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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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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통일 신라의 불교 (민족)
불교(우리나라 불교:통일신라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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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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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우리나라 불교:삼국시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통일신라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고려시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1)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2)
불교(우리나라 불교:근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현대의 불교)
불교(참고문헌)

통일 신라기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 왕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250년간 계속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대체로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기간 동안에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기는 불교사상이 건전하게 발전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 전기불교가 차차 퇴락, 쇠퇴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불교가 일기 시작한 시기이다.

[통일 신라 전기의 불교]

민족 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 통일하였으면서도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 역시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문화까지 더 보태어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는 훌륭한 고승들의 배출과 그들의 끊임없는 교학적 연구, 교화활동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1) 교학연구의 흐름

통일 신라 전기에 활동한 대표적 고승으로는 원효ㆍ원측ㆍ의상ㆍ경흥(憬興)ㆍ의적(義寂)ㆍ도증(道證)ㆍ승장(勝莊)ㆍ둔륜(遁倫)ㆍ태현(太賢)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저술을 보면, 대체로 불경으로는 ≪대반야바라밀경≫ㆍ≪금강반야경≫ㆍ≪법화경≫ㆍ≪화엄경≫ㆍ≪대무량수경≫ㆍ≪아미타경≫ㆍ≪열반경≫ㆍ≪미륵경≫ㆍ≪금광명경≫ㆍ≪범망경≫, 논(論)으로는 ≪광백론 廣百論≫ㆍ≪유가론 瑜伽論≫ㆍ≪유식론 唯識論≫ㆍ≪아비담잡집론 阿毘曇雜集論≫ㆍ≪인명론 因明論≫ㆍ≪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등에 관한 연구 주석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불교 역사상 경론(經論)에 대한 주소(註疏)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학연구도 이때의 산물이라는 것은 역사를 논하고 평가함에 있어 새로운 시사를 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불교는 철학적으로 ≪화엄경≫의 일승원융사상(一乘圓融思想)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는 ≪반야경≫, 특히 ≪반야이취경 般若理趣經≫과 ≪금강반야경≫을 중요시하였으며, 인명(因明)ㆍ유식(唯識)ㆍ유가(瑜伽)의 이론을 응용하였다. 또한 ≪법화경≫과 ≪열반경≫은 가장 대승적인 경전으로서 이 시기의 모든 불교사상가들이 한결같이 중시하였다. 또한 신앙면에서는 ≪미륵삼부경 彌勒三部經≫ㆍ≪무량수경≫ㆍ≪아미타경≫ㆍ≪약사경 藥師經≫을 중요하게 여겨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국가안태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유행한 ≪금광명최승왕경≫과 ≪인왕반야경≫이 매우 중시되었으며, 여러 차례 백고좌강회나 팔관회에서 강설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는 한국불교 역사상 불교의 참뜻이 가장 원만히 드러났으며 불교의 구체적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었고, 이론과 실행면에서도 원만한 융화가 이루어져 독특한 한국불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

(2) 초기 고승들의 활동

이 시대에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축이 되었던 많은 고승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원효와 의상이다. 원효는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시킨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정신을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를 향해 갔으나 고구려에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뒤 백제가 망하여 바닷길이 열리자 다시 당을 향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간들 있겠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고 유학의 길을 포기한 원효는 국내에서 더욱 불교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참뜻을 알리고 불교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입히기 위하여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에 나섰다. 모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거사(居士)의 차림으로 손에는 무애(無碍)의 박을 쥐고 노래와 춤을 추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당시 신라 사회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른 진로를 가르쳐 보여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相)의 의미를 깨닫도록 깊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준 고승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뜻은 저술을 통해서도 널리 반영되었다. 그의 저서는 85종 180여 권에 이르며, 현재에도 20여 종이 남아 있다. 그 중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 및 ≪기신론별기 起信論別記≫는 현대에까지 그 참신성을 드러내는 올바른 인생관을 담고 있으며,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은 진정한 평화와 통일과 자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하여 얻어질 수 있는가를 갈파한 신비적 체험의 책이다.

