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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7 (화)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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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73      
[근대] 근대화-역사적 측면 (민족)
근대화(역사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세부항목

근대화
근대화(역사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문화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사회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참고문헌)

(1) 기점

우리 나라에서의 기점과 근대사의 기점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먼저 한국근대사의 기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문제는 이론이 구구하여 아직 정설이 없는 실정이다.

몇 가지 주요한 설을 추려보면 18세기인 영조·정조 시기, 1860년 동학의 발생, 1862년 임술민란, 1864년 대원군 집정과 고종시대의 개막, 1866년 병인양요, 1876년 병자개항,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 등으로, 심한 경우에는 약 100년의 차이까지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사란 봉건사회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에 상응하는 시대의 역사이므로, 한국의 근대사는 우리 나라에서의 봉건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생성과정 속에서 그 기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잠정적으로 1860년 동학의 창시로부터 1876년 개항까지의 기간에 주목하여, 거기서 민족적ㆍ민중적 차원의 근대지향적 요인과 외세 침공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연결된 본질적 사회변동을 묶어서 한국근대사의 기점으로 보고자 한다. 이 기간은 격동의 연속기로서 거시적으로 볼 때 5백년 동안 묶였던 조선조의 쇄국이 단번에 무너진 시기였다.

1876년의 개항이 비록 구미 자본주의 국가와의 직접적인 수교 통상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매개로 자본주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를 수용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미 구미 열강의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이미 자본축적의 단계에 있던 일본이 구미 열강의 지원을 받아 개항을 강요해 온 결과였다.

일부 경제사가들은 병자개항을 우리 나라의 근대화 내지는 자본주의 성립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사실 병자개항이 구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직접적인 수교 통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곧 한국근대화의 기점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는 한국근대화의 성격을 자본주의 성립이라는 단순한 측면에서만 파악하려는 입장으로서, 개항이 지니는 보편적이며 복합적인 성격을 다 포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견해는 또한 한국의 개항이 이미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종속되어 본원적 자본축적의 단계에 있던 일본이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에 있던 청국에 의해 자본주의세계 체제의 가장 밑바닥을 맴도는 한 '주변'으로 편입된 데 불과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 견해는 불평등조약으로 개항 후 대등한 대외정책의 전개와 자율적 근대화를 제약한 외적 저해요인을 등한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라 할 때는 '근대적인 자기의식화' 곧 '근대적인 것을 지향해서 발전하려는 주체적인 의식의 작용'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1880년대의 근대화 노력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때의 근대화 의지는 정부 주도의 개량적 형태의 초기 근대화정책과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통해서 변법적으로 시도한 개혁으로서, 어느 것이나 하향적인 성격인데, 이는 1894년 농민층이 주체가 된 변혁의지와 대조된다.

어떻든 한국근대화의 기점은 1880년대 초에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전개된 '초기 근대화정책'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 역사적 전개

개항 후 새로 조성된 국내외의 사정과 관련하여 한국 근대에 있어서 봉건적 위기와 민족적 위기에 대응하여 나타난 정치세력은 대체로 네 유형으로 가를 수 있다.

① 집권파의 '동도서기' 및 '구본신참(舊本新參)'을 포괄하는 '구주신보(舊主新輔)'의 이론, 곧 재래의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근대적 제도를 참작, 원용한다는 이론 밑에 전개된 정부 주도의, 위로부터의 개량적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② 구미의 문화와 제도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려는 근대주의에 입각한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③ 농민과 소시민 등 사회 기층의, 아래로부터의 근대화 노선의 세력,
④ 근대화와 직접 관계되지 않고, 오히려 '반근대'를 지향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한국근대화의 역사적 전개에 따라 근대화 쪽으로 변용되어간 세력으로서, 척사위정(斥邪衛正)을 표방한 유생과 농민들의 의병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상 네 가지 유형의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로, 집권세력이 동도서기 또는 구본신참의 논리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한 것은 1880년대 초반의 초기 근대화정책과, 1900년 전후인 광무연간(光武年間)의 광무개혁이다.

전자는 서양을 배척하기 위해 일본만을 대상으로 개항한다는 척양적 대일개항(斥洋的對日開港)이라는 명분론 속에서 개항으로 인한 후유증과 새로운 국내외의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장 개명 관료들이 '자강(自强)'을 표방하면서 왕조체제를 개편, 강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위로부터의 개량적 구미문화 수용의 시발이 되었다.

