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3:10
분 류 사전1
ㆍ조회: 1720      
[한국] 한국 문화의 형성과 전개 (민족)
한국(한국문화의 형성과 전개)

세부항목

한국
한국(위치와 영역)
한국(자연환경)
한국(인문환경)
한국(환경보전)
한국(한국사 시대구분)
한국(원시사회)
한국(고대사회)
한국(중세사회)
한국(근세사회)
한국(근대사회)
한국(현대사회)
한국(한국사의 특성)
한국(한국문화의 형성과 전개)
한국(한국의 사상과 종교)
한국(한국의 문학)
한국(한국의 민속신앙)
한국(한국의 과학기술)
한국(한국인의 생활)
한국(가족주의문화)
한국(한국문화의 특성)
한국(현황과 전망)
한국(참고문헌)

한국 문화는 한국인이 5,000여 년 동안 살아온 역사이자 삶의 지혜이다. 문화는 살아가는 사람의 역사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과거의 역사로서만이 아니라 오늘의 삶을 가늠해주는 지침이 된다. 이 점에서 문화는 삶의 지혜로서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가 언제나 새롭게 쓰여지고 정리되어 가듯이, 우리의 문화도 언제나 새롭게 재정의되고 끊임없이 재창조되어가는 성질의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한국인이 지나온 발자취이다. 그 발자취는 각종의 역사적 유물들과 기록에 의해서 밝혀진다. 그렇다고 역사적 유물과 기록이 그 자체로서 발자취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적 유물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라는 해석 방법이 매개되어야 하고, 역사적 기록 자체도 이러한 점에서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유물과 기록이 제작되고 기록되던 당시의 한국인은 그 유물과 기록을 정리하고 해석하는 시대의 한국인과 동시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석은 해석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의 맥락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삶의 지혜라는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한국 문화에 대한 논의는 지금까지 주로 역사 발전 과정에 초점을 맞춘 진화론적 설명이 대부분이다. 지금까지 논의해 온 일반적인 내용을 여기서 정리하고, 한국문화의 특성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인지인류학(Cognitive Anthropology) 내지는 구조주의 입장에서 논하는 대대적 문화문법(對待的文化文法)으로 설명하겠다.

인간이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창조물과 성과를 가리켜 넓은 의미의 문화라고 한다면, 인류의 문화는 인류 사회가 이루어지면서부터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도 물론 이러한 보편적인 세계사적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문화는 이러한 보편성과 함께 특수성도 갖추고 있다. ‘한국 문화’라고 할 때는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더 염두에 둔 말이다.

한국 문화의 형성과 전개에 있어서 그 주체는 한국인이다. 문화를 인간활동의 산물로 본다면 한국 문화는 한국 역사의 전개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 문화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역사적인 시기 구분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문제점이 있고 또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으나, 한국 문화의 형성과 그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시대 구분에 따라 서술해 나가기로 한다.

① 원시공동체사회 : 한국문화의 형성기, ② 고대 : 한국문화와 외래문화의 접촉기― 문화의 개방성과 전파성, ③ 삼국시대 : 한국문화의 분열기―한국문화의 자기 점검기, ④ 통일신라와 발해 : 한국문화의 성숙기. ⑤ 고려 : 한국문화의 다양화 시기, ⑥ 조선 : 한국문화의 폐쇄기―민중문화의 태동기, ⑦ 일제강점기 : 한국문화의 투쟁―암흑기, ⑧ 광복 후 : 한국문화의 시련기―문화적 통일지향기.

여기서는 문화 주체인 인간의 활동,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 요컨대 역사적 상황과 그 상황을 조화시키려는 한국인의 노력을 문화 형성 및 전개의 주된 동인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아울러 문화 담당 주체의 변화라는 면도 고려할 것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의 문화]

우리 나라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지역이었다. 최초의 문화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시대 문화는 도구와 불의 사용, 채집·어로·수렵 활동 등을 통해 형성된 무리 사회라는 기반 위에서 형성되었다. 생산성은 낮았지만 공동 생산 체제에 기반을 둔, 모든 사람이 공유한 문화였다. 원시 예술이나 신앙은 이러한 공동 생활을 중심으로 자연과의 더없는 교감 속에서 소박하게 자리잡아갔다.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인간은 또 하나의 활동, 즉 자연을 정복하려는 의지를 키워 나갔다. 이와 함께 더욱 견고하게 짜여진 공동체사회 형태인 혈연적 모계 씨족 사회를 형성하였다.

