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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9 (토) 19:12
분 류 사전2
ㆍ조회: 1541      
[근대] 국채보상운동 (역사교실)
국채보상(國債報償) 운동

<사료>

자료1) *제3회 차관 문제*

… 지금 한국에 제1회 300만원 차관은 어디에 쓰였으며, 제2회 1천만원 차관은 또한 어디에 쓰였는가. 나는 1개 경제 사업이 이로 말미암아 발기한 것을 보지 못했다. 또다시 이번에 제3회 1천만원 차관의 설이 있으니 그것이 장차 어떤 경제에 소비될 것인가 …

슬프다! 일본은 빈한한 나라라. 외국의 빚을 꾼 것이 또한 이미 막대하거늘 백방으로 유혹하고 위협해 한국에서 전당 문권을 장악하여 억압에 억압을 더하고 구박에 구박을 더한다. 이에 한점의 생맥(生脈)도 남아나지 못하니 그 마음씀과 머리씀이 참혹하도다. 무릇 우리 조정 대신은 누구도 오직 이에 따라가기를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몰래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있으리오 … (『大韓每日申報』1906년 10월 18일)

자료2) 외채(外債)가 나라의 폐단의 큰 자이다

옛날에는 군대를 가지고 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지금은 빚으로 나라를 멸망시킨다. 옛날에 나라를 멸망케 하면 그 명호1)를 지우고 그 종사(宗社)와 정부를 폐지하고, 나아가 그 인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 복종케 할 따름이었다. 지금 나라를 멸망케 하면 그 종교를 없애고 그 종족을 끊어버린다. 옛날에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나라가 없을 뿐이었으나, 지금 나라를 잃은 백성은 아울러 그 집안도 잃게 된다. … 국채(國債)는 나라를 멸망케 하는 원본(原本)이며, 그 결과 망국(亡國)에 이르게 되어 모든 사람이 화(禍)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卞永周, [外債國忂之大者],『西友』제6호, 1905년 5월)

자료3) 국채보상 취지문

… 지금은 우리들이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 원은 바로 우리 한제국(韓帝國)의 존망에 직결된 것이라. 갚아 버리면 나라가 존재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대세가 반드시 그렇게 이르는 것이다. 현재 국고에서는 이 국채를 갚아 버리기 어려운즉 장차 3천리 강토는 우리 나라와 백성의 것이 아닌 것으로 될 위험이 있다. 토지를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것이다. … 노력을 크게 들이지 않고 손해도 보지 않고 의연금을 모아서 이것을 갚아버리는 한가지 방법이 있다. 2천만 인이 3개월을 한정하여 담배의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매 1인마다 20전씩 징수하면 1,300만원이 될 수 있다. 설령 그만큼 차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1원부터 10원, 100원, 1,000원을 출연하는 자가 있어 채울 수 있을 것이다. … 우리 2천만 동포 중에 참으로 조금이라도 애국 사상을 가진 이는 말과 글로써 서로 전하고 서로 경고하여 한 사람도 모르는 이가 없도록 하여 기어이 이를 실시해서 3천리 강토를 유지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大韓每日申報}, 1907년 2월 22일)

자료4)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공함2)

… 근일에 국채보상 한가지 일은 아한(我韓) 일반 인민의 충의가 넘친 바에서 나온 것으로 경향(京鄕)을 물론하고 곳곳에서 발기하여 단체를 조직하고 서로 힘써 장려하여 비록 부인이나 어린이라도 즐거이 돕지 않는 이 없이 용감이 나서니 천도(天道)와 민심이 통함을 이에서 볼만하니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은 마땅히 기약한 바이라. … 우리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어느 집에서 장차 살 것이며 집이 존재하지 않으면 몸을 장차 어디에 의탁할 것인가. 지금이 참으로 충신 지사가 죽기로 힘을 다할 때이다. 사람이 그 몸이 있으면 그래도 장차 의연할 것이니 하물며 돈을 가지고 의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시작은 부지런히 하고 나중에는 게을리함은 참된 것이 아니오 배회하고 관망함은 의로움이 아니다. 오직 우리 동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으로 앞을 다투어 힘을 내 기필코 대사를 완수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광무 11년(1907년) 3월 (『大韓每日申報』1907년 3월 28일)

자료5) 국채보상탈환회 취지서

대저 하나님께서 내신 바 사람은 남녀가 일반이라. 우리는 한국의 여자로 학문에 종사치 못하고 다만 방적(紡績)에 골몰하고 반찬에 분주하여 사람의 의무를 알지 못하옵더니 근일에 들리는 말이 국채 1,300만 원에 전국 흥왕이 갚고 못갚는 데 있다고 떠드는 말을 듣고 … 대저 2천만 중 여자가 1천만이요, 1천만 중에 지환3) 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오니 지환 매 쌍에 2천 원씩만 셈하고 보면 1천만 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 이렇듯 국채를 갚고 보면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이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 동등권을 찾을 터이니 … ([大韓每日申報], 1907년 4월 22일)

