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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9-20 (목) 15:40
분 류 사전1
ㆍ조회: 1285      
[조선] 정묘호란 (한메)
정묘호란 丁卯胡亂

1627년(인조 5) 중국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전쟁. 1월 중순부터 3월 초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그 원인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西人)의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과 후금 태종의 조선에 대한 주전정책(主戰政策)의 충돌에 있었다.

광해군은 외교에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여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의 새로운 국제 정세에 현명한 외교 정책으로 대응해 충돌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인조 즉위 후의 집권 세력인 서인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는 한편, 랴오둥[요동(遼東)]을 수복하려는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하는 등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금은 배후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고 조선과의 경제 교류가 막혀 극심한 물자 부족이 발생하자 무력으로 이를 타개할 기회를 노렸다. 한편 인조 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은 품은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그 잔당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면서 조선의 병력이 약함을 강조, 정벌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아민(阿敏)으로 하여금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고, 주력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점령한 뒤 용천(龍川)·선천(宣川)을 거쳐 안주성(安州城) 방면으로 남하하여 평양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에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난하고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하였다. 화전(和戰)의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이 강화를 제의해 오자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론(主和論)을 채택, 후금과 교섭하여 정묘약조를 체결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후금군은 평산(平山) 이남으로 더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할 것이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 화약은 두 나라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가 굴욕적인 데다가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요구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으로 더욱 배금의 길을 걷게 되었다. 후금도 경제적 이익은 취할 수 있었으나 모문룡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에 더욱 팽창된 후금이 조선에 대한 강압적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어 결국 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동걸>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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