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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1 (월)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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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13      
[삼국] 삼국 시대의 토지제도 (민족)
토지제도(상대) 삼국 시대의 토지 제도

세부항목

토지제도
토지제도(상대 : 삼국 시대)
토지제도(통일신라시대)
토지제도(고려시대)
토지제도(조선전기)
토지제도(조선후기)
토지제도(개항이후)
토지제도(광복이후)
토지제도(참고문헌)

우리 나라에서 토지에 대한 사적(私的) 소유 내지는 점유가 실현되고 사회적 계급이 발생한 이후 신라가 삼국 통일을 성취한 7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편의상 상대라고 칭하고자 한다.

상대 토지 제도의 특징은 그것이 공동체적 제반 관계에 의해서 크게 규제되어 있었으리라는 점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토지 소유 형태는 공동체의 구성원에 의한 공동 소유였으며, 생산의 성과인 토지에서 나온 수확물은 재생산을 위해서 남겨 두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소비의 필요에 따라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분배되었다. 그리고 생산 노동도 공동으로 담당하였다.

원시 공동체의 최후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 이른바 농업 공동체였다. 농업 공동체의 단계에 이르면 가옥과 가대지(家垈地)는 특정한 개인의 사적 소유가 되지만 경작지는 아직 공동체에 의하여 소유된다. 그리고 공동체의 소유인 이 경작지는 정기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분할되어 구성원들은 자기 몫으로 할당된 토지를 일정한 기간 주기적으로 번갈아가며 경작하였다.

경작인 각자에게 할당된 토지는 해당 경작자가 자기의 계산에 입각하여 사용하여 이익을 얻고, 그 이익을 개별적으로 사유화하였다. 이것이 마르크스(Marx,K.)가 지적한 농업공동체의 기본적인 특징인데, 이를 혈연적 원시 공동체의 경작지 공유와 공동노동에 입각하는 사회적 분배의 원리에 대비해 보면 그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농업 공동체 내부에서 개개의 대가족(세대 공동체)에 의한 개별 경작이 발전하면 경작지의 정기적 분할, 이른바 할지 현상(割地現象)이 소멸한다. 노동의 단위는 공동체에서 각 ‘집〔家〕’으로 옮겨지며 경작지 소지분(所持分)의 상속을 통하여 각 ‘집’에 의한 개별적 이용이 강화되면서, 공동경작 대신으로 소규모의 개별적 생산 형태인 소경영적 생산 양식이 성립한다.

즉, 농업 공동체의 구조에 고유한 이중성(二重性)의 균형이 토지의 정기적 할지가 소멸함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사유의 요소가 공유의 요소를 압도한다. 그리하여 산림·황무지·방목지(放牧地) 등의 공동 소유·공동 이용은 그대로 유지되지만, 기본적 생산 수단인 경작지에 대한 사유가 형성됨으로써 농업 공동체(공유의 원리에 입각하는 원시 공동체 최후의 단계)는 해체되고, 이어서 계급 사회인 지연 단체(地緣團體)로서의 촌락 공동체가 성립된다.

이상이 원시 공동체가 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토지 소유 형태에 관한 일반적 이론이다. 이 일반 이론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 사회인 노예제 사회가 전형적으로 전개된 서구 사회에서는 긍정적으로 적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사정이 크게 달랐다.

아시아 사회에서는 원시 공동체가 무너지고 계급 사회가 형성된 이후에도 경작지에 대한 개별적 사유는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는 형태를 바꾸어 유지되었으며, 경작자인 공동체 구성원에게는 다만 토지에 대한 점유(占有)가 용인되었을 뿐이다. 공동체의 수장이 계급적 지배자로 군림하여 공동체에 대신하여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장악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들의 계급적 피지배자로 전환되었다.

