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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9 (목)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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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74      
[조선] 근대 이후 한글의 역할 (민족)
한글(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

세부항목

한글
한글(훈민정음)
한글(한글에 대한 이름)
한글(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의)
한글(훈민 정책과 훈민정음)
한글(국문 문학의 발전 과정)
한글(훈민정음의 의의와 활용)
한글(근대 이후 어문 생활에서의 기능)
한글(한글 인쇄 활자의 기계화 문제)
한글(한글의 전산화)
한글(참고문헌)

[대한제국시대의 국문 사용]

1894년 갑오경장이라는 근대적 대개혁을 단행하는 가운데, 대한제국 정부는 1894년 11월 칙령 제1호 공문식(公文式)을 공포하여 종전의 한문 대신에 국문을 공문으로 바꾸었다. 450년 만에 언문이 비로소 공식적인 국자의 자격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 칙령 제14조에는 국문을 본으로 하되 한문 번역 또는 국한문을 덧붙인다는 과도적 조처도 규정해 두었다. 1883년 1월 ≪한성주보 漢城周報≫가 이미 그러한 것이었지만, 1894년 12월의 이른바 〈홍범(洪範) 14조〉라 불리는 〈종묘서고문 宗廟誓告文〉과 〈교육입국조서 敎育立國詔書〉는 이에 근거한 공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결정은 점차 변질되어, 본으로 삼는다던 국문보다 과도적인 국한문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원칙은 지나친 이상이었고, 과도적인 3원제는 현실적인 국한문으로 낙착된 것이다. 1895년 7월 소학교 국어 교과서인 ≪소학독본≫이 우선 국한문만으로 서술되었다.

당시의 상황은 사실 이 갑작스러운 개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정부의 ≪관보≫를 예로 들면, 갑오경장과 함께 순한문으로 창간되었다가 이듬 해 국한문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08년 2월 6일 ≪관보≫ 관청사항에서 공문 서류에 국한문을 사용하지 않고 순한문으로 쓰거나 이두를 혼용하는 것은 규례(規例)에 어긋난다고 경고하고, 각 관청의 공문 서류는 일체 국한문을 교용(交用)하고 순국문이나 이두, 외국 문자의 혼용을 부득(不得)함이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이 시대 문자 생활의 혼란상을 말해 주는 동시에, 당초의 칙령 공문식이 사문화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또한, 종래의 3원제가 인습적으로 잔존했다는 뜻으로도 이해된다. 여기서 인습이란 양반층의 한문, 평민 상층의 이두, 평민 하층의 국한문, 서민층의 국문으로 구분되던 것을 말한다. 즉 서민층의 국문을 본으로 삼으려던 당초의 이상은 깨지고, 평민 하층의 국한문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된다.

이러한 양상은 물론 당시의 사회 계층과 밀접하나, 근대화와 더불어 갑자기 늘어난 어문 생활의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긴급히 요청된 것은 새로운 질서였다. 이는 바로 일반적인 국어의 근대화, 즉 언문일치(言文一致)였다. 언문일치는 일상 언어로 표현하자는 현실화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 시대에 방향을 잡은 국한문이라는 것은 전통적인 언해(諺解) 법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였다.

언문일치가 실현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1910년 7월에 발표한 이광수(李光洙)의 논설은 이미 그 진수를 피력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용문(用文)에 대해 국한문이란 순한문에 국문으로 토를 단 것에 불과하다면서, 마음으로는 순국문을 쓰고 싶지만 이는 이해하기 어려워 신지식 수입에 저해가 된다고 전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한문으로 된 말만 한문으로 쓰고 그 밖의 말은 모두 국문으로 쓰자고 주장하였다. 이 방안은 물론 궁책이지만 현실에 입각한 것으로서, 구두어에 한자를 혼용하자는 것이니 언문일치를 주장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한문을 국문으로 엇바꾸는 것과 같은 대개혁을 단행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는 데 있었다.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이 순조롭지 못했던 탓이지만, 당시의 당면 과제는 조선 말기의 혼란 상태에서 하나의 국어 규범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작업이 한학자의 힘으로 될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국어에 관한 학자나 어떠한 기관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정부 차원의 정책이 있을 리 없었고, 문제를 해결할 뚜렷한 대안도 없었다. 실제로 받침을 할 것인지 연철을 할 것인지, 또는 아래아가 무엇인지 모두가 의문이었다. 특히 아래아의 정체와 처리를 둘러싼 문제는 이 시대 최대의 의문이었다.

