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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3 (화)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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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042      
[고려] 고려의 대외 관계 (민족)
고려(대외관계) 고려의 대외 관계

세부항목

고려 역사 개관
고려의 성립과 발전 1
고려의 성립과 발전 2
고려의 제도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 문화
고려의 역사적 성격
고려 시대 연구사
고려 시대 참고문헌

[대외 정책의 특성]

고려 시대는 유달리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대륙 정세가 불안정해 계속해 그 파도가 고려에 파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려의 대외 정책은 시대적인 특성을 갖게 되었다.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부터 멸망한 14세기 후반까지 대륙에서는 북방 민족이 군사적·정치적으로 커다란 활약을 전개하였다.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여진, 그리고 몽고 등이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한 북방 민족의 등장은 종래 중국을 주축으로 움직이던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 관계에 변동을 일으켜 고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五代)로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 대해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문화적·경제적으로 밀접한 유대를 맺었다. 반면 북방 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고는 야만시하고 대립 정책을 견지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 정책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국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동안에는 아무런 변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란·여진·몽고 등 북방 민족이 일어나 문약한 송왕조를 압박하고 중원에 진출함으로써 고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고려가 계속해 그들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북방 민족의 압력에 대한 고려의 대응은 그때 그때의 지배층의 체질에 따라 양상을 달리하였다. 처음 거란에 대해서는 건국 초기의 강건한 자주적 의식을 밑받침으로 굳건한 항쟁을 계속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 들어 문신귀족정치가 난숙하자, 그들은 금나라에 대해 유약한 사대주의를 결정해 강화를 맺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 이르러 몽고가 침입했을 때는 최씨 무신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으므로 항쟁의 결의를 고수하고 강화도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한 고려의 대외 정책의 추진은 당시의 국제 정세의 변화보다도 대내적인 위정자들 사이의 이해 관계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거란과의 관계]

고려가 건국된 10세기 초에는 대륙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오대의 혼란이 송나라의 건국으로 수습되고, 북방에서는 거란이 강성해져 발해가 멸망하였다. 그 때 고려는 송나라에 대해 친선 정책을 썼으나 북방 민족인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 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에 대해 배척 정책을 쓴 것은 거란이 중국 오대의 혼란기에 장성을 넘어 연운(燕雲) 16주를 침략했고, 또 동족 의식을 가진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에도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942년 거란이 사신을 보내어 낙타 50필을 바치자 태조는 “거란은 발해와의 구맹을 저버리고 일조에 공멸한 무도의 나라이므로 교빙할 수 없다.”하고 사신은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 밑에 매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또한, 태조는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진 정책을 강행해 청천강까지 국경을 확장시켰다. 그러한 태조의 북진 정책과 반거란 정책은 역대왕에게도 계승되었다. 정종은 북방 개척을 위해 서경 천도를 계획하는 동시에,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하고 광군 30만을 조직해 거란 침입에 대비하였다.

또한 정종과 광종은 청천강 너머 압록강 사이에 여러 성진을 쌓아 북방에 대한 경계를 엄히 하였다. 그런데 광종 때 발해유민들이 일찍이 고구려가 흥기했던 압록강 중류 지역에 정안국(定安國)을 세워 송나라 및 고려와 통교하면서 거란에 적대하므로,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은 필지의 사실이 되었다.

거란의 제1차 침입은 993년에 있었다. 거란은 986년 먼저 압록강 중류지역의 정안국을 멸망시키고, 또 압록강 하류의 여진족을 경략해 991년 내원성(來遠城)을 쌓은 뒤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그 때 거란은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이끌고 고려의 서북변에 쳐들어왔는데, 고려군의 중군사(中軍使)로 출정한 서희(徐熙)가 그와 담판을 벌여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수하게 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여진의 옛땅을 소유하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거란군이 철수하자 고려는 압록강 이동의 여진을 토벌하고 거기에 여러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 육주(江東六州)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의 국경은 압록강에 이르게 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강동 육주를 점령하고 군사적 거점으로 삼은 데 불만을 갖고 그의 할양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드디어 1010년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제2차 침입을 해왔다. 그 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는 목종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의 관계를 맺고 왕위까지 엿보자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와 함께 목종까지 시해하고 현종을 영립했는데, 거란의 성종(聖宗)은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양규(楊規)가 흥화진(興化鎭)에서 거란군을 맞아 잘 싸웠으나, 강조가 통주(通州)에서 패해 포로가 되고 개경까지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거란은 다만 고려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별다른 소득 없이 철군했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도 항복하지 않은 북계의 서경·흥화진 등 여러 성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약속한 대로 국왕의 입조를 지키지 않았고, 거란은 이를 독촉했으나 현종은 병을 칭해 회피하였다. 그러자 거란은 본래의 목적인 강동 육주의 반환을 강요했으나 역시 거절당하였다.

