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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8-28 (수) 08:34
분 류 사전1
ㆍ조회: 4109      
[제도] 신분-조선시대의 신분제도 (민족)
신분(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세부항목

신분
신분(고대의 신분제도)
신분(고려시대의 신분제도)
신분(조선시대의 신분제도)
신분(조선 후기의 변화)
신분(신분의 소멸과 의식의 잔존)
신분(참고문헌)

조선 시대의 신분제도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까지 이루어진 사회경제 변화와 성리학적 신분관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조선왕조가 개국하자마자 직면한 신분 재편성문제는 지배신분의 이원화와 양인신분의 확대로 해결의 방향을 잡게 되었다.

즉, 지배층인 양반의 배타적·신분적 우위의 확보, 중인신분의 창출과 고정화, 국역을 부담할 양인층의 확대, 노비신분의 확정을 시급히 시행하여야 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고려 후기 이래 지배층이 비대해졌기 때문에 집권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하여는 비대해진 지배층을 축소, 정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때까지 실직(實職)이든 산직이든 간에 문무양반의 관직을 받은 바 있는 자들만 상급지배신분으로 인정하였다. 반면에 향리 가운데 여전히 지방에 머물고 있었던 색리층(色吏層)·기관층(記官層)과 같은 하급 향리층을 비롯하여 중앙관청의 서리와 기술관·군교·역리 들은 하급지배신분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양반들은 천인의 피가 섞였거나 첩에게서 난 소생들을 서얼로 과감하게 도태시켰다. 이렇게 형성된 하급지배신분은 중인으로 양반과는 현격히 다른 신분 지위를 감수해야 했고, 신분 상승의 기회는 거의 박탈당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중인들의 임무도 성리학적 관념에 의하여 비하되고 권력과는 거리가 있는 실무행정·기술·업무 보조 등에 국한되고 말았다.

국가정책의 결정 및 경제적 부, 사회적 위세 등은 상급지배신분인 양반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며 의무가 되었다. 또한 양반 집권자들은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그 기반이 되는 양인을 늘리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 정책의 중요한 내용으로는 노비변정사업,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의 설정, 신백정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정책 수행과정에서 조세와 역의 부담자를 증가시키기 위하여는 천인신분보다는 양인신분의 확대가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일천즉천(一賤則賤)과 같은 전통적인 원칙을 일시적으로 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단 규정된 양인과 천인의 신분은 엄하게 준수토록 해서 명분으로 지탱되는 사회질서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국가와 지배층의 물질적 기초를 확고하게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초기에는 양인의 수가 대폭 늘어나고, 그 지위도 보다 안정되고 향상되었다.

조선왕조의 신분제도의 완성시기와 종류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 하고 있다. 먼저 신분 완성시기에 관한 여러 학설을 보면, 15세기설·16세기설·17세기설이 있고, 종류에 대하여도 4종·3종·2종을 각각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학설들이 정리되기 위하여는 신분의 개념과 각 신분의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연구가 더욱 축적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의 신분이 범주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실제 어떤 속성이 어느 정도 드러나야 하는가 하는 일종의 신분결정 기준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통설이 나오기 전까지는 심도 있게 연구를 해야 하지만, 일단 조선시대의 신분을 양반·중인·양인·노비로 이해하려고 한다.

양반은 경제적으로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조선왕조를 운영해온 최고의 지배신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양반은 단지 관례상의 문반과 무반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은 그 가족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의 신분이다.

이들은 생산에는 전혀 종사하지 않고, 오직 예비관료 내지는 유학자의 소양과 자질을 닦던 신분이었다. 전통사회의 신분은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으로 결정되므로 양반 자격의 기준도 그 점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는 양반지주층의 계급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워진 국가로서 각종 법률로 양반의 신분적 특권을 규정하였다. 또한 국가체제는 왕을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였기 때문에 관료로서 국가권력에 참여하지 못 하면 일단 지배층에서 탈락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가권력과 완전히 절연하고 자신의 사적 지배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존재는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배신분을 획득하고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국가의 지배층 충원제도인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를 받는 것이 필요했다.

