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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7 (화)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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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84      
[근대] 근대화-사회적 측면 (민족)
근대화(사회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세부항목

근대화
근대화(역사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문화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사회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참고문헌)

(1) 개념

우리 나라에서 근대화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1960년대의 일이다.

그 이전에도 개화ㆍ근대화 또는 현대화라는 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사회의 실천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또 학계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 정부가 '조국근대화'를 추진하면서였다.

조국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공업화를 중심으로 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그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우리 나라에서 사용된 근대화의 개념이 주로 공업화와 경제발전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그 이전에 시작된 문화적 변동, 도시화, 서구식 교육, 사회적 분화 등이 모두 근대화의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고, 이러한 것이 1960년대 이후 의도적으로 추진된 근대화작업과 직결되어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근대화 개념이나 이론이 반드시 구미의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으나,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의 추진은 특히 미국에서 발달한 기능주의적 근대화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구미식 근대화이론에 의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경제ㆍ사회발전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서구적 근대화의 현상을 보여주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사회문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말부터 구미적 근대화이론에 대한 비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갈등이론과 종속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서구적 근대화이론이라고는 하지만 이에 대한 공통된 개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18세기 중엽에 일어났던 영국의 산업혁명이나 프랑스의 시민혁명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업화 자본주의와 시민사회, 민주주의의 사회적 실체와 가치에서 근대성을 찾아보고 있다.

이러한 변혁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제반 영역에서 많은 새로운 변화가 초래되었지만 서구적 근대화의 본질은 또한 공업화에 의한 자본주의와 시민적 민주주의의 가치에 기초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구미의 학자들은 근대화의 개념을 탈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근대화의 개념을 경제학에서는 공업화ㆍ국민총생산ㆍ1인당 국민소득 등의 측면에서 파악하려 하고, 정치학에서는 구조분화ㆍ체계능력 등의 측면에서, 또 사회학에서는 평등화ㆍ합리성ㆍ세속화ㆍ역할분화ㆍ교육ㆍ미디어 참여 등의 면에서 파악하려는 것은 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화의 개념은 서구적 가치에서 벗어나 사회분석의 보편적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화의 개념을 서구화의 개념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앞서 지적한 가치와 현상을 제고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근대화의 개념은 기능론자들이 주장하는 분화ㆍ성장의 개념 이외에도 진보ㆍ평등ㆍ연대의 개념이 함유된 자주적 발전의 개념으로 파악하여야 될 것이다.

(2) 사회구조

사회구조의 측면에서 근대화 과정을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기능론적 관점에서 보면 역할구조, 즉 직업이나 조직 등의 변화를 통하여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갈등론적 관점에서 보면 불평등구조, 즉 계급이나 계층 등의 변화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사회적 관점의 차이에 따라 근대화에 대한 이해와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이것이 중첩적으로 일어났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역할구조의 측면에서 본다면, 지난 1세기 동안에 엄청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지난 70년간의 경험을 보아도 직업 및 고용구조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농업이 지배적인 산업 또는 직업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오히려 상공업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즉, 1910년에 농업종사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84.1%이던 것이 1942년에는 66.6%, 그리고 1985년에는 24.9%로 급속히 감소되고, 반면에 상공업 인구가 1910년에 7.0%이던 것이 1942년에 16.0%, 그리고 1985년에는 47.9%로 급속히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가족 전체의 역할구조와 가치관도 변화되었다. 우선 상공업은 직장과 거주를 분리시키고 노동의 개별화를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가족노동, 마을사람들의 협동노동보다도 개별노동과 분업노동을 촉진시켰다.

특히,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와 수출에 의한 경제개발계획과 1970년대 이후의 중공업화는 노동과 기술의 분화를 더욱 촉진시켰으며, 따라서 역할의 전문화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역할의 전문화는 고용관계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942년에 자영업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의 77.8%이었는데 1955년에 40.1%로 감소되었고 1980년에는 31.4%로 급속히 감소되었으며, 반면에 피용자는 1955년의 12.1%가 1980년에는 43.8%로 급속히 증가되었다.

사실 1942년의 자영업자는 농업부분에 있어서 소작농의 지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경우가 절반이 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자영업자와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른 것이다.

