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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9 (월)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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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41      
[한국] 한국의 문학 (민족)
한국(한국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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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을 한국 문화와 관련지어 이해하려고 할 때, 먼저 그 흐름을 네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제1기는 상고에서 삼국 통일 이전으로, 제2기는 삼국 통일 이후부터 12세기 말 고려 무신란까지로, 제3기는 13세기부터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까지로, 제4기는 영·정조 시대 이후부터 현대까지로 나눌 수 있다.

(1) 제1기

한국 문학은 부여와 삼한에서 행해진 제천 의식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현전하는 고대문학작품은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황조가 黃鳥歌〉·〈구지가 龜旨歌〉 등이다. 〈공무도하가〉와 〈황조가〉는 사언사구(四言四句)의 한문체 고시이다. 이 시대에는 중국의 난만한 한문 문화와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가지지 못해, 수입된 한문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한문이 사용되면서 비로소 기록 문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삼국유사≫ 등에 산견되는 자료를 모으면, 한국인들도 중국에 맞설 수 있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애쓴 흔적이 단군 신화를 비롯해 주몽 신화·박혁거세 신화·수로왕 신화 등의 고대 건국 신화에 반영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단군신화는 천신족과 지신족의 결합을 신화적 사유의 형태로 잘 드러내고 있다. 〈공무도하가〉나 〈황조가〉·〈구지가〉 등은 고대 한국인이 자신들의 감정을 중국 ≪시경 詩經≫의 형식을 빌려 표현한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힘이 증대하면서 향찰(鄕札)처럼 한자를 빌려서 한문과 다른 형태로 한국인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선진문화인 중국문화를 한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창작된 노래는 대개 익명이거나 집단의 창작형태로 나타났다. 집단의 노래는 고대인의 무의식적인 갈망을 승화시켜놓기도 하였다. 〈공무도하가〉는 죽음을, 〈황조가〉는 님을 그리는 마음을, 〈구지가〉는 풍요한 생산을 기원하는 고대인의 열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 건국신화에서 보여준 신화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치관의 전반적인 혼란이 은연 중 드러나고 있음이 주목된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불교적인 색채를 띤 노래가 생겨났는데, 〈풍요 風謠〉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노래는 여러 형태의 의식 노래의 면모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 〈도솔가〉는 그러한 노래가 잘 정제된 양식이다. 노래의 가락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규제한 것은 고대인의 발상이지만, 〈해가 海歌〉에서처럼 국가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노래는 재앙을 막거나 쫓는 주술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2) 제2기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후 한국문화의 전개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어가 경주어를 중심으로 통합되어 중세국어의 저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고구려나 백제계통의 문화는 신라문화 속에 흡수되거나 인멸되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은 향찰로 표기된 사뇌가(詞腦歌)의 등장이다. 사뇌가는 향가의 하위 갈래로서, 경주 근처 사뇌야(詞腦野)에서 발생해 통일신라 이후 민요와 구별되는 대표적인 노래형태로 정착하였다.

이 노래는 10행으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대개 범창(梵唱)·불곡(佛曲)·한찬(漢讚) 등의 영향으로 불교적 색채가 짙다. 신분적 차별 때문에 문제되는 피지배층의 사회적 통합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불교적 이념화가 적극 필요하였던 까닭이다. 사뇌가가 창작되고 불리고 있을 때에도 6세기 말 〈혜성가 彗星歌〉 등의 노래에서 주술적인 힘을 기대하고 있는 흔적이 엿보였다. 동시에 〈안민가 安民歌〉에서처럼 유교적 사유와 이념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충담사의 〈찬기파랑가 讚耆婆郎歌〉에서는 이상을 추구하는 신라인의 전형을 그려내기도 하였다.

사뇌가의 마지막 마무리는 고려에 와서 균여(均如)가 담당하였다.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는 11수의 사뇌가를 모은 것으로서 형식에 있어서 훨씬 정제되었으나, 일상생활에서 유리된 관념의 세계를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자주 나타나는 달·나무·구름 등의 비유대상은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곧 인간의 한 부분이면서, 믿음이나 의지에 의해 초월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설화에서는 불교 설화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한편, 〈연오랑과 세오녀〉 등 상층 지배계급과 하층 피지배계급의 관계가 폭넓게 다루어졌다. 호국 불교로 숭앙된 불교와 함께 들어온 유교는 육두품출신의 지식인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엄격한 골품 제도에 얽매인 이들은 신분의 불평등을 선험적 사실로 인식시키는 불교보다는 유교의 현세중심의 사유에 훨씬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지배층에서는 이들의 불만을 제도적으로 해소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유교적 지식인의 전형인 최치원 등의 방외인이 출현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당대의 고뇌를 적극적으로 타개하지 못하고 사뇌가에 상응하는 한문문학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육두품 출신들은 실용적인 문학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한시를 통해 내면세계를 구현해 나갔다. 이 시기의 문학은 향찰로 표기된 사뇌가가 공식 문학의 자리를 차지했고, 한문문학은 체제지향적 성향에도 불구하고 사뇌가류에 비해 비공식 문화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한문 표기의 문학은 서서히 공식적인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고, 한문 위주의 사고양식은 유교이념을 정착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3) 제3기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지식인들이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기 시작하자, 이 시기에 발달한 인쇄술의 발명 등으로 구비문학과 다른 본격적인 기록문학이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사대부들은 공식적인 문화의 기준으로 유교이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의 사상적 동향은 아직까지 불교적 사유의 두터운 저층을 대치하지 못하고 불교와 유교의 이념 사이를 방황하였다. 13세기에 들어서서 신흥사대부들이 개척한 〈한림별곡〉류의 경기체가와 〈청산별곡〉 계열의 속요는 그러한 정신의 소산으로 나타났다.