음서는 2·3품 이상의 양반 고급관료의 자제를 간단한 시험을 거쳐 임용하는 특권 관료 충원제도였다. 그러나 고려의 그것과 비교하면 수혜범위가 좁혀졌을 뿐 아니라, 음서출신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을 면하지 못하던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서는 여전히 관료 등용의 중요한 통로였고, 중국에도 없는 대가제(代加制)가 마련되어 고급 양반관료의 특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문무 과거는 이와 같은 개인 혈통을 중시하는 신분사회 속성을 가진 음서와는 달리, 개인 능력을 절대 평가기준으로 삼고 있던 제도였다. 또한 과거는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관료 충원제도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관료로 출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도 응시자격과 입격 후 임용에는 신분 차별이 있었다.

향리·범죄자·서얼자손 등은 과거를 볼 수 없었고, 비록 양인에 대한 응시제한이 법제에서 보이지 않지만 양인이 양반과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을 만큼 사회경제적·교육적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리고 과거 합격 자체는 관리후보자 자격 인정에 불과하였으므로 모든 합격자에게 관직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출세가 보장되고 권세가 있던 청요직(淸要職:뒷날 높이 될 자리나 현재 요직)을 얻는 데는 신분 배경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면, 평안도 출신 과거합격자는 다수였으나 실제 임용된 관리와 고급관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사회가 고려사회보다 상대적으로 신분을 중시하는 귀족제 성격이 약했다고 해도 양반 신분의 특권은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신분의 차등은 관료 충원제도뿐 아니라 관료체제 자체에도 해당되었다. 관계(官階)에는 당상·당하·참상·참하의 구별이 있어서 이를 바탕으로 각 신분의 한품서용이 있었다.

이 한품서용에 해당되지 않고 고급관료인 당상관에 오를 수 있던 신분은 오직 양반밖에 없었다. 또한 무반 우위라든지, 토관계(土官階)와 잡직계(雜職階)의 설치도 문인인 양반의 신분적 우월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양반은 국역체제에서도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노비를 제외한 전 신분에 신역(身役)을 부과하고 있었다. 양반의 특권인 관직 취임도 일종의 직역이었다.

성년 남자는 직역이 없으면 군역을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군역이 양인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양반들은 여기서도 특전을 받고 있었다.

양반으로서 면역받는 자는 현직 관리 외에도 성균관·향교·사학(四學)의 유생, 2품 이상 고위관직 경력자 등이 포함되었다. 초기에는 양반들은 수전패(受田牌)·갑사(甲士)·별시위(別侍衛)·오위(五衛) 등 서반특수직(西班特殊職)에 입속하여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을 받음으로써 군역과 사환(仕宦)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었고, 특수군 경력은 그대로 인정받아 수령까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성종 이후에는 아예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특권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군역을 진다는 것은 양반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양반과 양인의 명분을 크게 흐리는 것이고, 양반신분을 포기하는 것과 동일하였다.

그리고 양반은 본래 지주층으로서 크고 작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관리로서 국가에 복무할 경우에는 봉록 외에도 품계에 따라 일정한 수조지(收租地)를 받고 있었다. 양반관리가 아닌 서리·향리·일반군인들은 과전법상으로 수조지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양반은 경제적 기반을 국가에만 의존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더욱 많은 토지를 겸병(兼倂:한데 합쳐서 소유함)해갔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가 법적 제도로 관료의 특권을 보장하였으므로 그 특권을 향유하기 위하여는 관료가 되어야 하였고, 지배 엘리트인 고급 문반관료가 될 수 있었던 신분은 양반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관직이 이렇게 양반신분의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통로였다고 해도 신분으로서의 양반을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양반신분 속성 중에는 관직 외에도 사회 통념, 즉 일정지역인의 의식상에 설정되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기준에 해당되어야 하는 것이 많이 있었다. 우선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 문벌(門閥), 지벌(地閥)이었다.