신석기 시대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련되었다. 신석기 시대 문화를 형성한 주요 요인들로는 도구의 발전, 토기의 제작, 농경의 시작, 정착 생활 등을 들 수 있다. 농경은 자연 법칙을 더 한층 목적의식적으로 이용한 생산 활동의 시작으로, 사회적 생산의 성장과 문화 발전을 촉진시키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농경으로 인해 불가피해진 정착 생활은 문화 발전과 다양화에 큰 몫을 하였다. 안정된 생활 공간 속에서 만들어진 각종 형태의 토기는 당시 주민 집단의 문화적 특성과 예술적 정서를 가장 잘 보여준다. 이와 함께 기술이 크게 발전했던 시기도 바로 이 신석기 시대였다.

농경이 보습 농사로 바뀌어가면서 남성이 생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생산 활동의 범위가 확대되고 생산도 증가했다. 분배에 있어서 남성이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는 사회적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점차 가부장적 씨족 공동체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문화 성격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 문화가 생산 도구와 토기 제작을 중심으로 한 오랫동안의 여성 중심의 문화에서, 생산 도구와 무기 제작을 주된 요소로 삼는 남성 중심의 문화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금속기의 사용은 이를 더욱 촉진시켰고, 물질 문화도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청동 무기의 사용에 따라 필연적으로 늘 수밖에 없는 음식 문화의 다양화는 그릇문화를 발전시켜 토기 제작을 더욱 다양화 시켰다. 토기에 각종 장식이 가해졌고, 사람의 모습을 주된 테마로 삼는 조형 예술도 발전하였다. 오랫동안의 정착 생활은 주거 문화의 발전을 가져왔고, 돌무덤이라는 한국 원시 문화 특유의 매장 문화도 형성되었다.

한국 문화의 형성기에 해당하는 원시 공동체 사회의 문화는 여성이 그 주체였다.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그 주체가 남성으로 옮겨지긴 했어도, 아직은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공동 문화였고, 그 취향은 토기를 중심으로 한 여성문화였다.

아직 인간 사이의 갈등과 투쟁, 그에 따른 불평등을 반영한 문화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인간활동의 기본 전제가 되는 의식주 문화는 안정을 이루었다. 이는 앞으로의 한국 문화 전개에 있어서 정신적·물질적 기초가 되었다.

신석기 시대 말기, 즉 원시공동체사회 말기에 이르러 사유재산이 출현했고 그로 인한 불평등이라는 사회 문제가 제기되었다. 고대 사회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결정짓는 이른바 노예제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산물이었다.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예·맥·한 종족 집단들은 원시 공동체 사회 말기에 이르러 공동체적 경제 형태를 청산하고 노예 소유자적 경제 형태로 전환하기에 이르렀다.

사회 경제 형태의 변화와 더불어 노예 소유자 국가인 고조선·부여·진국이 형성되었다. 이 국가들은 물론 계급 국가였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상 첫 고대 국가였다. 고조선 문화의 모습을 알려주는 유적과 유물은, 여러 가지 이설이 있긴 하지만,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무덤이라는 유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고조선의 문화는 우선 발전된 청동기 문화였다. 다양한 형식과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독창적인 비파형 청동단검은 고조선의 청동기문화가 무기를 귀중하게 여겼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춘추 전국 시대라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관련이 있다.

이 밖에도 장식품·생활용품·수레부속품·마구류 등은 실용적인 문화를 대변하는 동시에 미술적 취향을 잘 드러내주는 공예품들이었다. 특히, 잔줄무늬거울과 같은 것은 당시의 높은 기하학적 도안법의 발전을 보여주는 걸작품이다. 고조선은 법률에 의해 유지된 국가였다. 그것은 노예소유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법률로, 고조선문화가 가지는 성격의 일면을 반영한다.

