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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1 (일) 19:04
분 류 사전1
ㆍ조회: 2392      
[삼국] 백제의 제도 (민족)
백제(제도) : 정치 제도, 경제 제도, 신분 제도

세부항목

백제
백제(역사)
백제(제도)
백제(대외관계)
백제(문화)
백제(연구사)
백제(참고문헌)

1. 정치 제도

백제의 정치제도는 연맹 단계에는 우보(右輔)와 좌보(左輔)가 있어서 군국 정사를 관장하였다. 고이왕대에 5부체제가 이루어지면서 연맹을 구성했던 국(國)들은 소멸되고 각국의 수장들은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었다. 이들을 지배체제 내로 편제하기 위해 좌평(佐平)이 설치되고 솔계(率系)관등과 덕계(德系) 관등 등을 만들었다. 이로써 백제 관제의 기본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국왕 직속의 관등과 부장 직속의 관등이 양립하는 이원적인 체제였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갖추어진 근초고왕대에 이원적인 관등 체계는 국왕 중심으로 일원화되었고, 관부와 관직도 마련되었다.

[중앙 제도]

백제의 정치 제도는 사비 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정비된 중앙의 정치 제도는 6좌평, 16관등제, 22부가 핵심이었다.

(1) 16관등제

16관등제는 좌평과 솔계(率系) 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이 핵심이 되었으며, 좌군(佐軍)ㆍ진무(振武)ㆍ극우(剋虞)는 하부구조를 이루었다. 좌평은 1품이었고, 솔계 관등은 달솔(達率)에서 나솔(奈率)까지의 5등급으로, 덕계 관등은 장덕(將德)에서 대덕(對德)까지의 5등급으로 분화되었다. 각 관등의 정원은 좌평은 6인이었고, 달솔은 30인이었으나 은솔(恩率)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따라서 정원이 정해진 6명의 좌평과 30명의 달솔이 가장 핵심적인 관료 집단이 가지는 관등이라 할 수 있다.

16관등은 복색과 관식(冠飾) 및 띠의 색〔帶色〕에 의해 구분되었다. 복색은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奈率)까지는 자복(紫服)을, 7품 장덕 이하 11품 문독(文督)에 이르는 관등은 비복(緋服)을, 12품 무독(武督) 이하 16품 극우까지는 청복을 입었다. 대색(帶色)은 장덕까지는 자대(紫帶), 시덕(施德)은 조대(牲帶), 고덕(固德)은 적대, 계덕(季德)은 청대, 대덕(對德)ㆍ문독(文督)은 황대, 무독 이하 극우까지는 백대를 띠었다. 그리고 관제(冠制)의 경우, 왕은 금화(金花)로 관을 장식했고, 나솔 이상은 은화(銀花)로 관을 장식하였다.

(2) 6좌평제

6좌평제는 내신(內臣)좌평ㆍ내두(內頭)좌평ㆍ내법(內法)좌평ㆍ위사(衛士)좌평ㆍ병관(兵官)좌평ㆍ조정(朝廷)좌평을 말한다. 좌평은 전지왕대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분화되기 시작해 성왕대까지 5좌평으로 되었다가 그후 중국의 육전(六典) 조직의 영향을 받아 6좌평으로 확대되었다. 6좌평은 최고귀족회의체를 구성하였다. 내신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왕명의 출납을 맡았고, 내두좌평은 고장(庫藏)사무를, 내법좌평은 의례(儀禮)사무를, 위사좌평은 숙위병마(宿衛兵馬)사무를, 조정좌평은 형옥(刑獄)업무를, 병관좌평은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관장하였다.

(3) 22부

백제의 관부는 상위 관부는 부(部)로, 하위 관부는 사(司)로 표시되었다. 부는 궁중사무를 관장하는 내관 12부와 일반 국무를 관장하는 외관 10부 등 22부로 이루어졌다. 내관 12부는 전내부(前內部)ㆍ곡부(穀部)ㆍ육부(肉部)ㆍ내경부(內檢部)ㆍ외경부(外檢部)ㆍ마부(馬部)ㆍ도부(刀部)ㆍ공덕부(功德部)ㆍ약부(藥部)ㆍ목부(木部)ㆍ법부(法部)ㆍ후궁부(後宮部)이었다. 외관 10부는 사군부(司軍部)ㆍ사도부(司徒部)ㆍ사공부(司空部)ㆍ사구부(司寇部)ㆍ점구부(點口部)ㆍ객부(客部)ㆍ외사부(外舍部)ㆍ주부(綢部)ㆍ일관부(日官部)ㆍ도시부(都市部)이었다. 이 22부제에서 일반행정관청에 비해 궁중소속의 관청이 많다.

또 사군부 이하 사구부까지의 명칭은 중국 고대의 ≪주례 周禮≫의 6관의 명칭과 동일한데, 이는 북주(北周)의 주례(周禮)주의적 관제 정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외관 4부는 국가 행정의 중추기관으로서 군사ㆍ재정ㆍ교육ㆍ형벌 관계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각 부의 장은 장사(長史)ㆍ재관장(宰官長) 등으로 불렸으며 3년에 한번씩 교체되었다.