이 두 가지 조건이야말로 사회적 관계가 분화되지 않고 단순한 사회에서는 개인에 대한 평가의 제일차적인 척도이다. 개인이 혈연과 지연에 몰입되어 있었으므로 생소한 개인의 면모는 이미 잘 알려진 혈연과 지연에 의해 우선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양반신분이더라도 문벌과 지벌의 명성과 사회 인식에 따라 국반(國班)과 향반(鄕班) 등으로 나누어졌다. 어떠한 양반과 사회적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양반신분의 판별기준은 확실하고 철저하게 설정되어 일반 사회 통념으로 굳어갔다. 이러한 양반의 자격요건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현조(顯祖:이름이 높이 드러난 조상)의 존재이다.

직계조상 중에 다른 사람에게 내세울만한 인물이 전혀 없는 양반은 상상할 수 없다. 양반은 양반으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전통과 지위를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업적을 이룩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후손만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전통과 지위란 관계진출·학행·혼인·가풍 등을 말한다. 그렇다고 현조의 존재가 모든 후손에게 영구히 후광을 비춰 주는 것은 아니다. 그 현조의 역사적 비중에 따라 그리고 혈연 거리에 따라 현조의 유택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세거지(世居地:대대로 살아온 땅)가 없는 양반가문은 있을 수가 없다. 여러 대에 걸쳐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특히 동족부락을 형성하고 그곳과 주변의 양반과 혼인·교유 등의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양반 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더라도 자신의 가문을 인정받기 위하여 외가나 처가, 또는 토지와 노비가 있는 곳을 택하였다.

이렇게 향촌사회에서 유력한 양반가문으로 인정받게 되면 남원의 둔덕 이씨, 노봉 최씨, 안터 안씨, 뒷내 노씨의 경우처럼 본래의 본관보다는 세거지를 많이 썼다. 서울의 경우 외척세도가였던 안동 김씨들은 장동 김씨로 불렸다.

이러한 개인과 가문을 양반으로 인정해 주는 사회통념상의 조건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며, 시대에 따라 그 중요성도 변하였다.

중앙관리들이 별로 많지 않던 조선 전기에는 재지품관들이 가장 소망하던 혼인대상은 중앙의 고위관리 가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유배를 당한 사람이나 그 동족도 선망의 혼인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그 혼인을 통하여 가문을 세운 예가 많다.

그리고 성리학이 점차 영역을 확대해 나가자 양반 조건으로 성리학적 소양과 그 성취도가 중요시되었다. 예를 들면 경상도에서는 이황(李滉)의 자손, 충청도에서는 송시열(宋時烈)·김장생(金長生)·윤증(尹拯)의 자손이 최고의 혼인대상으로 꼽혔을 만큼 사회적 위세가 대단하였다.

기타 문집·족보·비석·서원 등도 주요한 과시거리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경제행위로서 양반이라면 토지와 노비와 같은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지만, 소유재산의 규모보다도 그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양반신분에는 더욱 중요하였다.

비록, 재산이 엄청나다고 할지라도 손님접대에 소홀하거나 굶주린 마을의 농민을 진휼하지 않으면 양반으로 존경받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사회통념은 전기보다는 후기의 양반상에 더 가까운 것이며, 후기에 더욱 그런 쪽으로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에도 물론 양반이 몸소 가사노동을 하거나 하면 천시받기도 했지만, 양반신분의 결정은 기본적으로 사회통념보다도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태조에서 세조에 이르는 왕들은 강력한 전제 왕권을 행사하였다. 왕권이란 의인화된 국가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왕들은 국가권력의 강화를 위하여 신분제도를 좀더 개방적으로 확정하고 운영하려고 하였다.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누리려는 일부 관료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의 측근으로서 신분이 미천한 사람, 양인·향리 출신으로 뛰어난 능력과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이나 공신의 천첩 자손 등은 왕의 결단과 지지로 신분상승에 성공하는 예가 많았다.