당시 이에 대해 이봉운(李鳳雲)·주시경·지석영(池錫永) 등이 표명한 의견도 빗나가고, 지석영이 개인적으로 상소한 〈신정국문 新訂國文〉은 기묘하게 창조된 신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절차를 통과해 1905년 7월 공식적으로 백일하에 공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래아 대신에 괴상한 (ㅣㅡ합음)자를 쓰라는 불가능한 명령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의론이 분분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학부에 설치된 것이 국문연구소였다.

1907년 7월 최초의 국어 연구기관으로 창설된 이 연구소는 2년 후인 1909년 12월 10제(題)에 걸친 당면 정책 방안을 의결하여 보고하기에 이르렀으나, 그 타당한 최종안도 경술국치로 인하여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이능화·주시경·어윤적(魚允迪) 등이 개화기의 국어학자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이 시대는 정책 부재의 상태로 종말을 고하였다. 즉, 새나라의 국어를 가다듬어 일정한 규범을 세우려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어문 생활의 개선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국문을 본으로 한다는 당초의 이상도 빛을 잃고, 국어 순화를 지향한 국어 운동이 개인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져나갔을 뿐이었다.

1886년 4월 창간된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은 순국문에 띄어쓰기를 해서 3년이나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졍리≫(1897)도 국어 존중에 기여했지만,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한 주시경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국어 규범의 확립에 각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는 표의적 형태 표기에 착안하여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중의를 모으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2세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다. 그가 독자적으로 초기 국어 문법의 수립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저술을 통해 주장한 새받침이 바로 그것이다.

1909년 ≪국문연구≫에는 새받침 17종 93개가 제시되었으나, 이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최근 발견된 ≪한글모죽보기≫에 의하면, 그는 1907년 7월부터 학교 이외의 국어강습소에서만도 중등과 300여 명, 고등과 70여 명, 하기강습생 100여 명을 각각 배출했고, 1908년 8월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모의 전신)를 창립하여 그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것은 1930년대 위세를 떨친 뒤 주시경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대 16년간의 국어 정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선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이상에 치우쳐 순국문을 채택했다가 공식 절차도 없이 전통적인 국한문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신정국문〉의 무모한 채택으로 빚어진 문제를 계기로 국문연구소에서 작성한 정부 차원의 〈국문연구의정안〉은 중요한 국어 규범의 확립 방안이었으나 당초부터 서둘렀어야 했던 이 작업은 시대 의식의 부족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국어의 근대화라는 중대한 소임은 유기되고, 현실에 이끌려 한문을 국한문으로 바꾼 것이 그 하나의 실효가 되었을 뿐이다.

한편, 시기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던 국어 순화는 정책적으로 고려되지 않고 민간의 국어 운동으로 맡겨져 침략에 맞서는 자주 독립 운동의 한 방법으로 전개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도 현실을 떠난 이성적 이념 아래 이루어졌던 탓에 일반적인 호응이나 사회적인 확산은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 시대적 배경에도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갑오경장이라는 개혁 자체가 일제의 강요로 강행되었고, 청일전쟁과 한일공수동맹 및 청일강화에 따른 1895년 일제의 내정 간섭, 러일전쟁과 제1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 러일강화와 제2차 한일협약에 따른 1905년 일제의 통감정치, 고종 양위와 제3차 한일협약에 이은 1907년 일제의 차관정치, 경찰권 박탈에 이은 1910년 일제의 강점이 연쇄적으로 이루어졌던만큼, 근대적 신생국 대한제국은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스스로의 정책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특히, 1905년 통감정치를 시행하면서 일본어를 병용하기 위한 편의로 국한문의 시행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수립했을 것으로 보이는 국문연구소의 의정안도 일제에 의하여 폐기된 것이 거의 분명하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안정이나 새로운 발전을 뒷받침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의 국문 사용과 수난]

대한제국은 일제의 일방적인 강압에 의해 멸망하고 그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 강점기는 단순한 강점이 아니라, 민족을 근본적으로 말살하려는 흉계를 가지고 철저한 동화정책이 끈질기게 시행된 시기였던만큼, 우리 국어의 수호와 발전은 심각한 위기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흉계도 단계적으로 이루어져, 그 식민 정책은 대개 전기인 무단정치시대와 중기인 문화정치시대와 후기인 강력정치시대의 3기로 구분된다.