(4) 왕경의 행정구획

한편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성장에 따라 중앙 귀족들의 근거지인 왕경과 지방에까지 행정적인 구획이 설정되었다. 왕도의 행정 구역은 한성 시대에 족제적 성격의 5부를 행정 구역화하면서 만들어졌고, 웅진 도읍기에는 수도 5부제(部制)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사비 시대에 보다 체계화된 것으로 보인다. 사비 시대의 왕경은 상부(上部)ㆍ전부(前部)ㆍ중부(中部)ㆍ하부(下部)ㆍ후부(後部)로 나뉘고, 각 부는 다시 오항(五巷)으로 나누어졌다. 근래 궁남지 출토의 목간(木簡)에 보이는 “中部後巷(중부후항)”은 왕도 조직이 부-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입증해 준다. 각 부는 달솔 관등을 소지한 자가 맡았으며, 500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는 왕도의 행정 구역임과 경찰 및 수도 방위의 책임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지방 제도]

백제의 지방 제도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방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지방제도는 근초고왕대의 담로제 실시로 본격화되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였다. 담로제는 한성 시대에서 웅진 도읍기까지 시행되었고, 영역의 신축에 따라 가감이 있어 웅진 도읍기에는 22담로가 있었다. 담로에는 왕족을 파견해 다스리게 하였다.

담로제는 사비 시대에 방ㆍ군ㆍ성(현)제[城(縣)制]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은 중앙 집권력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방이라는 광역의 행정 구역이 만들어졌다는 것과 성(현)의 수가 크게 증대된 것을 들 수 있다. 웅진 도읍기의 22담로제와 비교할 때 행정 구역의 수가 대폭 증대된 것이다.

방은 중방ㆍ동방ㆍ남방ㆍ서방ㆍ북방의 5방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에는 방성(方城)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다.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 전라남도 장성지방),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 위치 미상), 북방은 웅진성(熊津城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이다. 방의 장관은 방령(方領)이고, 달솔의 위계자가 맡았으며 보좌관으로 방좌(方佐)가 있었다. 각 방에는 7백∼1천명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고, 7∼10개의 군(郡)을 관할하였다.

군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군의 장으로는 군장(郡將) 3명이 있었고, 덕솔의 위계자가 임명되었다. 군 규모의 성(城)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小城) 또는 현(縣)이라 했는데, 그 장은 도사(道使)라 하였다. 소성(현)은 방성이나 군성에 통속되어 있었다. 5방제는 백제 말기에 와서 5부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성격의 변화는 없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상황은 5부ㆍ37군ㆍ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였다.

2. 경제 제도

[토지 제도]

백제는 철제의 농기구ㆍ토목용구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 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백제의 토지 제도는 자료가 빈약해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고, 신라ㆍ고구려의 경우에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토지 지배의 유형에서 상부 특권층의 토지 지배에는 국가ㆍ왕실의 직속지, 귀족들에 대한 사전(賜田), 사원전 등이 있었다. 또 대귀족에 대한 식읍(食邑)의 사여(賜與)도 있었다. 전렵지인 서해대도(西海大島)ㆍ횡악(橫岳) 등은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이다.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힙입어 대토지 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외에 특별한 공로로 전조권(田租權)이나 식읍을 부여받기도 했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의 토지 지배로는 농민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 소를 사용한 경작[牛耕]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에 농업경영방식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집체적 방식에서 소농 중심의 농업 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개별농가가 농업 경영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 소유가 촉진되고,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 경작지는 국가의 각종 수탈과 귀족층의 강점의 대상이 되었다. 또 빈번한 전쟁에의 동원 등으로 농토를 상실한 농민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남의 농토를 용작(傭作)하기도 하였다. 토지 경작은 소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한 자유 농민이 주였으며 노예 노동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세 제도]

백제의 세제는 국초부터 조(租)ㆍ조(調)ㆍ역역제(力役制)가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租)는 농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조(調)는 가내 수공업의 생산물이나 각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는 것이었다. 역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조(租)와 조(調)는 결합된 형태로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조의 수취대상은 농민이었다. 백제 초기의 부민은 농업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일반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며, 하호(下戶)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국가 통치 체제가 갖추어지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민의 사회 경제적 지위도 변화되었다. 이에 민은 소국 수장층들의 사적 수탈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민적 존재로 편입되었다.

조조(租調)의 수취물로는 포(布)ㆍ견(絹)ㆍ사(絲)ㆍ마(麻)ㆍ미(米)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세액은 알 수 없고, 다만 매년 풍흉(豊凶)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수취하였다. 역역은 국가나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과 군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역역 징발대상은 주로 하호로 표현되는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정(丁)을 부 단위로 징발되어 축성(築城)과 같은 대규모 토목 사업에 동원되었다.

