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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7 (화) 16:17
분 류 사전1
ㆍ조회: 1106      
[근대] 근대화-문화적 측면 (민족)
근대화(문화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세부항목

근대화
근대화(역사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문화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사회적 측면에서 본 근대화)
근대화(참고문헌)

(1) 말과 글

근대화는 민족국가를 이루는 구성원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국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역사의 일정한 단계에서 일단 저절로 형성된 국어를 의도적으로 정리하여 보급하고 교육하여야 근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진다.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이고 단일언어를 사용해 왔으므로 국어가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근대화를 촉진하는 아주 유리한 조건이다.

그러나 단일민족의 단일언어가 곧 근대의 국어는 아니다. 근대의 국어를 표준화하고 보급하는 과업은 힘들게 이루어졌고, 아직도 미진한 구석이 있다.

한국은 소수민족ㆍ소수언어의 문제가 없는 민족국가 중에서 인구로 보아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는 사용자 수가 비슷한 다른 어떤 언어보다 방언 차이가 적은 편이다. 그러면서도 근대적인 언어 통합과 표준화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말을 서로 알아듣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도 서울이 교류의 구심점 노릇을 하였지만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대체로 교류가 관(官)의 차원에 머물렀다. 민(民)의 교류가 대폭 확대된 것은 상업이 발달하고 교통이 빈번해진 조선 후기 이래의 일이다. 그렇게 되면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방언을 서울말에 얼마만큼씩 근접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말을 통한 언어표준화는 말보다 글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된다.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훈민하고 언해하며, 시조나 가사를 짓는 데 쓴 말이 서울말이었다. 시조나 가사는 원래 서울을 내왕한 사대부 관원들의 문학이어서 어휘나 어법이 대체로 표준화되었다.

국문소설이 출현하고 보급되면서 국민표준화가 대폭 확대되었다. 국문소설은 서울의 시정에서 자라나 전국 어느 곳에서나 널리 읽히게 되었다. 목판본으로 찍어 어느 고장에서든지 팔기 위하여서는 표준화된 국어를 사용해야 하였다.

전주에서 낸 완판본소설(完板本小說)은 표준화된 국어에 전라도 방언을 다소 보태기만 하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고장에 사는 사람들, 지체가 낮은 사람들까지 소설을 즐겨 읽거나 읽는 것을 듣게 되면서, 국어의 통합과 표준화가 크게 진척되었다.

1894년 갑오경장에서 한문이 아닌 국문을 공용하기로 한 것은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때까지는 국문 사용이 아무리 확대되어도 국가의 공식문서와 기록, 학술이나 사상에 관한 저술은 한문의 소관으로 남아 있었다.

문학에서는 한문학과 국문문학이 이중으로 존재하였다. 한문을 아는가에 따라서 지체를 나누고, 인재를 선발하였다. 국문을 공용하기로 한 개혁은 민족 구성원이 신분의 구별 없이 한 가지 글을 사용하면서 동질성을 확인하고, 구태여 어려운 글을 배우는 데 들이는 노력을 줄여 글 아는 사람을 대폭 확대하자는 것이었다. 갑오경장의 여러 개혁 중에서도 이 점은 특히 높이 평가해야 할 의의를 지닌다.

국문 공용의 과업은 한문의 소관이던 공식문서와 학술저술을 국문화할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었다. 앞의 것은 정부에서, 뒤의 것은 민간의 언론이 맡아서 시도하였다.

그런데 갑오경장에서 선포하였듯이 순국문을 쓸 것인가, 아니면 신문이나 잡지에서 흔히 시도한 바와 같이 한자를 섞은 국한혼용문을 쓸 것인가 판가름하기 어려웠다.

표기법이 정비되지 않아 생기는 혼란을 시정해야 했고, 문법을 정리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했다. 결국 교육이 시급한 문제였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7년에 국문연구소를 두어 필요한 연구를 하게 하였는데, 망국을 앞둔 시기라 얻은 결과가 있어도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 작업에 참여하였던 인사를 포함하여 여러 학자들이 어문생활의 방향과 규범에 대하여 각기 주장을 폈는데, 그 중에서도 주시경(周時經)이 가장 주목할만하다.

