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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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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391      
[근대] 한국의 근대 사회 (민족)
한국(근대사회) 한국의 근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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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하던 조선 후기 사회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집권으로 한 차례 정비될 기회를 맞게 되었다. 대원군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세도 정치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며 삼정의 문란을 개선하는 등 나타난 폐단들을 제거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를 재정비하려는 일대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무렵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의 통상압력이 가해지자, 조선에서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대원군은 강경한 쇄국 정책을 고수해 척양(斥洋)ㆍ척왜(斥倭)를 표방하면서 서양의 통상 요구에 불응하였다. 이 때문에 병인양요(1866)나 신미양요(1871) 등 서양 열강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여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계 일각에서는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통상 개화론이 대두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실각과 동시에 통상 개화론이 채택되어 개국 정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876년에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개항이 이루어졌고, 뒤이어 미국 등 서양 열강과의 통상 조약이 맺어졌다. 이로써, 조선은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어 자주권을 유지하면서 근대 사회로 발전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개항 이후 조선에서는 적극적인 개화 정책이 추진되어 일본과 청으로부터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개화 사상이 대두하였다. 이 개화 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 사상, 특히 북학파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위기 의식을 바탕으로 개화 정책에 반대하는 위정 척사 운동(衛正斥邪運動)이 전개되었다. 위정 척사 운동은 보수적인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당시 정부의 개화 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외세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애국적 성격을 강하게 띤 운동이었다.

이로부터 개화와 보수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비롯된 것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이었다. 임오군란은 개화 정책으로 피해를 보게 된 구식 군인들에 의해 일어났다. 그 결과 대원군이 재집권했으나 곧 청의 군사 개입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고 청의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청의 경제적 진출이 두드러져 국민들의 반청 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개화 사상을 가진 젊은 관료들에 의해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그러나 갑신정변 역시 청의 군사개입으로 실패하고 조선에서의 청의 지위는 더한층 강화되었다.

개항 이후 지배층 사이에서 개화와 보수의 대립이 격화되고 청ㆍ일본 등 외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가운데 19세기 이래의 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특히, 개항 이후에는 개화정책에 따른 국가의 재정부담이 늘어나면서 농민들의 수세부담이 증대하였다. 지방관들의 탐학은 여전했고 일본과 청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 경제는 결정적으로 파탄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주권을 상실한 정부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와 경제적 침투로 농촌 경제를 좀먹는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폭발하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곧 동학 농민 운동이었다. 1894년(고종 31) 전라도 민란을 발단으로 동학 농민 운동은 전개되었다. 동학군들은 전주를 점령한 뒤 정부와 강화를 맺고 지방관의 농민에 대한 수탈의 중지, 신분 차별의 폐지, 토지 균분제 실시 등 전근대적인 정치ㆍ사회 체제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원병 요청으로 파견된 청과 일본의 군대가 동학군과의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다. 동학군은 다시 봉기했으나,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계속해서 일어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일본은 조선 침략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 의의는 매우 크다. 대내적으로는 전근대적인 사회 체제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혁명 운동이라는 점에서,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뒤이은 갑오경장을 통해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뒤 조선 정부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바로 갑오경장(1894)이었다. 일본의 간섭이 없지 않았지만, 당시 일본은 청과 전쟁 중이었으므로 이 개혁은 비교적 자주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이때 정치ㆍ경제ㆍ사회 각 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이 있었다. 특히 사회면에서는 양반과 평민의 신분을 타파하고 백정ㆍ광대 등 천민 신분의 폐지와 함께 노비 제도를 혁파하는 등 신분 제도를 완전히 개혁하였다.

그러나 개혁이 진전되면서 점차 일본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개혁의 방향 또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회 체제를 변형시켜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방향으로 변질되어갔다.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가 부상하자 조선에서는 러시아에 의지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세력이 나타나 친러 정권이 수립되고 개혁은 중단되었다. 이에 일본에서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다시 친일정권을 수립하고 개혁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을미개혁은 갑오개혁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을미사변에 뒤이은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개혁의 의미는 크게 퇴색하였다.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특히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으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된 가운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함께 을미개혁을 추진했던 친일 정부는 붕괴되고 친러 정권이 다시 수립되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화되면서 금광 채굴권이나 철도 부설권 등 각종 이권들이 제국주의 열강에게 침탈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층은 외세에 의존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자주권 확립의 방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들 사이에서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이 운동의 중심 조직이 독립협회(獨立協會)였다. 독립협회는 서구의 근대사상을 받아들인 지식인과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유학자들이 주도하였다. 여기에서는 자주 독립ㆍ자강 혁신(自强革新)ㆍ자유 민권(自由民權) 등 세 가지 방향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집권층은 독립협회의 급진적인 개혁 요구를 탄압했고, 결국 강제로 해산시키고 말았다.