그 정책의 실천방향은 관제면(官制面)에서는 통상을 비롯한 대외관계 전반을 관장하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설치(1881.1.)로 나타났다.

군사면에서는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개편하는 한편,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훈련시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밖에 청국과 일본에 유학생과 시찰단을 파견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초기 근대화정책은 그 담당 주체의 개량적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한계가 있어 결국 그 정책으로 생존권의 위협을 받은 구식 군인과 도시 변두리 빈민들의 폭발적 항거인 임오군란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전후해서 문화 및 교육부문에서는 부분적이나마 근대화정책이 추진되기도 했다. 우선 1883년 8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출판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이 창설되고, 그 해 10월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창간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1885년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했고, 1886년에는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했다. 1900년 전후의 광무개혁은 구본신참 또는 구주신보의 사상적 기반 위에 부분적으로 구미의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려고 하였다. 특히 식산흥업정책을 펴면서 경제적ㆍ기술적 측면에서의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이때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것의 하나가 양전(量田)ㆍ지계사업(地契事業)이었다. 그것은 제도의 개편 및 증설에 따른 재정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상공업진흥정책으로 방직 및 제조공장의 설립과 기술연수를 위한 유학생의 해외파견과 기술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특히, 실업교육이 강조되어 1899년에 상공학교, 1901년에 광무학교(鑛務學校) 등 공립실업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무렵에 관리들의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고, 1901년 금본위제(金本位制)가 채택되었으며, 1903년 중앙은행조례가 반포되었다. 그러나 그 추진 주체는 개명 관료였고, 이들의 계급적 성격은 지주층이었다.

따라서 주관적으로는 갑신정변 및 갑오경장 등에 나타난 졸속과 외세 의존적인 자세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신구사상의 절충을 통해 종래의 개혁방향을 조정해서 근대화를 제도적으로 마무리짓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동아시아에 제국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시기에 도시와 농촌의 민권운동을 탄압하고 근대적 외형을 갖추는 일련의 조처와 황실권력의 안보 및 자강, 그리고 황실 재정의 충실화를 위한 충군위국(忠君爲國)의 국가주의가 시종 답습되었다.

