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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5 (일) 15:52
분 류 사전1
ㆍ조회: 130076      
[조선] 임진왜란의 배경 (민족)
임진왜란(배경)

세부항목

임진왜란
임진왜란(배경)
임진왜란(전쟁의 발발)
임진왜란(의병의 활동)
임진왜란(수군의 활약)
임진왜란(조·명군의 반격과 휴전 성립)
임진왜란(정유재란)
임진왜란(난중의 사회상)
임진왜란(결과)
임진왜란(참고문헌)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쟁 초기 이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국력이 쇠약해진 것은 왜란이 일어난 선조대에 이르러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이미 훨씬 이전부터 중쇠(中衰)의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 세력간에 계속된 정쟁으로 인한 중앙 정계의 혼란, 사림 세력이 득세한 선조 즉위 이후 격화된 당쟁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국방 체제가 붕괴되어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군국기무를 장악하는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설치했으나, 이것 또한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이이(李珥)는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의 허약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는 점점 해이해지고 문약(文弱)에 빠져 근본적인 국가 방책이 확립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러할 즈음 일본에서는 새로운 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즉, 15세기 후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일본에는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되어 종래의 봉건적인 지배 형태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마침 이때 도요토미(豊臣秀吉)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시대(戰國時代)를 통일,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국내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諸侯)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 세력을 억제하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대마도주(對馬島主) 소(宗義調)에게 명하여 조선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수호(修好)하도록 시켰다. 그 의도는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나라를 치자는 데에 있었다. 이에 대마도주는 가신(家臣)인 다치바나(橘康廣) 등의 일행을 일본국 사신이라는 명목으로 부산포(釜山浦)에 보내어 통호(通好)를 청하였다.

이 소식이 경상우수사의 치보(馳報)로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찬탈시역(簒奪弑逆)한 나라에서 보낸 사신을 받아들여 접대할 수 없으니 대의(大義)로써 타일러 돌려보내라.”는 뜻을 비치고, 2품 이상의 정신(廷臣)들에게 가부를 논의하도록 하였다. 정신들의 결론은 관례대로 접대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선조는 내키지 않았으나 정의(廷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치바나 일행이 서울에 올라와서 바친 수교문에 오만무례한 구절이 있자 보서(報書)만 받고 사신을 돌려보내지 않은 채 회답도 보류하고 있었다.

일본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조헌(趙憲)은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려 통신사를 일본에 보내지 말 것을 극언하기도 하였다. 그대로 해를 넘긴 조정에서는 이듬해인 1588년 문무반 2품직과 육조의 참의 이상을 중추부(中樞府)에 모아놓고 가부를 재론하였다. 그 결과 “바닷길이 어두어 통신사를 보낼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져 다치바나 일행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이 와중에 소가 사망하고 양자 소(宗義智)가 그를 승계하여 새로 대마도주가 되었다. 그 역시 도요토미로부터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入朝)에 대한 독촉이 심해지자, 1589년 하카와시(博多市)의 세이주사(聖住寺) 주지인 겐소(玄蘇)와 가신 야나가와(柳川調信) 및 고니시(小西行長)의 사신인 시마이(島井宗室) 등과 일행이 되어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 칭하고 다시 부산포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구례(舊例)에 따라 이조정랑 이덕형(李德馨)을 선위사로 삼아서 부산포에 보내어 접대하게 하였다. 소 등은 부산진 객관에 머무르면서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며 함께 일본으로 가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의 일본 입조에 대해서는 조선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통신사 파견 문제를 결정짓지 못한 채 소 일행은 일단 돌아갔다.