이것은 개별 사례에 불과한 것일지라도 국가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며, 실제로 국가와 양반의 이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노비종모법과 종부법의 대결과정에서도 국가의 신분결정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기 전까지는 신분제도의 확정기로서 국가권력과의 관계에 따라 신분의 결정이 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정치적으로는 사림파가 중앙정계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향촌사회에서 사족과 향리의 가계가 확연히 분리되고 문중이 형성되었으며, 상속과 제사와 같은 사회구조와 관련된 풍속조차 변하게 되었다.

더구나 양반인구의 증가와 당쟁 때문에 관직 획득이 전보다 수월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는 양반신분은 법적 제도 외에도 굳건한 사회적 통념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정치적으로 몰락하던 경상도지역에서는 재지양반에 의한 향촌지배가 최고 전성기를 맞게 됨에 따라, 재지양반이 중앙권력에 덜 의존하여도 될 사회경제적 기초가 확립되었다.

양반신분에 관한 이상의 내용을 줄여 말하면, 양반은 지주계급인 동시에 관료층이며, 국가의 법적 제도에 의하여 신분적 특권을 보장받은 지배신분이었다.

또 이들은 일정한 사회적 여러 조건을 구비하여야 양반신분으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양반집권자들은 지배신분의 이원화를 단행하면서 향리를 양반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조처를 취하였다.

우선 향리의 과거 응시 자격을 제한하였고, 일정한 기준에 의해 이미 양반관료가 된 자들까지 향리로 환원시켰다. 또한 중앙집권력 강화 정책에 의해서도 향리의 세력과 신분적 지위가 약화되어 갔다. 외역전(外役田)의 혁파, 원악향리처벌법(元惡鄕吏處罰法)의 제정, 유향소(留鄕所)의 설치 등이 그 방법이었다.

이에 따라 전 향리의 80% 정도가 토착지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향리는 지방관의 수족과 다름없게 되었고, 심지어는 향리의 역에서 도망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래도 향리들은 이전 토호의 실력과 실무행정 담당자의 권세로, 비록 양반에게는 제압을 당하였지만 양인과 노비 등 일반 주민에게는 여전히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향촌사회에서의 향리의 사회적 지위는 중간적인 것으로, 서울의 기술관인 중인들과는 관직·혈연·교유·혼인의 면에서는 소원하였지만 양반과 양인의 중간에 있다는 공통점으로 중인신분에 포함될 수 있었다.

사실, 중간 신분으로서의 향리와 기술관은 직역의 세습, 신분내혼제, 관청 근접 지역 내 거주, 이기타산적이며 깔끔한 사고방식 등의 면에서 서로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했고, 다른 신분과도 분명히 구별될 수 있었다. 중앙 아전인 서리들도 향리와 마찬가지로 양반과 구별되었다.

이들도 고려시대에는 양반으로 상승하는 길이 넓었고, 봉록과 토지까지도 지급받았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다. 과전법상의 과전지급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진급을 하는 데도 양반보다 근무 일수가 더욱 많아야 했고 그나마 체아직(遞兒職:현직을 내놓은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로 녹봉만 주고 실무는 없음)이었기 때문에 봉록도 형편없었고 승진의 기회도 좁았다.

즉, 다른 중인처럼 한품서용(限品敍用:서자나 신분이 낮은 사람, 죄짓고 면죄된 사람을 관원으로 쓸 때 일정한 자리까지 제한하던 일)에 해당되어 승진이 막혔다. 또한 서리와 함께 중앙관서에서 기술을 담당하는 의관·역관·산관·율관·음양관 등도 15세기 후반부터 점차 양반과 다른 신분이 되었다.

이들 신분의 특징은 17세기에 이르러 소수의 명문 기술관 가문이 잡과를 석권함으로써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얼자손들도 역시 금고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고, 제사·입양·상속에서 적자손에 비하여 많은 차별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제한 규정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반사회에서 서얼자손을 더욱 차별하게 된 것은 성리학적 관념 때문이었다.

