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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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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782      
[조선] 조선 시대의 불교 2 (민족)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조선 시대의 불교 2)

세부항목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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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우리나라 불교:고려시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1)
불교(우리나라 불교:조선시대의 불교 2)
불교(우리나라 불교:근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현대의 불교)
불교(참고문헌)

(에서 계속)

[조선 중기의 불교]

(1) 문정왕후의 흥불(興佛)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왕비로서 중종의 혹심한 배불 정책 속에서도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545년에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대비로서 섭정하게 됨에 따라 평소에 품었던 불교중흥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대비는 1550년(명종 5) 12월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키고, 그 이듬해에 보우(普雨)에게 교단중흥의 중책을 맡겼다.

이에 보우는 문정대비를 도와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본사로 삼고, 봉선사(奉先寺)를 교종 본사로 삼았으며, 도승법(度僧法)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는 등 교단중흥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에 승과 예비시험을 시행하고 1552년에는 본고사인 승선(僧選)을 실시하였다. 교단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유능한 승려들이 승선에 응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최고 고승인 휴정도 이때의 승과출신으로 명종대에 교종판사(敎宗判事)와 선종판사(禪宗判事)를 역임한 바 있었고, 유정(惟政) 역시 그 뒤의 승과에 등용되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보우가 문정대비의 도움을 받아 불교를 중흥시켜가는 과정에 대해 당시 조정의 대신과 유생들은 크게 반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보우를 타도하려는 상소가 빗발치듯하였고, 전국의 유생들이 동원되어 터무니없는 죄목을 날조하여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규정하고 참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극심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시위까지 하였지만 문정대비는 숭불흥교(崇佛興敎)의 정책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보우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불교 중흥의 기세는 1565년 4월에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사업은 중단되고 보우는 곧 잡혀 제주도로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장살당하였다. 이로부터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다시 떨어져서 사역(使役)과 천대로 그 양과 질이 저하되었으며 불교는 산중으로 다시 숨게 되었다.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한 15년 동안의 불교부흥운동이 비록 중도에서 꺾이고 말았으나, 궁중에 불법숭상의 기풍을 깊게 하고 불교계에 유능한 인물을 배출시켜 교단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후일에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도 승려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보우는 유생들에게 시샘과 미움을 받고 요승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썼지만, 사실은 요승이 아닌 지략과 학식을 갖춘 걸승(傑僧)이요 순교자였다.

(2) 의승군(義僧軍)의 구국(救國)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해 부흥의 빛을 보았던 불교계의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의해 산 속으로 쫓겨가서 살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적침입으로 국가가 위태로워지자 산 속에서 뛰쳐나와 대창과 낫으로 외적을 무찌르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당쟁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지주를 잃고 있던 이 땅을 무인지경처럼 휩쓸어버려 왕성도 무너지고 국왕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다. 이러한 때에 공주 갑사(岬寺)의 청련암(靑蓮庵)에 있던 영규(靈圭)는 500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청주성(淸州城)의 왜적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의주로 피란갔던 왕은 처음으로 승전보가 전해지자 영규에게 당상(堂上)의 직과 상을 내렸지만, 왕의 특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다시 금산(錦山)의 왜적을 물리치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금산성 싸움에서 조헌을 비롯한 700명의 의사(義士)와 영규가 거느린 800명의 의승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교함으로써 왜적도 끝내 성을 버리고 물러나게 되었다. 영규는 바로 휴정의 제자였다.

또 묘향산에 있던 휴정도 왕의 부탁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받은 뒤, 전국의 승려에게 격문을 돌려 모든 불교인이 왜적을 몰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1,500명의 의승을 모았고 그의 제자 유정은 금강산에서 일어나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800명의 의승을 모았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의승을 이끌고 각각 참전하였다.

