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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23 (일) 17:28
분 류 사전1
ㆍ조회: 2403      
[조선] 사화 (민족)
사화(士禍)

관련 항목 :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조선 중기에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훈신·척신들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사림(士林)의 화’의 준말로서,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04년의 갑자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화는 당초 일으킨 쪽인 훈척 계열에서 난으로 규정했으나, 당한 쪽인 사림 측은 정인(正人)·현사(賢士)들이 죄 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란 표현을 썼다. 그러다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초반 무렵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 인식이 생겨나면서 사화는 대단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즉, 일제 시기 일인 학자들이 식민주의적인 역사 인식의 차원에서 한민족의 부정적인 민족성의 하나로 당파성을 거론한 이후, 사화는 당쟁의 전주에 불과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이러한 편협하고 피상적인 이해는 최근 이 시대에 대한 여러 측면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크게 불식되었다. 즉 사화는 단순한 권력 싸움이 아닌,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정치 현상으로 규명되고 있다.

[배경]

사화가 거듭 일어난 15세기 말엽부터 16세기 사이에는 경제적으로 다음과 같은 변동이 있었다. 우선, 농업 부문에서 연작상경(連作常耕 : 휴경이 없이 계속하여 경작함.) 농업 기술의 실현이라는 15세기의 성과를 토대로, 천방(川防 : 洑) 관개 기술이 새로 보급되었다. 또한, 서남 연안지역에서 간석지 개발이 언전(堰田)이라는 이름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경제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향상된 농업 경제력은 상업 부문에도 새로운 자극을 주어 5일장의 전신에 해당하는 지방의 농촌 장시가 이 무렵부터 장문, 향시의 이름으로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수공업 부문에서 면포 생산력의 급증은 이러한 국내 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외 교역상으로도 중요한 수출 상품이 되어 당시 새로운 활약상을 보인 동아시아 교역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중국과의 교역에서도 견직물 또는 그 원사를 은으로 결제해 수입하는 한편, 일본에 면포를 직접 수출하거나 중국산 견직 원사를 중개 무역하여 은을 벌어들였다. 대외 교역상으로 은의 수요가 높아지자 은광의 개발도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사화는 이와 같이 경제 변동이 급변하는 가운데 사회질서 문제를 놓고 일어난 정치적인 마찰이었다. 기본적으로 집권적인 위치에 있던 훈신·척신 계열은 권력을 사적인 치부에 남용하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였다. 사림계는 이를 비리로 규정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여 정치적 보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사림계의 비판 활동은 훈·척계의 행위가 명백한 비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재지중소지주 출신이라는 그들 자신의 사회적 기반과도 깊은 관련을 가졌다. 훈·척계의 사익 추구는 현직 지방관들을 매개로 각 지방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자행되었다. 따라서 수탈에 견디기 어려운 농민들이 권세가의 대농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추세가 현저해져 국가적으로 인력·재력의 원천이 위축되었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림 계의 재지적 기반마저도 위협받는 형세였다. 사림계의 비판은 유교적인 이념에 입각하면서도 사회적인 안정을 특별히 강조, 향사례(鄕射禮)·향음주례(鄕飮酒禮)·향약(鄕約) 등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한 것이 특징이었다.

[무오사화]

흔히 김종직(金宗直)이 사초(史草)로 쓴 〈의제를 조상하는 글 弔義帝文〉이 사단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史禍)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향촌 사회의 질서확립 문제를 둘러싼 이해 관계의 상충이었다. 성종 즉위 후 특채로 중앙 관계에 진출한 김종직과 그 문인 및 종유인들은 성종 15년 무렵부터 ≪주례≫의 향사례·향음주례의 시행 보급을 목적으로 세조 대에 혁파된 유향소(留鄕所) 제도를 부활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이 제도를 부활하여 중심기구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제의는 훈구대신 계열의 반대로 5년 가까이 지연되던 끝에 1488년(성종 19)에서야 비로소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림계의 기반이 강한 몇몇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향소가 향사례·향음주례는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중앙 권신들의 지방 사회 수탈의 하부 조직으로 악용되는 실정이었다. 즉, 현직 지방관을 위압적으로 사주하여 해당 지역 내의 결탁적인 토호들이 유향소를 장악하도록 만들어 기존의 경재소(京在所)제도로 조정했던 것이다.