이에 1018년 소배압(蕭排押)으로 해금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3차침입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상원수 강감찬(姜邯贊)이 흥화진에서 내침하는 거란군을 맞아 크게 무찌르고, 퇴각하는 적군을 구주에서 섬멸해, 거란의 침입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렇듯 참패만을 당하고 그들의 목적인 강동 육주의 쟁탈에 실패하자, 1019년 고려와 화약을 체결해 평화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북방에 대한 경계를 강화할 필요를 느끼고 전란이 끝나자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1029년부터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그 뒤 1033년부터 국경선에 장성을 쌓기 시작해 1044년에 완공했는데 그것이 ‘천리장성’이다.

[여진과의 관계]

고려가 많은 인력과 경비를 들여 북방에 대규모의 천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뿐 아니라 여진에 대한 대비책이기도 하였다. 11세기 후반부터 북만주의 여진족인 완안부(完顔部)가 강성해져 여러 부족을 토벌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원래 여진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靺鞨)의 유족으로 문화수준이 낮아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들은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구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공물을 바치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식량·철제농구 등을 주어 회유하고, 반면 침구하는 자는 무력으로 응징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또한, 고려에 귀순한 여진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일반 민호에 편입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여진족에 통일 세력이 나타나 오히려 고려에 압박을 가하니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완안부에 의해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했던 여진족을 토벌해 함흥지방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定州關 : 지금의 定平)에 이르렀다. 고려도 임간(林幹)과 윤관(尹瓘)으로 그들을 치게 했으나 모두 패배하였다. 여진군은 기병인 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으로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주축으로 한 별무반(別武班)을 조직해 신기군(神騎軍 : 騎兵)·신보군(神步軍 : 步兵)·항마군(降魔軍 : 僧兵)을 편성하고 대비를 서둘렀다. 1107년(예종2) 윤관에 의한 여진 정벌이 단행되었다. 그 때 윤관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정주관을 출발해 함흥 평야를 점령하고 그 부근에 9성을 쌓아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니, 고려의 국경은 크게 북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종래의 함흥 평야설에 대해 근래 두만강 너머 만주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그러나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주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어 환부를 애원하였다. 또 고려 내부에서는 윤관의 무공에 대한 시기 등이 겹쳐 1109년 구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그뿐 아니라 여진의 아쿠타(阿骨打)가 111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금나라를 건국,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고려에 대해서도 사대의 예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1126년 권신 이자겸이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나라에 대해 상표칭신(上表稱臣)할 것을 결정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강건한 고려인의 기개로 거란 침입에 항전을 다했으나, 문신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의 유지를 위해 여진족에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송과의 관계]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의 여러 중국왕조와 교빙했는데,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그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친선관계는 북방민족인 거란과 여진의 흥기로 방해를 받게 되었다. 거란의 침입으로 강화를 맺게 되자 고려와 송나라와의 교빙은 끊어졌다. 다만 비공식적인 송나라 상인의 내왕은 있었다. 그러나 문종 때 거란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다시 송나라와의 국교가 재개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입하려는 욕구가 많았고, 송나라도 고려를 통해 거란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양국의 통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2세기 무렵에 여진족이 흥기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친선 관계는 변모하게 되었다. 송나라는 금나라와 손을 잡고 숙적인 요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나중에는 도리어 금나라의 침공을 받게 되었다. 송나라의 변경(逗京)이 함락되고 남은 일족이 강남으로 피신해 남송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되어, 고려와 송나라와의 통교는 약화되었다.