부여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며 깨끗한 것을 숭상하는 문화 성격을 지녔던 국가로, 제천 등 종교의식문화도 발전하였다. 이러한 의식 문화와 동반된 놀이 문화 등 부여의 문화는 고구려에 직접 이어졌다.

또 주변의 예·옥저 등 여러 종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한족(韓族)으로 대표되는 진국의 문화는 금·은·철 등 금속 문화 방면에서 잘 나타나며, 특히 이 문화는 일본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대규모 집단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여 문화의 직접 전파가 이루어졌다.

[고대의 문화]

한국의 고대는 보편적인 세계사의 발전 법칙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한국 고대 사회는 아직 해결해야 할 학문적 문제들이 많긴 하지만, 노예제 사회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문화가 이 시기에 중국을 비롯한 오늘날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수많은 종족들과 끊임없이 접촉한 결과로 나타난 사회 경제 형태이다.

고대 한국 문화의 성격도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문화의 폐쇄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중국문화는 물론 북방의 문화요소들이 고조선이 남긴 각종 문물들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문화의 종속성이 아니라 개방성이다. 민족이니 하는 이데올로기적 관념이 나타나기 이전의 문화가 가지는 특성이라 하겠다.

그러면서도 그 개방성이 모방성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비파형 청동단검이나 돌무덤과 같은 군사문화와 매장문화는 다른 종족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유의 문화라는 사실이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개방성과 전파성, 이것이 한국 고대 문화가 가지는 특성이었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했던 여성적 문화가 이 시기에 오면 보다 남성적인 취향의 문화 내지는 계급성을 반영한 문화로 전환되어간다. 그러나 오랜 기간 이어져오며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전통적인 여성 취향의 문화는 장식예술과 각종 기물에 새겨진 문양들에 면면히 반영되고 있다.

[삼국 시대]

문화의 개방성과 전파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고대의 문화는 고조선의 멸망으로 커다란 변화를 맞는다. 이는 중국민족이 진·한을 거쳐 통일되는 역사적 상황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 화이 관념(華夷觀念)이 중국인에게 정착되고, 이 관념의 외연적 확대라는 중국의 대외 정책의 기본방향은 필연적으로 주변 민족들과의 투쟁을 초래했다. 그 결과 고조선이 내부 분열로 몰락했고, 고조선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었던 한국 고대 문화의 개방성과 전파성은 변화될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 말기 중국 한나라 상인과 관리들이 대거 고조선에 몰림으로써 풍속이 각박해지고, 그리하여 법조항이 8조에서 60여 조로 늘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뚜렷한 자기 판단 아래서 개방과 전파로 조화롭게 이루어지던 문화의 특성이 변질되었음을 잘 말해준다.

삼국 시대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개방과 전파라는 고대 문화의 특성이 변화되어, 삼국 각자가 폐쇄적인 통로를 통해 문화를 수용하고 전파하는 문화의 분열시기였다. 이 시기의 폐쇄성은 조선 시대의 문화가 가지는 폐쇄성과는 그 성격이 엄연히 다르다.

삼국의 폐쇄성은 고조선 몰락 후 초래된 정치적·영토적 분리에서 오는 문화전파 통로의 폐쇄였지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적 문화 폐쇄는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좀더 넓게 말하면 고조선이 몰락한 후 한국 고대문화를 삼국이 각자의 방향으로 재편성해나가는 과정이었다. 결국 통일을 위한 과정이었다. 삼국의 문화적 특성을 일일이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위에서 말한 안목으로 삼국의 문화를 본다면, 한국문화가 보다 다양해졌음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상호 경쟁으로 문화 발전은 한층 촉진되었다.