독립협회의 활동 역시 실패했으나 그 개혁 운동은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일제 침략에 대항해 민족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과 함께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독립협회의 요구에 따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하여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내외에 선양하기 위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또 한 차례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으니, 이것을 그 연호를 따라 광무개혁(1897)이라 한다. 이 개혁에서는 특히 절대 왕정 체제를 도입해 황제의 전제권을 법적으로 확립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에서 주장한 입헌 군주제나 의회 정치 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이었다.

산업과 교육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 근대적인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성립 자체가 조선을 둘러싼 열강 세력의 균형으로 가능했던 만큼 그 균형이 깨짐에 따라 광무개혁 역시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1900년대에 들어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점점 표면화되면서 결국 러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한국에서 일본의 우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 때 일본은 미국ㆍ영국ㆍ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국을 보호국으로 하는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1905년에는 흔히 을사조약이라 불리는 제2차한일협약을 체결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統監府)를 두어 본격적으로 한국의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권은 사실상 침탈되었다.

1910년에는 친일 정부로 하여금 합방 조약을 의결하도록 하여 대한제국은 완전히 종말을 고하였다. 이로써 한국인은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권의 침탈은 한국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나라를 잃고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서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을 뿐 아니라, 민족사의 일시적인 단절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국권 상실의 원인은 다각도로 찾을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강력한 추진 세력이 형성되지 못해 외부 세력의 침투를 불러들였고, 당시 집권 세력이 외세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하는 데에만 급급했다는 점을 특히 개화ㆍ보수의 알력과 여러 계층의 갈등을 하나의 민족적 역량으로 통합하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외부적으로는 때마침 일본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강행하는 시기였고,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해 일본의 한국 침략을 묵인했던 국제 정세를 들 수 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저항 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민족 운동으로 확대, 계승되어갔다. 이러한 민족운동 가운데 특히 뚜렷한 움직임은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이다. 이것은 각각 개항 직후의 위정 척사 운동 및 개화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의병 운동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자극받아 일어난 을미의병에서 비롯되었다. 이 때에는 종전의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대거 가담했고, 의병장은 대개 지방의 명망있는 유학자들이었다. 그 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군대가 해산되면서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의 규모가 커지고 무장과 조직이 강화되어 의병운동은 전면적인 항일전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의병 운동은 무력의 열세와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위축되어 갔다. 특히 국권이 침탈된 뒤에는 대부분의 의병들이 국외로 이동해 독립군에 합세했고 국내에서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의병 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일어난 항일 운동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며 또한 가장 효과 있는 운동이었다.

의병 활동은 개항 후의 위정 척사 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초기에는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평민 출신의 의병장도 배출되었다. 구성에 있어서도 농민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망라되어 전국민이 참여한 범민족적인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은 국민의 의식을 계발해 애국심을 기르고 국가의 힘을 축적해 주권을 회복하려는 구국 운동이었다. 사상적으로는 개화 사상과 연결되며, 특히 도시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적 의식을 가진 국민 대중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이들의 활동으로는 민족 산업을 육성해 자립적인 경제부강을 이룩하려는 경제 자립 운동, 국민들의 정치 사상과 사회 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ㆍ신민회(新民會) 등 정치ㆍ사회 단체들의 활동, ≪황성신문 皇城新聞≫ㆍ≪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등 언론 기관의 국민 계몽 운동, 사립 학교와 각종 학회를 통한 민족 교육 운동, 국사와 국어를 연구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 기독교ㆍ유교ㆍ불교ㆍ동학ㆍ대종교 등 종교계의 계몽 활동 등을 들 수 있다.