국가는 역역 지배를 위해 팔호(人戶)에 대한 파악을 하였다. 근초고왕대에 반포되었을 율령에는 호구령(戶口令)과 부역령(賦役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세기 이후 역역동원이 종래의 부 또는 옛 소국의 읍락 단위에서 주군의 행정 구역 단위로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역역 징발 업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관청이 사공부(司空部)였다.

[수공업ㆍ상업]

한편 수공업제품은 왕실이나 관청 소속의 장인(匠人)이나 노비에 의해 제작되었다. 궁내(宮內) 관부인 도부(刀部)ㆍ주부(綢部) 등은 이러한 수공업을 관장하기 위한 기구였다. 불교 전래 후 사원ㆍ불상ㆍ불화 등 우수한 불교 예술품이 제작되었다. 또 관리들이 착용한 고급직물과 자(紫)ㆍ비(緋)ㆍ청(靑)ㆍ황(黃)의 염색술과 표백술은 백제의 직조 기술과 염색 기술의 정도를 보여준다. 도공품(陶工品)으로는 정교한 문양전과 기와ㆍ질그릇 등이 제작되었다. 특히 우수한 공예 기술자를 일본에 파견해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하였다.

상업은 장시(場市)와 행상(行商) 등 국내의 상업과 해외 무역이 활발히 행해졌다. 왕도에서의 상업은 도시부(都市部)를 두어 관리하게 했고, 지방에는 향시(鄕市)가 있어 필요한 물자가 교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해상 무역을 보면, 당나라에 수출된 무역품으로는 광명개(光明鎧)ㆍ철갑조부(鐵甲彫斧) 등이 있었고, 수입품으로는 불전(佛典)ㆍ금포(錦袍)ㆍ채백(彩帛) 등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는 양마(良馬)ㆍ궁전(弓箭)ㆍ비단ㆍ실ㆍ포 등을 수입하였고, 채견(彩絹)ㆍ각궁전(角弓箭)ㆍ철정(鐵鋌)ㆍ복서(卜書)ㆍ약물(藥物) 등을 수출하였다.

3. 신분 제도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 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배 신분층은 다시 특권의 크기에 따라 3계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배 신분층의 중심은 왕실이었다. 왕실은 부여족의 일파로 남하한 온조계 집단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한성 시대 전기에는 진씨(眞氏)가, 후기에는 해씨(解氏)가 왕비족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백제가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를 성립시켜가는 과정에서 각 지역의 토착 세력의 족장들은 점차 중앙의 귀족으로 전환되어 갔다.

백제의 지배 세력들은 관리들의 공복의 복색과 관등제를 연결시켜 볼 때, ① 자복(紫服)을 입는 솔계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층, ② 비복(緋服)의 덕계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층, ③ 청복(靑服)을 입을 수 있는 관등층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가운데 왕족을 비롯해 대성 팔족(大姓八族)은 최고의 신분층으로 지배 신분층의 핵심이었다. 대성 팔족은 사씨(沙氏)ㆍ연씨(燕氏)ㆍ백씨(懶氏)ㆍ해씨(解氏)ㆍ진씨(眞氏)ㆍ목씨(木氏)ㆍ협씨(嗚氏)ㆍ국씨(國氏)를 말한다.

신분제는 관등ㆍ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ㆍ관직ㆍ복색ㆍ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제1신분층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제2신분층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제3신분층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러한 귀족의 지배를 받은 피지배층의 주류는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인 일반농민이 있었다. 농민은 소규모 토지 보유자로서 농ㆍ공ㆍ상에 종사했으며, 국가 수취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은 비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밑에는 최하층의 신분으로서 천인과 노비가 있었다. 천민 신분층은 정복 전쟁과 통일 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피정복민들이 천민 집단으로 또는 노예로 전락되면서 성립되었다. 노비는 관노(官奴)ㆍ사노(私奴)가 있었다. 관노는 국가 또는 관청에, 사노는 개인에게 예속되었다. 노비는 물건과 같이 취급받는 비자유인이었다. 한편 노비의 공급 및 재생산의 방법에 따라 전쟁포로ㆍ부채노비ㆍ형벌노비와 노비소생자를 노비로 삼는 세습노비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분제는 율령에 의해 법제화되었고, 국가는 율령을 통해 신분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율령의 율은 형벌법에 해당되고, 영은 민정법에 해당된다. 율로는 관리로서 뇌물을 받거나 도둑질을 한 자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 금고하게 하였다. 또 모반하거나 퇴군한 자는 목을 베고, 도적질한 자는 유형에 처했으며, 부인이 간통하면 남편집의 종으로 삼았다. 영으로는 관품령적인 16관등제, 직원력와 관련되는 22부제, 군현령 성격의 방ㆍ군-성(현)제. 부역령과 관련되는 부세ㆍ역역 등을 들 수 있다.

<노중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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