둘째로, 개화파의 반봉건 근대화 변혁운동의 허상과 실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개화사상의 원류는 실학사상, 특히 18세기 후반의 북학사상(北學思想)의 맥을 이은 박규수(朴珪壽), 역관(譯官) 출신의 오경석(吳慶錫), 한의사 출신의 유대치(劉大致) 등 봉건권력 내부의 개명 관료와 선각적인 중인 출신 지식인들에 의하여 개항 직전인 1874년 무렵에 형성되었고, 개화파는 개항 직후인 1879년 무렵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개화파의 사상과 행동의 최종 지표는 부국강병과 문명개화에 있었다. 그 변혁운동은 갑신정변ㆍ갑오경장ㆍ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애국적 문화계몽운동 등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884년 갑신정변은 객관적으로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영(英)ㆍ로(露)간의 세계적 규모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대응해서, 청ㆍ일간의 대립을 틈타 일본의 무력을 끌어들여서 위로부터의 국정변혁을 통한 자립과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획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발전의 주체인 국민 대중과 유리된 채 청국의 무력간섭을 받아서 이른바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개화파 정권의 국정개혁안인 갑신정강(甲申政綱)에서는, 대외적인 민족문제로는 친청사대외교(親淸事大外交)를 탈피하고 민족의 자립과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였고,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의 과제로서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권을 확립하며,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地租法)을 개혁하고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아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며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하였다. 특히 호조가 국가재정을 통일적으로 관할하여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개편, 강화하고자 하는 한편, 경찰제 및 군제의 개혁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갑신정강에서도 사회 기층인 농민들의 절박한 과제였던 토지소유 및 신분문제 등 봉건적 체제의 폐지 등은 제기되지 않았다. 그것은 그 개혁의 담당 주체인 개화당이 양반 지주계층이라는 신분적 제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편, 갑오경장은 일본군의 점령하에서 시행된 것이지만, 그 개혁사업은 일본측의 내정개혁안을 따른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 이래의 개화파가 제기한 근대화 구상이 지도이념이 된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사회 안에서 성숙된 반봉건적인 근대화개혁의 필연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민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 개혁사업은 일본의 침략과 야합하여 추진되었으므로, 반일감정과 함께 심한 반발에 부닥치기도 하였다. 갑오경장의 각종 개혁 중 정치ㆍ경제ㆍ사회의 각 측면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① 청국과의 전근대적인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을 사용한 점. ② 정치기구를 개혁하고 왕실과 정부를 분리하여 궁내부(宮內府)와 의정부(뒤에 내각으로 개편)를 둔 점(이때 의정부는 총리대신을 수반으로 하여 내무·외무·탁지 등 8개 아문을 두고, 각 아문에는 대신 밑에 차관에 해당하는 협판과 국장에 해당하는 참의 등의 관직을 두었다). ③ 종래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른 새로운 관리임용법을 시행한 점. ④ 사법권을 행정부에서 독립시켜 종래의 재판제도와 죄인의 연좌법(連坐法)을 철폐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다음 경제면에서는, ① 재정관리체제를 일원화하여 탁지아문(뒤의 탁지부)에서 국가재정의 사무를 일괄 관장하게 한 일. ② 신식화폐 발행장정을 제정하고 은본위 화폐제도를 채용한 점. ③ 조세의 전면적 금납화 단행 및 종래 민폐의 근원이었던 환곡제도의 폐지, 그리고 도량형의 통일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 가장 두드러진 개혁은 노비제도를 철폐한 점이었다. 이에 따라 인신매매 등 봉건적인 신분제도가 최종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제도 개편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나마 국가권력의 근대적 개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화운동은 1890년대 후반의 독립협회운동에 이르러 그 양상이 달라졌다. 이전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경장 등 위로부터의 개화운동이라는 제약성을 극복하고 민중의 자각에 의한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바뀐 것이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와 더불어 국민발의의 성격을 띤 〈국정변혁에 관한 6개조의 인민헌의안(人民獻議案)〉을 채택하고 정부에 그 실시를 건의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각종 이권의 양여(讓與)와 차관(借款)·차병(借兵) 및 외국과의 조약 체결에 관한 사항은 각 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재가한 것이 아니면 시행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밖에 정부의 예산·결산 공개, 중대 범죄의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것 등으로서, 자주민권사상의 일대 발전을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그 운동방법을 언론과 집회에 한정한 탓으로 수구파 권력의 어용집단인 보부상들의 황국협회(皇國協會)의 폭력을 서울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밖에 이 운동의 사회적ㆍ경제적인 기반의 미숙, 토지개혁 구상의 결여, 반제국주의의식과 평등권의식의 불철저 등의 한계성을 드러냈다.