한일 합방에 따라 일제는 종전의 통감부를 총독부(總督府)로 바꾸고 조선 총독이 한국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총독부의 한국 지배 방식은 무단통치라고 불리듯이 매우 강압적이었다. 총독부는 한국 경제 전반에 걸쳐 수탈 정책을 실시하였다. 우선 토지를 탈점하기 위해 토지 조사 사업(1910∼1918)을 실시했고, 회사령(1910)ㆍ조선어업령(1911)ㆍ조선광업령(1915)ㆍ임야 조사 사업(1918) 등을 통해 한국의 산업을 침탈하였다. 그 결과 한국인의 민족 산업은 위축되었고 한국은 일본의 식량 공급지ㆍ상품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국의 독립 운동은 무단 통치로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의병운동이 계속되었고 비밀 결사를 통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해 간도ㆍ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개척하였다. 상해(上海)나 미국에서도 열강을 상대로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18년 말부터는 학생 및 천도교ㆍ기독교 등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계획되었다. 더욱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발표된 민족자결주의는 한국의 독립 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그 결과 1919년에 3ㆍ1 운동이 일어났다. 이 만세 운동은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고 지방에 따라서는 4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일제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군대까지 동원해 잔인하게 탄압함으로써 3ㆍ1 운동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3ㆍ1 운동의 의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3ㆍ1 운동은 모든 국민이 하나의 목표 아래 하나의 방법으로 전개한 민족 운동이라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전통 사회의 신분적 제약이나 계층간의 이해를 초월해 온 국민이 민족 운동에 참가한 것은 전통 사회의 전근대적 잔재를 일소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지금까지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던 독립 운동이 3ㆍ1 운동을 계기로 일원화됨으로써 앞으로의 독립 운동에 있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3ㆍ1운동은 비록 실패했으나, 한국 독립 운동사의 흐름에 있어 방향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3ㆍ1 운동은 일제에게 한국인에 대한 무단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가지게 해 통치 방식을 변환시키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른바 문화 통치가 나타났는데, 무단적 억압을 완화시켜 한국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부여한다는 통치 방식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문화 통치는 한국인들을 회유해 보다 효율적으로 수탈을 하려는 고등적인 기만 정책에 불과하였다. 문화 통치기에 오히려 경제적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해 한국의 쌀을 약탈함으로써 한국의 농민들은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였다. 토지를 일본인에게 빼앗긴 한국 농민들은 영세 소작인으로 전락해갔다. 또한, 한국에 직접 자본을 투자해 상품 시장 이상의 자본 투자 시장으로 재편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가 중국 침략을 위한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는 한국을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 기지로 만들면서 동시에 철저한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 자원뿐 아니라 병력과 노동력을 징발했을 뿐만 아니라, 내선일체(內鮮一體)ㆍ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내세워 우리 민족 자체를 없애려 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의 독립 운동은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3ㆍ1 운동 이후 해외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내에서는 실력 양성 운동을 비롯해 학생 및 사회주의자들의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실력 양성 운동은 일제의 식민 통치가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이름 아래 유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틈을 이용해 사회ㆍ문화ㆍ경제 등 각 분야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민족 운동이었다.

먼저 민족언론으로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되어 실력 양성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한국인을 위한 고등 교육 기관을 세우려는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비롯해, 노동 야학을 통한 민중 교육 운동과 문맹 퇴치 운동 등 민족 교육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제계에서도 민족 산업의 육성과 민족 자본의 형성을 통한 경제 자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위한 대중 운동으로서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학생들은 동맹 휴학 등을 통해 활발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이 6ㆍ10 만세 운동과 광주 학생 운동 등으로 폭발하였다.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국의 사회주의는 민족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져서 그 활동 역시 노동 쟁의 등 조직적인 항일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당시 사회주의 계열은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실력 양성 운동을 비판, 거부하였다. 서로 대립한 가운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가 일제의 자치론에 동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족주의 계열은 사회주의 계열과의 연결을 모색했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도 응함으로써 두 계열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자치론을 기회주의로 규정해 철저히 규탄하면서 조직적이고 일원화된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노선 변경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이 신간회에서 탈퇴한 후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이 밖에도 1920년대부터는 농민들의 소작 쟁의와 노동자들의 노동 쟁의가 빈발, 단순한 경제 투쟁을 넘어 일제에 대한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3ㆍ1운동 이후에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의 정부를 조직해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전민족의 여망에 따른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 사회에 제기하였다.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해 국내와의 연락을 취하고 독립 자금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을 편성해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일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가하였다.

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이며, 또한 3ㆍ1 운동의 정신을 계승해 수립되었고, 이후 항일 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된 단일 정부라는 점에서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민족의 독립 운동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지 못했고 내부 분열로 보다 효과적인 활동을 벌이지 못했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ㆍ간도ㆍ연해주 등지에서는 독립군들의 무장 독립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들은 1920년에 봉오동(鳳梧洞)과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참의부(參議府)ㆍ정의부(正義府)ㆍ신민부(新民府) 등이 설치되어 그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에 대한 군정부의 기능을 하였다.

1931년에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이나 연해주로 흩어졌고, 그 일부는 임시 정부에서 조직한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 밖에도 김구(金九)가 조직한 애국단과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 등이 중심이 되어 애국 열사들의 폭력 수단에 의한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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