8대 35년에 걸친 총독정치를 통해 종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국권의 상실과 함께 대한제국의 국어가 민족어로 전락하고, 외국어였던 일본어가 대신 국어로 등장한 것이었다.

일본은 1911년 8월 〈조선교육령〉에서 성급하게 국민 정신의 함양과 일본어 보급을 교육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그 언어 정책은 출발부터 1국 1국어의 원칙을 악용하여 일본어 교육을 통한 국민 정신의 함양, 즉 노골적인 민족말살 동화예속 정책을 감행하려는 것이었다.

식민 정부는 취조국(取調局)에서 해오던 우리 민족 문화의 조사와 함께 1911년 4월 ≪조선어사전≫ 편찬에 착수했고, 내무부 학무국에서는 1912년 4월 통일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제정하였다. 이것은 저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최초로 실시된 국어정서법이었다.

이 철자법은 국문연구소에서 이미 작성한 〈국문연구의정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따로 실태를 대상으로 성문화한 표음주의 철자법이었으며, 그 뒤 교과서에 채택되어 약 10년간 국어 규범의 기준이 되었다. 당시 형식적으로나마 조선어 교육을 병행했으니, 일본어 위주의 이중 언어 정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에서는 조선광문회의 ≪조선어자전≫(말모이)을 비롯한 사전편찬, 김희상(金熙祥)의 ≪조선어전≫을 비롯한 문법서의 저술, 주시경을 중심한 조선어강습원의 국어 강습 등 국어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국어 연구 내지 운동은 그 시대 상황으로 보아 이념적인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된다.

일제의 무자비한 무단정치는 이윽고 민족적 민중 항거에 부딪쳐 난관에 빠졌다.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강점에 항거한 일대 민중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일제는 부득이 유화정책을 내세워 약 18년간의 문화정치를 시작하였다. 민간 신문의 허가, 관습의 존중과 차별 대우의 철폐, 교육제도의 개선과 조선어 장려 등 표면적인 유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우선, 저들이 계획한 ≪조선어사전≫이 1920년 3월 출판되었고, 이에 따라 1921년 3월 〈언문철자법〉이 개정되었다. 이것은 표준어와 국어 규범의 재정비라는 의미가 있었다. 어문 생활에서는 3·1운동을 고비로 1920년대에 언문일치가 이루어졌고, 민간 신문의 보급, 잡지의 융성, 민간의 계몽 운동 등으로 문자 생활이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저들의 20년 시정 실적은 1930년 통계로 취학률 24%, 문맹률 78%였다. 표면적으로는 문화정책을 내걸었지만, 저들이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항 투쟁은 1929년 광주학생사건으로 표면화되었다.

한편, 1920년대에는 미진한 국어 규범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미 1921년의 철자법 개정에서 어윤적·권덕규(權悳奎) 등 후주시경파에 의해 제기되었다가 보류된 표의주의 철자법이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후주시경파는 1921년 12월 학회를 결성하고 운동에 나섰다.

1930년 2월 개정한 저들의 〈언문철자법〉에서는 다수 후주시경파의 참여로 표의주의 철자법이 채택되었다.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논쟁은 첫번째 1446년 ≪훈민정음해례≫, 두 번째 1909년 국문연구소 〈국문연구의정안〉, 세 번째 1921년 개정된 〈언문철자법〉, 네 번째 1930년의 개정 과정에서 일어난 철자 파동 등 거듭된 대결을 거쳐 비로소 형태 표기로 낙착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이로써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후주시경파의 조선어학회는 철저하지 못한 〈언문철자법〉에 대한 반대, 전통적 보수파를 대표하는 박승빈(朴勝彬) 중심의 조선어학연구회는 양자에 대한 반대로 치열한 논쟁이 재연되었던 것이다.

다섯 번째 논쟁인 이 대결은 1932년 11월 동아일보사 주최의 토론회,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공표, 1934년 7월 재래식 정음파의 반대 성명에 이은 피차의 중상적 비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불꽃을 튀겼다.