송나라는 고려와의 친선 관계를 유지해 거란·여진족의 침입시에 고려의 군사력을 얻으려고 했으나 고려는 중립의 태도를 취하였다. 송나라가 거란정벌에 고려의 원군을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송나라가 금나라의 침공을 받자, 고려에 군사를 일으켜줄 것을 간청했고, 강남으로 옮긴 뒤에도 포로가 된 휘종·흠종을 구출하도록 부탁했지만 역시 고려는 거절하였다. 고려는 친송정책을 취하면서도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군사적 개입을 회피하는 중립의 태도를 유지하였다.

송나라의 대 고려 외교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있었다면, 고려의 대송 외교는 문화적·경제적 면에 주안점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통교를 통해 그들의 발달된 선진 문물을 수입하였다. 고려는 사신과 학생·승려를 송나라에 파견해 그들의 난숙한 유학·불교·예술 등을 받아들여, 유학·불교가 송나라의 영향으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송판본의 전래로 고려의 인쇄술이 발달되었으며, 송자(宋磁)의 영향으로 고려자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공적인 사신과 사적인 상인의 왕래로 송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고려는 송나라의 선진 문화에 대한 흠모와 또 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송나라의 서적·비단·자기·약재·차·향료 등을 수입했으며, 반대로 금·은·동·인삼·나전칠기·화문석 등을 수출하였다. 그 때 예성강구의 벽란도(碧瀾渡)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멀리 대식국(大食國 : 아라비아)의 상인까지도 출입하는 국제 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몽고와의 관계]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온 고려의 대외 관계는 13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변동을 겪게 되었다. 즉, 몽고 세력의 흥기와 그 침입이었다. 몽고족은 금나라의 세력 밑에 있었는데, 13세기 초 테무친(鐵木眞)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 칸(汗)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가 곧 징기즈칸(成吉思汗)이다. 그 때부터 몽고는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해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나라를 침략해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몽고와 접촉을 가진 것은 1219년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족을 몽고와 함께 공략해 함락시킨 것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금나라에 복속되었던 거란족은 금나라의 국세가 약화되자 독립했다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 영토로 밀려와 강동성에 들어왔고, 이 때 고려·몽고군의 협공으로 패멸되었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한 뒤 고려에 대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특히 1221년 사신으로 온 저고여(著古與)는 황태자의 지시라고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오만불손한 태도로 고려 군신들의 분노를 샀다. 1225년 압록강가에서 귀국하던 저고여가 어떤 도둑에게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는 그것을 트집잡아 침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몽고의 제1차 침입은 1231년에 이루어졌다. 몽고의 장군 살리타(撒禮塔)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 근처에 다다랐다. 고려는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구주에서 박서(朴犀)가 용감히 항전했으나, 수도가 포위되어 화의를 요청해 몽고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한 뒤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관리의 횡포가 심하자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어 최우 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반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자 살리타는 제2차 침입을 단행해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했으나, 처인성(處仁城 : 지금의 용인)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고군은 1259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몽고군의 침략이 되풀이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해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 정책을 견지한 최씨 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했고, 육지에서는 일반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특히, 무신 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海島)로 들어가 살게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농민은 그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다. 그러나 항전을 고수해왔던 최씨정권의 붕괴는 항몽전에 변화를 가져왔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柳璥), 무신 김준 등에 의해 제거되자, 강화파인 문신들의 주청에 따라 이듬해 몽고에 대한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은 문신 유경을 거세한 뒤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 정권을 유지하고 몽고에 대한 강화를 반대하였다.

이는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대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1269년 친몽 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경공 창(安慶公銖)을 세웠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복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뒤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 정책을 고수해, 1270년 국왕이 몽고의 세력을 업고 몽고에서 귀국하면서 내린 출륙 명령(出陸命令)을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무신 정권은 종식되고, 그에 따라 오랜 항몽은 끝나게 되었다.

이에 왕정이 복구되고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으나, 몽고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적 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 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 환도는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 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의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 지방 일대를 손에 넣었지만 여·몽 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김통정(金通精)의 지휘 아래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3년에 평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 항쟁은 종식되어 이후 고려는 몽고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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