셋째로, 농촌과 도시의 사회 기층에서 발생한 아래로부터의 변혁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중의 반외세·반봉건적인 구체적인 변혁운동은 1894년과 1895년의 동학농민혁명과 광무 연간의 영학당운동(英學黨運動)·활빈당운동(活貧黨運動) 등 무장 농민집단의 운동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를 무대로 한 만민공동회의 소시민운동 및 황국중앙총상회(皇國中央總商會)의 상권수호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먼저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제기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에서는 노비문서의 소각, 천인의 대우 개선, 과부의 재혼 자유 등 봉건적 신분체제의 타파를 요구하였고, 토지의 평균분작(平均分作)으로 봉건적 토지소유관계인 지주ㆍ전호제(地主甸戶制)의 타파와 경제적인 균등을 주장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농민군의 지도자들이 비록 근대화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내발적인 힘에 의한 근대적 변혁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평가할만한 사실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민족 내부의 모순이 전면으로 등장한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농촌과 도시지역의 자주적ㆍ상향적 근대화운동은 1890년대 후반부터 집단적인 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농촌지역에서는 영학당(일명 서학당)과 활빈당·남학당 등이 중부 및 삼남지방을 무대로 활약했고, 특히 활빈당은 독자적인 구국안민책, 즉 국정과 민원(民寃)에 관한 13개 조목의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직접 생산 농민의 처지에서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한 저항을 전개하면서 농민의 토지소유 발전을 위해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890년대 후반에 서울의 반제변혁운동(反帝變革運動)을 담당한 만민공동회 및 황국중앙총상회의 추진 주체인 도시 소시민의 계급적 성격은 소상인과 소수공업자(小手工業者)들로서, 그들은 봉건적 수탈과 외국 상인들의 국내상권침해에 대한 대항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당시 우리 나라를 둘러싼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기본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넷째로, 반근대를 표방하면서도 그 성격을 점차 바꾸어간 척사파(斥邪派)의 반침략적 유형이 있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는 반침략적 성격을 띠는 것이지만 민족적 차원에서보다는 충군애국(忠君愛國)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이 척사파의 흐름은 재야 유생(儒生)들의 극단적 애국사상과 같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면서 굴종적인 대일(對日) 개항과 수교 그 자체를 반대하는 조약반대 상소를 올리고 1880년초에 정부 주도의 초기 근대화정책을 반대하는 신사척사위정운동(辛巳斥邪衛正運動)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그 제약성을 극복하고 재야 유생들은 농민들과 결합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더욱이 1905년부터 1914년에 걸쳐 전개된 후기 의병투쟁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저항해서 점차 그 인적 구성의 변모와 함께 독립전쟁의 양상을 띠기 시작하면서 반근대화 경향이 흐려졌으며, 이 시기 개화파들의 애국적 문화계몽운동과도 부분적으로 연계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 한국근대화의 특징과 그 위상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근대국가의 형성과 근대화의 방향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는 서로 다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먼저 한ㆍ중ㆍ일 동양 3국에서 각기 근대화의 계기가 된 개항의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 후 1842년에 체결한 남경조약(南京條約)에 의해 개항되고, 일본은 중국보다 12년 늦은 1854년에 미국과의 미일화친조약 및 1858년의 미일수호통상조약[安政條約]에 따라 개항된 데 비하여, 한국은 일본보다도 22년이나 늦은 1876년에, 그나마 일본에 의해서 개항이 강요되었다.

이렇게 우리의 개항이 늦어지고 일본이 주요 역할을 맡게 된 요인은 우리의 사회적·경제적 구조보다도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이해판단에 따른 사정 때문이었다.

이미 구미 자본주의 열강에 종속된 일본이 사실상 구미 열강의 지원 아래 불평등조약에 의한 개항을 강요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또한 구미 열강에 종속된 청국과의 전근대적 종속관계로 인하여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자본주의 세계시장의 가장 밑바닥에 놓인 셈이 되었다.

청국과 일본의 경우, 개항 직후에 직면한 외세압력은 산업자본주의 단계의 구미 자본주의의 외압이었고, 그것이 청국이나 일본의 변혁 주체를 파괴하지는 않았으므로 양무파정권(洋務派政權) 및 메이지정권(明治政權)에 영도되어 일단은 근대화의 전환점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이 당면한 직접적 외압은 구미 열강 자체가 아니라 그들에게 종속되어 본원적 자본축적 단계에 놓여 있는 일본과 청국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은 중첩된 외압에 의해 저개발의 위성화(衛星化)가 강요된 조건 아래 자율적인 근대화, 즉 후발 자본주의국으로의 발전의 길을 추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청국이나 일본과 같이 변혁의 내부 조건을 갖고 있던 조선은 개항 후 안팎의 어려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하향적 초기근대화정책과 급진개화파의 주도로 변혁적 근대화를 꾀한 갑신정변, 그리고 상향적 변혁과 근대화를 꾀한 동학농민혁명이 추진되었지만, 그 변혁의 결정적 시점에서 청ㆍ일 양국의 정치ㆍ군사적 압력으로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청국의 조선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 특히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에 따른 전근대적인 종속관계가 강요된 이른바 '양절체제(兩截體制)' 아래서 조선과 구미 여러 나라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따라서 조선이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국으로부터의 정치적·문화적 독립이 요구되었다.

위로부터의 변혁과 근대화를 꾀한 갑신정변은 객관적으로는 조선에서의 한로밀약설(韓露密約說) 및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 등 영·로의 대립이라는 제국주의적 국제환경에 대응하면서 청·일간의 대립과 모순을 이용하여 조·청간의 양절체제를 타파하고 명실상부한 독립을 쟁취해야만 했다.

