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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24 (금) 20:11
분 류 사전1
ㆍ조회: 2376      
[사찰] 구례 화엄사 (민족)
화엄사(華嚴寺)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에 있는 절.

[창건]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화엄사의 창건 및 중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시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연기(煙氣)라는 승려가 세웠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1936년에 찬술된 ≪대화엄사사적 大華嚴寺事蹟≫ 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진흥왕 5)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구례속지 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다.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에 속하였던 화엄사를 자장이 중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 797년(원성왕 13)에 번역된 정원본사십화엄(貞元本四十華嚴)이 의상에 의하여 석각(石刻)되어 장륙전의 사방 벽에 장식될 수 없다고 하는 점, 그리고 양식으로 보아 현존 화엄사의 석조물이 모두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되었다고 하는 점 등에 의하여, 창건과 중건에 대한 의문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의문은 1979년에 신라 경덕왕대의 화엄경사경(華嚴經寫經)이 발견됨으로써 완전히 풀렸다. 이 사경의 발문에 의하여 연기는 황룡사(皇龍寺)의 승려로서 754년(경덕왕13) 8월부터 화엄경사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 완성시켰던 실존인물임이 밝혀졌다. 그리하여 창건 연대가 신라 진흥왕 때가 아닌 경덕왕 때이고, 아울러 자장 및 의상의 중수 또한 사실이 아님이 입증되었다.

[중 수]
그 뒤 이 절은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다.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되었다.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했고 1769년 각황전을 중수했다.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했다. 1977년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다.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했다.

[주요고승]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다.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다. 특히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影幀)에 예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다.

조선 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다. 특히, 선수(善修)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處能)·수초(守初)·명안(明眼)·새봉(璽峰)·조관(璽冠)·윤장(玧藏)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다. 이들 외에도 해안(海眼)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雪泓)·윤눌(潤訥)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陳震應)이 머무르기도 하였다.

[당우와 문화재]

화엄사의 현존 건물은 각성이 중건한 17세기 이후의 것이다. ‘지리산화엄사’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좌우에 금강역사(金剛力士) 및 문수(文殊)·보현(普賢)의 동자상(童子像)을 안치한 금강문(金剛門)이 있다. 그 바로 뒤에는 제3문인 천왕문(天王門)이 있는데, 전면 3칸의 맞배집으로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다.

천왕문에서 약 50m 거리에 강당으로 사용되는 정면 7칸의 보제루(普濟樓)가 종루(鐘樓)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다. 동서 쌍탑(雙塔)의 정면에는 대웅전, 그 서쪽에는 각황전이 있으며, 이 밖에도 영산전(靈山殿)·나한전(羅漢殿)·원통전(圓通殿)·명부전(冥府殿)과 노전(爐殿)으로 사용되는 삼전(三殿) 및 요사(寮舍)인 원융료(元戎寮)·청풍당(淸風堂)·만월전(滿月殿) 등이 있다.

이 중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에 조성된 삼신(三身)의 삼존불(三尊佛)이 봉안되어 있으며, 1757년에 제작된 후불탱화(後佛幀畵)가 있다. 또한,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그 건축수법이 뛰어나다. 각황전 내부에는 3여래불상과 4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보제루(普濟樓)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절에는 각황전 앞 석등(石燈)과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노주(露柱)·동서오층석탑(東西五層石塔)·석경 등의 중요한 유물이 전해 오고 있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의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이는 높이 6.36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은 8각의 하대석(下臺石)이 병(甁) 모양의 간석(竿石)을 받치고 있고, 중간에 띠를 둘러 꽃무늬를 연이어 새긴 것으로 현존하는 국내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웅건한 조각미를 간직한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각황전 서남쪽의 높은 대상(臺上)에는 3층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 석탑의 사방에는 머리로 석탑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중앙에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 있는 승상(僧像)이 있다.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인 비구니의 모습이라고 전하며, 석탑 바로 앞 석등의 아래쪽에도 꿇어앉은 한 승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불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석등을 머리에 이고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그 능숙한 기법과 균형있는 조형미로도 주목되지만, 그 특이한 형태는 더욱 눈길을 끈다. 이 사사자석탑은 창건주 연기의 효성을 나타낸 것이기에 효대(孝臺)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원통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가 이마로 방형(方形)의 석단(石壇)을 받치고 있는데, 이를 흔히 원통전전사자탑(圓通殿前獅子塔, 보물 제300호)이라고도 한다.