서얼은 다른 중인신분과 마찬가지로 자기들끼리의 혼인·교유·학맥·동족부락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서얼은 본래 양반의 자손이라는 점에서 다른 중인신분과는 다른 면도 많았고, 서얼들 사이에도 다양한 분자가 뒤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서얼은 군역을 부담하여야 하였는데, 지역과 가문에 따라서는 군역을 면탈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다른 양반적손들과 대립하는 서얼가문도 적지 않았다. 반면 한미한 양반의 서얼인 자는 일반 양인보다 못 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전자의 경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양반과 다름이 없었지만 법적 제도와 사회 통념상 차별을 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양인은 상인·백성·평민으로 불린 신분이었다. 양인이라는 용어는 삼국시대에는 별로 쓰이지 않던 중국에서 차용한 신분개념의 단어이다. 양인은 노비와 함께 사회 재생산을 담당한 피지배계급이었다.

그들은 소농민경영자 또는 전호이거나 각종 수공업자와 상인이었다. 양인의 신분관계도 역시 국가권력과 밀접하다. 양인은 국가의 조세와 공물 외에도 신역을 부담하였다. 양반집권자들은 양민확대정책을 꾸준하고 강력하게 밀고 나갔는데, 양인이야말로 국가의 물질적·무력적 기초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반의 개인적 계급이익을 위해 약간의 사유지와 노비를 제외한 토지와 인민은 국가권력의 관할로 이양시키는 데 힘을 합쳤다. 그리하여 지배층에 들지 못한 양인은 국가 유지에 필요한 물질과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국역체제가 바로 물질과 노동력의 수탈체제인 것이다. 결국 개인에게 부과되는 국역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졌다. 자영 소농민이나 전호와 같은 생산인구이면서 무예와 학문이 없는 자는 국역에서 양반처럼 특혜를 받을 수가 없었다. 특히 군역은 국역 중에서도 신분과 관련이 깊었다.

법률적으로는 양반과 양인은 똑같이 군역을 부담하여야 했지만, 양반과 양인의 병종은 신분에 따라 분명히 구별되었다. 양인의 병종은 양반이 입속되지 않던 별패(別牌)·시위(侍衛)·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기선군(騎船軍)·수군 등이었으며, 정병(正兵)으로 복무하지 않으면 봉족(奉足)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여말선초에는 신분구조가 아직 유동적이었고 고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양인 상층에서는 한량(閑良)에 속하거나 갑사·별시위 등에 선발되어 신분상승의 기회를 얻는 자도 나왔다. 그러나 일단 신분제도가 확정되자 일부 특수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일반 병종은 양인만의 것으로 변하였다.

그리하여 양반과 양인의 신분 구별은 군역을 부담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쉽게 알 수 있었다. 양인이 교대로 일정기간 복무를 하는 부병제적 군사제도가 붕괴된 뒤에도 양인의 군역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따라서 신분 규정을 법적 제도에서만 찾으려고 한다면 신분의 역사적 실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의 신분제는 양반과 양인을 신분적으로 차별하는 법제가 없으므로 양천제이며, 그 단적인 예는 전기 과거에 급제한 양인 출신이 20여 명이나 된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20여 명이 모두 양인 출신인가라는 실증적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소수인 그들 존재의 의미는 고려 후기와 말기의 획득적 신분단계의 신진사대부세력이 새 왕조에 들어와 귀속적 신분으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 고착성이 미진한 상태에서 생긴 부분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

양반과 양인의 신분적 차등을 부정하기 위하여는 수군으로 군역을 치른 자 가운데 양반신분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물론, 양인이 양반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완전 두절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양인이 양반신분의 조건을 갖추기가 어렵고, 설사 갖춘다고 하더라도 양반으로 인정받기는 매우 어려웠다. 국가 차원의 법제적 구속보다 주변 사람들의 사회 통념을 극복하기가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양인보다 더 아래 신분이었던 노비는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물적 재산처럼 매매·상속·저당·증여가 가능하던 최하층 계급이었다. 노비는 소유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크게 나누어진다. 그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의 직업·예속도·사회적 지위 등에서 차이가 약간 있었다.