주시경은 나라가 독립을 이루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요건이 영토ㆍ국민ㆍ언어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독립의 정신에 해당하는 언어가 특히 소중하다고 보아, 언어의 성쇠가 민족의 성쇠와 직결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어가 혼란되어 있고, 일제의 침략으로 위축된 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표기법을 정비하고 문법을 체계화하려고 애썼다.

그 뒤를 이어서 일제강점기 동안 국어연구가 줄기차게 이어졌으며, 조선어학회가 담당한 몇 가지 사업의 진척을 보았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것을 비롯하여 표준말을 사정하고 〈외래어표기법〉을 정하였으며, 국어사전 편찬에 진력하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그때 정한 표기법 통일은 대체로 오늘날까지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다. 어렵게 편찬한 국어사전도 광복 후에 출간되어 여러 후속 국어사전의 모체가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어문생활의 근대화가 완수된 것은 아니다. 표기법ㆍ표준어ㆍ문법 등에 문제점이 적지 않으며, 국문 전용과 국한문 혼용 사이의 논란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래서 국어교육이 혼란을 겪는다.

어문생활의 영역을 몇 가지로 갈라 본다면, 문학 창작은 이미 오래 전에 다져졌던 기반을 물려받아 풍부하고 다채롭게 개발되었다 하겠고, 언론에서의 국어도 민족항일기 동안의 노력을 이어 대체로 정확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문기술과 학문에서의 언어는 아직도 국어화되지 못하고 일본어의 잔재나 더욱 늘어나는 영어 어휘에 대폭 의존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용어의 국어화는 낙관할 수 없는 과제이다.

(2) 사상ㆍ학문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사상과 학술의 업적 중에서 실학과 기학(氣學)은 근대사상의 선행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홍대용(洪大容)과 정약용(丁若鏞)의 실학은 신분제의 폐해를 지적하고 생산활동의 의의를 발견하며, 합리적 사고의 가치를 인식하여 근대화를 촉진하였다. 그러면서 사상혁신의 방법을 유학을 다시 해석하는 데서 찾았으며, 중세를 부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고대를 긍정하였다.

임성주(任聖周)가 기틀을 다지고 최한기(崔漢綺)가 더욱 발전시킨 기학은, 이(理)는 오직 기(氣) 자체의 원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철학을 심성론(心性論)이나 인식론의 영역에서까지 확립하여 근대사상이 수립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널리 알려지거나 깊은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실학의 사회관과 기학의 방법론을 결합시켜 근대사상을 확립하는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고 격동과 시련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조선왕조의 지배질서가 위기에 몰리고 외세의 침략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자, 사상의 전환을 이룩하여 이에 대처하고자 동학(東學)을 비롯한 여러 신흥종교 또는 민중종교가 일어났다.

이들 종교는 잘못된 역사가 근본적으로 쇄신되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이 곧 일어난다 하고, 그렇게 되면 한국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고 미천하고 빈한한 사람일수록 복을 받는다 하면서, 믿고 따르는 민중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였다.

이들 종교의 경전은 흔히 노래나 이야기를 중요시하면서 국문으로 표기되어 한문을 모르는 독자를 끌어들이고, 국문의 품격을 높였다. 그러나 종교적 상징을 적절하게 활용하였을 따름이고, 체계적인 논리를 갖춘 철학사상이나 사회사상을 제시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유학의 정통을 지키고자 하여 사상의 혁신에는 기여하지 못하였다. 국권을 상실한 뒤에 망명지 만주에서 투쟁을 계속할 때에는 민족의 각성을 깨우치고 투지를 고취하는 데 대종교(大倧敎)가 두드러진 구실을 하였다.

3ㆍ1운동 전후에 국내에서 전개된 민족운동은 천도교ㆍ불교ㆍ기독교 등과 다양하게 얽혀 있었으나 특별히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뒤에는 민족운동이 온건노선과 과격노선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뉘었다.

온건노선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연결시키고자 하면서 서부 유럽과 미국의 전례를 중요시하였다. 과격노선은 무정부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기울어졌으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되면서 사상 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한편, 자체의 전통에 입각한 자생적 근대사상의 발전은 적지 않게 위축되었다.

