은제 장신구가 발달하였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불교 관계 공예에서는 범종이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종은 그 형태가 중국의 탁(鐸)과 종(鐘)을 합친 것 같은 특이한 것이다. 종 머리에는 속이 빈 용통(甬筒)과 용 모양의 고리〔瞿〕가 있다. 그리고 종의 몸에는 위쪽에 4개의 유곽(乳廓), 아래쪽에는 2개의 당좌(撞座)와 비천상이 각각 자리를 바꿔 가며 배치되어 한국 종이라고 할 수 있는 독립된 종 형식을 만들고 있다.

현존하는 신라 종으로는 상원사종(725년 작)·성덕대왕신종(일명 봉덕사종, 771년 작)·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 파편, 804년 작)·실상사종(828년 작)이 있다. 그리고 따로 일본에 범종(833·904년 작)이 남아 있다.

사리를 담아 석탑에 넣기 위한 사리구(舍利具)로 남아 있는 것으로 닫집을 가진 방형 불좌형(方形佛座形)의 정교한 감은사석탑사리구(682년 작)가 있다. 불국사삼층석탑(일명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구는 투작당초무늬의 방형전(方形殿) 형식, 송림사오층탑에서 나온 것은 유리그릇이 닫집 밑의 네모난 대좌 위에 안치된 것이었다.

<김원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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