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 한국사사전1 한국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1 (화) 12:5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3147      
[건축] 건축 기술의 발달 (민족)
건축(건축기술의 발달)

세부항목

건축
건축(우리 나라 건축의 특징)
건축(선사시대의 건축)
건축(삼국시대의 건축)
건축(통일신라시대의 건축)
건축(발해의 건축)
건축(고려시대의 건축)
건축(조선시대의 건축)
건축(근대 및 현대의 건축)
건축(건축기술의 발달)
건축(참고문헌)

      가형토기(家形土器). 고상주택의 형태를 보여준다. 높이 15.7cm. 호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 둘레 약 8,000m. 사적 제57호.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며, 온조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경주 임해전지.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신라 왕궁의 별궁터. 사적 제18호.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대목장. 대목장의 기능보유자 배희한의 포맞추는 모습. 김대벽 찍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단청장. 단청칠하는 모습.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김대벽 찍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철제의 연모를 부리게 되면서 집짓는 일은 놀라운 발전을 보게 된다. 돌을 사용하던 시절에는 주춧돌을 다듬을 수 없었으나 쇠를 사용하여 돌을 다듬는 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자, 나무를 다듬는 일은 훨씬 수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솜씨가 향상되었다.

고주몽(高朱蒙)이 동부여에서 살던 집은 주춧돌을 일곱 모로 다듬고 소나무기둥을 세운 그런 구조였다. 뒤에 그의 아들이 이 주춧돌 밑에서 신표(信標)를 얻어 임금으로 등극하게 되는데, 돌을 다듬어 일곱 모를 접을 수 있는 수준이면 치석(治石)하는 솜씨는 물론, 부정형의 돌을 일곱 모로 접을 수 있는 수리응용의 능력도 배양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고주몽이 졸본에서 등극한 것이 서기전 37년이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른다면, 고주몽의 동부여의 집은 그 이전 시기에 경영되었던 초기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건축조영의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어서 건국 4년 뒤인 서기전 34년 성곽과 함께 궁궐도 경영한다. 서기전 24년 어머니인 유화(柳花)를 위하여 신묘(神廟)를 세우고 서기전 17년에는 이궁(離宮)을 건립한다. 이러한 사실은 필요에 따라서 여러 유형의 건물을 조영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가락국 또한 건축이 발전되어 있었다. 서기 42년에 등극한 수로왕은 가궐(假闕)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집은 석자 높이의 토단 위에 지은 초가집으로 아직 기스락(처마끝)조차 가지런히 잘라내지 않은 질박한 것이었다.

그러나 등극한 이듬해에 좋은 터전을 골라 1, 500보의 나성과 함께 궁궐도 경영하였는데 그 모습이 장려하였다.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에서 가락국에 이르기까지의 넓은 지역에서 좋은 집들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준이 이 정도에 이른 것은 옛날부터의 경험과 배양된 능력 등 많은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 짓는 일은 석기시대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물고기를 잡고 들짐승을 사냥하고 조개를 잡아먹던 시절에는 아무리 풍요한 음식물이 있었다고 해도 저장이 불가능하였다.

철에 따라 달라지는 기후의 조건에서 안정된 공급이 절실한 것이기 때문에 저장의 가능성이 탐색되었다. 소박한 대로 흙을 빚어 그릇을 구워내게 되면서 저장술은 획기적인 발전을 보게 된다.

저장의 효과적인 보장을 위하여서는 집도 정착성향으로 옮겨간다. 즉, 동굴이나 비탈을 의지하고 짓던 질박한 집에서 의도된 집을 짓는 일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농사짓는 일에서 익숙해진 나무도끼나 돌도끼, 또는 적당한 연모로 땅을 파 구덩이를 만든 것이 움집의 시작이다.

돌도끼나 돌낫·돌끌 같은 연모들을 사용하여 적절한 재목들을 마련하고, 이를 적당히 다듬어 땅을 파고 박아 묻어서 벽체를 구성하였는데, 기둥 사이에 알맞은 나무를 건너질러 짐승가죽이나 풀로 외벽을 구성하였다.