그러나 많은 학자를 포용한 한글파는 문화계의 호응을 받으면서 1936년 표준어사정, 1940년 〈외래어표기법〉 제정에 이어 1942년 ≪조선말큰사전≫ 출판에 착수하여 1921년의 개정 철자법을 주장하는 정음파보다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32년 창간한 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 1934년 창간한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 ≪정음≫, 1931∼1934년 민간 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강점하의 현저한 국어 운동으로서 일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30년대 전후의 논쟁 및 출판물의 융성은 식민 정부의 언어 정책을 초월한 국어 운동의 고조와 확산을 자아냈다. 이 운동이 독립 운동의 일환이었던만큼 일제는 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군벌에 의하여 다시 강력정치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허울 좋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살벌한 분위기의 민족 말살과 저들의 전쟁을 위한 총동원이 있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1938년 4월의 파멸적 교육령에 의한 조선어과 폐지에 이은 조선어 금지와 일본어 상용의 강요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성전완수(聖戰完遂)라는 미명하에 전국토를 병영화하고 더욱 무자비한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은 악명 높은 것이었다.

1920년부터 용인해 왔던 학회 활동을 악랄한 〈치안유지법〉을 적용, 마구 엄단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한징(韓澄)·이윤재(李允宰)가 감옥에서 숨지고, 출판 허가까지 받았던 사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35년, 특히 그 후기 8년간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사에서 전례가 없는 암흑기였다. 언어 정책이라고는 일본어의 강요뿐이고, 줄기차던 민간의 국어 운동은 뿌리째 뽑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일본어 해득률은 저들의 통계로 1919년 1. 8%, 1930년 8. 3%에서 1938년 12. 3%, 1943년 22. 1%였고, 1945년에는 27%로 추정된다. 그 통치가 5년 더 연장되었다면 45%로, 10년 연장되었다면 85%로 상승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 통계에 포함되어 있는 10세 미만 인구 34.2%를 제외하면, 1943년 22.1%는 33%, 1945년 27%는 역시 41%로 상승된다. 마찬가지로 45%는 68%로, 85%는 128%라는 초과 현상까지 나타날 것이다.

저들의 민족어 말살 정책은 1894년 이후 12년간의 일본어 부식기, 1906년 이후 30년간의 2어 병용기를 거쳐 1937년 일본어 전용기를 만들었다. 60년 기한으로 그 목표 달성을 꾀하였을 것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며 8·15광복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따라서 1931년 이후 10년에 걸쳐 혁혁한 업적을 쌓은 조선어학회의 노력은 오유(烏有)로 돌아가고, 그 결정체인 ≪조선말큰사전≫은 완성되지 못한 채 소멸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사전은 국어 규범을 세우기 위한 맞춤법·표준말·외래어표기 등을 장기간에 걸쳐 제정하고 이것을 기준으로 집대성한 최초의 국어 규범 사전이 될 것이었다.

국어 규범의 확립은 국어 근대화의 가장 긴급한 기초 작업인데, 이 중요한 문제가 완성될 찰나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이미 매듭지은 일련의 국어 규범이 책자로나 존재할 뿐, 소멸 단계에 있는 국어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가장 암담한 시기가 되었다.

그러나 강인한 우리 민족은 그들의 계획대로 쉽사리 소멸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총칼 앞에서 겉으로는 복종했지만, 민족 의식을 지닌 집안에서는 개인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가르쳤고, 일제 막바지인 1945년 7월에도 대한애국청년당이 부민관(府民館)에 투탄한 무력 투쟁이 있었다. 장하고 거룩한 민족 정기가 끈질기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의 국문사용]

1945년 8·15광복은 어문 생활에도 새로운 광명을 가져다 주었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이극로(李克魯)·최현배·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이 광복과 더불어 석방되고, 학회는 이들을 맞이하여 열흘 만인 8월 25일 재건되었다. 당시 최대의 과제는 시급한 국어 회복이었다.

이 학회는 즉시 국어 교과서의 편찬, 국어 강습과 국어 교원 양성, ≪한글≫지의 속간과 중단된 국어사전의 편찬 등 당면 방침을 정하고, 정부 차원의 국어 정책과 민간 차원의 국어 운동을 동시에 짊어지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8년간의 암흑기를 겪고 난 당시의 상황은 암담하였다. 국어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층은 문맹이었고, 안다는 층도 국어 규범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어 교원은 없었고, ≪한글첫걸음≫(1945. 11.)은 한때 국민학교와 중학교의 같은 교재였으니, 당시의 실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학회는 단일 지도 체제 아래 이 난국을 타개해갔다.

조선어학회는 1945년 9월 미군정이 시작된 뒤에도 여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속 활동하였다. 군정하의 공용어는 일본어 대신 영어로 바뀌었으나, 정부 차원에서도 국어 순화는 긴급한 시책으로 행해졌다.