근대사상 형성의 평가할만한 국면은 애국계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발견된다. 박은식(朴殷植)은 정통 유학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양명학(陽明學)을 가져와 민족적 자아인식의 방법으로 삼고, 거기다 대종교의 발상을 덧보태어 위대하였던 과거의 역사를 되찾고자 하였다.

신채호(申采浩)는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특정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연구의 원리와 방법을 스스로 수립하여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려고 하였다.

그는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의 서두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하고, 우리 민족의 '아'가 주변 민족으로 이루어진 '비아'를 누르고 크게 떨쳤던 고대의 기상을 되살려 중간의 위축과 당대의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중세 극복을 위한 고대 재인식을 실학자들과는 다르게 민족사 내부에서 이룩할 수 있었다.

2단계 근대사상은 '민족'과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면서 이루어졌다. 국권 침탈의 위기가 심각해지면서 '오백년 종사(宗社)'를 근심하는 선비로서의 자각이 '반만년 역사'를 지켜야 하는 '이천만 동포'의 공동사명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하여 민족의식이 부각되고, 조선왕조를 위하여 충성을 하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무너지게 되었다.

보수주의와 외세 의존의 자세를 타파하고 민족사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권력ㆍ재산ㆍ지식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주체로서의 자각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한용운(韓龍雲)과 신채호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민중주체론(民衆主體論)을 제시하였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에서 불교의 새로운 각성을 말하면서, 모든 '중생'이 평등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 뒤에 '중생'이라는 말을 '민중'으로 바꾸어 적고, 불교가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민중의 불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항일투쟁 노선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 朝鮮革命宣言〉에서 구시대에 '국가의 노예' 노릇을 하던 '인민'이 아닌, 스스로 각성한 주체인 '민중'이 일체의 불평등ㆍ부자연ㆍ불합리를 타파하는 혁명을 성취하는 것이 항일투쟁의 올바른 노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근대적 자각을 구현하는 사상은 체계적으로 정립되거나 학문으로 연구되지는 않았다. 이치의 근본을 치밀하게 따지는 작업이 앞시대의 방식대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당대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를 받아들여 철저한 논란을 차분하게 펼 수 있는 기풍이 조성되지 않았다.

'철학'이라고 새롭게 이름지어진 학문은 일본을 거쳐 서양에서 가져온 개념과 논리로 이루어졌다. 일본어를 번역한 술어를 괄호 안에 원어를 넣고 사용한 문장이 이어지게 되었고, 그런 틀을 이용하여 자각적인 사고를 전개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세상이 요구하는 학문과 고등교육기관에서 하는 제도화된 학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생겼다.

전통시대의 자료를 중요시하면서 역사적 고찰을 일삼는 학문은 흔히 국학이라고 일컬어졌다. 국학은 일제가 설립하거나 통제하는 고등교육기관에 소속되지 않은 학자들도 할 수 있었으며, 서양 전래의 이론이나 방법에 그리 크게 의존하지도 않았다. 애국계몽운동의 논조를 구체적인 자료에 의한 연구로 입증하여 널리 펴내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것이 국학의 사명이었다.

그런데 국학은 현대의 문제까지 아울러 다루는 데 무력하고, 역사나 문화의 일반 이론을 구축하지도 못하였다. 그러한 영역은 서양 전래의 학문이 맡아서 다루도록 하는 관례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국학'과 '양학'을 통합하여 문화의 보편논리에 입각해서 민족문화를 연구해야 학문에 있어서의 자주적 근대화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3) 문학

조선 후기의 문학은 전근대문학 또는 중세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과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을 아울러 지녔다. 그러면서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향이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을 한꺼번에 지적하면, 조선 후기의 문학은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문학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 당대의 현실을 자세하고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 한문소설이나 한시 가운데에도 있었다.

국문문학의 영역이 확장되면서 상품화되어 팔리는 소설이 나타났다. 사설시조ㆍ판소리ㆍ탈춤에서는 현실인식이 생동하는 표현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면서 국문소설에는 중국을 무대로 한 것이 적지 않았다. 사설시조ㆍ판소리ㆍ탈춤은 물론 국문소설마저 전문작가의 창작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완결되기 위해서는 몇 단계의 변화를 겪어야 하였다.