유향소 복립운동이 이와 같이 본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되자, 사림계는 지방에 사마소(司馬所)라는 독립 기구를 만들어 대항하는 한편, 중앙에서는 훈신·척신을 비롯한 권신들의 비리를 맹렬히 비판하였다. 사림계의 공격으로 궁지에 몰린 훈·척계는 김종직의 〈의제를 조상하는 글〉을 빌미로 역공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사림계의 향사례·향음주례 보급 기도는 경제 변동으로 이미 동요의 기미를 보인 사회 질서를 유교적인 윤리 체계로 갱신하려는 것이었다.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사림계가 크게 제거된 상태에서 연산군과 그를 싸고 돈 궁금(宮禁) 세력이 사치욕으로 훈신 계열의 재력을 탈취하고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에 대한 대신들의 묵과를 흠잡아 일으킨 것이다. 당시 훈신 계열은 선대 이래의 공신전(功臣田)을 비롯한 토지 재산뿐 아니라, 경재소·유향소제도를 통해 특정한 지방을 고정적인 재력 확충의 대상으로 장악하다시피 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이때 사림계로서 연루된 인사도 적지 않았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기묘사화]

1515년(중종 10) 왕비책립 때 조신간의 대립·알력을 시발로 하여 조광조(趙光祖) 등의 지치주의 정치(至治主義政治)에 의해 대량 등용된 신진사류에 대한 불만과 도의론을 앞세워 훈구파를 소인시한 배타적인 태도에 대한 증오 등이 위훈삭제 사건(僞勳削除事件)으로 폭발된 것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갑자사화 2년 뒤 중종반정으로 종식되었다. 이로써 사림계도 재진출하게 되지만, 중종 초기의 정국은 훈신 계열이 주도하였다.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이때의 훈신계는 전날의 훈신들과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사림계의 중앙 진출은 1515년 무렵 조광조의 특채를 계기로 더욱 활발해져 중종 12년 무렵부터 혁신적인 정책을 폈다. 반정공신의 녹공이 부적한 경우가 많다고 하여, 이른바 위훈삭제를 주장하는 한편, 훈신들의 수탈 기반이 되고 있는 경재소·유향소 체제를 없애고 향촌 사회에 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향약을 시행하도록 하자는 것 등이 그 중요 정책이었다. 후자는 특히 영남·기호 등지뿐만 아니라, 서울의 5부 방리에서까지 시행될 정도로 열기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급진적인 변혁은 훈구계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되었으며, 향약 시행의 성과는 기묘사화의 발발과 동시에 모두 철폐되었다.

[을사사화]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이 명종 즉위를 계기로 인종의 외할아버지 윤임(尹任)의 대윤(大尹)을 축출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후 사림계는 의기가 크게 꺾였으나, 중종 30년대 후반에 왕이 기묘사화를 후회하여 다시 중앙 진출의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중종의 뒤를 이은 인종이 사림계의 정치적 처지를 지지하여 많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1년만에 죽고 명종이 그 뒤를 잇게 되자, 양 외척간에 권력 암투가 벌어졌다. 윤임은 외척이면서도 사림을 비호하는 면이 있었으나,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그 동생 윤원형은 권력을 독단하는 성향이 강해 윤임의 제거와 동시에 다수의 사림계 인사도 제거하였다. 이 무렵 정국은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팽배하여 권력의 첩로인 외척이 관료 사회에 절대적인 위세를 누려 대립하는 두 정치세력의 대표가 모두 외척 출신으로 표출되었다.

[정미사화]

앞의 4대 사화 외에도 같은 시기에 정미사화로 불려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정치가 일단 종식된 뒤부터는 정치적인 분쟁과 축출이 있어도 그것을 사화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이후로 사림 안에 복수로 정파가 이루어져, 공도(公道)의 실현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상호 비판, 견제하여 정치를 이끄는 이른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기본적인 정치 원리로 추구되었다. 그런 만큼 여기서 발생하는 정쟁은 선악의 구분이 전제된 개념인 사화란 표현이 적용되지 않았다.

붕당정치의 기본적인 원리가 무너진 뒤, 특히 정쟁의 중심 인물들이 다수 처단된 경종대의 신임옥사(辛壬獄事) 이후 정파간에는 자파의 희생을 사화로 일컫는 현상이 잦아졌다. 더욱이 이를 미화하고자 왕조 초기의 계유정난(癸酉靖難)까지도 사화로 지칭하는 경향이 대두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中宗實錄, 明宗實錄, 朝鮮前期 畿湖士林派의 硏究(李秉烋, 一潮閣, 1984), 嶺南士林派의 形成(李樹健, 嶺南大學校出版部, 1986), 韓國社會史硏究(李泰鎭, 知識産業社, 1986), 朝鮮儒敎社會史論(李泰鎭, 知識産業社, 1989).

<이태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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