이에 반해 유교적 이념을 문화의 척도로 내세우려는 시도는 이규보의 ≪백운소설≫,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등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사대부들에게 문학은 우주 자연의 원리와 같은 글(三才之文)로서 이해되었다. 객관적 사물의 세계를 중시하면서, 한편으로 도의의 근거를 문학을 통해 이루려고 하였다. 경기체가는 악장과 가사로 발전되었고 시조라는 새로운 문학의 갈래가 만들어졌다.

불교나 도교의 무의식적 교양이 저층으로 침전되어가면서 따라 유교적 관념체계인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부상해 문학이론에 있어서도 재도론(載道論)이 등장하였다. 재도론은 문학의 심미성보다 도덕성을 중시해 비유교적 이념을 배제하는 구실을 수행해서 일찍이 유례가 없는 문학의 규범화가 이루어졌다. 남녀간의 애정이나 초월적 세계로의 지향과 같은 문학의 주제는 군주에 대한 충성 등 유교적 이념 속으로 수렴되었다. 모국어로 불린 고려속요 등은 한문으로 번역되어 유교적 규범에 구속되었다. 노골적인 애정표현은 절제되었고 모국어 노래말 속에 한문가사가 삽입되기도 하였다. 〈처용가〉·〈정석가〉·〈만전춘〉 등이 좋은 예이다.

이러한 유교 문화의 절정기인 15세기에는 한문학이 전성기를 맞이해 그 수준이 중국과 대등한 정도임을 서거정(徐居正)의 ≪동문선≫이 대외에 입증하였다. 유교문화의 정착이라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모국어를 표기할 수 있는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유교문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배태하게 되었다.

구전되어오던 수많은 구비문학을 문자로 정착하게 되어 저층의 문화를 기록문학의 본격적인 궤도로 끌어올렸다. 사대부는 하층민에게서 골계담을, 하층민은 사대부에게서 도덕적 교훈의 주제를 수용하게 되었다. 유교문화에서 소외되었던 부녀자나 하층인들에게도 의사표현의 창구를 열어 놓아서, 결국 한문으로 대표되는 유교문화의 숨은 모순을 드러내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진정한 이상향의 제시나, 유교적 이념의 허구에 대한 대담한 비판으로 발전해 소설이라는 새로운 갈래를 낳았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바로 좋은 예이다. 국문 소설은 17세기 이후에 새로운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해 문학의 전반적인 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소설의 등장은 산문으로 된 서사문학의 시작을 알릴 뿐 아니라, 쉽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이유로 상품화되어 널리 유통하게 되었다.

유교적 문화가 지배적 이념으로 변해가는 13, 14세기경에 이규보(李奎報)·이제현(李齊賢)·서거정 등의 한문학 대가가 나타난 것처럼, 16, 17세기경에는 한글문학의 대가들이 줄지어 등장하였다. 황진이(黃眞伊)·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윤선도(尹善道)·김만중(金萬重)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중 정철과 김만중은 각기 가사와 소설에서, 유교적 세계의 모순을 도교적 세계에 가탁해 해결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보여준다. 김만중은 〈사씨남정기〉에서 처첩의 갈등에 대한 이해를 관념적으로 보여주었고 〈구운몽〉에서는 유교적 이념의 모순을 불교적 이념과 절충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대부로서 부귀영화에 대한 기득권을 긍정하려고 하는 당대의식을 노출하였다.

이에 비해 윤선도는 유교이념을 신봉하는 사대부로서의 절조를 간결한 모국어로 표현함으로써 시조문학의 정상에 자리하였다. 그의 문학은 입신양명한 사대부의 방종이나 하층인들의 절실한 삶의 고통을 배제하고, 고도의 간결성을 형상화하였다.