또한 대승경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화엄경≫ㆍ≪법화경≫ㆍ≪열반경≫ㆍ≪유마경≫ㆍ≪반야경≫ㆍ≪해심밀경≫ㆍ≪대지도론≫ㆍ≪유식론≫ㆍ≪보성론≫ㆍ≪섭대승론≫ 등에 대한 종요(宗要)와 소(疏)를 지어 방대한 불교철학의 진수를 드러냄으로써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길잡이가 되게끔 하였다. 그는 승려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고, 초인적인 저술가였으며 뛰어난 실천가였다.

의상은 661년(문무왕 1)에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있는 화엄종의 지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연구한 뒤 중국에서 화엄을 강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671년에 귀국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온 나라에 화엄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가 되었다.

그리고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등지에서도 화엄의 도리를 전법하였다. 또한 그는 낙산사(洛山寺)에 신라 관음신앙의 터전을 열었으며, 오진(悟眞)ㆍ지통(智通)ㆍ표훈(表訓)ㆍ진정(眞定)ㆍ진장(眞藏)ㆍ도융(道融)ㆍ양원(良圓)ㆍ상원(相源)ㆍ능인(能仁)ㆍ의적(義寂) 등 10명의 수제자와 3,000명의 문도를 길러 한국불교의 사상과 신앙사에서 가장 큰 맥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화엄사상과 관음신앙을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가 전한다.

이들 2대고승 외에도 통일 직후의 신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불교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신문왕 때 국로(國老)를 지냈던 경흥(憬興)은 학덕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삼장(三藏)을 통달한 고승으로서, ≪미륵삼부경소≫를 비롯한 40여 부 250권의 저술을 남겨 신라 3대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또한 신문왕대의 고승으로는 승전(勝詮)과 도징(道澄)ㆍ점개(漸開) 등이 있다. 692년(신문왕 12)에 귀국한 승전은 당나라의 법장이 새로 지은 ≪화엄경탐현기 華嚴經探玄記≫ 등 5종의 책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전하였고, 스스로 화엄을 강하면서 ≪심원장 心源章≫을 지었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도징 또한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면서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친 일이 있다. 점개는 흥륜사에서 ≪점찰선악업보경 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잘못을 참회하고 업장을 없애고자 하는 예식인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기 위해 시주를 권하며 다니기도 하였다. 이 밖에 혜통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밀교로써 크게 교화하였으며, 그의 가풍은 전승되어 후대에 진언종(眞言宗, 摠持宗)의 근거가 되었다.

(3) 8세기 전반기의 불교

이때의 신라 불교계의 주류는 원효ㆍ의상ㆍ자장이 닦아놓은 사상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고, 밀본(密本)ㆍ명랑ㆍ혜통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 한 줄기가 병행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존숭을 받은 불보살은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아미타불ㆍ미륵불ㆍ약사여래ㆍ관세음보살ㆍ지장보살이었다.

성덕왕 때에는 태종무열왕을 위해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인왕도량을 열었다. ≪호국인왕반야경 護國仁王般若經≫을 근거로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번영을 기원하는 이 도량이 기록화되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또한 704년 김사양(金思讓)에 의해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이 당나라로부터 들어오게 됨에 따라 금광명도량을 개설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저마다 조상의 영(靈)을 위하여 조상(造像)하는 습관이 크게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감산사(甘山寺)의 미륵존상과 미타존상은 성덕왕 때 중아찬(重阿飡)의 벼슬에 있던 김지성(金志誠)이 세상을 떠난 부모와 전처 등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차차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 등이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이루어진다.

경덕왕은 그 이전 50년 동안에 다스린 다른 왕들에 비하면 훨씬 탁월하게 불교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간 지도자였다. 그는 745년에 우금리(禹金里)의 한 가난한 여인이 민장사(敏藏寺)의 관음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행방불명되었던 아들 장춘(長春)이 되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절에 많은 토지와 재물을 시주하였다.

장춘이 살아서 돌아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있어 나라를 그리는 마음이 불보살을 섬기는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신라불교가 완전히 민족사상 또는 민족신앙으로 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은 이듬해 4월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관용을 베풀고, 150명에 달하는 많은 승려를 출가시킴으로써 중국의 양무제(梁武帝) 이래로 신심 깊은 왕이 취하는 경건한 참회의 행위를 본받았다.