삼국 시대의 문화는 문화의 주체가 여성·남성의 차원이 아닌 국가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빚어낸 결과였다. 신라 불교 수용과정이나, 고구려가 도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정치적 목적성도 당시의 문화 전반이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문화 생산의 담당자와 민중이 분리되기 시작했으며, 또 문화생산의 담당자가 지배 계층과도 신분적으로 분리되는 양상이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고대의 문화는 지배계층과 노예 내지 예속민이라는 극단적인 계급이 동시에 담당하였다. 다시 말해 문화 활동에 대한 제한 내지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문화가 국가에 의해 주도되던 삼국 시대에는 문화 담당자가 신분적으로 일반 민중이나 지배 계층과 구분되었다. 또 문화 활동의 산물이 지배 계층에 예속되어 민중의 생활과 유리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것이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문화 담당자는 하나의 신분층으로 굳어졌다.

요컨대, 삼국 시대는 삼국 각자의 폐쇄적인 문화수용 통로를 통해 주변 문화를 현실적 요구에 맞게 경쟁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들의 것을 점검해나가는 시기였다. 문화 수용의 통로는 국가가 독점하여 폐쇄성을 띠었으나, 문화 수용의 내용은 전과 별차이없이 개방적이었다. 이는 한국문화의 성숙기를 구가한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문화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문화]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합된 시대를 흔히 통일 신라 시기라 부른다. 여기에 발해는 일찍부터 남북국 시기의 북국으로 인정되어왔고, 최근 더욱 그 역사적 위치가 평가되고 있다. 이 양자의 문화를 함께 뭉뚱그려 개괄하기란 현재로서는 힘들다 그러나 한국 문화가 이 시기에 와서 보다 성숙되었다는 점만은 충분히 인정된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 최초로 이민족에 의한 민족 분단이 이루어진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시기의 문화는 신라나 발해가 모두 국제적인 성격의 중국 당문화(唐文化)를 한껏 받아들여 충분히 누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당문화가 수용되었던 것은 두 나라가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달리 찾을 수 있다. 신라는 삼국을 통합할 때 당이라는 거대한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측면에서 당문화의 세례를 면하기 어려웠다. 특히 지배 계층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발해는 문화적인 수준이 크게 뒤떨어지는 다수의 말갈민을 통합해 세운 나라였고, 또 초기에는 신라와 대립되는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당의 문화가 절실했던 것도 당연했다. 물론 신라나 발해 모두가 현실적인 대외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당과의 관계 유지는 필연적이었다.

통일 신라의 문화는 크게 보아 특정 신분에 의해 독점되었다. 골품제라는 특유의 신분체계는 몇 차례의 개혁시도에도 불구하고 통일 신라 전시기를 통해 굳건히 유지되었다. 거의 모든 분야의 문화는 이 골품제의 최고 자리를 차지한 성골과 진골 귀족에 의해 독점되었다. 찬란한 황금문화를 비롯한 거대한 고분 문화, 그리고 찬란한 장식 미술은 이를 잘 대변해준다. 삼국 통합기에 보여준 건강한 불교 정신은 통일 후 왕권과 골품 귀족들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반동화했다. 이는 통일 신라 말기에 선종이라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상의 유입으로 귀착되었다.

흔히 혼란한 통일신라 말기에 새로운 지도 이념으로서 사상과 문화 및 정치 체제를 수용했다고 하는 6두품 계급의 현실 인식도 개인주의적이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통일 신라 말기의 보잘 것 없는 문화적인 면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다만, 진성여왕대를 전후해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 봉기는 다음 시대의 문화 질서 개편 방향에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문화가 지배 계급에 의해 독점되었다는 점에서는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고분 문화 및 불교 문화로 대표되는 발해의 문화에는 성숙한 당문화의 요소가 짙게 반영되어 있다. 다만 과거 고구려의 강인한 문화의 단면이 끊기지 않고 계승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문화의 독점은 발해국의 주민 구성상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발해가 별다른 이유없이 문화적으로 열등했던 거란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사실은, 문화의 수용과 분배가 자기 철학 없이 이루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의 문화 수용 태도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신라는 국제적인 성격의 성당 문화(盛唐文化)를 보다 넓어진 영토와 증가된 인구를 다스리는 데 활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족적 성격이 강한 골품제를 개편하지 못해 그 문화를 주로 지배계층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데 적용하고 말았다. 통일 신라의 문화는 귀족적 취향의 성숙된 면이 구석구석에서 묻어나오지만,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각자에 맞게 형성했던 삼국시기의 문화적 특성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성과 전체성을 모색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말갈인을 다스려야 했던 발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통일 신라 말기가 철저하게 힘에 의해 재편될 수밖에 없었던, 다시 말해 그 어떤 사상과 종교도 별다른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나, 발해가 거란의 군사력 앞에서 맥없이 무너졌던 사실에서 이 시기 문화의 한계점이 드러난다. 아울러 이 시기는 한국 문화가 전개되는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지는 시기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향후 한국 문화가 다분히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도 문화 영역의 축소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려의 문화]