이 단계에서 아시아 지역에서는 많은 공동체를 통솔하는, 그리고 공동체의 수장들을 대표하는 전제 군주의 지배가 성립하고, 그 하부 구조로서 이른바 ‘총체적 노예제’가 형성되었다. 흔히, 이 단계를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로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원시 공동체에서 계급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나는 이러한 단계 구분의 설정은 다분히 하나의 이론적 구상에 불과하며, 우리 나라 사회에서도 반드시 그렇게 진행되었다는 확실한 보장은 아직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토지의 사적 소유 성립에 관한 일반적 이론에 관하여 길게 언급한 것은, 우리 나라 사회에서의 토지 사유의 형성 과정을 조명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이론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토지 소유 관계의 발전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시 일정한 가설을 설정해서 이에 의한 단계 구분의 작업을 시도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 3국 중에서 가장 일찍이 역사에 등장한 나라는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아마 2세기 무렵에는 국가 형성 단계에 들어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거니와, 본래 고구려족은 농경보다는 수렵·목축을 더 중요한 생활수단으로 삼는 종족으로서 역사무대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구려는 처음부터 농경종족으로 출발한 신라·백제의 경우와는 꽤 큰 성격의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 사회에서 농경이 생산 분야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그 영토를 확장하여 정복 국가로서의 기반이 어느 정도 확립되고, 각 정복지 안에 편성된 하호(下戶)에 대한 지배가 이미 정착한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토지 제도를 거론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하호의 존재이다.

하호의 실체에 관하여, ① 하호를 노예·노예군(奴隷群)으로 이해하여 원시부족국가 혹은 노예제국가를 형성하는 기본적 피지배계급의 하나로 이해하는 견해, ② 부여의 하호는 노예적 존재이며 노예 계급이지만 고구려의 그것은 농노적 존재 내지는 봉건적 예속민이라는 견해, ③ 하호는 노예가 아니며 씨족 사회의 해체기 피정복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견해, ④ 하호는 누층적으로 구성된 읍락 공동체(邑落共同體)의 일반 구성원이라는 견해 등, 많은 견해가 있다.

여기서 하호의 문제에 대하여 비교적 장황히 언급하는 이유는 하호의 성격 규정에 따라서 고구려의 토지 지배 내지는 소유 형태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여러 견해들은 주로 하호를 노예 내지는 노예적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이냐, 노예와는 성격이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차원에서 파악하여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초점이 두어져 있는데, 최근에 이르러서는 시각을 크게 달리하여 하호를 후대의 전호(佃戶)와 같이 호민(豪民)의 토지를 차경하여 10분의 5에 해당하는 세(지대)를 부담하는 예속 농민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나왔다.

이 견해에 따르면 당시의 지배층인 호민(豪民, 大加 계층:고구려 각 部의 최고 직위, 곧 각 지방의 族長을 가리킴)은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대토지를 경영하였는데, 그 밖에도 하호 농민을 그들의 대토지 경영에 예속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호 농민은 신분상으로는 양인(良人)이었지만 생산 수단을 유지하지 못한 데서 부득이 전호와 같은 예속 농민으로 전락된 것이라 한다.

하호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내용은 아마 서기 3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동이 사회(東夷社會)의 상황을 전하는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바이다. 이 당시 지배층인 호민 계층의 토지 경작에서 하호가 경작 노동 담당자로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의 하호가 과연 본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토지와 맺고 있던 본원적(本源的) 관계가 단절되어 호민 대가층의 전호, 즉 소작인으로 전락될 만큼 공동체 내부의 해체가 진행되어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적어도 3세기 당시의 고구려 내부의 계급 관계는, 대토지를 소유하는 호민층과 토지의 소유에서 이탈된 결과 남의 토지를 차경하여 지대를 부담하는 전호(소작인)와의 관계가 사회적 생산 관계의 기본적 형태를 형성할 만큼, 공동체적인 제반 유대 관계가 해이해진 상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하호에 관해서는 피정복 종족이 정복 종족에 총체적으로 예속되어 공동체의 구성원인 채로 공동체와 더불어 정복자에게 수탈되는 ‘공납 노예(貢納奴隷)’라는 개념이 도입된 적도 있다. 이 견해의 가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이러한 공납 노예제의 구상은 총체적 노예제(공납노예제)를 기반으로 그 위에 성립되었다는 이른바 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문제를 우리 나라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다시 검토해 보는 계기를 던져주었다는 의미에서 매우 주목된다.

하호의 실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많은 해석들이 나왔는데, 하여튼 호민 대 하호의 관계는 당시 고구려 사회의 생산관계를 대표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하호를 일단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와 더불어 어떤 권력자에게 예속된 상태에 있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해 둔다. 이럴 경우, 그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는 해당 공동체의 수장이 계급적 지배자로 전환해서 수탈을 가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 주로 다른 종족의 수장이 정복자로서 군림한 경우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경우 토지 지배의 기본적 형태를 구성하는 것은 호민 대 하호 관계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이해되지만, 이와 병행해서 가부장적 노예를 사역하여 경작에 투입하는 형태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개별적인 소농민 경영의 범주에 속하는 것도 상정해 볼 수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을파소(乙巴素)는 그 신분적 출신은 귀족이었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해 역전자급(力田自給)하여 생계를 세운 사람이었다. 또 온달(溫達)은 평강왕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황금 팔걸이를 팔아 전택(田宅)·노비·우마·기물 등을 사들여 살림이 완전히 갖추어졌다고 하였다. 온달은 6세기 후반경의 인물인바,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이 무렵에는 토지의 매매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노비의 노동력을 농경에 이용하는 일도 흔히 있었던 것 같다.