이 밖에도 의엄(義嚴)ㆍ경헌(敬軒)ㆍ신열(信悅)ㆍ청매(靑梅)ㆍ해안(海眼)ㆍ법견(法堅)ㆍ쌍기(雙冀) 등은 모두 쟁쟁한 의승장들이었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승의 총수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도총섭 휴정은 73세의 고령으로 제자 의엄에게 병권의 일부를 대행시켰으며, 광동 지방에서 달려와 도총섭의 주력 승군과 합세한 유정을 승군도대장(僧軍都大將)으로 삼아서 실전을 도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1월에 이들 의승군은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러 평양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처영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용맹히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유정은 왜적이 정유년에 재침하였을 때도 의승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을 포위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적진 속을 드나들며 적정을 탐지하고 평화회담에도 힘을 썼다.

또한 후방에서도 팔공산성ㆍ금오산성 등의 산성을 쌓는 일을 비롯하여 4,000여 석의 군량미를 조달하고 많은 집기물을 제공하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산성의 방비를 위해 힘쓰다가 잠시 산사(山寺)로 돌아가 쉬었는데, 그때 또 조정에서 일본과의 국교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다시 유정을 불러 그 문제를 일임하였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7월에 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서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그때 그는 국교상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은 일과 그 성과 및 일본인들의 유정에 대한 대우들에 관해서는 흥미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설보화상(說寶和尙)의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때에도 의승군들이 일어나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 중 각성(覺性)과 명조(明照)는 대표적인 의승장이다. 임진왜란 때에 스승 부휴(浮休)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서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던 각성은 1624년 조정에서 승려들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쌓게 하였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역사(役事)를 감독한 뒤 3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 뒤 지리산 화엄사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3,0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또 명조는 1627년(인조 5)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4,000여 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의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 보급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3) 승단의 활동

휴정이 교화력을 펼친 뒤 불교계에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고승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된다. 한편으로 구국을 위한 의승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의 혜명(慧明)을 전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고승은 휴정과 선수(善修)이다.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좌선(坐禪)ㆍ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ㆍ염불(念佛)ㆍ간경(看經) 등의 경향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 위에서 휴정은 선교불이(禪敎不二)를 강조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선을 통하여 견성(見性)을 이룩하는 우리 나라 불교의 전통을 다시 한번 새로운 각도에서 재확립시켰다. 휴정 이후 우리 나라의 불교승단은 거의가 휴정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또한 선수는 휴정과는 동문으로서 휴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대선사였다. 그는 평생 신도로부터 받은 모든 시물(施物)을 남김 없이 그 자리에서 나누어주어 자신이 가지는 일이 없었으며,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도를 묻는 무리가 항상 끊이지 않았다. 휴정과 선수의 제자들은 각각 유파(類派)를 형성하거나 개인적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휴정의 제자에는 유정을 비롯하여 언기(彦機)ㆍ태능(太能)ㆍ일선(一禪)ㆍ인영(印英)ㆍ원준(圓俊)ㆍ해안(海眼)ㆍ인오(印悟)ㆍ법견(法堅)ㆍ경헌(敬軒)ㆍ영규ㆍ처영ㆍ의엄(義嚴) 등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며, 유정ㆍ언기ㆍ태능ㆍ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四大派)를 이루었다. 그 중 언기는 유정과 더불어 휴정문하의 쌍벽을 이룬 이로서, 선과 교를 별문(別門)으로 보지 않는 휴정의 경향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敎) 안에서도 일승(一乘)ㆍ삼승(三乘) 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청중의 근기(根機:깨닫는 능력)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 깊고 얕은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그에 의해서 형성된 편양파(鞭羊派)는 여러 파들 중에서 가장 성하였다.