이때 기둥과 가로지르는 나무를 끈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이음과 결색의 능력이 이로써 함양되기 시작하였다. 오두막집을 짓거나 귀틀집을 짓는 시기가 되면 다듬고 잇고 맞추는 기술에 걸치고 의지하는 방식까지 터득하게 된다. 벽체와 지붕의 분화가 이룩된 것이다.

인구가 늘고 집이 모여 마을을 이루게 됨에 따라 통치자가 생겨나고 살림집 이외의 건축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어야 할 건축의 수가 증가하면서 전문기능인들이 작업의 중심이 되었고, 이들의 기능은 기술로 발전하게 되는데 더 편리한 연모를 제작하는 창의성도 발휘되게 된다. 이럴 때 철제연모의 등장은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게 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철재는 돌에 비하여 연모를 만들어내기가 쉬웠으며, 필요에 따라 여러가지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다. 부러져도 재생산이 가능하였고, 무디어지면 날카롭게 가다듬을 수도 있었으며, 돌보다 강하여서 돌을 다듬을 수도 있었다.

이제까지 다듬어 만들 수 없었던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정을 만들어 망치로 두드려 가공하기 위해서는 알맞은 석재가 있어야 했다.

흔히 뜬돌들이 활용되었는데, 일터 부근에서 구할 수 없으면 멀리에서라도 알맞은 돌을 운반하여야 했다. 이 운반의 능력이 매우 중요한 것으로, 운반의 능력이 없으면 가공하였더라도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운반의 능력은 일찍부터 시작되어 고인돌과 같은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있는 기능도 배양되었다.

또한, 구조물 경영에 척도(尺度) 사용이 보편화되기에 이른다. 척도의 사용은 고대국가에서도 기본되는 일로서, 신정(神政)의 제도라 하더라도 척도는 타량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요긴하게 응용되었던 것이다.

척도의 사용은 수의 개념이 정리됨에 따라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수는 신정의 사제들에 의하여 정의되었다. 즉, 수가 표현하는 내용이 신의 섭리를 표출한다고 믿는 종족들에게는 수 그 자체가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그러한 수를 척도로 마름하여 위대한 구조물을 경영한다는 일 그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구조물을 조성하기 위하여는 줄을 사용해야 했는데, 뒷날의 먹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줄의 사용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건의 한 바탕이 되었다.

줄은 그만큼 상징되는 바가 컸고 효능 또한 대단하여서 이 줄을 자유자재로 다스려 집을 짓는 기능인을 대단한 능력자로 인정하였다.

건축기술의 발달과 조영에 대한 의미부여와 사회적인 후원이 상당한 경지에 도달되어 있을 즈음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가락국들이 건국하였는데, 건국하자 곧 장려한 궁실을 경영할 수 있었던 데는 이와 같은 성숙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조직에 의한 정치라기보다는 임금의 개인적인 능력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었으므로, 궁궐을 짓는 일은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사(神事)에 가까운 일이었다.

따라서, 궁실 경영에서도 일반주택과는 다른 형상의 건축을 요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역대에 이어져 최근세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궁실은 백성에게 군림할 수 있는 권위를 지녀야 하였다.

일반주택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구조에 금은보화를 들여 화려하고 장중하게 치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건축의 조영에는 많은 식견이 소용되었으므로 지식인들의 대거 참여가 종용되었다. 이웃나라와의 교통을 통하여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건축기능에 응용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건축물의 수준은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지식인들의 수리에 대한 지식은 건축물 구성에서 비례치의 계산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적절한 공간구성과 함께 격조있는 집의 규모설정에도 이바지하여서, 중심건물을 장대하게 하고 그에 버금가는 격조의 집을 그보다 적게 구조하는 등의 조화를 구상하게 되었다. 궁실건축에서의 이 능력은 대단히 요긴한 것이었다.