753년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하여 이를 걱정한 왕이 태현(太賢)을 궁중으로 불러 기우(祈雨)를 하도록 하였는데, 태현은 ≪금광명경≫을 강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이것이 ≪금광명경≫을 강설한 최초의 기록이다. 754년에는 왕이 법해(法海)을 불러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행차하여 분향하였다. 이 해에는 황룡사의 범종이 주조되었으며, 755년에는 분황사에 약사여래상을 모셨다. 이는 문헌상 약사여래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약사여래신앙은 ≪약사경≫을 근거로 하여 생긴 신앙으로서, 약사여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 및 십이지신(十二支神)을 권속으로 삼고 있는데, 그를 지극한 마음으로 칭명염송(稱名念誦)하는 이에게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 등을 물리치게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존재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각처에서는 약사여래와 그 권속들을 새긴 동불(銅佛)ㆍ석불ㆍ석탑ㆍ벽화 등이 많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신앙이 점차 증대하여 갔다.

또한 이 당시의 신앙형태는 특정한 한 부처나 보살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므로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섬기는 경우도 많았다. 같은 무렵 강주(康州:진주)에서는 신도 수십 명이 미타사(彌陀寺)를 창건하여 만일(萬日)을 염불 수행하기로 하고 계(契)를 맺기도 하였다. 때로는 아미타불을, 때로는 약사여래나 미륵이나 지장보살을, 그리고 때로는 관음보살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풍조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ㆍ미륵불ㆍ아미타불ㆍ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생각하고 신봉하는 사방불신앙도 생겨났다. 그러나 사방불이 반드시 부처만이 아니라 보살을 포함할 경우도 있었다.

왕자였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오대산에 보천암(寶川庵)을 세우고 수행할 때 체험한 오만진신(五萬眞身) 중 4대(四臺)의 주존(主尊)은 동서남북을 좇아 관세음보살ㆍ아미타불ㆍ지장보살ㆍ석가모니불의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경덕왕 때의 불교관계 기사는 교학연구보다는 불보살에 대한 신앙에 얽힌 영험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차츰 불교가 타력신앙의 경향을 띠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경주 한기리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은 분황사의 천수관음(千手觀音)에게 빌어 장님 아이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아간 귀진(貴珍)의 집 종인 욱면(郁面)은 미타사에서 열심히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다.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는 미타를 염불하고 서방을 구한 지 몇 십년 만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맞이하였다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758년에는 김대성이 발원해서 시작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공사가 끝나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주지로 삼았다. 이 두 절의 정묘한 예술성은 종교적 신심의 외적 표현으로서, 그 조각이 지니는 고도의 정신성은 당시 신라불교가 발휘할 수 있었던 최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58년에는 큰 번개가 일어나 절 16개 소에 진동이 있었고, 760년에 해가 둘이 나타나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월명(月明)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자, 월명은 〈도솔가 兜率歌〉를 지어 이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 〈도솔가〉의 내용은 미륵불에 대한 찬탄의 노래이며 그가 지은 〈제망매가 祭亡妹歌〉는 절실한 미타신앙을 표현하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또 월명과 함께 향가문학 개발의 선구자가 되었던 충담(忠談)도 이때의 승려로서 〈안민가 安民歌〉와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를 남겼다. 이 중 〈안민가〉는 경덕왕의 청에 의해 지은 것으로, 선정(善政)을 찬양하고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충담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茶)를 달여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태현(太賢)과 진표(眞表)가 있다. ≪성유식론학기 成唯識論學記≫ 등 52부 120여 권을 저술하여 원효ㆍ경흥 등과 함께 3대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태현은, 특히 유식학(唯識學)에 뛰어난 대가로서 중국학자들까지도 그의 학설을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한다. 일찍이 출가한 진표는 참회정진으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를 전해받고 새로운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크게 일으켜서 널리 국민을 교화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교화활동은 이전까지 있었던 신라 불교인들의 교화활동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영심(永深)ㆍ보종(寶宗)ㆍ신방(信芳)ㆍ체진(體珍) 등 훌륭한 제자들을 길렀으며, 금산사(金山寺)ㆍ길상사(吉祥寺:지금의 法住寺) 등을 창건하고 교법을 크게 떨쳤다. 이 시대에는 많은 대덕들이 저술과 교화 활동 등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불교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당시의 불교 문화를 찬연히 빛나게 하였다.