토지 지배의 유형으로서는 하호의 노동력에 의존하는 형태, 가부장적 노예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형태, 소경영농민이 스스로 자기 몫의 토지를 경작하는 형태 등 여러 사례가 상정되거니와, 권력자의 대토지경영은 주로 하호의 경작노동력에 의존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가령 그러한 상정이 가능하다면 공동체 구성원이 공동체와 더불어 총체적으로 계급적 지배자에 예속되어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이 단계에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지배의 객체가 된다.

을파소나 온달의 사례에서 보이는 개별적 소경영과 비슷한 형태가 과연 어느 정도 성장해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해야 할 여지가 많으며, 이들의 토지 경영이 당시의 공동체와 어떤 관계에서 진행되었을까 하는 문제도 검토를 요한다.

소경영 형태를 포함하여 토지의 가부장적 소유는 아마 처음에는 온달의 경우와 같이 노비·우마·기물을 갖출 수 있는 부강자 계층에 의하여 달성되었을 것이며, 일반 공동체 구성원이 이 단계에 도달하는 것은 퍽 시기가 뒤진 훗날의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호와 계급적 대립 관계에 있는 호민은 읍락(邑落)의 장수(長帥, 渠帥, 主帥, 大人)로서 공동체의 수장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앞에서 지적하였는데, 이들 호민들과 국왕의 관계가 토지 지배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 있었는지 매우 궁금한 일이지만 그 실상을 알 수가 없다.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추리를 해 본다면, 이들 공동체 수장에 의한 토지의 지배와 소유는 이들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국가를 건설한 최고의 수장, 즉 국왕의 소유로 발전 해소하여 국왕을 정점으로 한 일종의 국가적 토지 소유 같은 것이 성립하였으리라는 것을 상정해 볼 수가 있겠다.

현재 학계의 분위기로는 우리 나라 상대에 있어서의 토지의 국가적 소유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판적 내지 소극적인 견해가 꽤 유력한 실정이므로 결론 비슷한 것을 도출해 내는 것은 삼가는 것이 옳겠다.

물론 경작자의 자기 노동에 입각하는 본원적 소유인 점유와 경작자의 노동력 수탈에 입각하는 국가적 소유를 별개의 차원으로 분리해 토지에 대한 이중적 소유구조를 구상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이런 견해를 취할 경우라도 소유니 점유니 하는 이중적 소유의 내용을 선명하게 구별해서 설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고구려뿐만 아니라 신라·백제의 토지 지배와 소유 관계를 거론할 경우에도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토지 소유와 공동체와의 관계이다. 호민과 하호의 생산 관계와 비슷한 구조는 신라·백제의 경우에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 상대에 보이는 식읍(食邑)·녹읍(祿邑)이라는 토지 지배의 유형은 족장(族長) 내지 구공동체 수장 계열의 호족이 과거에 그들이 지배해 오던 영지 및 인민에 대한 경제적 수취의 전통을 다분히 이어받은 것이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여기서 구현된 식읍·녹읍의 지배자에 대한 경작자의 예속관계는 적어도 상대의 초기에는 공동체의 수장과 그들에 의하여 영유 혹은 정복된 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로 환원시켜 고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구려의 하호지배나 신라의 식읍·녹읍 지배의 원초형(原初形)은 그 본질에 있어 서로 공통되는 유사점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된다. 신라의 경우 국왕 내지 왕실에 직속된 광대한 소유지가 있었음이 인정되는데, 아마 이 중에는 과거에 국왕이 족장의 하나로서 지배하고 소유한 토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럴 경우의 소유지는 일정한 면적의 토지가 집합되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의 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며, 거기에 거주하는 인민들은 토지와 더불어 생산수단의 일부로서 국왕에게 소유되어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백제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농민에 대하여는 이른바 총체적 노예의 개념이 적용된 일도 있다.

<강진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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