고려의 문화가 비교적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게 된 데에는 전 시대의 문화가 보여준 사회적 역할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이는 고려 시대의 문화가 여러 방향에서 한국 문화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적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탓으로 무신 집권기라는 정치적 암흑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한국 문화의 긴 역사적 흐름에서 볼 때 이 정치적 암흑기가 문화적 암흑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신 집권기와 그 뒤의 문화적 성격은 대몽 항쟁기와 몽고의 간섭기를 함께 고려한다면, 한국사의 전개와 함께 입체적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다른 민족의 문화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차원이 아닌 강제적 이식이 행해진 시기의 문화에 대해 지금까지 우리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자유분방하다 할 수 있는 고려 문화의 발전과정 속에서 이러한 면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려 시대를 흔히 귀족의 시대라 부르지만, 고려 시대의 문화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무신 집권기의 문화와 몽고 간섭기의 문화의 특성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조선 시대의 문화를 평민적이라 부를 수 있는 그 근원은 여기에서 찾아진다.

고려 시대 문화의 특성을 한국 문화의 발전과정 속에서 이해하려 할 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려 말에 수용된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이념적·철학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지만, 한국 문화 전개 과정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고려 왕조는 이 새로운 이념 체계를 자기화하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념은 조선 시대 양반층의 형성이라는 한국사에 있어서 중요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고려 시대 문화의 특성 이면에는 문화의 자기 체질화라는 면이 결여되어 있다고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는 불교가 그 자체의 폭 넓고도 깊이 있는 문화적 특성을 살리지 못하고 현실적인 이익만을 추구한 사실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의 문화]

성리학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다분히 이데올로기적이고 지배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성향이 강하며 또한 배타적이다. 주자학, 즉 성리학이 형성된 남송대의 역사적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다면 성리학의 이 같은 성격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그와 같은 성격이 한국 성리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느냐는 좀더 논해야 할 문제이지만, 조선의 역사 전개와 조선 시대의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조선의 지배 계층인 양반들이 보여준 정치적 행태는 성리학이 시대와 민중을 이끌어갈 능력을 상실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른바 실학이라는 새로운 정치적·문화적 운동이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던 것도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특징으로 하는 성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후 철저한 자기반성과 개혁, 다시 말해 역사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엄연한 결과였다. 병자호란과 물리적 힘에 의한 개항 및 일제의 침략도 모두 여기에 기인하는 바 크다.

조선 시대의 문화는 고대나 삼국 시대의 개방성, 통일 신라 시대의 성숙함, 고려 시대의 자유분방함 등 앞선 시대의 그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문화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질식당한 시대였다.

그러나 그 숨막힐듯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폭넓은 정치적 자각을 자극했다. 넓어진 지배 계층과 한정된 관직이라는 현실이 빚어낸 정치 문화, 그 정치 문화가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민중의 자각, 그리고 싹트는 민중의 문화 등 실로 조선 시대는 한국 문화의 전개 과정에서 민중 문화를 배태시킨 시기였다.

<강신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한국] 한국의 사상과 종교 (민족)
아래글 [역사] 한국사의 특성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0 사전1 [알림] 이후의 내용은 '한국사 사전 2'에 이어집니다. 이창호 2010-07-05 2033
2999 사전1 [조선] 김우명의 졸기 (숙종실록) 이창호 2002-11-03 2411
2998 사전1 [조선] 김우명 (한메) 이창호 2002-11-03 2049
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2002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2023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2073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2036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2165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2546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3254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