[통일 신라 후기의 불교]

8세기 후반과 9세기에 걸친 불교계는 전통적인 교종의 발전이 그 한계점에 도달하여 점차 그 모순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사들의 분주한 중국 내왕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1) 교단의 침체

혜공왕대 이후의 불교교단은 차츰 침체되어서 불교인들의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형편이었다. 불교가 침체된 가장 큰 원인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에 있었다. 통일 이후 민족 대통합의 벅찬 과업을 성취하여 민족문화 창조의 힘찬 저력을 보여주었던 신라왕조였으나, 혜공왕대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안정과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왕좌의 쟁탈전이 잦아지면서 정치는 혼란해졌고 조정은 안정을 잃어 정치가 혼란해짐에 따라 불교도 그 활기를 잃어갔다. 전쟁과 암투로 위정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면서 국가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 또한 갈팡질팡 헤매게 되었으며, 신라는 이미 국가적으로 정도(正道)를 간직하고 기릴 능력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창조적이고 선도적이며 활력에 차 있던 불교문화 활동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한 뜻 있는 불교인들은 혼란을 피해서 산 속 조용한 곳을 찾아 은둔 생활을 하거나 해외로 떠나는 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크게 위축되고 불교 문화는 침체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불교는 그 순수성이 퇴색되고 주술적 신앙과 어우러져 있었다. 불교인지 무속(巫俗)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龍) 세 마리를 당나라 사신이 저주하여 작은 고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김현(金現)과 호녀(虎女)의 만남이 얽힌 호원사(虎願寺) 이야기, 헌강왕 때 동해용왕의 한 아들인 처용(處容)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재앙의 귀신을 쫓았고 용을 위해 망해사(望海寺)를 세웠으며, 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의 귀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등은 귀신들과 관련된 설화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때에 거타지(居厄知)라는 사람이 용왕의 자손으로서 간을 빼 먹는 늙은 중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 다라니(陀羅尼) 모양으로 은어(隱語)를 만들어 진성여왕과 그 유모의 비행을 풍자하는 이야기 등은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불교계가 이미 그 순수성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몇 명의 고승들이 있어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헌덕왕 때의 심지(心地)는 진표(眞表)의 점찰법(占察法)을 계승하고 동화사(桐華寺)에 참당(懺堂)을 지어 대중을 교화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智海)가 궁중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독하였다. 또한 799년에는 범수(梵修)가 당나라로 갔다가 징관(澄觀)의 ≪신역후분화엄경의소 新譯後分華嚴經義疏≫를 가지고 돌아왔다.

802년에는 순응(順應)이 해인사의 중창을 시작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정(利貞)이 완성하였다. 806년에는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지하고 다만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하였으며, 사찰에서 사용하는 기구나 기타 복식에 금ㆍ은ㆍ비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귀족불교의 사치가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헌덕왕 때에는 이차돈의 넋을 기리는 법회가 그 기일(忌日)마다 베풀어졌다. 법흥왕이 없이는 이차돈이 없고, 이차돈이 없이는 신라불교가 없다는 뜻에서 영수선사(永秀禪師)의 주관 아래 이 법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흥덕왕 때인 827년에 구덕(丘德)은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불경 약간 권을 가져왔고, 보요도 귀국하여 해룡왕사(海龍王寺)를 창건하였다.

당나라에 갔던 진감국사(眞鑑國師)는 830년에 귀국하여 쌍계사(雙磎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하고, 지리산 일대에 차〔茶〕나무를 심어 다도(茶道)를 보급하였다. 이처럼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를 내왕하면서 새로운 불교인 선(禪)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선풍진흥(禪風振興)과 관계없이 신라는 갈수록 쇠퇴해 갔다. 경문왕 때의 사람으로 유교뿐 아니라 불교ㆍ도교에까지 통달했던 최치원(崔致遠)은 894년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숨어버린 뒤, 모형(母兄)인 현준(賢俊)과 대사 정현(定玄)의 도우(道友)가 되어 산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신라의 멸망기인 효공왕 이후 경순왕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불교사원에도 온통 불길한 징조만 나타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봉성사(奉聖寺)의 회랑 21칸에 까치가 깃들이고, 참포(斬浦)의 물이 바닷물과 3일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고 하며, 또 영묘사(靈廟寺)의 행랑에 까치와 까마귀들이 다투어 집을 지었다.