이와 같이 자영업자가 감소하고 피용자가 증가된다는 것은 경영과 소유의 분리, 그리고 관리와 노동의 분리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뜻한다. 또 가사종사자가 1955년의 47.8%에서 1980년의 21.1%로 감소되었다는 것은 여성이 가사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뜻하고, 따라서 여성의 노동 및 사회의 참여가 활발히 전개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이러한 역할분화는 그간의 급속한 인구증가, 교육기회의 확대 그리고 정부의 경제개발정책 등의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다. 물론 도시화가 공업화에 의하여 모두 수용된 것은 아니다.

지난 20여년간 해마다 도시인구의 약 1%가 증가되고 근로자의 약 1%가 증가되었으며 자영업자가 약 1%씩 감소되어 그 비율상 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기에 농촌 자영업자의 절대수가 다른 직업인구에 비하여 훨씬 많았기 때문에 이촌농민이 모두 도시근로자화된 것은 아니며, 그 중의 약 3할이 도시의 영세민촌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형성된 영세민촌은 저렴한 노동력의 공급원이 되어왔으며 도시의 빈곤층을 형성하였고, 농촌에서도 저곡가정책에 의하여 대부분의 농민이 사회적 하층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 근대화과정은 역할분화의 측면에서는 매우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분화된 역할의 차이에 따른 보상의 차이가 심화되고 따라서 심한 불평등구조가 존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적 계급분화가 심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불평등구조는 직업과 지역간에도 그 심한 차이가 드러났다. 즉, 생산과정에 있어서 소유와 비소유, 경영(관리직)과 노동(생산직)의 차이에 따라 보상의 차이가 심했다. 이러한 차이는 농업이 지배적인 시대에 있어서 지주와 소작인, 주인과 머슴과의 관계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다분히 덜 적대적이고 온정적인 주종관계의 성격이 강하였다.

역할분화가 심화되고 소유와 경영, 경영과 노동이 분화된 상태에서 수입원과 수입액의 차이가 심하였기 때문에 산업화된 사회의 노사간 계급관계는 더욱 분명해진다. 즉, 소유권자인 자본가와 경영권자인 관리자 및 생산자인 노동자간에는 소득ㆍ권력ㆍ위세의 차이가 심화될수록 적대적인 대립관계, 즉 계급관계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대립적인 불평등구조는 심화되었지만 그것에 비하여 계급갈등현상이 심하게 나타나지 않았던 것은 경제성장과 고용주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삼권이 유보되고 노동행정이 치안행정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특히 피용자의 계급조직, 즉 노동조합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반면 사용자의 계급조직은 활발하였다.

근로자의 계급조직은 사업장 단위별 조직이 가능하지만 산업별 조직이 불가능하였으며,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회비에 의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본가ㆍ기업가의 계급조직으로는 전국경제인연합회ㆍ한국경영자총연합회ㆍ한국무역협회ㆍ중소기업중앙회 등의 단체들이 나타나 노동자의 계급조직과는 대조적으로 뚜렷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대신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종교단체가 무수히 나타나 자본주의사회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하여 기능하고 있다.

(3) 가치관

지난 1세기 동안 유교문화권에서 일본문화와 서구(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한국인의 가치관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분명한 것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특히 서구 문화의 유입에 따른 충격으로 인해 많이 변화되었고, 따라서 세대간에 가치관의 차이가 심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전통적 가치관이 무엇이냐에 대한 공통된 견해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가족주의ㆍ공동체 의식ㆍ권위주의 등을 지적하고 있다.

가족주의가 사회의 기본원리로 오래도록 존재하게 된 것은 가족이 가족성원의 모든 생활책임을 담당하였고, 조상숭배와 가족적 연대를 위한 제사, 족보 간행, 공동재산의 확보 등에 의한 가족 및 친족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혈연적 사회구조는 지연성에 기초하여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대까지 전국 자연촌락의 약 절반 이상이 동성촌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화ㆍ공업화의 결과로 이러한 동성집단의 기능은 약화 또는 해체되었다. 다시 말하면 혈연성에 기초한 사회원리가 점차 지연성과 계약성에 기초한 것으로 변화되고 있다.

오늘날 지연성에 기초한 사회원리도 많이 변화되어 가고 있으나, 농업ㆍ농민이 지배적이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의 자연촌락은 공동체적 성격이 매우 강하였다.

영농을 위한 계ㆍ두레ㆍ품앗이 등의 협동조직과 공동노동뿐만 아니라 부락제와 같은 공동문화가 발달하였고, 이러한 협동조직과 공동문화가 오랫동안 강력히 존재하였기 때문에, 농촌ㆍ농민출신의 가치관은 근대적 가치관이라고 말하는 개인주의적 성향과는 거리가 대단히 먼 것이다.