1860년부터 몇 해 사이에 동학 가사가 이루어져 사회개혁과 외세배격을 주장하는 문학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애국계몽 운동에서 주장하고 제시한 문학이 민족의 현실을 발견하고 민족정신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근대적인 주제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국문을 공용하게 되면서 한문학 청산의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1906년에 신소설이, 1908년에 신체시가 발표되면서 작품을 꾸미는 방식이 달라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세문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근대문학을 완성하게 된 것은 3ㆍ1운동 이후 1920년대 동안의 신문학운동에 의해 이룩된 변화이다. 당시에는 한문학을 제외한 국문문학만 문학이라 규정하고, 한문에서 유래한 격식이나 국한혼용문의 문투를 버리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말을 활용하려고 애썼다.

또한 직접 드러내놓고 사실을 설명하고 주장을 전달하는 문학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서정시ㆍ소설ㆍ희곡을 문학의 기본 영역으로 삼았다.

서정시는 일정한 율격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시라야 시인의 내면의식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다 하였다. 소설은 당대의 현실을 자세하고 실감나게 그려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하였다. 희곡 또한 작품으로 창작되며, 등장인물의 대사를 적절하게 마련하여 긴박한 구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전문적인 작가가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점이 앞시기까지와 크게 달라 근대문학의 한 가지 기본 특징이 된다. 조선 후기까지에는 한문학 작가는 이름이 밝혀졌으나 문학 창작에 전념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지는 않았고, 국문문학의 작가는 보수를 바라고 작품을 썼더라도 이름을 내지 않은 무명씨였다.

애국계몽기에도 이런 관습이 이어지는 한편, 가명ㆍ필명ㆍ익명 등을 이것저것 쓰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발표하는 방식이 유행하였는데, 계몽의식이 작가의식보다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부터는 작가의 이름이 본명이든 필명이든 반드시 밝혀지고 한 가지로 고정되어 등록상표와 같은 구실을 하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자기 작품에 대해 저작권을 가지므로 이름이 밝혀져야 하고, 독자와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기 위해 이름을 고정시켜야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현한 근대의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작가는 문학 창작에 전념하면서 생업을 마련하고 평가를 받는 데서 사는 보람을 느끼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신문ㆍ잡지ㆍ출판의 영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 원고료가 적거나 없고 인세수입 또한 기대하기 어려웠다.

1930년대 당시 신문 연재소설을 쓰는 작가라야 중등학교 교원 월급의 절반쯤 되는 원고료를 받아 가까스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한 작가는 다른 수입이 있어야 문학을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원고료와 인세로 살아가는 작가가 더 많아지고 수입이 대폭 늘었지만, 소설가라야 그럴 수 있다는 조건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문학 창작을 생계 도모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모든 정열과 노력을 바쳐 수행해야 하는 성스러운 과업으로 여기는 작가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널리 읽히고 높이 평가되지 않는 이유가 세상의 잘못이나 독자의 무지에 있다고 여기기 일쑤이다.

문학하는 노선이 다양하고 그 때문에 많은 논란이 일어난 것이 근대문학의 또 한 가지 특징이다. 논란을 전문적인 소임으로 삼는 문학비평이 줄곧 부추겨 와서 노선의 차이가 더욱 확대되었다.

지난 시기 문학의 전통을 찾아서 되살려야 한다는 노선이 있고, 서양문학의 이식에 힘써야 새로운 문학을 이룩한다는 노선이 있어 서로 대립되었다.

문학은 세상의 잘못된 것을 집어내 바로잡는 투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문학은 문학 그 자체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주장과 대립되었다. 상업적인 통속문학을 무시할 것인가, 이용할 것인가, 추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고, 이에 따라서 작품의 경향이 다양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용운의 ≪님의 침묵≫, 김소월(金素月)의 ≪진달래꽃≫ 같은 시집이 나와 전통계승과 진지한 문제의식을 갖춘 근대시의 좋은 본보기를 이루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희망을 빼앗긴 상황에 대하여 두 시인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대처해 희망을 고취하고, 비탄에 잠겼다.

이상화(李相和)ㆍ이육사(李陸史)ㆍ윤동주(尹東柱)는 더욱 적극적이고 비장한 자세로 민족의 수난을 노래하고 투지를 되찾으려 하였다. 이런 시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송되며 깊은 공감을 주고 있다.