경명왕 때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 속의 개가 울었다고 하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튀어나왔다가 들어갔고, 흥륜사에는 큰 불이 났다. 경애왕 때에는 황룡사가 요동하여 서쪽으로 기울어졌다고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935년 10월 마침내 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신라 왕조는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2) 선불교의 전래와 진흥

9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래된 선불교(禪佛敎)는 신라 불교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선종은 이미 통일신라 초기에 중국의 달마선(達磨禪)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4조 도신(道信)의 선이 신라승려 법랑(法朗)에 의해서 전해진 바 있고, 이어서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이 신행(神行)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크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선이 신라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남종선(南宗禪)을 중국의 지장으로부터 전해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에 각각 귀국한 이후의 일이다.

그 뒤 계속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전수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선사찰(禪寺刹)을 세웠고 선종 선포의 거점을 형성하였다. 또한 885년(헌강왕 11)에는 행적(行寂)이 경저(慶諸)의 선법을 받아왔으며, 효공왕 때에는 형철(逈徹)ㆍ경유(慶猷)ㆍ여엄(麗嚴)ㆍ이엄(利嚴) 등이 각각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을 가지고 돌아왔다. 도의는 821년 귀국하여 남종선을 처음으로 신라에 전하였으나, 무념무심(無念無心)을 근본으로 하여 심인(心印)을 전하는 그의 새로운 선풍(禪風)은 경전연구에 젖어왔던 신라 불교계에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은거하여 지냈다. 그 뒤 도의의 법을 이은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이 840년에 귀국하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침으로써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룩하게 되었다. 도의와 함께 수학하였던 홍척은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도(禪道)를 창도하였다. 그와 도의가 각각 남북에서 선도를 창도하였으므로 이를 북산의 남악척(北山義南岳陟)이라고 일컫는다.

홍척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여기서 선법을 선양함으로써 실상산파(實相山派)를 형성하였다. 수백 명의 문도를 두었으며,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의 귀의는 지극하였다. 이 실상산파는 신라에서 최초로 개산(開山)된 선문이며, 그의 제자 수철(秀澈)이 제2조가 되었다.

또한, 일찍이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혜철(惠哲)도 당나라 지장의 심인을 얻고 839년에 돌아와서 크게 선풍을 떨침으로써 태안사(泰安寺)를 중심으로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로는 도선(道詵)과 여선(如禪) 등이 있었다. 중국 지장의 심인을 이어받은 가지산ㆍ실상산ㆍ동리산 등 3파가 호남에서 그 선풍을 떨치고 있을 때 호서지방에서는 보철(寶徹)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無染)이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산하였다.

당나라에 있을 때 백낙천(白樂天)과 각별한 도연(道緣)도 맺고 동방보살(東方菩薩)이라는 별칭을 받기까지 했던 그는 845년에 귀국하여 성주사를 창건한 뒤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무설토론 無舌土論〉이라는 글을 지어 불교와 조도(祖道:조사의 가르침)를 구별하면서, 불교를 응기문(應機門)ㆍ언설문(言說門)ㆍ정예문(淨穢門)으로 나누고, 조도를 정전문(正傳門)ㆍ무설문(無說門)ㆍ부정불예문(不淨不穢門)으로 나누어 선(禪)과 교(敎)의 차이를 논하였다.

한편 837년에는 현욱(玄昱)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서 전법하였는데, 그의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審希)가 봉림사를 창건하고 크게 선풍을 떨치게 되자, 이를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하였다. 그의 법맥을 이은 자적(慈寂)은 이 산문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다.

관동지방에서는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선풍이 진작되었다. 사자산파는 847년에 중국 보원(普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道允)의 제자 절중(折中)이 스승을 계승하여 개창한 것이다. 흥녕사(興寧寺)에 중심을 둔 사자산파는 종홍(宗弘)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도윤과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범일(梵日)은 강릉 굴산사에 자리를 잡고 40여 년간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풍을 진작하였으며, 그의 제자 개청(開淸)이 사굴산파를 형성하였다.