대마도로 돌아간 그들은 정사에 겐소, 부사에 소를 구성하여 다시 부산포에 왔다. 겐소를 정사로 삼은 것은 국왕사(國王使)로 위장하려는 것이었다. 이들을 다시 맞이한 조정에서는 이미 일본 사신으로부터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병화(兵禍)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던 터라 통신사 파견의 여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정신들의 찬반이 엇갈려 결정을 짓지 못하던 중, 왕의 전교(傳敎)에 따라 조선의 반민(叛民)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자들이 가끔 왜구(倭寇)의 앞잡이가 되어 변방을 소요시키니 그들을 잡아보내면 통신에 응하겠다는 것을 내세워 조선의 명분을 찾고 그들의 성의를 시험하고자 하였다. 이에 소는 선뜻 응하여, 야나가와를 자국으로 보내 사화동(沙火同) 등 10여 인을 잡아와서 조선의 처치에 맡긴다 하여 이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통신사 파견을 결정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보빙(報聘)을 겸한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과 도요토미의 저의를 탐지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그런데 곧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모든 것이 이에 집중되어 사행을 선정하지 못하다가 11월 중순이 넘어서야 통신사 일행을 선정하였다. 즉 정사에 황윤길(黃允吉), 부사에 김성일(金誠一), 서장관에 허성(許筬)으로 결정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이듬해인 1590년 3월에 겐소 일행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대마도에서 한달간 머무르다가 7월 22일에 경도(京都)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행은 도요토미가 동북 지방을 경략중이어서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에 가서야 접견하여 국서(國書)를 전하게 되었다.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려 하는데도 도요토미는 답서를 주지 않아 국서를 전한 지 4일 만에 경도를 떠나 계포구(堺浦口)에 와서 답서 오기를 기다리다가 보름 만에 받았다.

그런데 내용이 오만불손하여 김성일은 그대로 가져오지 못하고 여러 곳의 문자를 고쳐서 가져오게 되었다. 일행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 3월이었으며, 이때 일본 사신 겐소·야나가와 등도 따라왔다.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지을 때는 그 가부를 가지고 논박을 벌였으며, 사행이 돌아온 뒤에는 그 보고 내용을 놓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서인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는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반하여, 동인의 부사 김성일은 침입할 정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도요토미는 사람됨이 서목(鼠目)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정사와 의견을 같이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黃進)도 분노를 참지 못하여 부사의 무망(誣罔)을 책했다고 한다.

이들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관들 사이에는 정사의 말이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부사의 말이 맞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동서의 정쟁이 격화된지라 사실 여하를 묻지 않고 자당(自黨)의 사절을 비호하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던 조정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은 김성일의 의견을 쫓아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다.

또 선위사 오억령(吳億齡)은 조선에 머무르고 있던 겐소 등에게 “일본은 다음해에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정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일본의 발병(發兵)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가 도리어 파직을 당하였다.

또 겐소 등이 그를 위문하는 황윤길과 김성일 등에게 “명나라가 일본의 입공(入貢)을 거절한 것을 도요토미가 분개하여 동병(動兵)을 꾀하고 있으니, 조선이 앞장서서 명나라에 알선하여 일본의 공로(貢路)를 열어줄 계획을 세우면 무사할 것”이라 했으나 이것도 거절하였다.

겐소 등이 답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뒤, 소는 다시 부산포에 와서 배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도요토미가 병선을 정비하고 침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조선은 이것을 명나라에 알려 청화통호(請和通好)하는 것이 좋다.”라고 거듭 변장(邊將)에게 말했으나, 10일이 지나도록 회답이 없자 그대로 돌아갔다.

그 뒤 왜관(倭館)에 머무르던 일본인마저 점차 본국으로 소환되고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일본의 침입이 있을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김수(金邈)를 경상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로 삼아 무기를 정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는 신립(申砬)을 경기·황해도에, 이일(李鎰)을 충청·전라도에 급파하여 병비 시설을 점검하게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백성의 원망만 높아져 갔다. 다만,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만이 전비(戰備)를 갖추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 계획은 무르익어 오랜 전쟁을 통하여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을 정비하고,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 생산하면서 전쟁 준비에 전력하고 있었다.

<이장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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