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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19 (토) 19:55
분 류 사전2
ㆍ조회: 1241      
[조선] 육의전=육주비전 (민족)
육주비전(六注比廛)

조선시대 서울에 설치된 시전(市廛)으로 전매특권과 국역 부담의 의무가 큰 여섯 종의 상전(商廛). 육의전(六矣廛)·육부전(六部廛)·육분전(六分廛)·육장전(六長廛)·육조비전(六調備廛)·육주부전(六主夫廛) 등으로도 불리었다.

[설치 배경]

조선 초부터 관에서 만든 공랑(公廊)을 사용하는 시전에는 납세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관인 지배자들은 상행위에 대한 과세를 넘어 관부의 수요에 따라 부과되는 임시부담금, 궁중·부중의 수리 및 도배를 위한 물품 및 경비 배당, 왕실의 관혼기제(冠婚忌祭), 중국에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 및 수요품 조달 등 이른바 국역을 부담시키기 위해 서울에 정주하는 직업 상인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국역 부담의 의무를 지닌 상전을 유분각전(有分各廛)이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국역부담률이 높은 6개 상전을 육주비전이라 불렀다. 육의전은 이와 같이 시전 중 최대 응분전(應分廛)인 육대전(六大廛)을 말한다. 그 구성전은 시간·공간적으로 변화되므로 어떤 특정전의 특정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육주비전은 유분각전 중 최대의 국역을 부담, 특정 상품의 전매특권을 보장받거나, 또는 정부 필수품의 조달상 필요에 의해 그들에게 그 대상(代償)으로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해 다른 시전과는 구별되지만, 상업 단체로서의 근본적인 성질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육주비전의 내용은 〔표 1〕과 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시전에 대해 국역이 발생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대동법 실시 논의가 일어난 선조 말에서 인조대에 걸친 전후로 추측된다. 특히 육의전의 발생 시기는 1637년(인조 15) 중국에 보내는 방물과 세폐를 분담하게 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육주비전의 위치는 남대문 쪽에서 수각(水閣)다리(남대문로 3가), 북창동(北倉洞 : 지금의 중앙청 앞)을 넘어서부터 각 상전이 시작되어 광통교(廣通橋)를 지나면서 육주비전이 시작되었다. 각 전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표 2〕와 같았다.

[구성 형태]

육주비전은 민간의 수요에 응함과 동시에 궁실 및 산하 관청의 물품 수요에 대한 공급 기관으로서 유일한 어용상인의 단체였다. 그러나 6개의 전이 합해 단일의 경제 단위를 구성했던 것이 아니라, 각 전은 각기 별개의 독립경제 단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각기 별개의 구성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각 전은 도중(都中)이라는 일종의 조합을 구성하고 도영위(都領位)·대행수(大行首)·상공원(相公員)·하공원(下公員) 등의 직원을 두었다. 또, 관부에서 경시서(京市署)를 통해 육주비전이 상납시킬 물품의 품목과 수량을 하명받으면 각 전의 부담 능력에 따라 유분각전의 비율을 정하고 그 분부(分賦)를 총괄해 상납하였다.

이와 같은 납세단체적 성격은 점차로 노골화해 정기적으로 정률의 액수를 상납하게 하였다. 때문에 도중에서는 미리 각 전에서 물품을 징수, 보관했다가 명령이 내려지는 즉시로 납품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도원(都員)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해 보가지도(保家之道 : 가정을 지키는 도리)·경장자유지풍(敬長慈幼之風 :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자애하는 풍습)을 배양, 자가(自家) 실력을 축적하였다.

[특권 부여]

육주비전이 부담한 세액의 비중은 외국 상품, 수요가 큰 물품 등에 많았다. 공물로는 세폐와 방물, 관청의 수요에 부과되는 임시부담금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리하여 재정에 궁핍을 느끼고 있던 정부는 상인의 부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한편 상인들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 자본의 축적을 꾀하려 했는데 양자간에는 일종의 대상관계가 성립, 정부는 육주비전에게 공납을 받는 대신 강력한 특권을 부여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자금의 대여, 외부 압력으로부터의 보호, 난전의 금지 등이다. 특히 난전을 금하게 한 것은 최대의 특전으로서 육의전은 상권을 완전히 독점하고 길드(guild)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특권이 강화될수록 의무도 가중되어 육주비전의 상품 독점은 한편으로 정부 관리의 부정부패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또 사상인(私商人)의 활동을 봉쇄, 상공업 발전을 근본적으로 위축시키는 폐단도 가져왔다.

[붕괴]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와 같은 금난전권은 차츰 동요하게 되었다. 즉 서울 도내(都內)의 호노(豪奴), 지방 도시의 부상배(富商輩), 각 영문(營門) 소속의 군병들에 의한 도내 상공업 활동은 종래 특권 상인의 상권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 예로 1781년 11월 훈련도감 내의 군인들이 양휘항(凉揮項)이라는 방한구(防寒具)를 만들어 육의전 내의 입전(立廛)을 통하지 않고 자체 점포에서 판매해 특권 상인들인 육의전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제소로 중신들이 어전회에서 논의를 거듭한 일이 있었다.

더욱이 서울 도내의 귀족권세가와 부유층들은 차차 지방의 농촌생산자와 결탁, 농촌의 수공업 생산품을 후한 가격으로 구입해 서울에서 산매(散賣)했고 때문에 특권상인 육의전 상인들의 피해는 심해져만 갔다. 더욱이 개항 이후부터는 많은 외국 상품들이 수입, 판매되어 육주비전의 타격은 더욱 심하였다.

육의전은 이러한 청나라와 일본의 외래자본주의에 맞서 미약한 저항을 해보기도 했으나, 국역 부담과 금난전을 특징으로 삼는 봉건사회에서만 존립이 가능한 어용길드적 성격으로 인해 그만 붕괴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萬機要覽, 靑丘示掌, 增補文獻備考, 秋官志, 大典會通, 韓國近代經濟史硏究(劉元東, 一志社, 1977), ギルとしての京城六廛(黑正巖, 經濟史論考, 岩波書店, 1923), 朝鮮市廛의 開設과 沿革(金瑗根, 靑年 1-9, 靑年雜誌社, 1921), 李朝時代京城市制(李能和, 稻葉博士還曆紀念滿鮮史論叢, 1938), 서울 六矣廛硏究-李朝都市商業의一考察-(劉敎聖, 歷史學報 8, 1955), 李朝時代商業硏究-특히 六矣廛에 대하여-(金正煥, 經濟學叢 5-1, 延禧大學校商經硏友會, 1956), 李朝時代京城의 商業에 關하여-六矣廛에 관한 考察을 中心으로-(李商權, 經濟 1, 釜山大學校, 1957), 李朝經濟史硏究(劉敎聖, 忠南大學校論文集 1, 1959), 朝鮮後期 商業資本의 成長-京市廛·松商 등의 都賣商業을 中心으로-(姜萬吉, 韓國史硏究 1, 1968), 朝鮮時代 後期 都市의 變化過程 硏究(孫禎睦, 鄕土서울 34, 1976).

<유원동>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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