염상섭의 〈삼대 三代〉, 현진건(玄鎭健)의 〈적도 赤道〉, 채만식의 〈탁류 濁流〉 등의 장편소설은 단편소설에서 이미 이룩된 성과를 확장하여, 당대 사회의 모습을 충실하게 보여주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밝히려고 하였다. 하지만 희곡에서는 몇 사람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에 상응하는 성과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4) 예술

미술ㆍ음악ㆍ무용ㆍ연극ㆍ영화 등 예술의 여러 영역에서는 근대화를 위한 진통이 문학의 경우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서양예술의 이식이 이루어지면서, 서양화되지 않은 예술과 서양화된 예술이 명칭에서부터 구별되기에 이르렀다.

미술에서는 동양화(또는 한국화)와 서양화가 구별되었다. 음악에서는 작곡의 원리나 사용하는 악기가 서로 전혀 다른 국악과 양악이 공존하고 있다.

무용에서도 고전무용과 현대무용이 서로 다르다. 연극에서는 전통극은 거의 무시되고 서양 전래의 신극만 연극으로 인식되었다. 단지 영화는 서양에서 생성ㆍ전래된 것이어서 그런 방식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예술에서는 해당 영역마다의 서양예술이 언제 소개되고, 언제부터 한국인이 익혀서 재현하게 되었는가를 살펴 근대화를 추적하는 것이 관례이다.

1910년 국권상실 얼마 전에 국내에 들어온 서양인이 서양의 미술ㆍ음악ㆍ영화 따위를 소개했으며, 그 후 일본에 유학하여 서양 전래의 예술을 공부한 선각자들이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예술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양화가 곧 근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렇게 하여 이룩된 작품이 한국예술로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한편, 동양화ㆍ국악ㆍ전통무용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에게서는 지난 시기의 전통 예술이 잊혀지고 없어지지 않도록 잇고 다듬는 작업이 소중하다 하겠다. 하지만 그대로 있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이므로 변화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물어야 한다.

서양예술을 익히고 서양에 가 본바닥의 평가를 받는 것을 미술과 음악 양쪽에서는 최고의 목표인 듯이 내세웠다. 그래서 프랑스나 미국에 가서 활약하는 화가도 있고, 서양 여러 나라에서 연주생활을 하는 음악가도 있다.

그러나 창조적인 의의가 평가되기 위해서는 서양예술가들이 지니지 못한 정신세계를 우리 전통에서 찾아내어 현대화하고 보편화하여야 하는데, 서양에서의 노력보다는 떠나기 전의 수련이 모자라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서양예술의 경우에는 도입한 기법의 우수성보다 나타낸 사연이 얼마나 절실한가에 따라서 지속적인 평가가 결정되었다. 홍난파(洪蘭坡)의 가곡, 나운규(羅雲奎)의 영화, 이중섭(李仲燮)의 그림 같은 것은 그런 면에서 소중한 의의를 지녔다.

전통예술을 잇는 경우에는 전례를 추종하지 않고 독창적인 재창조를 이루어 자기 세계를 개척하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 이상범(李象範)이나 변관식(卞寬植)의 그림은 산수화의 전통을 이었지만 실제로 본 눈앞의 대상을 개성이 뚜렷한 필치로 그렸으므로, 널리 주목하여야 할 선례를 이룩하였다.

국악에서도 새로운 곡을 작곡하려는 시도는 흔한데, 그림에서처럼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고 현대의 양악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려 하는 탓에 두드러진 성과가 축적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신극이 이식예술로서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통극에 관심을 가지고 탈춤을 재창조하자는 운동이 최근에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전달하려는 내용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탓에 예술운동으로서 정착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동양화와 서양화, 국악과 양악, 전통무용과 현대무용, 전통극과 신극이 현재와 같이 나누어져 있지 않고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매체나 기법 또는 예술적 원리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으므로 무리하게 통합하면 각기 지닌 장점을 상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서로 근접할 수 있는 대로 근접하면서 한국 근대예술로서의 공통된 사명을 깊이 인식하여야 바람직하지 않은 대립으로 인한 폐해가 줄어든다.

공통된 사명은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사상을 새롭게 갖추고 민족 공동체에 널리 공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근대와 몰주체를 청산한 근대 민족예술로서의 의의가 그렇게 할 때 최대한 발휘되리라고 본다.

<조동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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