1946년 왜색일소를 위한 학술용어 제정, 1948년 같은 목적의 ‘우리말 도로찾기’가 그것이었다. 다만, 1945년 12월 미군정청에서 결정한 교과서의 한자 폐지는 1947년 논쟁을 겪으면서 결국 한자 병기를 취하였다.

한편, 국어 규범은 일제하에 작성된 조선어학회의 규정이 교과서에 채택됨으로써 시행되었으나, 1년여가 지난 1947년 난삽하다는 일선 교단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는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여섯 번째 대결이었으나 역시 학회의 권위로 진정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학회의 ≪큰사전≫인데, 수정 과정이 지연되어 국어 규범 집성을 갈구하는 모두에게 큰 불편을 안겨 주었다. 1947년에 1권이 나오고, 10년 만인 1957년에야 6권으로 완간되었으니, 국어 규범의 혼란은 그만큼 지속된 셈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어 정책은 그대로 계승되어 큰 변동은 없었으나, 국어 규범은 안정되지 못하였다. 1946년 일부 사이시옷과 띄어쓰기를 수정한 〈맞춤법통일안〉과 ≪표준말 모음≫은 학회 자체의 사전에서 또는 문교부 교과서에서 임의로 계속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는 문교부에서 1948년 아예 새로 제정함으로써 일제하에서 이룩된 3대 사업은 크게 변질되었다. 게다가 단일한 규범이 서기 전에 1950년 6·25가 일어나, 이번에는 모든 복구가 다급한 과제로 등장했다.

3년 만에 부산에서 환도한 정부는 계속된 대통령의 유시에 따라 1954년 3월 한글 간소화와 국문 전용을 정책으로 결정하였다. 간소화가 강행되자 이에 대한 반대가 심하여 한글 파동으로 번졌다.

이는 음소표기 대 형태표기의 일곱 번째 대립으로서 가장 치열한 것이었으나, 반 년 만에 대통령의 후퇴로 종식되었다. 그리고 국문 전용은 공문과 간판에 그쳐, 1951년 9월에 제정한 상용 한자를 근거로 하여 국한자 혼용의 2원제가 여전히 지속되었다.

국어를 되찾아 교육한 지 10년이 지난 1956년에는 일선에서 진실한 반성의 소리가 비등하기 시작하였다. 치열해진 입학 시험과 관련하여 국어 규범과 학교 문법의 통일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본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시행 불가능한 1948년 문교부의 〈외래어표기법〉을 1958년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과 1959년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외래어의 원음주의가 여전히 지속되어, 이 역시 교과서는 교과서대로, 신문은 신문대로 통일을 기하지 못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은 1961년 5·16 이후에 나타났다. 1962∼1963년 문교부 한글전용특별심의회의 한자어 추방 정책, 1963년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 공포, 1970년 교과서의 한글 전용 단행 등 계속된 일련의 정책이 그것이나, 모두 현실과 유리된 방안으로 거듭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한자어 추방은 일반에게 백안시되었고, 학교 문법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으며, 한글 전용은 2년 만인 1972년에 종전대로 환원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의 대통령 지시에 따른 1970년의 한글전용촉진책에 담긴 알기 쉬운 표기 방법과 보급 방법은 1969년 상반기 시한을 넘기고 1973년 6월에야 성안되었다.

이것은 〈맞춤법통일안〉 실시 30년 만에 규정과 실태 사이의 괴리 현상을 현실화하여 역사상 최초로 국정화하는 작업이었으나, 사세의 변화가 겹쳐 1979년에 겨우 연구용으로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그 내용은 준히읗과 사이시옷의 폐기와 같은 이미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 원형 표기와 띄어쓰기의 축소와 같은 엇갈리는 문제의 규정화 등으로 집약된다. 특히, 밝혀 적기로 되어 있는 준히읗은 가령 규정대로 ‘적당ㅎ지 않다’로 쓰지 않고 거의 ‘적당치 않다’로 쓰고 있으며, 또한 한자어의 사이시옷도 ‘냇과의원’등으로 쓰지 않고 ‘내과의원’등으로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문화된 규정의 폐기는 불가피한 일이다. 표음화의 경향인 그 어원 표시의 완화는 확실히 현실 타협의 방법이나, 국어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좀더 일찍 서둘러야 했을 것들이다.

