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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01 (수)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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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418      
[한국] 한국인의 생활 (민족)
한국(한국인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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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식생활

복식이란 인체 위에 표현되는 모든 것을 총괄해 말하는 것이다. 복(服)은 주로 몸통과 팔 다리를 감싸주는 의복을 말하고, 식(飾)은 머리에 쓰는 모자나 관, 발에 신는 신이나 허리에 두르는 띠 등 여러 가지 장식을 의미한다. 보건위생적 측면에서 옷은 입고 벗음으로써 체온조절을 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된다. 쾌적한 상태로 피부온도가 조절되었을 때 인간은 자신의 활동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사회적 측면에서 복식은 각 개인의 개성과 품격을 나타내준다. 인간이 생활하고 있는 그 사회집단에 소속감을 표시해주는 구실을 하기도 하고, 또 사회생활에 필요한 연대감과 예의의 표현으로 사용된다. 지역의 풍속이나 관습을 담은 민속복은 그 민족의 얼이 담겨 있어서 전통적인 민족의 연대감을 가지게 하며 민족의 뿌리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이어내려가는 민족애의 긍지를 심어주는 귀중한 구실을 한다.

복식의 발달과 변천은 그 시대의 생활 양식의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에 의해 영향받게 되므로, 같은 자연적 조건을 가진 나라라도 시대에 따라서 사회적 조건이 다르면 생활양식이 변하고 복식도 변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상고시대 복식에 관한 역사를 살펴보면, 문헌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피의(皮衣)를 입었다는 기록과 제주도 부근에서 가죽옷을 입되 윗옷만 있고 아래는 벌거벗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양잠이나 저(苧)·마(麻) 등의 섬유류가 존재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료의 생산이 있었다고 보인다. 4, 5세기 고구려 벽화는 당시의 복식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음과 중국 복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우리 복식은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영향으로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구조에는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유의할 점이다. 바지·저고리·포의 3분 구조는 2,000년 동안 변함이 없었고, 관모(冠帽)를 소중히 여기는 것도 오랜 전통이다. 상고복식의 전통으로서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지목되는 금관은 당시 왕이 샤먼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무관(巫冠)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복식의 특징은 관복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전형적인 복식 제도가 확립된 때라고 볼 수 있다. 관복의 경우 이중조직의 특색에 의해 관료 계급에서 준수했고 그 나머지는 국제(國制)의 포의와 바지·저고리를 고집스럽게 입었다. 이와 같이 상고 시대부터 변함없이 우리의 기본 복식구조를 고집해온 것은 세계 복식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개화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제까지 1,000년 이상 우리 복식의 골격을 이루었던 중국과의 이중조직의 복식이 서양복식과 대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화기 이후는 신분의 평등의식으로 복식의 간소화를 초래하였다. 1884년 5월의 갑신의복개혁이라는 교지는 모든 품계의 관리들이 흑단령을 입게 하고 다만 흉배로써 품계를 나타내게 하였다. 이는 신분·계급 타파에서 온 평등사상이 그대로 복식에 나타난 것이다. 이어 1895년의 문과복장식과 1900년의 〈문관복장규칙〉등으로 수천년을 내려오던 한복문화가 한복·양복의 혼합문화로 전환되었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의 복식문화는 왕실에서 일반 평민 중심으로 전환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우리의 전통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의복공급을 서두른 데 기인한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미군과 미국에 망명했던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양복의 보급이 급격히 늘어났다. 광복 전에 일인들에 의해 양복이 반강제적으로 입혀졌던 시기는 지나가고, 양복의 기능적이고 편리한 실용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높아져 자의에 의해 선택되어 보급되었다. 남자 양복은 광복 이후 현재까지 깃과 바지의 너비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정도의 변화가 있었으나 여성의 양장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리 나라 복식은 역사적으로 알타이 복식의 일파에 속한다. 한복의 일차적 특색은 의고 분리의 의복이라는 점에 있다. 여성도 애초에는 바지를 입었다고 생각되나 나중에는 치마를 입어 남성복과 달라진다. 복색은 중국문헌에서부터 백의를 숭상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말에 이르도록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한민족은 백의민족이라고 하지만 백의는 서민의 의복이었을 뿐 관원들의 의복은 색복이 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인 경향은 백의라 해야 옳을 것이다.

복식은 풍토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 민족이 거처하는 기후에 알맞게 오랜 전통으로 습용되면서 그 실용적인 면과 아울러 각 민족대로의 미를 내재시키고 있다. 우리 복식의 미는 그 곡선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이를 단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당의와 버선의 곡선이라 할 수 있다. 배래의 선, 의거의 선, 버선 선의 흐름 등은 한국적 미의 대표적인 모형으로 꼽힌다. 색의 미에 있어서는 옷에 그림을 그려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원색의 천을 봉합해 복식을 구성해나간다.

우리 나라의 전체적인 기후 조건은 아한대에서 온대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에 상응하는 복식생활을 해왔다. 우선 저고리와 바지를 신체에 긴박하게 조이는 방식을 취하고,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발에는 버선과 신을 신었다. 즉 신체 전체를 피복하는 방식으로 보온하였다. 계절에 맞추어 동복·춘추복·하복으로 구별하였고, 솜옷·겹옷·홀옷 등으로도 구별하였다.