오늘날 대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1960년대 이전에 농촌에서 사회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직도 가족주의적ㆍ공동체적 의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혈연과 지연에 의하여 사회화가 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이전 농촌 출신은 인정ㆍ의리ㆍ보은과 같은 가치관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러나 구미문화(歐美文化)의 유입으로 인해 이러한 가치관은 급속히 감소되고 있다.

권위주의적 가치관은 가부장적 가족문화의 영향도 있지만 6백여년 이상 지속되어 온 관료 양반사회의 뿌리깊은 영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관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관료의 지속적 충원이 양반의 문벌을 유지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양반ㆍ관료가 지배하는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기 위하여 유교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이었던 양반관료는 그들의 특권을 누리기 위하여 반상제도(班常制度)를 형성하였고 동시에 관료세계에서도 문무ㆍ품계에 따라 예ㆍ의복ㆍ언어ㆍ형벌 등 생활양식의 차이를 두었다. 이러한 신분사회에서 양반ㆍ관료는 상전의식을 지니고 상민에 대한 천대의식을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권위주의가 조선 말기에 있었던 민란ㆍ동학란, 그리고 개화ㆍ갑오개혁 등에 의하여 많이 해체되었으나, 일제가 강점하면서부터 그들의 관료주의와 군국주의 문화에 기초한 권위주의가 다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권의주의 문화는 광복 후 미군정에 의하여 일시적 충격을 받았으나, 1960년 이후 군정에 의하여 전통적인 권위주의 및 관료주의는 더욱 강력히 존재하게 되었다. 이는 관료를 견제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을 그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 국민의 전통적 가치관은 많이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기성세대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전개된 서구식 교육 및 도시화ㆍ공업화의 영향에 의하여 가치관은 더욱 해체되어 가리라고 판단된다.

(4) 생활양식

사회구조와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생활양식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전통적인 생활양식이 더 우세한 경우가 많이 있으며, 1970년대에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현대화시키려는 작업도 있었다.

사실 생활양식 가운데 어떠한 것이 근대적이고 선진화된 것인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서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의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전통적인 의상은 한옷인데, 이것이 오늘날 양복으로 많이 변용되었다. 특히 도시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양복과 양장을 많이 입으며, 나이가 든 부인일수록 한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농촌인들은 도시인에 비하여 한옷을 더욱 많이 입고 있다. 특히 노인이나 주부들은 거의 한옷을 입고 이따금 작업시에 개량된 옷을 입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양복ㆍ양장을 많이 입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영향도 있지만, 특히 광복 이후 미군정 및 6ㆍ25전쟁 이후 서구의 문화와 상품이 유입된 결과이다.

6ㆍ25전쟁 전만 하여도 읍ㆍ면 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 학생의 대부분이 한옷을 입었으며, 비록 양복을 입었다 할지라도 자기 집에서 손수 만든 옷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이후 나일론 제품이 보급되고 농촌경제가 본격적으로 상품시장권에 편입되면서, 한옷과 자가제품의 양복은 점차 사라졌다.

1960년대 이후에는 산골에서나 겨우 한옷을 입은 학생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신발류도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짚신을 주로 신었으나, 그 뒤에는 고무신, 그리고 1960년대 이후는 운동화를 많이 신게 되었다.

식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인은 전통적으로 채식 위주였으나 오늘날에는 육식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주식은 밥과 국이었으나 오늘날 젊은이들은 빵과 우유를 많이 애용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6ㆍ25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 원조가 많아서 특히 어린이의 입맛을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주생활에서도 가옥의 형태와 구조가 크게 변화되었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초가삼간이 전형적인 우리의 주거형태였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지붕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어 초가가 거의 없어지고 기와와 슬레이트지붕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농가주택 개량사업으로 토담과 흙집이 블록담과 기와 또는 슬라브 등의 양옥으로 많이 변모되었다.

한편 도시에는 1960년대 말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아파트가 급속히 건설되어, 오늘날 서울의 경우 전체 가구의 3할 이상이 아파트 주민이다. 그리하여 대도시에는 새로운 아파트문화가 형성될 정도로 주생활의 커다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교육수준에도 학력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다. 광복 당시만 하여도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취학연령아동의 절반 미만이었으나 1970년 이후에는 취학률이 100%가 되었으며, 중학교의 경우도 1980년에 94.6%, 고등학교의 경우는 68.5%, 대학의 경우는 1975년에 12.2%였다.