자료6) 통곡고대한실업가(痛哭告大韓實業家)
세계상에 가장 크고 가장 긴급하고 지극히 참담하고 지극히 극적인 것은 실업(實業) 경쟁이다. … 오호라! 대한 동포여. 금일에 이르러 비로소 놀라고 분발하는 사상이 있어 때로 교육 발달에 주의하며 때로 사회 결합에 협력하며 나아가 국채보상에 의연(義捐)이 계속 이으니 가히 국가를 충애하는 인민이라 이를지라. … 지금 대한 인민이 양전(良田) 옥토(沃土)와 가옥과 기지(基地)를 무단히 외국인에 매도함이 날로 더하고 달로 늘어 외국인들이 소유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장차 어느 곳으로 옮겨가야 농업도 경영하며 거처도 얻을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하겠다. … 전국 재정이 외국인의 장악에 돌아간 다음부터 금융이 고갈하여 경제가 곤란함으로 일반 상업이 종종 철폐하는 경우에 임박하였고 외국인의 상점은 날로 늘어나고 확장되어 바늘끝만한 이익도 싹쓸어버리니 … (『大韓每日申報』1907년 3월 27일)

자료7) 국채보상에 대하여 권고 동포 (심의철)

근일 대구 서상돈씨 등 취지서에 담배 끊어 국채 1,300만 원 갚자는 일에 대하여 본인이 얼만큼 감사하고 얼만큼 다행하여 두어 변변치 못할 말로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고하오니 잠시 시간 허비함을 아끼지 마시고 보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 혹 어떠한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돈을 내가 썼나 남이 썼더라도 한푼이나 누가 구경하였나 왜 우리더러 물라는가. 무슨 돈을 1,300만 원이나 차관하여서 다 무엇에 썼나. 우리가 추렴내어 물어주면 재미가 있어 또 차관만 하게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의 말이 혹 그럴 듯하나 조금 잘못 생각한 듯하오. … 설령 그 세간사리하든 사람이 미워서 갚고 싶지 않더라도 가옥 전토를 다 빼앗기고 보면 그 부모와 집안식구를 다 어디다 두며 제몸은 어디다 담으며 무엇을 먹고 살겠소. 그렇게 되고 보면 그 자식들이 어디 가서 사람이라고 행세할 수 있소. 지금 국채 일체도 그와 비슷하오. 우리나라 사세(事勢)를 가량하여 보면 10년 동안에 어디서 돈이 나서 1,300만원을 갚겠소 더 쓰지나 말면 다행이지요. 그런즉 우리가 일심하여 갚아보자고 하여볼밖에 수가 없소. 나라의 토지를 빼앗긴다든지 재산을 빼앗긴다든지 하면 우리가 어찌 생활할 수 있소. 대한 사람이라고 어느 나라에 가서 행세할 수 있소. 서상돈씨 말에 담배 끊자고만 하였지만 내 생각같으면 술도 끊으면 어떻겠소. 또 비단옷 입은 사람은 보병옷4) 하여 입고 밥먹던 사람은 죽쑤어 먹고 타고 다니던 사람은 걸어다녀서 그렇게 모아서 빚 좀 갚아보면 어떻겠소. 보병옷 입고 죽먹고 걸어다니고 술 담배 다 끊어도 아무 어려운 일도 없고 아무 해로운 일도 없소. … 이 일이 성공하고 보면 천하 만국에 그만큼 빛날 일이 없고 국권도 회복할 날이 있소. 이 일을 못하고 보면 2천만 동포를 일시에 모두 모아 하늘을 덮어도 다시 할 수 없소. (『大韓每日申報』1907년 2월 28일)

자료8) 국채보상문제로 유학생이 보낸 편지의 대개(留學生來函大槪)

동경에 재류하는 유학생이 본국 동포가 국채보상의 방침으로 단연(斷烟) 동맹하고 대황제 폐하께옵서 담배를 말아 피우지 아니하심을 듣고 유학생 총회를 열어 단연할 뜻으로 동의를 제출하여 이르기를 무릇 경제는 국가에 가장 중요하고 크게 긴급한 문제라. 다만 법률로만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법률이 고명한 로마국도 경제를 결여하여 마침내 망하였으니 지금 우리 나라가 이처럼 비참한 경우에 떨어져 경제상 이익을 꾀하지 못하고 있다. 국권 회복을 희망하는 자라면 이는 영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는 것이니 어찌 깨우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유학생으로 말하더라도 근 800인이라. 날마다 아침에 한줌씩 아끼더라도 한사람이 매일 6전이오, 한사람이 1달에 1원 80전이니 800인이 1달이면 1,440원이라, 1년을 합계하면 17,280원이다. 이처럼 800인을 합해도 1년 담배값이 적지않거늘 하물며 전국인을 다하면 어떻겠는가. 음식물을 끊으면 죽겠기로 할 수 없거니와 해만 있고 무익한 연초를 끊기가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우리는 일제히 단연하여 국채보상의 만분의 일의 도움이 되자 하고 결심동맹(決心同盟)이라 하였더라. (『西友』제6호, 1907년 5월)

<해설>

1904년 러시아에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는 한편, 경제 구조의 재편에 착수하면서 침략을 위한 발판을 다졌다. 먼저 '농업 개발'을 구실로 토지를 약탈하고 일본의 가난한 농업들을 이주시키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또 재정 고문으로 메카타란 인물을 보내 재정·금융·화폐 제도를 재편하고 한국에 일본 화폐의 유통을 강요하여 일본 자본과 상품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한국인은 막대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 틈에 일본인은 한국에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일제는 주요 지역에 금융 조합을 세우고 자금 융통을 제한하여 고리대에 의한 수탈을 부채질했으며, [조세징수규정]을 만들어 세금 징수·세출입·금전 출납 등을 담당하는 재정 기구를 장악해 나갔다.