(2) 식생활

우리의 음식 문화 형성에는 동북방 문화가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일찍이 북방 문화에 접하면서 잡곡농사가 시작되었다. 이어 중국계 문화가 유입되면서 따라 벼농사의 발달과 진전을 보게 된 이래 자연환경을 기반으로 벼농사를 주로 하게 되었다.

3면의 바다는 천혜의 어장을 형성해 농경 이전에는 주된 식량의 공급원이었다. 특히, 동해는 난류와 한류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세계적 어장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4계절이 분명해 식품의 산출이 다양하고 비철에 대비한 식품의 저장법과 가공법이 개발되었다. 계절의 명확한 구분은 식생활에서 절식과 시식의 풍속을 가져왔고, 저장식을 비축, 관리하는 습관을 형성하게 하였다.

게다가 한반도를 남북으로 지른 태백산맥을 경계로 동서의 차이가 뚜렷해 비슷한 위도에서 서로 다른 풍토를 형성하게 하여 특성있는 향토음식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의례에 관한 음식에는 축의음식으로 출산·삼칠일·백일·첫돌·책례·혼례·폐백음식 등이 있다. 제의음식으로는 무속행의음식·개례봉사제물 및 사찰의 위령제공의 등이 있다. 제의음식은 기본적으로 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떡이 우리 겨레가 고유하게 개발한 음식임을 말해준다.

유교식 제사음식은 무(巫의) 음식과 기본양식은 같으나 그 내용이 많이 현세화되었다. 무의에서 백설기에 붉은 대추를 얹어 찌는 관습, 제사에 올리는 식혜 위에도 붉은 대추 저민 것, 또는 날고깃점을 얹어놓는 관습 등에서 음양의 조화의식이 뿌리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제의음식은 상고형을 기본으로 해 여기에 불교와 유교가 접합된 양식이라 하겠다.

우리 나라 식생활 관리의 관습은 농업생활을 기저에 두고 계절의 순환성과 풍토상의 특성을 배경으로 형성되었다. 또한 여기에 우리의 가족형태와 가족관도 영향을 미쳤다. 음식의 맛을 내는 장류를 중시하고, 김치를 담가 겨울의 4,5개월 동안의 영양식으로 삼았다. 반주·빈객·제례에 대비해 계절과 시사에 따라 가양주를 담그고, 젓갈·장아찌·육포·어포·건어류 등 마른 반찬을 상비하였다.

우리 사회가 농업 경제에서 산업 경제 체제로 바뀌면서 식생활도 변화하였다. 해마다 채소·과일·어패류·수조육류·알류 등의 공급량이 증가되는 추세이다. 이러한 현황은 우리의 식생활이 종래의 일상식 양식을 이어오면서도 밥의 의존도가 감소되고 기타 음식의 의존도가 높아짐을 시사한다. 가공식품의 이용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특히, 장류를 비치할 공간이 없어지면서 2,000여년 간 이어져 내려오던 장의 가공이 공장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우리 식생활의 일대 변혁이다. 종래의 좌식 상차림의 양식이 입식 상차림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은 주거양식의 변화에 크게 기인한다.

식품 조리법은 뿌리 깊은 기호와 식습관으로 큰 변화는 없으나, 서양요리용 조미료 사용이 늘고 있고 서양요리 조리법의 수용도가 증대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한편, 외식비 지출이 날로 늘고 있으며, 다양한 전자·전기 조리용구의 증대로 각 가정의 식생활 준비작업이 간소화되고 있다.

(3) 주거 생활

집의 개념은 가족구성원·거주지·건물·생활 정도·동족·친족 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개념이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해변과 강가, 호수가에 집을 마련하고 고기잡이와 짐승들을 잡아먹고 살며 주로 움집에서 생활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나지막한 구릉지대에 적을 때에는 여러 채, 많을 때에는 100여 채의 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면서 농사·고기잡이·목축 생활을 하였다.

원삼국 시대에 이르러서는 주로 구릉지대에 살다가 점차 강구(江口)의 삼각주 지방으로 진출해 농경생활과 목축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원시시대의 움집과 귀틀집·고상식주거 등 여러 형태의 주택들이 건축되었다. 지배 계급에서는 낙랑 등을 통해 한나라의 좀더 발달된 목조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 궁실 건축이 이루어졌다.

삼국 시대는 건축이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건축은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주택을 계승해 목조가구식으로 귀족 계급은 기와집이고 서민층은 초가였다. 서민 주택은 고구려의 온돌 구조가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다. 또한 신라의 마루구조도 고려에 널리 계승되었다. 고려 시대는 음양오행론에 맞추어 단층을 하고, 고려 초부터 풍수설의 영향으로 택지 선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 시대의 건축은 풍수지리의 양택론에 치중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대가족 제도에 따라 주택의 규모가 켰고, 별채들이 건축되었다. 남녀구별의식으로 인해 여자의 공간인 안채·내측,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외측이 따로 구분되어 건축된다. 조선 시대 주택의 배치·평면은 정치·경제·신분·민간 신앙·기후 등 다양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결정된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사회의 변혁은 신분적 한계를 벗어난 건축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외래 양식의 건축이다. 이와 더불어 시멘트·유리·벽돌·콘크리트 등의 새로운 재료들이 점차 보급되었고, 스팀 난방이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부터 6·25에 이르는 동안 해외 귀환 동포와 월남민으로 인한 인구증가로 주택의 보급이 미치지 못해 주택난을 겪었다. 최근에는 인구의 도시 집중화로 대도시의 주택난은 더욱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신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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