이때 개화파가 임오군란 뒤 종주권의 재편 강화, 그리고 상병정책(商兵政策)을 획책하던 청국의 세력과 이와 결부된 수구파 세력을 일소하고자 무력 정변을 일으켜, 위로부터의 국정변혁을 통해서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변혁 주체는 예상되는 청국군의 무력간섭에 대비하기 위해 서울에 주류하고 있는 150명의 일본군을 차병(借兵)하는 등, 일본 세력과 결탁된 것과 관련하여 반일적인 국내 대중과 유리된 채 청국군의 무력개입으로 마침내 '3일천하'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지역에서 아래로부터의 근대화와 반제(反帝)ㆍ반봉건 투쟁의 원점을 이룬 동학농민혁명도 봉건적 모순의 타파와 상향적 근대화변혁을 꾀하고 광범위한 민중의 힘을 결집시켜 정부군을 압도했으나 결국 일본군에 압도, 좌절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치변혁 및 근대화가 하향 및 상향으로 엇갈리는 시점에서 청국과 일본의 군사적 외압이 우리의 자주적인 근대화 변혁운동의 방향을 교란하여 마침내 국민적 통합을 저해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외세에 의한 타율적 개혁론과 자주적 개혁론 또는 양면평가론 등이 서로 엇갈린 갑오경장은 그 개혁 주체인 유길준(兪吉濬) 등 이른바 개량적 개화파 관료들이, 1894년 7월 23일의 일본군의 왕궁 점거로 청국과 결합한 수구파가 정권에서 물러남에 따라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김홍집(金弘集) 등이 이같은 비상사태를 역이용해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방면에 걸친 근대화 개혁을 일본군의 점령하에서 실시하였다.

그들의 개혁사업은 대한침략과 대청(對淸)전쟁의 구실로 이용하고자 한 일본측의 내정개혁안을 지표로 삼은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 이래의 개화파의 국정개혁안을 지표로 삼았고, 특히 동학농민혁명 때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혁 주체가 개혁의 추진과정에서 농민군을 탄압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한 방어장치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민중들의 눈에는 개혁사업이 일본의 한국침략과 표리(表裏)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수구세력은 물론 광범한 민중들의 반발에 직면한 것이다.

갑오경장의 근대적 제도개혁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근대적인 국가권력의 개편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누려야 할 민중들의 것이 되지 못하였고, 봉건적인 제약은 많이 시정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외세의 국내침투에 이용되었다.

한편, 1890년대 후반의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의 우리 나라 개혁운동의 주류를 정부 즉 광무정권으로 보느냐, 아니면 독립협회로 보느냐 하는 이른바 '광무개혁ㆍ독립협회 논쟁'이 제기된 바도 있으나 아직도 정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후자는 자주민권사상에 의한 국정개혁을 통해서 상향적 근대화를 지향한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을 개혁의 주류로 평가하는 데 반해, 전자인 광무개혁은 동도서기론사상을 내재적으로 계승, 답습한 구본신참 내지 구주신보의 사상적 기반 위에 집권세력에 의한 하향적인 개량적 근대화를 추진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은 무엇보다도 갑신정변 및 갑오경장 등의 제약성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에 제국주의가 형성되는 시기에 있어서 민중의 힘을 모아 대중적인 정치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개화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말해주는 획기적 현상으로 평가되며, 그 뒤의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 운동방법이 언론과 대중집회의 형태로 주로 서울에 한정된 점, 토지개혁 구상의 결여, 반제의식과 평등권의식의 불철저 등 그 역사적 한계성이 지적된다. 또 만민공동회 운동이 대중운동이라는 점에서 독립협회운동보다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1898년 말에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자주민권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한 이듬해인 1899년(광무 3)에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제 大韓國制〉를 제정, 반포한 점, 양전ㆍ지계사업을 추진한 점, 그리고 일련의 상공업진흥정책과 함께 금본위 화폐제도 및 중앙은행조례 등 자주적인 근대화를 시도한 것은 특기할만한 성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담당 주체인 당시 실권파들이 주관적으로는 위로부터의 개량적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통해서 식민지화를 저지하고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도리어 각종 이권을 열강에 넘겨줌으로써, 열강의 관심을 끌어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략으로 국권을 지켜보려던 일련의 자주적 근대화시책도 마침내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한 사실상의 국권상실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을사조약 이후 통감부를 통해서, 도시와 농촌지역에서의 자주적 근대화를 꾀한 반제변혁 주체 및 그 세력을 강권으로 탄압하면서 식민지 반봉건체제로 우리 사회를 개편해 나갔다.

<김경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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