철제의 도구가 사용되기는 하였어도 아직도 주류는 도끼에 있었다. 돌도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둥구나무를 다듬어 알맞은 재목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도끼와 자귀의 사용이 보편적이었다.

도끼별이라고도 하는 도끼를 써서 재목의 표면을 다듬는 일은 아무리 정교하게 한다 해도 대패를 사용해서 마무리짓는 것만 못하였다. 대패가 아직 일반화되기 이전, 도끼와 자귀가 중요한 연모일 때에 그 거친 표면을 가리기 위하여 비단을 감아 쌌다. 무늬가 아름다운 비단으로 중요부재들을 포장하고 나면 집이 아주 돋보였다. 이처럼 비단을 감아 치장하던 관습에서 단청(丹靑)의 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비단으로 기둥을 감던 시절에는 아직 수장(繡帳)을 드리우는 기술은 발달하지 못하였다. 기둥은 살기둥인 채로 비단을 씌웠으므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담을 칠 수 없었다.

이 시절에는 기둥 사이의 주간(柱間)에 장막을 늘이거나 발을 드리우고 살았다. 장막과 발의 사용은 ≪삼국사기≫ 옥사조나 금제(禁制)의 항목, 또는 본기(本紀)의 단편적인 기록들에서 읽을 수 있다.

즉, 겨울에는 장막을, 여름에는 발을 드리우고 살았다는 기록이다. 이러한 점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도 볼 수 있다. 고분의 주인공이 생전에 살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 중에 주인공들이 앉아 있는 집의 기둥 간살이에 장막을 늘인 광경이 보인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수도인 서라벌에 안압지를 파고 주변에 임해전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삼국통일 직후에 경영한 대표적인 궁실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안압지를 발굴하였을 때 임해전 창건 당시에 사용했던 것이라고 생각되는 발을 걸던 쇠걸이들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기둥간격에 발을 늘이고 살았다는 증거가 출현한 셈이다.

기둥 사이에 붙박이 담이 없이 열고 사는 방식은 계속되어서 오늘날의 집에도 이어지고 있다. 살림집의 대청이나 툇마루를 탁 터놓고 사는 것이 그것인데, 전통양식이 얼마나 끈기있게 전래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붙박이담을 설치하자면 수장재가 결구되어야 하는데 이 일은 쉽지 않다.

요즈음도 시골집에서 헛간을 지을 때는 머리 쪽에 고샅이 있는 Y자형의 나무를 구덩이를 파고 박아 기둥으로 세운다. 몇 개의 기둥을 간격에 맞추어 세우고 고샅에 의지하여 도리를 건넨다. 이 도리를 주도리로 삼고 서까래를 걸어 지붕을 완성하게 되는데, 아직 기둥 사이의 벽은 등장하지 않았다.

우선 수장나무를 건너지르고 끝을 잡아매어 고정시키고 그에 의지하여 거적이나 이엉으로 엮어 의지간을 만든다. 여기에 붙박이벽을 만들기 위하여 기둥에 홈을 파고 다듬은 수장재를 끼워 맞추어야 하는데, 그 일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서 옛날에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보인다.

수장재를 결구시키려면 자와 먹통과 끌이 있어야 한다. 한쪽 홈은 깊게 파서 밀어넣었다가 되잡아 안정시키고, 쐐기를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고급기법에도 익숙해 있어야 하였다.

이 일 중 홈 파는 것과 쌍장부촉을 만들어 내는 일이 매우 어려웠는데, 톱이 있으면 한결 쉬워지게 된다. 톱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수장의 설치가 자유스럽게 되었다. 여기에 쓰이는 톱은 내릴톱으로 내릴톱이 사용되면서 연귀〔燕口 : 직교하는 두 재의 나무마구리가 보이지 않게 45°각도로 비스듬히 잘라내는 맞춤〕 등의 고급 이음과 짜맞춤법이 출현하게 되었다.