공노비는 국가의 기관에 소속되어 번을 나눠 뽑아서 각종 잡역이나 수공업품 제조에 종사하거나 신공(身貢)을 바쳤다. 사노비는 개인에게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강한 예속을 받았고, 주로 가사노동은 가내노비가 농업노동은 외거노비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 특히 주인과 멀리 떨어져 살고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지 않던 외거노비는 주인에 대한 의무는 신공밖에 없었으므로 오히려 여타의 노비보다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인이 자신을 매매하면 그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 다른 가내노비와 같았다. 노비는 소유자가 국가이든 개인이든 간에 소유자의 사회적 권위와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였다.
공적 기관인 국가의 관서는 노비의 소유관계에서는 마치 사인(私人)과 같이 공노비를 착취하려고 하였고, 양반들은 천한 가사노동과 농업경영을 위하여 노비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노비의 주인 신분이 반드시 양반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양인도 노비를 소유할 수 있었고, 드물고 특별한 경우지만 노비도 다수의 노비를 소유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노비에 관한 법률은 소유주의 소유권 및 처분권보다 더 우위에 있었다. 국가는 노비소유주인 양반의 공동이익 실현기구였으므로 노비신분의 판정·매매·혼인·신공·입역·형벌 및 노비재산의 귀속 등에 관련된 세세한 부분까지 규정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그만큼 노비의 신분적 지위는 열악하였고, 상승의 기회는 거의 두절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노비소유주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자신의 노비를 그곳 관리의 도움을 받아 관리하던 예가 많았는데, 이것은 거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노비의 법적·신분적 지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형법이었다.

예컨대 양반인 노비소유주는 관청의 허가를 얻어 노비를 죽일 수 있었지만, 노비가 양반을 구타하면 강상죄에 적용되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주인과 노비의 관계는 부자의 관계와 같으며, 노비는 항상 공손하여야 한다고 양반들은 말하였다.

양반노비주들은 노비 경영의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노비세전법을 만들고 그것을 불변의 원칙으로 전제한 뒤, 노비 신분의 판정과 소유관계를 결정하는 종모법과 종부법을 시행하였다.
국가는 양인을 늘리기 위하여 종부법을, 개인 소유주는 종모법을 소망했다. 따라서 양자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이 두 법이 빈번히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느슨해지자 개인 소유주들은 양천교혼(良賤交婚)의 법까지 어겨가면서 노비 증식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소생이 확실하게 자신의 소유가 되는 양부(良夫)와 자기 비의 혼인을 아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그렇지 않은 양녀(良女)와 자기 노의 혼인은 법 그대로 엄중히 막았다.

이와 같은 노비의 법적·현실적 위치 때문에 노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말하는 동물’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노비는 동물처럼 어미만 알고 아비는 모른다는 근거로 종모법이 주장되기도 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비는 노보다 더욱 열악한 처지를 감수해야 하였다. 또한 비는 비록 도망을 하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방법이 별로 없었으므로 구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비는 중요한 재산 증식 수단이 되었고, 따라서 비 중에는 아버지가 다른 경우가 많았으며, 성 도덕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족구조가 모계적인 면도 두드러졌다. 노비는 매매가 되고 경제적으로 빈곤하였기 때문에 족적 기반을 형성한다는 자체도 어려웠다.

그렇지만 후기에 들어서 외거노비의 경우는 그것이 가능하기도 하여 신분 상승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신분적 지위에서 기본적으로 생성된 노비의 생활양식은 유교적 가치에서 보면 비천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노비는 자연히 혹심한 사회적 천대를 면할 수 없었다.

양인 중에 빈곤층은 생존을 위하여 스스로 노비의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도 많았지만, 비부(婢夫:계집종의 남편)나 고공(雇工:머슴이나 품팔이꾼)이 되더라도 될 수 있으면 노비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더구나 양반은 당장 아사할 지경에 처했더라도 노비가 될 수는 없었다.

생존한다고 해도 자기 자신의 사회적 삶은 끝난 것이며, 조상과 자손에게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분제도, 그 중에서도 노비제도가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가를 말해 준다.

<김영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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