(4) 제4기

유교적 이념은 임진왜란 이후 한국 사회의 저층에 지배문화로서 완전히 정착하였다. 그러나 현실과 이념 간의 모순은 기생·서자·잔반·상인·농민 등 하층민의 삶과 괴리되어 결국 이들에 의해 사대부계층의 지배문화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한시의 격조가 파괴되고, 단시조와 다른 사설시조가 별도로 나타나서 시가문학이 전면적으로 변화할 뿐 아니라, 고문(古文)이 파괴되어 문체반정론(文體反正論)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구비 문학도 지속적으로 성장해 탈춤과 판소리 등 연행문학이 활발하였다. 탈춤의 기원은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이르러 도시에 기반을 두고 대규모로 성장하고 주제도 더욱 뚜렷해졌다. 18, 19세기에 이르러 전주나 안성 등지에서 방각본출판이 성행해 문학작품이 상품화되고, 직업적인 이야기꾼이 등장해 독자와 작자로 연결되는 문학의 유통체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

지배층의 유교문화가 변화된 시대에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하층인들을 상대로 하는 국문문학이 생산성과 자율성의 확보라는 측면에서 현실에 대한 대항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상층문화와 하층문화가 교류하는 과정에서 주관적이고 여성적인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 애정소설, 가문소설, 여성계 영웅소설 등의 범람이 이를 대변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과 천주교의 전파로부터 시작된 서양문화의 침투는 유교사회의 모순을 체득하되 논리적 근거를 찾지 못한 중인계층과 하층민에게 적극 환영받았다. ≪성경≫이 한글로 번역되면서 따라 한문에 대한 상대적 열등감을 해소하고, 서양문체의 영향을 받아 섬세한 표현법을 익히게 되어 문학언어로서의 공고한 지위를 획득하였다.

인쇄 기술의 도입으로 문학작품의 대중적 보급이 용이하게 되어 개화기문학의 토양이 되었고, 일부 자각한 민중은 동학 등 민중종교에 경도되었다. 특히, 최제우의 ≪용담유사≫가 이루어진 시기에는 하층민의 각성이나 시민의 성장이 가시화되어, 〈칼노래〉와 같이 유교 지배체제를 위협하는 운동이 문학을 통해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신문 등을 통해 식자층을 확대시켜 문학작품은 상품화되어 전문적인 문인이 생겨났다. 감정을 표현하는 운문으로 쓰여진 문체가 산문으로 바뀌어 현실세계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고 비판할 수 있는 역량을 얻었다.

이 시기에는 한문학이 문학의 판도에서 밀려났다. 이광수(李光洙)·김동인(金東仁)·염상섭(廉相涉) 등 국문소설가의 노력이 언문 일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노력은 시가문학에서도 활발해 김소월(金素月)·한용운(韓龍雲) 등은 전통적 서정을 모국어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판소리계소설과 신소설에서 나타나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의 대립이라는 이중적 문화구조에 대한 무자각적 비판과 해석은 곧 한계를 가져왔다. 이광수의 경우는 ‘민족개조론’이라는 미망에 사로잡혀서 문학의 자율성을 배반하고 유교적 이념으로 복귀하였다.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문학론 또는 일본제국주의의 국책문학론으로 흡수되었다.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 등 개화기 문학가들이 문화의 이중구조가 주는 모순성을 인지하지 못해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이용되자, 결국 신채호(申采浩)의 문학무용론 내지 유효론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李箱)은 신채호와 다른 각도에서 문화적 주체의 상실을 〈오감도 烏瞰圖〉와 〈날개〉를 통해 고발하기도 하였다. 한편, 채만식(蔡萬植)은 판소리계소설의 이중구조에 착안해 풍자적 수법으로 식민지상황을 희화하였다.

광복 후의 문학은 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음에 따라 비로소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좌·우익의 대립으로 문단이 분열되고, 마침내 전통문화에 대한 비판적 정리와 식민지 잔재의 청산이 있기 전에 6·25라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해 문학의 주제는 집단과 개인의 문제로 전이되었다. 김동리(金東里)·황순원(黃順元) 등에 의해 실존주의문학이 일어났고, 최인훈(崔仁勳)의 〈광장〉에 의해 이념의 폭력에 노출된 개인의 존재가 문제시되었다.

개인적인 경험의 틀 속에서 사회적 혼란과 모순을 인지하고 비판하려는 이러한 지적인 노력은 민주주의의 이면에 있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직시하게 되었다. 김정한(金廷漢)은 〈인간단지〉에서 경제정책의 폐단으로 사회문제화된 소외계층을 부각시켰다. 한편, 민족 문학의 건설과 민족어의 지속적인 발전이라는 과제는 신경림(申庚林)의 민요시 운동으로 접맥되고, 김지하(金芝河)의 경우는 담시(譚詩)라는 전통적 문학양식의 재발견으로 사회현실의 부조리에 적극 대응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한국 문학은 현대 문명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분단 문학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전통 문화의 정리와 외래 문화의 비판 위에 기층문화를 확대하는 자리에 문학의 위상이 놓여 있고,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학이 가지는 소임이 성실히 수행될 것이다.

<강신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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