연귀가 아직 없던 시절에는 문짝 만드는 일 또한 매우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부석사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는 신방목에 문지도리를 파고 설치하는 널빤지 문이나 살대 박은 광창이 고작이었다.

담으로 기둥 간살을 막고 출입문을 내고 창을 다는 일은 톱이라는 연장이 발달하기 이전까지는 소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장막을 늘이고 발을 치고 살던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었던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거대한 통나무를 켜서 널빤지로 만들어내는 일은 인거나 기거와 같은 톱이 생겨난뒤에야 가능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도끼별(원목을 산판에서 도기로 제재한 것)로 다듬어야 하였는데, 도끼별로 판자를 만드는 것은 통나무 하나를 깎아 한장을 얻는 것이므로 매우 비경제적이었고 능률이 오르는 일도 아니었다. 톱이 도구로 채택되면서는 이 어려움이 해소되었다.

인거나 기거로 판자를 켜는 일은 따로 훈련된 인거쟁이나 기거쟁이에 의하여 전담되었는데, 두꺼운 판자와 가는 나무오리도 켜냈다. 이러한 일은 아주 숙련되지 않으면 어려운 것으로 이 기술이 축적됨으로써 비로소 문살이나 창살을 구성하는 살대가 생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기술은 중기 이후에서나 가능하게 된 것이므로 그 이전에는 문짝에 살대를 써서 무늬를 형성하거나 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와 같은 작업이 미진하던 시기의 집은 두꺼운 판자의 문짝이 볕이나 빛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밝지 못하였다. 따라서, 빛을 받기 위해 문짝의 널빤지를 투각(透刻)하게 되었으며, 무늬에 따라 투각해낸 문짝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 때의 문짝은 새겨낸 무늬가 견디어낼만한 통나무 널빤지가 가장 적합하였는데, 마땅한 통나무를 아무 때나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살대의 문짝이 등장하자마자 그것이 곧 일반화되었다.

창의 살대로 무늬를 구성하는 방식은 봉창에서처럼 빗살로 성글게 구성하는 것이었다. 봉창은 대나무 같은 가는 오릿대로 빗살이 되도록 살대를 만들고 거기에 종이를 바르는 것이다.

구멍만 뻥 뚫은 창으로는 느닷없이 짐승이나 파충류가 침범하는 수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살대를 빗살로 꽂아 막게 되었다. 통풍과 채광이 겸비된 것이었으나 겨울에는 추운 바람을 막기 위하여 창호지를 발랐다.

창과 문짝에 살대를 만들기 위하여는 문짝의 울거미가 든든하여야 했다. 반듯하게 짜서 만들되 뒤틀리거나 어그러지면 안 되었으므로 짜맞추는 기법이 응용되어야 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탕이라는 대패의 이용은 큰 성과를 얻었다.

문 울거미는 굵기에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 굵기의 나무를 수직되게 다듬어 방정하게 해야 했다. 따라서, 대패로 밀어내야 하는데 밀대패에는 수직의 기준이 부착되어 있지 않다.

변탕은 기준이 되는 기능이 부여되어 있어서 먼저 이로써 나무를 수직되게 바로잡고, 그에 의거하여 대패질을 하면 나무는 비로소 사면이 방정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이 나무를 길고 짧게 잘라 장방형의 울거미를 만드는데, 짠 그대로만 그냥 두어서는 밋밋하여 보기에 흉하므로, 개탕대패로 개탕을 치고 쌍사대패로 쌍사를 쳐서 아름답게 꾸몄던 것이다. 이 방식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문짝이나 창을 달기 위해서는 배목과 문고리 등의 쇠장석이 필요했으므로, 거멀쇠 같은 보강용의 쇠장석도 사용되었다. 쇠를 다루는 능력이 발달함에 따라 쇠장석도 크게 진척되었고, 아울러 쇠못을 쳐서 만드는 기술도 늘어 장식쇠못까지 생산되었다. 큰집을 짓는 일터에 대장간이 차려지는 일이 보편화되었으며, 쇠장석의 발전은 결구와 이음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건축기술의 발달은 목조건물의 조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벽돌을 만들거나 블럭(block)을 만들어 쌓는 능력도 대단하였는데, 그 제작은 흙을 빚어 기와를 구워 만드는 능력에서 배양된 것이다.