한편, 한자 문제는 신문에서는 각기 제한 한자를 사용하는 방침을 취하고, 교육에서는 한글 전용의 모순과 여론에 부닥쳐 1971년 12월에 다시 한문 교육을 시행하게 되어, 기초 한자 1,800자를 제정하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70년의 한글전용정책을 번복하여 종전으로 환원했음을 뜻하므로, 국한자 혼용과의 2원제가 다시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신문의 한자 사용은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75년 신문 정치면의 한글 표기가 1974년에 비해 10% 이상 늘었다고 하며, 한 통계는 또 신문 기사 전체의 한자 사용률이 1950년대 46.16%, 1960년대 28.29%, 1970년대 20.12%,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8.21%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12% 이상 줄어든 것은 한글 세대의 등장과 유관하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경향은 잡지나 단행본 등 출판물에서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으로 보이며, 한 나라의 언어 정책과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해 국어 순화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개선되지 못하였다. 1962년 한글전용특별심의회 방안이 실패한 뒤, 1963년 문법 파동을 빚은 문교부의 〈학교문법통일안〉에서도 명사식 용어가 채택되었다. 1949년 이후 교과서에 적용되던 292개의 순수한 우리말과 한자음으로 된 말과의 두 갈래 용어가 18년 만에 통일되었다.

순수한 우리말이라는 표현은 허울 좋은 명목일 뿐, 실상은 ‘씨갈(품사론)·월갈(문장론)·함께자리(공동격)·안박인꼴(부정형)’ 등과 같이 부자연한 인조어이므로 폐기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논란에서 나타난 거부 반응을 통하여 국어 순화는 일반화된 한자어까지도 추방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1960년대의 이 귀결은 일제하의 국수주의적 운동과 다른, 그 성격과 방향이 잡힌 사실로서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정부는 다시 1976년부터 문교부에 국어순화운동협의회를 두어 각 부처에서 의뢰한 용어를 심의, ≪국어순화자료≫를 책자로 계속 출판하고 있다.

한편, 1980년대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에 대비, 1982년 정부의 국어 및 외래어 표기 통일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우선, 1959년 2월 개정한 문교부 〈한글의 로마자표기법〉을 1983년 12월에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으로 개정하여, 종전의 내국인 위주의 형태주의에서 매큔라이샤워 표기체계와 같은 외국인 위주의 표음주의로 전환하였다. 한 나라에서 문교부는 형태표기를, 건설부는 매큔라이샤워 표기에 의한 표음표기를 취하던 모순이 이로써 해소되었다.

또, 1958년 10월 개정한 문교부의 〈로마자의 한글화표기법〉을 1985년 12월 〈외래어표기법〉으로 개정하여 미진하나마 현실음에 접근시키는 방향으로 바꾸었다. 이들은 각각 이론이나 이상보다도 현실과 편리의 존중을 지향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으며, 어문 생활의 실제와 공식적인 규정 사이의 괴리 현상을 훨씬 좁히게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런데 1984년 공포된 문교부의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반달표)와 ’(어깻점) 등 특수부호를 사용함으로써 컴퓨터에서 입력과 검색이 불편하여 다시 개정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 7월 문화관광부 고시 제2000-8호로 제정된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정부에서 고시한 네 번째 표기법이다. 이 표기 체계는 국어의 발음에 따라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특수 부호는 사용하지 않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특수 분야에서 한글 복원을 전제로 표기할 경우에 대비하여 전자법안을 따로 마련하였다.

〈한글맞춤법〉은 1933년 공표 이후 부분적 수정을 거쳤으나, 1950년대 후반에 점차 자리를 잡으면서 사문화되거나 사정을 기다리는 사항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완이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그대로 사회적으로 수용됨으로써 사전 및 교과서에까지 반영되었다.

그 동안 표준어 사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79년 문교부에서는 〈표준말재사정시안〉 및 〈한글맞춤법개정시안〉·〈외래어표기법개정시안〉 등을 마련했다가 1981년 학술원으로 이 작업이 이관되었고, 1985년 국어연구소(1990년 국립국어연구원으로 격상됨)가 발족하면서 다시 이 연구소로 이관되어 문교부 국어심의회의 심의를 거쳐 1988년 1월 〈표준어규정〉과 함께 〈한글맞춤법〉이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관보 제10837호에 고시되었으며, 1989년 3월 1일부터는 이 새로운 맞춤법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김민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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