대웅전 앞의 계단 아래에는 양식을 달리하는 동서 양탑이 있다. 보물 제132호인 동탑(東塔)은 보물 제133호인 서탑(西塔, )에 비하여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고, 단층기단(單層基壇)으로 되어 있다. 서탑은 1995년 해체보수되었는데, 이때 진신사리와 더불어 4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라시대에 조성된 필사본 다라니경과 불상을 찍어내는 청동불상주조틀 등이 있었다.

장륙전의 사방 벽은 화엄석경(華嚴石經)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물 제1040호인 이 석경은 의상이 조성한 것이라는 전승이 있지만, 화엄사가 세워진 경덕왕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석경은 불행히도 임진왜란의 병화로 장륙전이 불탈 때 파괴되어 만수천점에 달하는 이들 파편만이 남아 있다. 석경의 크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전(方塼:네모난 벽돌) 정도이고, 사방 벽에 고정할 수 있는 홈이 아래위에 있다. 글자체는 쌍계사진감국사비(雙磎寺眞鑑國師碑)를 닮았다.

화엄사 영산회상도 괘불탱화는 1653년(효종 4)에 조성된 것으로서, 1997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2호인 구층암석등과 교지(敎旨:宣祖가 碧巖禪師에게 하사) 1매, 예조사격(禮曹寺格) 1매, 예조홍각대사첩(禮曹弘覺大師帖) 1매, 겸팔도총섭첩(兼八道摠攝帖), 예조대선사각성첩(禮曹大禪師覺性帖) 1매가 있다.

그리고 인조 하사 어석(御席) 1건, 인조 하사 가사(袈裟) 1령, 인조 하사 어작(御爵) 1대, 선조 어필각본(御筆刻本) 1권, 선조 하사 서산대사발우〔西山大師鉢盂〕 1좌, 선조 하사 서산대사 향합(香盒) 1건, 각황전중건상량문(覺皇殿重建上樑文) 1매, 각황전삼여래사보살복장기(覺皇殿三如來四菩薩腹藏記) 1축, 고종(古鐘), 인조 14년간 ≪화엄사사적 華嚴寺事蹟≫ 1책 등이 있다.

[산내 암자]

이 절의 부속 암자는 신라 경덕왕 때에는 81개나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는 원소암(圓炤庵)·청련암(靑蓮庵)·적기암(赤旗庵)·은무암(隱霧庵)·은선암(隱仙庵)·백련사(白蓮社)·도선굴(道詵窟)·연기암(煙起庵)·보적암(寶積庵)·내원암(內院庵)·봉천암(鳳泉庵)·문수암(文殊庵) 등의 상당히 많은 암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암자가 없어지고, 구층암(九層庵)을 비롯한 금정암(金井庵)과 지장암(地藏庵) 등의 세 암자만이 있을 뿐이다.

구층암에는 탑신 전면에 여래좌상을 조각한 3층석탑과 석등·배례석 등이 있고, 천불을 모신 천불보전(千佛寶殿), 선실(禪室), 요사 등의 건물이 있다. 1562년 설응(雪凝)이 창건한 금정암에는 조선 고종 때에 세운 칠성전(七星殿)과 요사가 있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셨다. 1959년 원응(源應)이 창건한 지장암의 본전인 보광전(普光殿)에는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다. 절 일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문헌≫

新增東國輿地勝覽, 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 大覺國師文集, 擇里志, 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求禮華嚴寺事蹟, 鳳城誌, 求禮續誌, 朝鮮寺刹史料(朝鮮總督府, 1911),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朝鮮金石總覽(朝鮮總督府, 1919), 韓國建築樣式論(鄭寅國, 一志社, 1974), 華嚴寺(韓國佛敎硏究院, 一志社, 1976), 考古美術 6-9(1965.9. 화엄사특집), 新羅華嚴寫經과 그 變相圖의 硏究(文明大, 韓國學報 14, 一志社, 1979), 新羅 景德王代의 白紙墨書 華嚴經(黃壽永, 歷史學報 83, 1979), 新羅 景德王代 華嚴經 寫經 關與者에 대한 考察(李基白, 歷史學報 83, 1979), 전통사찰총서 7-광주·전남의 전통사찰 Ⅱ-(사찰문화연구원, 1996).

<김상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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