백제시대 초기에는 날디새를 만들어 볕에 말려 쓰기도 하였던 모양이나, 차차 가마에 넣고 높은 화도로 구워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궁실이 더욱 장려해지고 불교가 도입되면서 건축물의 양과 질이 전에 없이 증가됨에 따라 기와지붕의 치장도 점차로 증가하게 되었다.

치미·취두 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장식품들이 채택되었고, 기왓골 끝에는 암막새·수막새가 설치되었는데 이 일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것이었다. 전문인들 중에서 최고의 능력자를 와박사(瓦博士)로 삼았고, 이에 따라 전돌의 제작도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석총(石塚) 등 삼국시대 초기에 건립된 건축물에서 수습된 명문(銘文) 있는 전돌들이 휘어지고 일그러진 것인 데 비하여, 삼국시대의 중기 이후가 되면 무늬가 아름다운 놀라운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웅진시대에 축조된 백제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연꽃무늬의 반전(半塼)들이 제작되었다.

부여 도읍 시기에는 절을 짓는데 산경문(山景文)·귀문(鬼文)·연화무늬 등 여섯가지 색색의 무늬를 조각한 방전(方塼)을 만들어 썼으며, 또 블럭을 만들어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쌓아 벽체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쌓는 기술은 석탑 조영에 채택되어 정림사지오층석탑과 같은 형상으로 정리되었다.

신라통일 이후 전돌 제작기술은 한층 더 난숙해져서 사천왕사나 안압지 주변의 임해전터에서 발굴된 것과 같은 완벽한 제품들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고구려·백제·신라의 뛰어난 기술인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통일을 계기로 이룩된 수많은 건축물의 구조에서 그 성공적인 취합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토함산의 석굴암과 불국사이다.

난숙해진 건축기술은 이웃나라에 전해져 그 나라의 건축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고려에도 계승되나 몽고의 침입 등으로 경제적인 고난을 겪으면서 건축기술이 침체되었다.

그러나 견실한 법식과 기법이 조선시대로 계승되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그 맥이 꺾이고 말았다. 즉, 임진왜란 7년 동안 경제적인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뒤이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국면으로까지 쇠락하여 버렸다.

전란 후에 복구해야 할 건축물이 허다하였지만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렀으며, 건축계에는 치명적이 되어서 축적된 지식과 법식과 기능은 탕진되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상태에서 크게 회복하지 못한 채로 경복궁의 경영이라는 대사업에 봉착한다.

대규모의 국력을 기울인 건축활동이기는 하였지만, 건축기술의 측면에서는 저조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준비 없는 사업이 되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의 건축술은 모두가 수공업에 바탕을 두고 이룩되었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고 기계문명이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수공업의 건축기술은 퇴보를 거듭하게 되었다.

<신영훈>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건축] 건축 참고문헌 (민족)
아래글 [근대/현대] 근대 현대의 건축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922 문화사 [건축] 주심포 (민족) 이창호 2003-01-21 6440
921 문화사 [조선] 조선 시대의 건축 (두산) 이창호 2003-01-21 3273
920 문화사 [건축] 건축 참고문헌 (민족) 이창호 2003-01-21 1854
919 문화사 [건축] 건축 기술의 발달 (민족) 이창호 2003-01-21 3147
918 문화사 [근대/현대] 근대 현대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9610
917 문화사 [조선] 조선 시대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11552
916 문화사 [고려] 고려 시대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8499
915 문화사 [남북국] 발해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2661
914 문화사 [남북국] 통일 신라 시대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3981
913 문화사 [삼국] 삼국 시대의 건축 (민족) 이창호 2003-01-21 4958
1,,,31323334353637383940,,,13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