이로써 국민의 취학률이 급속히 증가되었고 교육열이 대단히 높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학력이 길어도 평균수명이 길어져서 그만큼 직력(職歷)이 또한 길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남녀간 학력의 차별은 아직 존재하고 있으나 예전에 비해 많이 감소되었고, 또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대단히 활발해졌다.

그 밖에도 교통ㆍ통신은 전자산업의 혁명적인 기술발전으로 전국이 자동통화권이 되었고 교통도 전국이 1일생활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밖에 전화ㆍ텔레비전ㆍ라디오ㆍ자동차 등의 보유율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음악과 의학 분야에서도 서양음악과 서양의학이 보편화되었지만, 최근에 와서 국악과 한의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종래의 5일장이 점차 없어지고 슈퍼마켓 등 상설시장화되어 가고 있으며, 국민의 기본욕구 또한 가족과 마을 주민에 의한 자조사업에 의존하였으나 현재는 이러한 기능이 사회보장 등에 의하여 대체되고 있다.

(5) 과제와 반성

근대화라는 개념은 기능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분화 또는 성장의 개념 이외에도 그것이 사회구성원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제공할 때 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화라는 개념은 진보와 평등 및 연대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갈등론적 관점의 뜻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비교평가에서 그 참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사회발전이 과연 참된 자주적 근대화의 의미를 지녔는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광복 이후 한국사회를 종속이론 또는 신식민지론으로 규정하는 것을 이따금 볼 수 있는데, 이는 우리의 근대화에 자주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근대화의 개념을 경제학에서는 주로 공업화를 강조하고 정치학에서는 민주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풍요와 민족국가의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근래 우리 나라의 근대화작업이 과연 국민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5년 동안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근대화작업에서 1차적 가치는 서구적 모델이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러한 근대화가 심화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력과 기술개발에 의한 후기산업사회와 복지국가를 건설해야 될 것이다.

사실, 지난 1960년대 이후의 공업화에 의한 경제개발계획은 재벌과 국민총생산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였지만, 지역간ㆍ계층간 불평등을 조성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즉 빈곤과 범죄 및 가족해체 등과 같은 사회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되는데, 그간의 민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와 갈등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였다.

지난날 선(先)성장 후(後)분배의 근대화 작업과정에서 가장 많이 희생된 농민과 노동자의 이익이 보호되지 못했고 또 그들의 사회의식이 대단히 낮기 때문에, 그 간 대학생ㆍ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민주화투쟁에 의해 1980년대의 노동운동이 광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사회적 갈등을 수용할 수 있는 갈등의 제도화, 즉 입법과 정책이 강구되지 못해서 비합법적 폭력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사회구조적 근대화과정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가족과 지역사회는 급속히 해체되었고, 공업화에 의한 근대화정책은 대량의 노동자를 창출하였다.

이들의 계급적ㆍ사회적 이익과 갈등이 수용되지 못할 때 많은 폭력이 잠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의 사회세력으로서 노동자의 중산층화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한편, 한국인의 가치관은 서구문화의 이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가치갈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가치관 등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고, 사회구조가 서구적으로 변화를 겪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였다.

광복 이후 한국인에게 미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미국문화라 할 수 있다. 미국문화의 가치특성인 보편성ㆍ실용성ㆍ개인성ㆍ전문성ㆍ비정의성 등이 만약 근대적 특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미국문화는 우리 나라의 근대화에 큰 기여를 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는 한국인이 잘못 수용했거나 또는 우리의 풍토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 역기능을 초래하였다.

예컨대 자유주의가 자유방임주의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실용주의가 배금주의로, 서부활극이 폭력예찬으로 잘못 인식되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배경이 다른 곳에서 형성된 문화와 가치를 근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맹목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성이 있고, 만약 잘못 수용하는 경우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문화와 가치에는 우열이 없고 선ㆍ후진이 없다. 문화적인 생활양식에서 서구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착각하여 양식을 좋아하다가 성인병에 걸리거나, 온돌에 맞지 않은 양장의 불편을 느끼는 것은 이른바 갓쓰고 자전거 타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양장ㆍ양의ㆍ양식 등의 양풍(洋風)을 오랫동안 모방하게 되면 그것이 체질화되는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고유한 한옷ㆍ한의ㆍ한식과 같은 문화도 애용할 수 있도록 현대화시킬 필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김영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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