태능은 임진왜란 때 의승으로 참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축성(築城)하는 일에도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그도 역시 사상적으로 선과 교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현변(懸辯)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 소요파(逍遙派)의 문풍(門風)을 떨쳤다. 또 일선(一禪)은 처음 ≪법화경≫을 배우고 나중에 휴정의 법을 이은 이로서, ≪법화경≫ 3,000부를 찍어 배포하였을 뿐 아니라, 병란으로 승풍이 퇴폐하고 승려들이 선가(禪家)의 본분으로 되돌아오지 않음을 개탄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문하에 충언(食彦)ㆍ태호(太浩) 등 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정관파(靜觀派)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법을 묻는 이에게 ≪도서 都序≫와 ≪절요 節要≫로 결택(決擇:배움의 길을 바로잡음)하게 하고 ≪선요 禪要≫와 ≪서장 書狀≫으로 참증(參證:깨달음을 증명함)하여 스스로 법을 얻게끔 지도했던 경헌, 임진왜란 때 의승장의 한 사람으로서 출정하였다가 은거한 뒤 자연을 벗삼아 순수한 선게(禪偈)를 남겼던 인오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뒤 구례 화엄사에 머물렀던 해안, 스스로 휴정의 문파에 속함을 자처하면서 수많은 이적(異蹟)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소화신(小化身)이라고 전해지는 일옥(一玉) 등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부휴선사의 문하에서도 각성(覺性)ㆍ응묵(應默)ㆍ희옥(希玉)ㆍ성현(聖賢)ㆍ인문(印文)ㆍ담수(淡水)ㆍ희언(熙彦) 등이 7파(七派)을 형성하여 그 문풍(門風)을 크게 떨쳤다. 이 중 벽암의 문파가 가장 성행하였으며, 희언은 보기 드문 초연도인(超然道人)의 풍모를 보여준 고승이었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기풍을 회복한 불교계에는 그 이후에도 휴정의 문손(門孫)과 부휴의 문손 두 계통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불교계에 적지않은 업적들을 남겼다.

휴정의 후대에는 앞에서 본 그의 제자들 이후로 응상(應祥)ㆍ의심(義諶)ㆍ도안(道安)ㆍ지안(志安)ㆍ상언(尙彦)ㆍ유일(有一)ㆍ의소(義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장(學匠)과 종사(宗師)들이 이어 나왔다. 이들 중에는 선지(禪旨)에 깊은 선사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화엄을 중심으로 한 강경(講經)의 대가들이었다. 부휴선수의 후대에도 그의 문하 7파 이후에 처능(處能)ㆍ수초(守初)ㆍ성총(性聰)ㆍ수연(秀演)ㆍ최눌(最訥) 등의 종사들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대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승려 사이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독특한 전법방식에 따라 권속 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히 그 승풍(僧風)에도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그것은 대개 선과 교의 두 종파 중 어느 편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 기준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표면상으로 선과 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큰 차이가 없었고, 포용성의 넓고 좁음에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크게 휴정과 부휴의 2개 파로 나누어져 있던 조선 중기의 승단은 연초(演初) 때에 합일이 됨에 따라, 그 뒤의 승려들에게는 그 전과 같은 뚜렷한 계보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4) 배불(排佛)과 불교계의 흐름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호전되었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주요 장소에 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는 일은 모두 승려에게 맡겼고,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과 신 등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며, 그 밖의 잡역을 시켰다. 승려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심한 천인대접을 받고 있었다.

또한 현종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들의 사회적 냉대는 점차 심해졌다. 현종은 즉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하여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였고 또 이미 승니가 된 사람들도 환속할 것을 권하거나 명령하였다. 그는 서울의 비구니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셨던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位田)은 모두 본사(本司)로 돌리게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1749년(영조 25)에도 있었는데, 영조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였다. 정조는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불교를 옹호하는 듯한 몇 가지 조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철저한 이기주의적 기복신앙이었으며, 다른 왕족, 왕가 주변사람들의 불교신앙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승려들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히 더욱 은둔적ㆍ체념적인 길을 택하거나, 주위의 조건에 적절히 대처하여 이익을 얻어보려는 경향도 나타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반대의 뜻을 천명했던 승려는 처능이었다. 처능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간폐석교소 諫廢釋敎疏〉를 올려, 조선왕조의 척불책과 배불사상을 논파하였다. 이 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길고 분량이 많은 것이었으며, 현종의 더 심한 박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사상 조류로는 ≪화엄경≫의 중시를 들 수 있다. 우리 불교사에서 ≪화엄경≫의 사상이 매우 중시되어 온 것은 하나의 전통이다. 이 시기에 와서 그 전통은 거의 모든 문중, 거의 모든 승려들 사이에 아무런 이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편양 언기와 부휴ㆍ선수의 문중에서 특히 중시되고 있었다. 의심(義諶)은 ≪화엄경≫의 동이(同異)를 연구한 뒤 음석(音釋)을 가하였다.

