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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8 (월) 20:21
분 류 사전1
ㆍ조회: 1877      
[성씨] 여흥민씨 (두산)
민 閔

성씨. 본관은 여흥(驪興) 단본이다.

문헌에는 여흥 외에 황려(黃驪) ·영주(榮州) 등이 전하지만, 황려는 여흥의 고호(古號)이고, 영주민씨는 여흥민씨의 지파(支派)로서 근세에 여흥으로 합보(合譜)되었다. 시조는 여흥민씨 족보상 고려시대 상의봉어(尙衣奉御)를 지낸 민칭도(閔稱道)이며, 그 내력은 분명하지 않다.

여흥민씨 세계(世系)를 대별하면 문인공(文仁公:閔漬)파와 문순공(文順公:閔釣)파로 나누어지며, 이 밖에 민세영(閔世榮)을 중시조로 하는 파와 수개의 별파(別派)가 있다. 민씨는 한말 세도가문으로 널리 알려졌으나, 역사상 3차에 걸쳐 크게 위세를 떨쳤다. 첫번째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 두번째는 조선 숙종~영조, 세번째는 한말 고종 때이다.

고려 말기의 대표적 인물은 영모(令謨) ·식(湜) ·공규(公珪) ·지(漬) ·상정(祥正), 종유(宗儒) ·적(釣) ·은평(恩平) ·유(愉) 등이다. 조선 개국과 더불어 개국공신 여익(汝翼)이 대사헌 ·호조판서에 오르고, 제(霽)가 좌의정, 개(開)가 대사헌, 불탐(不貪)이 청백리에 올랐다. 1410년(태종 10) 무구(無咎)의 옥사가 일어나 그 기세는 잠시 주춤하나, 문인공파에서 효증(孝曾)이 찬성에 오르고, 몽룡(夢龍)이 우의정까지 올랐다가 인조반정 뒤에 삭탈관직되었다. 또 형남(馨男)이 우찬성, 성휘(聖徽)가 호조판서를 지냈다. 문순공파에서는 기(箕)가 선조 때 우의정을 지냈고, 순(純)은 학자로 유명하며, 인백(仁伯)은 인조 때 호조판서를 지냈다.

문순공파의 주측인 입암파(立巖派)의 파조 제인(齊仁)은 명종 때 소윤(小尹) 일파에게 죽었다. ‘수사옥(粹史獄)’의 주인공 수는 제인의 손자이며, 숙종 이후 10대에 걸쳐 크게 세력을 떨친 ‘삼방파(三房派)’의 파조 광훈(光勳)은 수의 6대손이다.

삼방파는 민광훈의 세 아들 시중(蓍重) ·정중(鼎重) ·유중(維重)의 후손 일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중은 인조 때 문과에 장원, 숙종 때 좌의정에 올랐고, 그의 아들 진장(鎭長)도 문과에 장원, 숙종 때 우의정에 올라 부자가 정승을 지냈으며, 광훈도 인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삼세문장(三世文壯)으로 이름을 떨쳤다. 유중은 노론(老論)의 중진이며, 그의 아들 진원(鎭遠)은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는데, 한말의 민씨 세도는 삼방파 중에서도 유중의 여양파(驪陽派)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1680년(숙종 6) 인경왕후(仁敬王后)가 후사없이 죽자, 이듬해 유중의 딸이 계비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되었는데, 인현왕후는 남인(南人:濁南)과 서인(西人:老論) 사이의 당쟁 속에서 한때 폐위되었다. 같은 여흥민씨이면서도 삼방파의 시중 ·정중 ·유중 ·진원은 노론의 영수, 세영파의 희(熙) ·암(耉)은 남인의 영수로서 싸움을 벌였다.

1674년(현종 15) 서인을 누르고 득세한 남인은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렸고, 1680년 남인이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하였다. 3년 뒤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분당되었으며, 노론의 우세가 지속되어 노론에 속한 삼방파에서 현관(顯官)이 많이 나와 숙종 이후 상신(相臣) 7명, 묘정배향(廟庭配享) 6명, 판서급 이상 32명을 포함하여 당상관 이상을 50여 명 배출하였다.

1866년(고종 3) 치록(致祿)의 딸이 고종비, 즉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되고, 10년간 집정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하야하여 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민씨의 세도정치는 시작되었다. 민씨의 세도정치는 고종 32년 민비가 시해됨으로써 막을 내렸지만, 민씨 세도는 삼방파의 치(致) ·호(鎬) ·영(泳) ·식(植)자 돌림의 4대를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충정공 영환(泳煥)은 고종의 외조부 치구(致久)의 손자이고, 병조 ·이조판서를 지낸 겸호(謙鎬)의 아들이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민씨의 인물들은 대개 민비의 책립 전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10년 미만의 단기간에 병조 ·이조판서 등의 핵심요직을 역임하였다.

여흥민씨는 조선시대 총 244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는 역사적 위세에 비해 적은 편으로, 1960년도 국세조사에는 1만 5467가구에 인구 8만 7262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46위였고, 1985년도 조사에서는 3만 3706가구로 전국가구 구성비 0.35%, 순위는 274성 중 제46위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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