순지(順之)도 경문왕 때에 귀국하여 위앙종(館仰宗)의 선풍을 떨쳤다. 위앙종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을 그려가면서 공부하였는데, 그 원상(圓相)의 갈등(葛藤)이 처음으로 순지에 의해서 신라에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그는 〈사대팔상 四對八相〉의 법과 〈삼편성불론 三遍成佛論〉을 제창하였는데, 삼편성불은 증리성불(證理成佛)ㆍ행만성불(行滿成佛)ㆍ시현성불(示顯成佛)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대통(大通)도 위앙종을 전파한 승려이다.

또한 얼굴이 검기 때문에 흑두타(黑頭陀)라는 별칭을 얻었던 혜소(慧昭)는 830년에 귀국한 뒤 지리산 쌍계사에 6조 혜능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선법을 크게 떨쳤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어산범패(魚山梵唄)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道憲)은 문경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파(曦陽山派)를 개창하였다.

이 밖에도 행적(行寂)과 무착선사(無著禪師)ㆍ홍각선사(弘覺禪師) 등도 널리 선을 선양하였다. 선불교는 교종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을 가하는 동시에,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고방식에 맞설만한 새로운 체질을 만드는 데 힘쓰면서 고대 지성에 대응하는 중세적인 지성으로서의 선종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신라 불교의 해외활동]

(1) 중국에서의 활동 신라시대에는 중국으로 유학한 신라 승려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신라 불교문화에 공헌하였으나, 일부는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학계나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승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원측ㆍ승장(勝莊)ㆍ신방(神昉) 등 유식학파의 승려들과 무상(無相)ㆍ지장(地藏) 등의 선사들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왕손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원측은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등의 강학을 듣고 유식학의 연구에 힘썼다. 그는 삼장(三藏)의 교학은 물론 고금의 장소(章疏)에도 통달하였다.

당 태종의 명에 의하여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렀는데, 그의 계통을 서명학파(西明學派)라 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그의 귀국을 청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를 매우 존경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 중 도증(道證)ㆍ승장(勝莊)ㆍ자선(慈善) 등이 뛰어났으며 도증과 승장은 신라사람이었다. 도증은 원측의 학설을 이어받아 ≪성유식론요집 成唯識論要集≫ㆍ≪성유식론강요 成唯識論綱要≫ 등 무게 있는 저술을 남긴 뒤 697년에 귀국하였는데, 태현(太賢)이 그의 제자라고도 전하여진다.

승장은 ≪성유식론결 成唯識論訣≫ㆍ≪범망계본술기 梵網戒本述記≫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의정(義淨) 등이 삼장을 역경(譯經)할 때는 증의(證義)가 되기도 하였다. 신방도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현장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4인 중의 1인이 되어 대승방(大乘昉)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현장의 역경장에서 증의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륜경소 十輪經疏≫ㆍ≪성유식론요집≫ 등 적지않은 저서도 남겼다.

선사들 가운데서 지덕(知德)은 일찍이 5조 홍인의 11제자 중 1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또 성덕왕의 제3왕자 무상(無相)은 당 현종(玄宗)의 지극한 예우를 받았으며, 뒤에는 성도(成都)에 들어가서 지선(智詵)과 그 제자 처적(處寂)의 선풍을 이어받아 정중사(靜衆寺) 주지가 되었다. 그는 무억(無憶)ㆍ무념(無念)ㆍ막망(莫忘)의 3구설(三句說)을 천명하여 계(戒)와 정(定)에 구애하지 말고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 근본이 되는 혜(慧)를 잊지 말 것을 가르쳤다.