같은 편양문하의 도안(道安)은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릴 정도로 ≪화엄경≫을 자주 설법하였다. 정혜(定慧)는 화엄에 통효하여 그것을 강설하는 데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며, 지안(志安)은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모인 청중이 1,400명이나 되었다. 새봉(璽燈)도 선암사(仙巖寺)에서 화엄강회를 베풀었는데, 그때 모였던 1,207명의 회중(會衆) 명단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 때의 의소(義沼)는 ≪화엄사기 華嚴私記≫를 지었고, 상언(尙彦)은 소실된 ≪팔십화엄 八十華嚴≫ 간본을 새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조선 시대의 문예진흥기인 영조ㆍ정조 때에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유ㆍ불ㆍ도 3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도 이 시대 불교사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수초(守初)를 비롯한 성총(性聰)ㆍ수연(秀演) 등이 다 그 방면의 선구자요, 의소ㆍ응윤(應允)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후반의 불교수행은 대개 선이냐, 교냐, 염불이냐 하는 세 가지로 나뉘어왔다. 이 밖에 진언집(眞言集)이 생기고, 여러 가지 의식이 성행되면서 밀교적 경향도 다시 대두한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론적으로 회통시키는 데는 화엄의 도리가 필요하며, 실천으로는 선의 실수(實修)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부족했던 승려나 거사들 사이에서는 잡신(雜信)ㆍ미신(迷信)의 경향도 강하게 보였던 것이 이 시대 불교의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 당대의 화엄종주였던 도안은 노장(老莊)에도 밝고 시문에 매우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나, 그의 사상은 매우 잡박하여 오히려 선가(禪家)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귀매(鬼魅)의 정령, 객관적인 정토를 다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묘향산의 운봉(雲峰)은 도안만큼 이름은 나 있지 않았으나, ≪심성론 心性論≫을 저술하면서 원효의 문장을 방불하게 하는 글을 지어 원만공적(圓滿空寂)한 심체(心體)가 한량없는 공덕과 무량한 묘용(妙用)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또 새봉은 선ㆍ교를 혼합할 뿐만 아니라 북두(北斗)를 숭배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七星信仰)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승려들 사이에서는 반야(般若)의 관조(觀照)가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의소는 그 관(觀)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으로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증명하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또 최눌은 음양오행의 설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조석(潮汐)을 그것으로 풀이하였고 산신(産神)ㆍ역신(疫神)ㆍ신신(身神)ㆍ명신(命神)ㆍ음양오행신(陰陽五行神) 등이 실재한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몸이 약하다고 설명하였다.

[조선 후기의 불교]

조선 후기의 불교계는 이렇다 할 종(宗)이 없는 무종파의 교단으로 존립하였다. 비록 종파나 종명(宗名)이 없었지만 불교는 엄연하게 존재해 있었고, 차별적인 종명과 종지(宗旨)가 없는 오직 하나로 이루어진 통불교(通佛敎)의 교단이었다. 그러나 이 교단은 불교인의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척과 억압의 정책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팽개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무종파의 상황은 법맥을 중심으로 하여 본다면 교단의 주축은 선종이었다. 그러나 휴정과 선수 이후로 그 법손(法孫)들이 수선(修禪)에만 전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교(經敎)의 연구에 힘쓴 경향이 짙었고, 한때는 간경(看經)ㆍ강학(講學)에 전념하는 고승들이 수없이 이어 나왔다. 그리하여 긍선(亘璇)의 ≪선문수경 禪文手鏡≫ 저술 이후,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담(禪談)의 바람이 일어났다. 또 승려들은 고성염불(高聲念佛)로 정토(淨土)에 왕생할 업(業)을 닦았고, 때로는 진언을 외워 비밀법(煉密法)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단의 변천 결과로 승단 안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승려의 수행도 선과 교와 염불의 3문으로 나누어짐에 따라서 대부분의 대사찰에는 선방ㆍ강당ㆍ염불당을 갖추고 있었다.