일제는 수탈 체제를 마련하는 비융을 충당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관세를 담보로 1천만 원의 차관을 강요했다. 일제의 강요에 따라 국채와 차입금 등 각종 명목으로 도입된 차관액은 1907년 1,300만 원, 1910년 4,500만 원으로 엄청난 액수에 달했다. [자료1] 1905년 6월 200만원은 화폐정리자금으로, 200만원은 회계 부족금 등으로, 또 그해 11월 150만원은 민간 금융 자금으로, 1906년 3월 1천만원은 시설자금으로, 도합 1,650만원 중 대부분은 일본인 거류지 시설과 통감부의 자의적 사용으로 소비했다. 또 차입금 중 일부는 이전 채무를 상환하는 명목으로 한 것이라 바꾸어치기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여하튼 이리하여 1906년 말경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얻어온 국채라고 일반에 알려진 액수는 1,300만원으로 계산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예산은 세입액이 세출액에 비교해서 77만원이나 부족한 적자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액의 국채를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제의 강요로 도입된 차관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한편으로, 일제가 한국에 차관을 강요한 목적이 한국의 재정과 금융을 완전히 장악하여 일본에 예속시켜 식민지 지배를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하려는 데 있다는 인식이 깊어졌다. [자료2] 이에 한국인들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 김광제·서상돈 등이 앞장서고 대한매일신보가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국채보상운동이다. 이는 1907년 2월부터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사라 고치는 특별회에서 서상돈이 국채를 보상하는 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의하고, 참석자 모두가 찬성하여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해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료3]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민간 신문사의 적극 지원과 민중의 광범한 호응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자료4]· [자료 5] 각지의 민중들은 운동에 호응하여 남자는 담배를 끊어 저축한 돈을, 부녀자는 비녀나 가락지 등을 팔아 모은 돈을 모금하였고, 고종 황제도 담배를 끊을 뜻을 밝혔다. 이 운동에 적극 참가한 것은 일제의 상업 침탈과 일본 상인의 침투로 위기에 몰리게 된 한국인 자본가들과 지식인층이었다. [자료6] 아울러 국외에서도 이 운동에 적극 찬동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자료7]· [자료 8]

국채보상운동의 목적은 일본에 진 국채를 상환하여 재정 독립을 이룩하자는 것이었고, 모금의 형태는 자발적 성금을 통해 의연금을 모집하는 형태를 취했다. 운동이 가장 활발히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으며, 특히 6∼8월 사이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집되었다.

그러나 활발하게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운동 주도측의 소극적 대처로 1908년 이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는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고 탄압하였다. 우선 대한매일신보 사주였던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기 위한 공작을 끈질기게 폈으며, 사장이던 양기탁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구속하였다. 결국 운동 주도층은 분열되었고 운동은 성과를 달성하지 못한 채 중지되었다.

[대한매일신보]

1904년 7월 18일 아일랜드계 영국인 베델(裵說)이 당시 영어에 능통하던 양기탁과 함께 창간하였다. 처음 한글과 영문을 혼용하였다. 신문 경영은 임치정·안태국 등이, 편집과 논설은 신채호·안창호·이갑 등이 참가하였다. 이 신문은 국권 회복을 위한 명백한 태도, 의병 항쟁에 대한 자세한 보도 등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일관되게 민족주의 정신을 고수하였다. 일제는 이 신문을 탄압하기 위해 베델을 제소하여, 베델은 영국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고 3주일간 상해에서 연금당했다. 그 뒤 서울로 돌아온 베델은 신문 경영을 영국인 비서 만함(萬咸)에게 인계하고 1909년 5월 1일 별세하였다.

[제국신문]

1898년 8월 10일 이종일이 창간하였다. 한글 전용을 지켜 일반 민중과 부녀자들 사이에 독자가 많았다. 경영의 어려움과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휴간이나 정간되기도 했지만 국민 계몽과 자주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신문 제목도 {뎨국신문}이라 한글을 사용하다 1903년 7월 7일부터 한자로 바꾸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폐간당했다.

[西友]

인재 양성과 민중 계몽을 목적으로 1906년 조직된 서우학회의 기관지이다. 서우학회는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회원은 1천여 명에 달했다. 1908년 한북흥학회와 통합해 서북학회로 확대되었다.

신용하 외, [일제경제침략과 국채보상운동], 1994 아세아문화사

출전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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