무상과 때를 같이하여 성도에 있었던 김선사(金禪師)도 당 현종이 대규모의 대성혜사(大聖慧寺)를 창건할 때 칙명으로 그 공역(公役)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창건 후 주지로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경덕왕 때에 입당한 무루(無漏)는 8대탑(八大塔)에 예배하고자 인도로 가기 위해 파미르를 넘었으나 도중에 되돌아와서 성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도 왕족 출신으로 지주의 화성사(化城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친 지장(地藏)을 비롯하여 가지(迦智)ㆍ충언(忠彦)ㆍ각체(覺體)ㆍ도균(道均)ㆍ국청(國淸)ㆍ청원(淸院)ㆍ와룡(臥龍)ㆍ서엄(瑞嚴) 등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신라의 사찰이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에 많이 살았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인들의 신앙장소이자 정신적 의지처로 삼기 위해 창건한 절을 신라원(新羅院)이라고 하였다. 신라원은 서해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곳이었을 뿐 아니라 본국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원 중에서 흥덕왕 때에 장보고(張保皐)가 산둥반도의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법화원은 당으로 가는 신라의 유학승은 물론, 일본승려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사찰의 규모나 일상의식, 연중행사는 신라 본국과 같았다.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 동안에 걸쳐 열렸던 축제는 성황을 이루었고,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도 열었다.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겨울에는 ≪법화경≫을 강하였던 강경회는 약 250여 명이 모여 2개월 동안 계속하였다. 신라원 외에도 백낙천이 즐겨 찾았던 향로봉(香爐峯) 대림사(大林寺)에는 신라 승려만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러한 신라사원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인도 구법순례

당나라로 갔던 신라 승려 중 일부는 인도로 순례의 길에 올랐으나 모두들 신라 본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하였다. 삼국 통일을 전후하여 인도로 간 아리야발마와 혜업은 불교학의 최고 전당인 나란타사에서 불경을 연구하다가 죽었다. 당나라 승려 현조(玄照)와 더불어 인도로 갔었던 현각(玄恪)은 40세가 조금 지났을 때 죽었으며, 현태(玄太)는 서장(西藏)을 거쳐 중인도로 가서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참배한 뒤 대각사에서 연구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범어(梵語)에 능숙했던 혜륜(慧輪)은 666년에 인도로 들어가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간 공부한 뒤 도화라(都貨羅)지방의 사원으로 옮겼다. 구법순례 중 수마트라섬의 서해안에 있는 바로사국에서 죽은 2인의 신라유학승이 있었으나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인도 등지에서 생애를 마쳤지만 대범(大梵)과 혜초(慧超)는 인도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불교계에 공헌한 바가 컸다. 대범은 대각사에서 연구하고 돌아왔으며, 혜초는 벵골만의 니코바르군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

일찍이 당나라로 가서 인도승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던 혜초는 해로로 인도에 가서 모든 불적지를 순례한 뒤 다시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는 많은 교화활동을 하였으나 끝내 신라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은 지금도 그 상당부분이 남아 있어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덕왕대에 당나라로 간 원표(元表)는 인도로 가서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당으로 돌아올 때 80권 ≪화엄경≫을 가지고 와서 지제산(支提山) 석실(石室) 안에서 고행을 하였다.

(3) 도일승(渡日僧)의 활동

통일 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라승의 도일(渡日)은 더욱 빈번해졌고, 이에 따라 일본에의 불교문물 전달도 많아졌다. 687년(신문왕 7)에 왕자 김상림(金霜林)이 불상과 바리ㆍ번(幡) 등의 불구를 일본에 전한 것을 필두로 690년에는 전길(詮吉) 등 50여명이 일본에 건너가서 전교하였다.

고승 심상(審祥)도 성덕왕 때 일본으로 가서 크게 교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740년에는 일본의 금종도량(金鐘道場)에서 ≪화엄경≫을 개강하여 일본 국왕을 비롯한 승속(僧俗)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지봉(智鳳)은 일본에 법상종(法相宗)을 전파하였고, 백제왕의 후예인 교키(行基)는 도로를 닦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복지사업을 일으켰으며,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752년(경덕왕 11)에는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일본으로 가서 당시 일본불교의 중심지인 남부 도다이사(東大寺)에 머물면서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다.

758년에는 승려 32명과 비구니 2명, 남자 19명과 여자 21명이 일본으로 가서 무사시노(武藏野)의 한지(閑地)에다 신라도(新羅都)를 설치하고 교화에 힘썼으며, 816년에는 승려 26명이 건너가서 일본 여러 절에 배치되어 불법을 폈다. 반면에 관상(觀常)ㆍ운관(雲觀) 등의 일본승려가 신라로 유학 와서 신라의 불교문화를 수입하여갔으며, 신라명신(新羅明神)을 호국신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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