(1) 선론(禪論)과 염불회(念佛會)

긍선이 선학 연구의 지침서로서 ≪선문수경≫을 저술하자 이때부터 조선 말기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선의 연구서로서 긍선은 이 책에서 조사선(祖師禪)ㆍ여래선(如來禪)ㆍ의리선(義理禪)의 3종선(三種禪)을 세우고,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格外禪)으로, 의리선을 최하급의 선이라고 보았다. 이 ≪선문수경≫에 대해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이는 근세의 고승으로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펼친 의순(意恂)이다. 그는 ≪사변만어 四辨漫語≫를 지어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활인검(活人劍)과 살인검(殺人劍),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백파의 선론을 반박하였다.

또 홍기(洪基)도 긍선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선문증정록 禪門證正錄≫을 지어 긍선의 선론을 지적하고, 고석을 인증하여 그 잘못된 바를 변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긍선의 문인이며 법손인 유형(有炯)은 ≪선원소류 禪源溯流≫를 지어 의순의 ≪사변만어≫와 홍기의 ≪선문증정록≫을 다시 반박하고 긍선의 ≪선문수경≫을 비호하였다.

그 뒤 서진하(徐震河)는 ≪선문재정록 禪門再正錄≫를 지어 긍선ㆍ의순ㆍ홍기ㆍ유형의 선론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여기서 서진하는 긍선의 설을 찬성하거나 또는 반대하였지만, 그때까지의 선론을 총정리하여 집대성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긍선의 선론을 중심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선에 이론이 가해지고 논쟁이 일어남으로써, 조선 말기 불교계의 한 시대적 특징으로 전개되어 갔다.

또 이 시대의 불교계에는 고성염불로 일과를 삼는 미타정토신앙의 풍조가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미타신앙은 불교 전래와 거의 동시에 이 땅에 들어왔고 통일신라 때부터 성행하였다. 특별히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은 보지 못하였지만, 미타염불은 모든 불교인에게 거의 보편화되었고, 특히 조선 말기에는 크게 성행하였다. 많은 사찰에는 염불당이 있어서 만일회(萬日會)를 설(設)하고 아미타불을 칭념하여 정토왕생을 원구하는 염불의 모임들을 가졌다.

불교도들이 1만 일을 한정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이 만일염불회는 부쩍 성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건봉사(乾鳳寺)와 망월사(望月寺)의 염불회가 유명하였다. 특히 건봉사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대법회를 가졌다. 처음은 순조 때에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번째는 철종 때에 벽오(碧梧)가 시작하여 마쳤으며, 세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또한 이 시대에 와서 승려들 사이에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참선ㆍ간경ㆍ염불의 삼문(三門)으로 수행을 했던 이시대의 승려 중 참선과 염불하는 승려를 수좌(首座)라 하고 경을 공부하는 승려를 강사(講師)라고 불렀다. 이들 수좌와 강사는 가급적이면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중의 사암(寺庵)에 머물렀으며 사원의 사무와 관가나 유생들에 의해 주어지는 역임(役任)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원을 운영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할 승려층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수도하는 수좌와 강사를 이판승이라 하고, 사원의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주지 등의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였다. 이판승은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에 의하여 교단의 혜명(慧明)을 계승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고, 사판승은 비록 무식하고 공부에는 힘쓰지 못하였으나 유생들과 위정자의 횡포를 견디면서도 사찰의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여 사원의 황폐를 방지하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2) 승려 입성(入城)의 자유

조선 시대에는 국가의 역사(役事)가 도성 안에서 있을 때에만 승려의 입성이 허락되었을 뿐, 대부분의 시기에는 천인과 죄인처럼 취급되어 도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4월에 입성의 금령(禁令)이 해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승려들의 힘이 컸다. 이듬해에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일본승려들과 합동으로 성내의 원동(苑洞)에서 무차대법회(無遮大法會)를 베풀었다. 그 뒤 1898년 봄에 다시 성내의 승려를 축출하고 출입을 금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내에 출입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자 승려들은 자유롭게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할 수 있게 되었고, 배척과 천대의 굴레에서 벗어나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되었다. 암담하였던 불교는 다시 밝은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의 관리를 다시 받게 되었고, 또 일제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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